성화로 만난 하느님

[성화로 만난 하느님] (25·끝) 유다인의 왕 예수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에서 ‘십자가 처형’을 주제로 한 그림은 매우 드물다. 그 이유는 로마인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다는 것은 매우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십자가 처형’ 작품을 일반화하기 시작한 것은 13~14세기경이다. 성 프란치스코의 신앙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 수난에 대한 신비주의적 경향의 문헌이 널리 확산하면서였다. 많은 화가가 예수의 죽음을 다양하게 표현했다. 고통을 초월해 높은 경지에 이르러 우아하기까지 한 예수의 모습부터 예수의 아픔을 적나라하게 격정적으로 묘사한 그림까지 다양했다. 일반적으로 ‘십자가 처형’을 주제로 다룬 그림에는 예수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성모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있고, 오른쪽에는 요한 사도가 배치되곤 한다.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의 메시나에서 출생한 안토넬로 다 메시나(Antonello da Messina·1430경~1479)는 작은 화폭에 예수의 십자가 처형 장면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이탈리아 남부 지역과 밀라노 등을 거쳐 1475년경 베네치아에서 활동했던 안토넬로 작품은 색채를 중심으로 한 베네치아 미술 특징에 플랑드르 회화의 특징인 섬세한 묘사가 더해져 있다. 그림 맨 앞 왼쪽에는 “1475년, 안토넬로 다 메시나가 그렸다”는 화가의 서명을 정확하게 라틴어로 적어 놓았다. 작품에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와 두 죄수, 성모 마리아와 예수께서 가장 사랑했던 사도 요한이 보인다. 성모는 두 손을 무릎에 내려놓고 있는데,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슬픔을 넘어 체념한 듯하다. 오른쪽 요한 사도는 무릎을 꿇은 채 십자가 위 예수를 향해 두 손을 모으고 있다. 안토넬로 다 메시나의 ‘십자가 처형’, 1475년, 패널에 유채, 52.5X42.5cm, 벨기에 안트베르펜 왕립 미술관 ■ 십자가에서 사랑을 보인 예수 넓게 펼쳐진 들판과 차가운 기운이 감도는 하늘을 배경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골고타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 위에 고요하고 창백한 모습으로 매달려 있다. 예수의 머리 위에는 병사들이 죄목으로 ‘유다인의 왕 예수’를 나타내는 라틴어 약자 ‘I.N.R.I.’(Iesus Nazarenus Rex Iudaeorum)를 적어 놓았다. 십자가 아래에는 자갈과 모래가 뒤덮여 있으며, 해골과 사람의 뼈가 널려 있다. 해골은 예수의 수난을 주제로 한 작품들에 빈번히 그려진다. 이는 인류의 시초인 아담이 골고타 언덕에 묻혀 있다는 중세 사람들의 믿음에서 유래된 것이다. 아담의 해골은 뱀의 꼬임에 넘어간 아담과 하와의 타락에서 시작된 원죄를 의미하며, 이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그 피로 깨끗이 씻겨 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화가는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 속에서 죽어 가는 예수를 묘사하고 있지만, 그림의 중심은 죽음의 고통이 아니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 모두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바친 ‘예수의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예수의 손발과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피는 인류에게 흐르는 사랑의 표징이다. 마치 ‘땅에서 안개가 솟아올라 땅거죽을 모두 적셨던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듯이’(창세 2,6-7) 창으로 찔린 예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와’(요한 19,34) 세상 모든 사람을 다시 살아나게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성령의 표징과도 같은 예수의 피와 물을 내어 주신다. 십자가의 수난은 죽음에 대한 승리의 서막인 셈이다. 예수께서 매달린 십자가 밑 부분의 뒤편에 밑동이가 잘린 나무 그루터기에도 새 가지가 나오고 있다. 이것은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인간을 위해 희생함으로써 하느님과 새로운 계약을 맺게 됨을 의미한다. ■ 십자가에서 회개한 죄수 중앙에 숨을 거둔 예수의 양옆에 있는 두 명의 죄수는 온몸이 뒤틀린 상태로 나무 기둥에 가죽 끈으로 묶여 있다. 예수와 두 죄수의 모습은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는데, 이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에서 많이 연구된 인체 해부학의 중요성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분명하게 예수 양옆에 있는 두 죄수 중에 누가 ‘선한 죄수’인지 추측할 수 있다. 죽음에 대해 발버둥 치는 듯한 두 죄수의 모습은 인류 구원을 위해 목숨을 희생하는 예수의 균형 잡힌 평온한 몸의 형태와 상당히 대조를 보인다. 죽음의 면전에서 한 죄수는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 23,42)라고 말했다. 땅에서 들어 올려져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는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루카 23,43)이라고 하신다. 십자가에서 예수는 회개한 죄수를 자신에게 이끌어 그를 아버지께 인도할 것이다. 예수의 머리는 ‘선한 죄수’를 향하고 있다.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라며 예수를 모독했던 오른쪽 죄수는 그분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그림 맨 앞에는 빛을 싫어하는 야행성 동물인 올빼미가 있다. 이 죄수는 올빼미처럼 진정한 믿음의 빛을 외면하며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이렇게 화가는 이들의 회개 여부에 따라 몸의 뒤틀림 정도를 묘사했다. 안드레아 만테냐의 ‘성 세바스티아노’, 1480~1485년, 캔버스에 유채, 275×142㎝, 파리 루브르 박물관 ■ 십자가를 따르는 성인 해부학은 의사들에게 신체 내부 구조에 대한 지식을 전달했지만, 예술가들에게는 신체에 대한 구조를 바탕으로 작품을 통해 메시지를 효율적이면서 효과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했다.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들에게 해부학은 시각적 기법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뤄졌다. 화가는 십자가 위 예수와 두 명의 죄수를 통해 인체 구조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르네상스 시기에 세바스티아노 성인이 자주 그려진 이유도 성인이 나체의 몸에 화살을 맞으며 순교하는 모습으로 묘사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1431년경~1506)는 성인의 자태를 통해 당시 르네상스 미술이 추구하던 고대 헬레니즘의 아름답고 완전한 신체를 드러내고 있다. 작품 속 성인은 신체의 S자 윤곽선과 건장한 육체미를 드러내고 있다. 또 온몸에 화살을 맞아 피를 흘리고 있지만 시선은 하늘로 향하고 있어, 육체적 고통이나 죽음의 두려움에 괴로워하기보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감내하는 표정이다. ※그동안 기고해 주신 윤인복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발행일 2019-12-15 제3174호 18면

[성화로 만난 하느님] (24) 세상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이탈리아 로마 바티칸 박물관 내 회화관에 소장된 그림 ‘최후의 심판’은 보기 드문 형태의 템페라 작품이다. 로마의 캄포 마르치오에 있는 산타 마리아 여자 베네딕도 수도원 부속인 산 조르조 나지안제노의 오라토리오 내부에 있는 제대에 배치됐던 것이다. 그림의 틀은 둥근 형태로 아랫단은 직사각형으로 이뤄져 있다. 그 틀은 빨간 띠와 백합 잎 모양의 장식으로 둘러싸여 있다. 장면은 총 5단으로 나눠져 있다. 맨 위에 두 명의 세라핌과 천사들과 함께 있는 그리스도를 시작으로 두 천사와 열두 사도들과 함께 제대 앞에 있는 그리스도가 나타난다. 세 번째 단에는 좀 더 복잡한 구성으로 세 명의 인물(성 바오로, 성 스테파노, 성모 마리아)이 중심이 되고 있다. 네 번째 단에는 관에 있는 죽은 자들에게 나팔을 불고 있는 천사들과 죽은 자들의 몸이 들어 올려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가장 아랫단에는 봉헌자들이 성모께 간구하는 모습과 지옥의 장면이 묘사돼 있다. 니콜로와 조반니의 ‘최후의 심판’, 12세기, 패널에 템페라, 288x243㎝, 이탈리아 로마 바티칸 박물관 ■ 대사제 그리스도의 손 화면에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면은 가장 위에 자리한 그리스도 형상이다. 그리스도는 여섯 날개를 가진 두 세라핌과 두 천사의 보위를 받으며, ‘가장 높은 자리’에서 엄숙하고 근엄하게 이 세계를 내려다보고 있다. 정중앙 그리스도는 우주의 통치자이며, 황제처럼 위엄을 갖추고 옥좌로 상징된 구에 영광스럽게 앉아 있다. 그리스도는 왼손에 구원의 상징인 긴 십자가를 들고 있고 오른손에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는 구절이 새겨진 구를 들고 있다. ‘세상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는 당당하고 위엄 있는 임금의 모습이다. 두 번째 단에는 사제 복장을 한 그리스도가 천사와 사도들 가운데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오란테(Orante) 형식으로 제대 뒤에 서 있다. 기도하는 사람처럼 두 팔을 하늘로 들어 올린 그리스도는 미사를 드리는 사제와 같은 모습이다. 대사제로서 당신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 자신의 몸과 피를 성체성사 안에서 함께 나누려는 것이다. 제대 위에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상징하는 도구가 놓여 있다. 예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옆구리를 찌른 창, 예수가 숨을 거두기 전 갈대에 신 포도주를 적셔 마시게 한 해면, 손과 발에 박은 못들, 가시관, 성경 그리고 금 도금된 십자가 등이다. 이는 고통과 죽음의 상징 도구이자 우리 모두를 구원하기 위한 희생의 도구로, 십자가 위에서 목숨까지 내어줌으로써 이제는 우리와 함께 당신이 소유한 무엇이든 나누려는 것을 드러낸다. 비록 그리스도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희생된 사제의 모습으로 제대 앞에 서 있지만, 그 위에는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왼쪽 대천사가 든 두루마리에는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 25,34)라고 적혀 있고, 오른쪽 대천사가 든 두루마리에는 “저주 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마태 25,41)고 적혀 있다. ■ 간구하는 손 세 번째 단에는 무고한 성인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가운데에는 부제 복장을 한 성 스테파노가 순교의 상징인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있고, 그의 앞에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은 각각의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서 있다. 성 스테파노와 마주한 성모 마리아는 양손과 고개를 하늘로 향해 그리스도께 간구하고 있다. 그 뒤에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회개한 도둑이 십자가를 들고 있다. 뒤로는 선택된 많은 평신도와 성직자가 성 바오로와 함께 있다. 오른쪽에는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고, 감옥에 있는 자를 찾아가고, 헐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주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 25,36) 네 번째 단에는 죽은 자들의 부활한 모습을 땅(황소 위에 앉은 유형)과 바다(바닷속 용 위에 앉은 유형)의 의인화로 나타내고 있다. 왼쪽에는 땅과 바다의 동물이 사람의 몸을 토해내고 있고, 오른쪽에는 천사들의 나팔 소리를 듣고 관에서 나오는 죽은 자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부활한 이들의 몸은 땅과 바다 정령의 손에 하늘로 올려지고 있다. 나체의 부활한 두 사람도 하늘을 향해 양팔을 올려 간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아랫단 왼쪽에는 도시 밖에서 수도원장인 코스탄자와 수녀인 베네딕타라는 봉헌자들이 성모께 간구하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고, 오른쪽에는 벌 받는 지옥 장면이 묘사돼 있다. 왼쪽에는 순교자의 시신을 수습하며 피를 닦던 자매인 성녀 프라세데와 푸덴지아나와 그들 뒤로 줄을 이은 선택된 사람들이 보인다. 그들 중앙에는 성모 마리아가 전형적인 오란테 형식의 모습으로 양팔을 올리고 있다. ‘오란테’, 3세기, 이탈리아 로마 프리실라 카타콤바 ■ 은총을 받으려는 손 기원하는 자라는 의미의 오란테 도상은 2세기 후부터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 지하묘지인 카타콤바에서 많이 나타난 형상이다. 인물은 기도하거나 탄원하듯 양 팔을 하늘로 들어 올린 채, 손바닥은 밖으로 드러내고 머리와 눈은 약간 위쪽을 향해 있다. 이 자세는 죽은 영혼의 부활이나 구원을 염원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오란테 형식의 이미지는 이미 헬레니즘 미술에서 죽은 사람의 영혼이 낙원으로 갈 수 있도록 장례 이미지로 보편화됐으며, 로마 시대에는 주로 석관이나 동전에 부조 형식으로 새겨졌다. 특히 황제의 부모나 가족을 기억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려졌다. 이런 변화의 과정에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란테는 영원한 안식에 대한 기원을 상징하는 도상으로 이용된 것이다. 양팔을 올린 것은 신비의 문을 여는 것을 의미하고, 펼쳐진 신성한 공간을 통해 하느님의 은총을 신비롭게 받는 행동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란테 유형의 성모 마리아는 새로운 영원한 계약을 의미한다.

발행일 2019-12-01 제3172호 18면

[성화로 만난 하느님] (23) 어린 나귀를 탄 예수 그리스도

이탈리아 시칠리아 팔레르모의 팔라티나성당(Cappella Palatina)은 노르만 궁전 부속 성당으로 노르만 왕 루제로 2세에 의해 1130년대 초 지어지기 시작했다. 성당은 아랍-노르만 양식의 대표적인 건물로 아랍 양식의 나무 천장과 눈부신 모자이크화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성당 안쪽 벽면을 가득 채운 모자이크화는 구약과 신약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신약 부분에서는 예수의 생애를 연작으로 제작했다. 커다란 화면의 중심부에 예수가 나귀를 타고 있다. 예수의 생애 가운데 나귀는 예수의 탄생과 이집트로의 피신 이후 ‘예루살렘 입성’에서 다시 등장한다. 예수는 사도들에게 나귀를 데려오도록 했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나귀를 타고 갔다. 예수는 즈카르야의 예언대로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으로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있다. 예수는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왕국인 천상 예루살렘이라는 곳으로 스스로 수난 여정을 걷고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 입성’, 12세기, 모자이크, 이탈리아 팔레르모, 팔라티나성당. ■ 입성하는 승리자 이 모자이크 작품에서 중심 주제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나귀에 앉은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예수의 머리는 십자가가 새겨진 후광에 둘러싸여 있다. 예수께서만 오직 거룩하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탈출기에 드러난 하느님의 이름, ‘나는 곧 나다’를 표시한다. 예수는 속에 자줏빛 통옷을 입고 청색의 겉옷을 두르고 있다.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라는 말씀처럼 자줏빛은 임금으로서의 권위를 상징하며 신성을 의미한다. 청색은 조용하고 차분한 의미가 있으며 육화된 인성을 상징한다. 즉, 예수께서는 하느님이시지만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예수가 신성을 인성으로 감춰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뒤로는 사도들이 따라오고 있으며, 예루살렘 성 앞에는 군중이 모여 있다. 예수께서는 왼손으로 말씀이 적힌 두루마리를 들고 있고, 오른손으로는 자신을 만나러 도시에서 나오는 군중에게 강복하고 있다. 예수의 평온한 얼굴에는 수난 중에 겪게 될 모든 것들에 대한 슬픔이 배어 있다. 예수 오른쪽에 있는 베드로는 예수의 얼굴을 쳐다보며 마치 말을 걸듯 오른손을 들어 앞을 가리키고 있다. ■ 환호하는 어린이들 나귀는 어린이들이 깔아놓은 가지를 먹기 위해 머리를 숙이고 있다. 무거운 짐을 질 수 없는 어린 나귀는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을 상징한다.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는 “어린 나귀가 아직 길들지 않았고 그래서 똑바로 걸을 줄 모르는 것처럼, 우상 숭배하는 이방 백성들 또한 하느님의 법을 배우지 못했다”고 알레고리적(추상적인 내용을 구체적인 대상을 이용하여 표현)으로 해석했다. 왼쪽 뒤에 있는 산은 높고 모든 것보다 높이 솟아 있다. 이것은 올리브 산이자 메시아의 의미를 띠는 시온 산으로 하느님이 사는 산으로 표현된다. 오른쪽에는 높고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예루살렘이 보인다. 성 안에는 솔로몬의 성전이 있다. 성문 앞에는 예수를 맞이하기 위해 종려나무 가지를 든 유다인들이 예수의 입성을 기다리고 있다. 유다인들은 높은 사람을 환영한다는 뜻으로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흔드는 관습이 있다. 종려나무 가지는 초기 그리스도교 무덤이나 카타콤(지하묘지)에서도 발견됐다. 이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승리에 대한 믿음과 영광, 순교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으로 나온 사람들은 매우 침울해 보인다. 이들은 아직 어둠 속에서 길을 헤매는 백성이며 빛을 향해 나오는 이방인으로 아직 예수께로 오지 못한 사람을 나타낸다. 이들은 필사적으로 정치권력을 가진 혁명적 지도자를 희망했고 그런 왕, 메시아가 오면 이스라엘의 엄청난 적들을 벌하고, 영광스러운 유다 왕국을 회복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반면 화면 앞 네 명의 어린이는 그리스도의 입성을 매우 환영하는 모습이다. 성 앞에서 관습에 따라 예수를 맞이하는 유다인들의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오른쪽 두 아이는 옷을 벗어 길에 깔아 놓고 예수께서 그 위로 지나도록 준비하고 있다. 다른 한 아이는 나뭇가지를 든 손을 높이 들고 예수를 기쁘게 맞이하고 있다. 왼쪽 한 아이는 옷을 벗으려고 안간힘을 쏟고 있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이 모자이크에 나타난 아이들의 순수한 행동은 기쁨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킨다. 아이들은 관습에 따라 굳은 표정으로 겉으로만 예수를 맞이하는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과 달리 순수한 마음으로 진실하게 승리의 상징인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를 맞이하고 있다. 마티아 데 마리의 ‘성 모데스타와 성녀 크레센티아와 함께 있는 성 비토’, 1753년, 캔버스에 유채, 이탈리아 오스투니, 성 비토성당 ■ 영광스러운 성인들 그리스도교 미술에서 종려나무 가지는 순교 성인을 주제로 다룬 작품에 자주 등장한다. 시칠리아 화가 마티아 데 마리가 그린 ‘성 모데스타와 성녀 크레센티아와 함께 있는 성 비토’의 작품에서처럼 세 명의 성인은 각각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있다. 마티아 데 마리는 가르멜 봉쇄수도회의 의뢰로 이탈리아 오스투니(Ostuni)의 모나첼레 교회에 성 비토 제단화를 제작했다. 가운데 성 비토는 그의 유모인 성녀 크레센시아(Crescentia)와 그녀의 남편인 성 모데스토(Modesto)와 함께 서 있다. 이들은 순교의 승리를 의미하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있다. 화가는 성 비토를 젊은 소년의 모습으로 표현해 그가 어린 나이에 하느님을 위해 순교했음을 나타냈다. 성 비토는 그리스도교의 상징이며 그의 확고한 믿음을 드러내는 십자가를 가슴에 안고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다. 하늘에서는 천사들이 세 성인에게 영광의 화관과 금관을 각각 내리려 한다. 성인 옆에 있는 두 마리의 개는 사람이 개에게 물렸을 때 성 비토가 독으로부터 보호해 준다는 설에 기인한 것이다. 독이 있는 짐승에게 물렸을 때 성 비토에게 특별히 기도하면 보호받을 수 있다고 여겨졌다.

발행일 2019-11-17 제3170호 18면

[성화로 만난 하느님] (21) ‘죽은 이들을 살아나게 하는 그리스도’

인쇄술 발달 이전의 기록문서는 소나 양, 새끼 염소의 가죽으로 만든 양피지 위에 직접 손으로 쓴 필사본이다. 교회사에서 중요한 유물 가운데 하나는 성경에 각종 그림 삽화를 넣어 만든 성경 필사본이다. 필사본에 그려진 삽화는 본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 장식적 효과도 얻을 수 있게 한다. 주로 복음서, 창세기, 미사경본 그리고 의학서적 등에 사용됐고, 특히 하느님 말씀을 전달하는 중요한 매체로 인식돼 화려하게 장식했다. 다만 필사본 제작 과정은 매우 복잡하고, 한 권의 성경을 필사하고 제작하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따라서 필사본 표지는 이탈리아 몬자대성당의 보물실에 소장돼 있는 테오돌린다 복음서의 표지처럼 금판에 보석이나 칠보장식, 상아 조각판을 사용했다. ‘라자로의 소생과 구약의 선지자들’, 6세기경, 채색 세밀화, 이탈리아 로사노대성당 보물실. ■ 하느님의 말씀을 그린 채색 세밀화 이탈리아 남부의 로사노 복음서(Codex Purpu reus Rossanensis)는 6세기 복음서로 시리아의 스크립토리움(Scriptorium, 필사작업실)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복음서는 2015년 10월 9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로사노 복음서는 자주색 양피지에 전체가 188장(376쪽)으로 구성된 필사본이다. 직물을 염색하는 데 사용하던 푸르푸라 염료로 양피지를 자주색으로 염색해 그 위에 금과 은으로 글자를 썼기 때문에 자주색 로사노 필사본이라고도 불린다. 그 시대에 자주색은 황제 전용색으로 위엄과 권위의 상징이었다. 상징적 측면에서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담는 복음서 필사본의 색으로 자주색이 적절했음을 알 수 있다. 로사노 복음서에는 마태오복음 전체와 마르코복음이 거의 다 수록돼 있다. 요한복음과 루카복음은 소실됐다. 여기에는 4복음사가의 초상을 포함해 예수의 생애를 조명한 15개의 채색 세밀화가 묘사돼 있다. ■ 다시 살아난 라자로 이 복음서의 첫 장은 예수께서 라자로를 살리는 이야기(요한 11,1-45)를 그린 권두화로 시작한다. 화면은 크게 신약성경의 장면, 구약성경의 선지자들, 선지자들의 성경 내용 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머리에 후광을 두른 반신상의 선지자들은 예수의 기적을 바라보며, 한 손에는 두루마리를 펼쳐서 각각 들고 있고, 다른 한 손은 사건이 벌어지는 장면을 향해 뻗고 있다. 라자로는 예수의 친구라고 불릴 만큼 예수와 친밀하게 지낸 인물이었다. 예수께서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으로 가던 도중, 라자로와 그의 누이동생인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서 잠시 쉬며 묵곤 하셨다. 예수께서 수난당하기 직전 유다국 동쪽인 페레아에 전교할 때 라자로가 갑자기 병에 걸려 위독했다. 신앙이 두터운 성인의 누이들은 이 사정을 예수께 전하면 틀림없이 예수께서 좋은 일을 해 주실 것이라 믿었다. 그리스도교 미술에서 라자로의 모습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가 관 속에 있는 그를 살리는 장면으로 가장 많이 묘사된다. 라자로의 소생은 장차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사람들에게 예고한 것으로 이해돼 3세기 이후 많은 화가들이 즐겨 그린 주제였다. 라자로의 소생 장면에는 여러 인물이 등장한다. 예수와 라자로를 비롯해 그의 제자들, 다른 목격자들(군중), 마리아와 마르타가 있다. 작품에는 사건 전후가 매우 생동감 넘치게 묘사돼 있다. 작품 왼쪽에 있는 제자들은 그리스 복장으로 긴 튜닉에 각기 다른 히마티온을 걸치고 샌들을 신고 있다. 특히 흰 머리에 흰 수염을 가진 나이 든 모습의 시몬 베드로와 그의 어깨 뒤로 안드레아는 상당히 특색 있게 표현돼 있다. 예수를 따라나선 제자들은 스승을 바라보며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몹시 궁금해 하는 모습이다. 제자들 앞쪽에 후광을 두르고 수염이 난 예수는 황금빛 그리스 히마티온과 갈색의 긴 튜닉을 입고 있다. 예수는 긴박감 넘치게 발걸음을 옮기는 듯하다. 예수 발치에는 라자로의 누이 마리아와 마르타가 엎드려 애원하고 있다. 엎드려 있는 모습에서 죽은 오빠 라자로를 살리고자 하는 그녀들의 절박한 심정이 잘 드러난다.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참된 믿음으로, 마르타와 마리아는 예수의 앞에 엎드려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화면 오른쪽에는 온몸이 흰 천으로 동여매진 라자로가 무덤 앞에 나와 있다. 그러나 이 화면의 중심은 역시 예수 그리스도다. 그는 오른손을 들어 무덤에서 나온 라자로를 축복하고 있다. 무덤 앞에 서 있는 라자로는 얼굴만 보이며 마치 미라처럼 흰 천으로 감겨 있다. 그 옆에 붉은색 옷을 입은 사람은 나흘 전에 죽은 사람에게서 나는 썩은 냄새 때문에 옷자락으로 코를 가린 채, 군중에게 오른손으로 라자로를 보도록 가리키고 있다. 운집해 있는 사람들은 죽은 라자로를 몹시 근심스럽게 쳐다보거나 슬퍼하는가 하면, 놀라거나 두려워하는 표정과 행동을 취하고 있다. ■ 살아날 것을 알리는 선지자들 라자로의 소생 장면에서 화면 상단 부분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각각 들고 있는 하단 부분의 성경 내용과 연결된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윗, 호세아, 다윗, 이사야가 들고 있는 두루마리에는 각각 “주님은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시는 분, 저승에 내리기도 올리기도 하신다.”(1사무 2,6), “내가 그들을 저승의 손에서 구해야 하는가?…”(호세 13,14), “주 하느님,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시리라. 그분 홀로 기적들을 일으키신다.”(시편 72,18), “당신의 죽은 이들이 살아나리이다. 그들의 주검이 일어서리이다. 먼지 속 주민들아, 깨어나 환호하여라….”(이사 26,19)라고 적혀 있다. 이 작품 화면에 적힌 내용은 도상에 담긴 이야기에 관한 것이 아니며, 그 장면에 대한 설명은 더더욱 아니다. 선지자들이 쥐고 있는 짧은 구약성경 내용은 신약성경의 장면인 라자로의 소생에 대해 예언한 것이다. 이 일련의 사건은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됐고, 이를 예수께서는 이루신 것이다. 로사노 복음서의 채색 세밀화를 보면 구약은 신약에 의해 완성된다는 신학적 논의를 반영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발행일 2019-11-03 제3168호 18면

[성화로 만난 하느님] (21)‘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 예수 그리스도

‘사마리아 여인’, 4세기, 벽화, 이탈리아 로마 비아 라티나 카타콤. 물은 모든 형태의 생명, 무엇보다 인간 존재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물은 인간세계에 다양한 가치를 부여한다. 성경에서 물과 관련된 도상을 살펴 보면 ‘노아의 홍수’나 ‘요나 이야기’에서 물은 혼란과 죽음처럼 모든 것을 뒤엎거나 삼켜 버리는 거대한 물결을 상징하고 있다. 반면 ‘사마리아 여인’이나 ‘그리스도의 세례’를 보면 물은 영혼의 갈증을 풀어주는 생명이며, 죽음과 재생을 상징하고 있다. 이 가운데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는 우리에게 영혼의 갈증을 풀어주는 ‘생명의 의미를 지닌 물’의 의미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의 시카르라는 한 고을에 이르렀을 때 야곱의 우물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를 나눈다. 몹시 피곤하고 갈증이 난 예수는 물을 긷는 여인에게 마실 물을 좀 달라고 요청한다. 당시 유다인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 반목 질시했다. 유다인은 그 지역에 가지도 않고 그곳 주민과는 상종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는 달랐다. 오히려 예수는 지상의 목마름에만 집착하는 여인에게 영원한 생명의 물을 주고 이 물이 깊은 곳의 갈증을 풀어준다고 말한다. 예수는 그녀에게 자기가 그녀가 기다리던 메시아임을 드러낸다. 사마리아 여인은 고을 사람들에게 가서 메시아를 만났다는 것을 알리고, 그들은 예수를 믿게 되고 그들의 삶은 변화된다. ■ 목마르지 않는 물 그리스도교 미술에서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는 많은 화가가 선호하는 주제 중 하나다. 이미 3세기 로마 카타콤(Catacomb) 내부 벽화에서 이 주제를 찾아볼 수 있다. 4세기 초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로마의 비아 라티나(Via Latina) 카타콤의 사마리아 여인 장면은 최상의 보존 상태는 아니지만, 등장인물과 배경이 명확히 묘사돼 있다. 오른쪽 예수는 전형적으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표현한 방식을 차용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아름다운 그리스 소년이나 헬레니즘의 목가적 모습으로 표현했다. 젊은 청년의 모습은 영원한 젊음으로서 예수의 전지전능함을 표현한 방법이기도 하다. 이 작품의 배경은 목가적 풍경을 연상케 하는 바위와 나무다. 커다란 우물 사이에는 예수와 물동이에 물을 담는 사마리아 여인이 선 채 대화를 나누고 있다. 예수는 1세기경부터 그리스도인들이 입기 시작한 달마티카(Dalmatica, 직사각형을 반으로 접어 양쪽 팔 밑을 직사각형으로 잘라내고 가운데 머리가 들어갈 부분을 ㅡ자나 T자, U자 또는 원형으로 파서 만든 것) 형태의 옷을 입고 있다. 두 사람은 현세와 영혼의 갈증을 풀어 줄 생명의 물에 관해서 대화하고 있다. 여행으로 피곤한 예수는 휴식을 취하기 위해 특별한 장소, 우물을 선택한다. 벽화 중심부에는 원형의 우물이 그려져 있다. 우물은 가정이나 가축을 위해 물을 푸는 곳이다. 또 우물은 여행자의 만남의 장소이자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머무는 여행자들과 새로운 소식을 교환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성경에서 우물은 중요한 만남의 장소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사악의 신붓감을 구하기 위해 종을 떠나 보낸다. 아브라함의 종과 레베카가 처음 만난 곳이 우물이다. 또한 야곱이 라헬과 처음 만난 곳도 우물이다. 이들은 우물 가까이에서 새롭게 시작하고 구원의 대역사를 펼치게 된다.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우물은 예수를 만나는 중요한 장소가 된다. 사마리아 여인은 왼손으로 물을 긷고 있지만, 오른 손가락으로는 우물을 가리키며 예수께 질문하고 있다. 예수는 오른손을 들어 물에 관해 힘주어 이야기하고 있다.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에서 퍼 올린 물은 우리의 일상적인 목마름을 가라앉히는 물이지만, 예수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생명의 물을 준다고 전한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 4,13-14) 예수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샘이 되고 거기에서 물이 솟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작가는 우물을 화면 가운데 큰 형태로 표현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물임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무덤에 묻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물이 상징하는 바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주는 물은 결정적 구원에 대한 목마름을 풀어줄 생수의 이미지다. ‘그리스도와 사마리아 여인’, 13세기, 모자이크, 이탈리아 베네치아 산 마르코 성당. ■ 새로운 삶을 주는 물 예수께서 주는 물이 어떤 것인지는 13세기에 제작된 이탈리아 베네치아 산 마르코성당의 내부 모자이크 작품에서 더욱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예수는 오른손으로 축복하고 있고, 왼손으로 로고스를 상징하는 두루마리를 들고 앉아 있다. 그의 앞에는 사마리아 여인이 물동이를 들고 서 있다. 이들 사이에 놓인 우물은 정방형의 십자 형태로 특별하게 묘사돼 있다. 우물 뒤에는 잘 자란 나무도 서 있다. 물은 예수와 여인의 대화에서 세례를 연상케 하며, 십자 형태의 우물은 세례대를 떠오르게 한다. 세례를 통해 낡은 사람은 물에 잠김으로써 죽고, 물속에서 나와 다시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을 상징한다.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 사도 바오로가 로마인들에게 전한 말처럼 사마리아 여인은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나무 기둥이 우물과 연결돼 잘 자라고 있듯이 그녀는 영원한 생명인 예수와 연결돼 새로운 삶을 찾았기에 더는 물을 퍼 올릴 필요가 없을 것이다. 모자이크 오른쪽의 사마리아 여인은 물동이 없이 고을 사람들에게 메시아를 만난 것을 알리고 있다.

발행일 2019-10-20 제3166호 18면

[성화로 만난 하느님] (20) ‘예수 그리스도의 시선’

16세기 들어 예수회를 설립한 성 이냐시오 로욜라(St. Ignatius Loyola, 1491~1556)는 시각적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관상 방법론을 주장했다. 성 이냐시오는 ‘영신수련’(靈神修鍊)을 통해 그리스도를 잘 알기 위해서, 나아가 더 사랑하고 따르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삶에 등장하는 인물과 장소를 보라고 권했다. 이 방법론의 기원은 중세 말부터 전해 오는 가톨릭 명상전통이다. 성 이냐시오는 작센의 루돌프가 그리스도 삶의 신비를 묘사한 책인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 이를 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조금 더 앞서 나온 보나벤투라의 「그리스도의 일생 명상」의 이론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방대하게 학문적으로 접근한 글이다. 이 두 책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읽을 때 상상력을 동원해 그 장면들을 내적으로 음미하라고 권한다. 특히 독자가 스스로 상상력을 발휘해 사건의 이미지를 만들어 그 장면으로 들어가 사건에 참여하도록 권고한다. 독자들은 이런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단순히 머리로만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주는 교훈에 대해 생생하게 묵상할 수 있게 된다. 화가들은 복음사가들이 기록한 예수의 말씀에 영감을 받아 그 내용을 시각화한다. 우리는 성경을 읽듯 이 그림들을 읽어 나가며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준비할 수 있다. 또 그림 속 장소로 들어가 예수를 직접 만날 수 있으며, 그의 말씀을 듣고 따를 수 있다. 벨라스케스의 ‘채찍질 당한 후 그리스도인의 영혼을 응시하는 그리스도’, 1630년경, 캔버스에 유채, 영국 런던 내셔널 갤러리. ■ 나를 바라보는 예수 그리스도 예수는 커다란 돌기둥에 두 손이 묶인 채 바닥에 주저앉아 몸을 겨우 지탱하고 있다. 그림은 로마 군인들에게 돌기둥에 묶여 막 채찍질 당한 뒤의 장면으로, 바닥에는 채찍 도구들이 널려 있다. 스페인의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 1599~1660)는 예수를 그리스-로마 조각상을 연상케 하는 반나체의 몸으로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벨라스케스는 종교화를 거의 그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 작품을 보면 예수의 눈빛에서 무언의 강렬한 힘이 느껴진다. 이 그림은 매우 단순하지만, 벨라스케스가 젊은 시절에 깊은 감동을 받았던 카라바조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명암법과 사실주의적 묘사로 극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또한 화가는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여러 대가와 고대 작품을 연구했는데, 그 결과 예수의 몸을 조각의 기념비적인 분위기로 연출하면서 독창성을 발휘하고 있다. 더욱이 화가는 예수의 수난을 주제로 한 ‘채찍질을 당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육체적 고문보다는 그리스도의 인내의 참된 가치와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초점을 두고 있다. 작품 제목은 ‘기둥에 묶인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기도’를 비롯해 성녀 비르지타가 어려서 예수의 수난을 체험한 신비에 기인한 ‘성녀 비르지타의 환시’ 등으로도 불린다. 화면 정중앙에 위치한 예수는 모진 채찍질을 당한 뒤라 매우 지쳐 보이지만, ‘어떤 사람보다 수려한’(시편 45,3) 아름다운 몸으로 묘사돼 있다. 예수의 얼굴은 엄숙함과 절제로써 고통과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고 있다.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임박한 죽음, 상상할 수도 없는 육체적 고통을 일으킬 공포를 엄숙한 절제로 극복하고 있다. 예수는 당신의 육체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하느님의 요구에 순종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육체적으로는 고통스럽지만, 하느님께서는 결코 자신을 저버리지 않으리라는 깊은 신뢰감을 가지고 있다. 카라바조의 ‘채찍질 당하는 예수 그리스도’, 1607년경, 캔버스에 유채, 이탈리아 나폴리 카포디몬테 국립미술관. ■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어린아이 무방비 상태로 앉은 예수는 무릎을 꿇고 자신을 바라보는 어린아이에게 의지하며 위로 받기를 원하는 듯하다. 천사는 어린아이에게 “보아라”라고 말하는 것처럼 채찍질 당한 예수를 가리킨다. 예수의 힘없는 얼굴에서 어린아이의 가슴으로 한 줄기 빛이 스며든다. 예수 수난의 주제인 ‘채찍질을 당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표현한 작품은 수 세기에 걸쳐 많은 화가가 그렸다. 그 사건에 대부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고문하는 사람들이다. 이탈리아 바로크 미술의 거장인 카라바조(Caravaggio, 1571~1610)가 이탈리아 나폴리의 산 도메니코 마조레성당의 제대를 위해 그린 작품처럼, 기둥에 묶인 예수는 세 명의 고문자들에게 둘러싸여 고문을 당하고 있다. 기둥에 묶인 예수의 몸은 채찍의 아픔을 말하듯 몹시 비틀려 있고, 강한 명암대비로 어둠 속에서 예수의 상체를 강렬히 비추는 빛은 고통의 정도를 극대화한다. 고문자들은 빽빽하게 밀집된 공간에서 고문을 즐기기라도 하듯 역동적인 몸동작을 하고 있다. 그러나 벨라스케스는 카라바조에서 보이는 역동적 분위기 속의 고문자들 대신 조용히 어린아이를 등장시킨다. 예수 수난 장면에서 매우 보기 드문 등장인물이다. 일반적으로 어린아이는 순수함을 상징한다. 예수를 바라보는 깨끗한 눈과 마음을 가진 어린아이의 순수성이 예수의 무고함을 증명하며, 이 어린아이만이 예수의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듯하다. 작품 제목인 ‘채찍질 당한 후 그리스도인의 영혼을 응시하는 그리스도’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어린아이는 그리스도인(믿는 사람들)의 영혼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예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수호천사의 인도로 이미 예수의 피땀으로 얼룩진 기둥과 앞에 놓인 고문 도구들을 바라보며 수난 장면으로 들어가 예수 수난에 동참하게 된다. 채찍질을 당한 예수의 눈과 마주하고, 잠시 머문다. 우리는 수난의 고통을 공감하고 그리스도의 고통을 마음속으로 헤아리며 그리스도의 수난을 체험할 수 있다.

발행일 2019-10-06 제3164호 18면

[성화로 만난 하느님] (19) ‘성모 마리아에게 안긴 예수 그리스도’

‘피에타‘(Pietà)는 경건한 마음, 경건한 동정을 뜻하는 이탈리아어로, 보통은 성모 마리아가 죽은 아들 예수를 무릎에 올려 놓고 안고 있는 도상을 가리킨다. 피에타 도상은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 그리스도를 애도하는 모습과 성모자 모습의 결합이라고 볼 수 있다. 성경에는 기록돼 있지 않지만, 많은 화가들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내려진 후 마지막으로 죽은 아들을 무릎 위에 안고 가슴 아파하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그렸다. 그리스도교 미술에서 피에타 도상은 13세기 독일에서 만들어진 ‘베스퍼빌트’(Vesperbild)가 시초로, 이탈리아로 전해지면서 ‘피에타’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베스퍼빌트는 저녁기도의 조각상이라는 뜻이다. 피에타는 14세기와 15세기에 유럽에서 흑사병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어갈 때 널리 퍼진다. 당시 수많은 시신 앞에서 가슴 아파하며 슬픔에 잠긴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들에게 죽은 예수를 깊은 사랑으로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는 죽음과 질병에 맞서는 위로와 희망의 표상이 됐다. 피에타는 많은 이에게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덜어준 것이다. 성모 마리아가 죽은 아들을 안은 모습처럼 자신이 죽고 나면 어머니 같이 사랑이 넘치는 하느님의 두 팔에 안길 것이란 희망의 표상이 된 것이다. 조반니 벨리니의 ‘피에타’, 1470년경, 목판에 유채, 86x107cm, 이탈리아 밀라노 브레라 미술관. ■ 팔에 안긴 죽은 예수 그리스도 15세기 후반, 베네치아의 저명한 화가 집안에서 태어난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1430경~1516)는 많은 성모자를 그린 것으로 유명하며, 전통적인 유형에서 벗어난 피에타를 제작한다. 특히 북부 르네상스의 치밀하고 상세한 유화 기법과 15세기 초 이탈리아 회화의 기념비적인 전통을 통합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작품에서 베네치아 회화만의 색채와 톤으로 유연한 윤곽선과 충만한 빛의 효과와 자연 풍경 그리고 자신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깊은 종교적 감성과 인간적인 정서를 드러낸다. 작품에서 예수는 두 눈을 감고 어머니 성모 마리아에게 기대어 서 있다. 요한 사도도 옆에서 예수를 부축하고 있다. 피에타 도상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분류할 수 있지만 크게 예수 시신의 자세에 따라 수평형과 수직형으로 나눈다. 수평형은 성모가 예수의 시신을 무릎에 수평으로 안은 자세를, 수직형은 성모가 예수 시신을 수직으로 안은 자세를 하고 있다. 벨리니의 피에타는 수직형에 가깝지만 예수와 성모 마리아를 특별한 구성으로 표현했다. 예수의 왼손 바로 석관(石棺) 모서리에는 벨리니의 서명과 함께 “커지는 눈이 탄식을 불러일으킬 때, 조반니 벨리니의 이 작품은 눈물을 흘릴 것”이라는 라틴어 비문이 쓰여 있다. 작품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릴 때, 작품 속 등장인물인 성모 마리아와 요한, 예수가 눈물을 흘리게 되리라는 것이다. 화가는 자신의 작품이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켜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십자가에서 처형된 예수를 무덤에 묻으며 성모 마리아와 요한이 석관 앞에서 애도하고 있다. 이들 뒤에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석관이 있고 앞쪽으로는 석관 뚜껑이 보인다. 죽은 예수의 못 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난 손은 가장 밝게 관 뚜껑의 가장자리 위에 놓여 있다. 화면 앞 관의 가장자리는 조형적으로 화면의 공간적 깊이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동시에 상징적 요소도 내포돼 있다. 석관 위에 놓인 예수의 왼손을 경계로 예수가 서 있는 신성한 공간과 우리가 서 있는 세속적 공간으로 나눌 수 있다. 두 경계 지점에 예수가 서 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인간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의 문, 성스러운 공간인 하늘나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늘나라의 풍경을 암시하는 듯 화가는 마리아와 요한의 뒤로 밭과 드문드문 심어진 나무 그리고 성을 묘사하고 있다. ■ 팔에 지탱한 예수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는 눈을 반쯤 감은 채 아들 예수의 볼에 얼굴을 기울이며 아들의 어깨에 목을 살며시 기대고 있다. 마리아의 망토 끝자락은 예수의 가시관에 닿아 있고 살짝 열린 마리아의 입은 예수의 입과 똑같은 모양이다. 눈시울이 부풀어 오르고 충혈된 눈에 눈물이 어렸지만 마리아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모습은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온화한 표정이다. 마리아는 고요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고통의 표현을 자제하며 아들 예수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듯하다. 요한 사도의 얼굴은 예수의 얼굴에서 약간 떨어져 있다. 그의 시선도 다른 곳을 향해 있다. 요한의 눈시울 역시 달아올랐고 목 근육은 긴장돼 보인다. 마리아가 예수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내면으로 억제한다면 요한은 가혹하고 부당한 죽음을 세상에 외치고 있는 듯하다. 요한의 얼굴은 성모 마리아와 거리가 느껴지지만 그의 왼손은 예수의 배 왼쪽에 올라 있고 오른손은 마리아의 손을 붙들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예수의 접힌 팔도 성모 마리아의 팔이 감싸 안고 있다. 두 사람은 무덤 위에 놓인 예수의 얼굴과 손 그리고 몸을 만지며 지탱하고 일으켜 세우고 있다. 이들이 지탱하고 일으켜 세우는 예수의 모습은 죽음과 부활을 동시에 예고하고 있다. 안드레아 만테냐의 ‘성모자’, 1490년경, 캔버스에 유채, 45x36cm, 이탈리아 밀라노 폴디 페촐리 미술관. ■ 팔에 안겨 잠자는 아기 예수 피에타 도상처럼 성모 마리아가 예수를 무릎에 안은 모습은 성모자의 모습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조반니 벨리니의 매부인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1431~1506)의 ‘성모자’ 작품에서 성모 마리아가 안고 있는 아기 예수는 생명이 끓긴 죽은 아기처럼 잠을 자고 있다. 잠은 죽음의 은유다. 잠자는 아기 예수의 모습에서 잠은 곧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미한다. 또 아기 예수의 몸을 겹겹이 동여맨 수의를 연상케 하는 흰 천도 예수의 죽음을 상기시킨다. 이에 아기를 품에 안은 어머니 얼굴은 행복한 미소가 아니라 슬픔으로 가득하다. 성모 마리아는 자신의 품에서 깊은 잠에 빠진 아기 예수에게 슬픈 표정으로 볼을 맞대고 있지만 앞선 작품과 같이 아기 예수의 죽음으로 인류를 구원할 것이란 사실도 알고 있다.

발행일 2019-09-22 제3162호 18면

[성화로 만난 하느님] (18) ‘지상을 내려다보는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교적 윤리관에서는 ‘일곱 가지 큰 죄’(칠죄종)를 주요 악덕으로 구분한다. 일곱 가지 죄는 그 자체가 죄이며 인간이 자기 뜻에 따라 범하는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죄로서 교만, 인색, 질투, 분노, 음욕, 탐욕, 나태를 일컫는다. 화가들은 미술작품에서 인간을 영원한 파멸로 이끄는 큰 죄들과 함께 비겁함과 변덕, 우둔함과 무지, 간통과 부정, 우상 숭배 등과 같은 것을 더해 악덕을 특별히 강조했다. 화가들은 죄의 근원을 동시대의 일상생활을 배경으로 자세히 묘사해 생생하게 전하기도 했다. ■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사람들 상상력이 풍부한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 1450~1516)의 작품은 인간의 선과 악, 기괴한 상상의 짐승, 비현실적인 풍경 등을 묘사하고 있다. 보스의 작품 주제는 크게 종교와 도덕적 교훈이 혼합돼 나타난다. 종교화 속에 장르화(일상생활 속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익명의 사람들과 소소한 이야기를 묘사한 그림)적인 요소가 보이거나, 장르화 속에 도덕적 교훈과 함께 그리스도교적 가르침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보스의 작품 ‘건초 수레’도 인간의 악덕과 어리석음을 상징하기 위해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다룬, 도덕적 교훈이 담긴 하나의 풍자적인 교리로 설명될 수 있다. 세 폭 패널로 구성된 ‘건초 수레’의 중앙 패널에는 인간의 타락한 도덕성을 풍자적으로 표현했다. 거대한 건초 수레는 오른쪽 패널의 지옥을 향하고 있다. 지옥에서는 인간들이 저지른 죄로 인해서 벌을 받고 있다. 왼쪽 패널에는 인간의 영벌(永罰)에 관한 주제를 담은 총 네 개의 이야기를 묘사했다. 반역 천사의 추락, 이브의 탄생, 뱀의 유혹 그리고 에덴동산에서의 추방이 그려져 있다.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건초 수레’, 1512~1515년, 패널에 유채,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중앙 패널에는 커다란 건초더미를 가득 실은 마차를 중심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얽히고설켜 시끌벅적한 모습이다. 네덜란드에는 “세상은 건초더미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그 건초더미에서 각자 움켜잡을 수 있는 만큼 취한다”는 오래된 속담이 있다. 마차 뒤에는 화려한 옷을 입은 교황과 황제를 비롯해 세속적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말을 타고 뒤따르고 있다. 마차 주위에는 서민들이 하나같이 한 움큼이라도 건초를 더 가지려고 욕심스럽게 다투고 있다. 사다리를 놓고 건초더미에 오르려는 사람, 갈퀴로 건초를 빼돌리려는 사람, 바퀴에 걸린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손에 건초를 조금이라도 더 움켜잡으려고 격렬하게 싸우는 사람 등 사람들이 치열하게 발버둥치고 있다. 모두 커다란 건초더미를 보호하려는 마음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건초를 양껏 차지하려는 사람들이다. 건초 수레는 인간의 끝없는 탐욕과 한없는 욕심을 상징한다. 건초를 차지하려는 탐욕은 다른 죄를 낳기도 한다. 화면 아래 오른쪽에는 뚱뚱한 수도사가 한 손에 포도주잔을 들고 자신이 모아 놓은 건초를 보며 흐뭇해하고 있고 그를 대신해 수녀들이 큰 자루에 건초를 채워 넣고 있다. 이들은 수도자로서의 서약은 저버리고 교회 재산을 빼돌리고 있는 것이다. 이들 왼쪽에는 여자 환자가 고통스럽게 돌팔이 의사에게 치료받고 있다. 그 옆에는 아이가 치맛자락을 잡고 보채고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는 여인이 한 집시에게 손금을 보고 있다. 이들 뒤로는 검정 모자에 망토를 두르고 아이를 업은 마술사이자 도둑이 보인다. 모두 탐욕에 젖어 속임수와 도둑질을 일삼는 자들이다. 더욱이 이들 위쪽에는 칼을 휘둘러 사람을 죽이는 장면도 묘사돼 있다. ■ 하늘을 보지 않는 사람들 건초 꼭대기에는 두 쌍의 남녀가 한때를 즐기고 있다. 소박한 차림의 한 쌍은 덤불 속에서 입을 맞추고 있고, 우아한 차림을 한 다른 한 쌍은 곡을 연주하고 있다. 이들 오른쪽에는 공작새 꼬리를 한 파란색 악마가 있다. 이들은 악마의 유혹에 빠져 바로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보지 못하고 있다. 천사는 욕망에 사로잡힌 이들이 가엾다는 듯 하늘만 쳐다보며 두 손 모아 기도하고 있다. 하늘의 구름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는 양팔을 벌리고 지상의 아수라장을 내려다본다. 인간들은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않고 탐욕에만 눈길이 간다. 부를 향한 인간의 온갖 탐욕과 범죄, 혼돈과 분열의 결말은 어떠한가? 수레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결국 수레는 기이한 생물들에 의해 천천히 그들의 목적지인 오른쪽 패널, 곧 최후의 심판인 지옥으로 끌려가고 있다. 얀 베르메르의 ‘저울을 들고 있는 여인’, 캔버스에 유채, 1662~1663년, 미국 워싱턴 D.C. 국립미술관. ■ 정의의 저울 앞에 선 사람들 지옥은 단순한 불구덩이가 아니라 현세가 그대로 연장된 듯한 장소다. 괴물 같은 형상의 악마들이 죄인을 하나씩 맡아 고문한다. 죄인들은 저 멀리 도시를 집어삼킬 것 같은 불길 속으로 던져지거나 괴롭힘을 받을 것이다. 더욱이 모든 죄인을 수용하기에는 지옥이 너무 적은지 벽돌공 악마들은 새 건물 짓기에 바쁘다. 일반적으로 최후의 심판 도상에서 구원받은 사람과 저주받은 사람의 수를 비슷하게 배열하지만 보스의 작품에서는 지옥으로 갈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와 구원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다. 하지만 선과 악 사이에서 각자의 마음에 따라 선택하게 된다. 네덜란드의 또 다른 화가 베르메르(Jan Vermeer, 1632~1675)의 작품에 보이는 저울을 든 여자를 보자. 여인의 머리 뒤에 걸린 액자 속에는 예수께서 선과 악,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최후의 심판이 그려져 있다. 창을 통해 빛을 받고 있는 여인은 탁자 위에 널려 있는 많은 보석 앞에서 저울을 들고 있다. 저울은 비어 있지만 탁자 위의 금과 진주는 세속적이고 순간적인 삶을 의미한다. 완벽하게 균형 잡힌 저울은 정의의 공평함과 모든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할 능력을 상징한다. 여인은 빈 저울을 들고 욕망의 물질 앞에서 곰곰이 생각에 잠긴 눈빛을 하고 있다.

발행일 2019-09-01 제3160호 18면

[성화로 만난 하느님] (17) 인도하는 어머니와 축복하는 아들

그리스도교 미술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에 관한 도상은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특히 예수에 관한 이미지는 성경이나 교리 내용을 바탕으로 구체적이며 분명하게 시각적으로 드러났지만, 마리아의 모습은 그렇지 않다. 마리아에 관한 이야기는 성경에 많은 부분이 포함돼 있지 않고 오히려 외경에서 많이 다뤄지고 있다. 전해지는 문헌에 따르면 마리아 도상은 루카 복음사가가 ‘호데케트리아’(신을 향해 길을 인도하는 여인이란 뜻)로 추정되는 성모 마리아의 이콘 초상을 그린 것에서 기원한다. 이 그림에 대해 6세기경 비잔틴 역사학자인 테오도로스 렉토르는 그가 저술한 「교회사」에서 5세기경 테오도시우스 2세의 부인인 황후 에우도키아가 자신의 시누이인 풀체리아에게 준 것이라고 밝혔다. 안티오키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져 있던, 성 루카가 그린 그림을 황후가 콘스탄티노플로 가져왔다고 전해진다. ‘호데케트리아’라고 불리는 이콘 유형의 하나인 이 그림에서는 정면을 향하고 있는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왼쪽 무릎 위에 앉히고 오른손은 아기 예수를 가리키고 있다. 아기 예수의 왼손에는 로고스를 상징하는 두루마리가 들려 있고 오른손은 축복을 주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성 루카가 그린 성모 마리아의 초상은 현재 남아 있지 않지만, 그가 그렸다는 일화는 사실처럼 받아들여져 널리 알려졌고 이후 많은 화가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조토의 ‘모든 성인의 성모’, 1300~1310년경, 목판에 유채,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 인도하는 손과 축복하는 손 이탈리아 후기 고딕 회화의 거장인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 1266?~1337)는 청렴한 신앙생활을 목표로 한 평신도 단체인 우밀리아티(Umiliati)로부터 이탈리아 피렌체의 모든 성인의 성당 제대화를 의뢰받아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거대한 성화를 그렸다. 이 제대화는 보다 3차원적이고 사실적인 공간 연구를 향해 발전했던 피렌체 회화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작품이었다. 이탈리아 토스카나주의 전형적인 오각형 패널 형태의 제대화에는 황금빛을 배경으로 성모자가 묘사돼 있다. 고딕 취향이 명백히 드러나는 금으로 장식된 우아한 옥좌 위에 앉은 성모자를 중심으로 규칙적인 기하학적 형태의 선 위에 인물들이 배치돼 있다. 옥좌는 흡사 지붕과 벽을 가진 작은 감실 또는 닫집을 연상시킨다. 이 때문에 양옆에 늘어선 성인들과 천사들은 중앙의 성모자상과 분리된 공간을 갖게 돼 확실한 3차원적 공간감을 나타낸다. 이러한 구획 분리로 중앙의 성모자를 향하는 성인들과 천사들은 오히려 더 제의적(祭儀的)으로 보인다. 실제 이들 시선은 모두 아기 예수와 성모 마리아를 향하며 경배하고 있다. 기품이 느껴지는 성모 마리아는 어머니의 온화함을 자아내며 아기 예수를 안고 있다. 성모 마리아의 금술이 달린 암청색 겉옷은 당시 가장 세련된 아름다움을 표현한다. 암청색 안료는 당시 값비싼 색으로 귀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성모 마리아의 색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암청색은 동정녀의 모습과 하느님의 아들을 낳은 어머니로서의 영광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어머니 무릎에 앉은 아기 예수는 근엄한 표정으로 한 손에는 말씀이 적힌 두루마리를 들고 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축복을 주고 있다. 성모 마리아의 암청색 옷과는 달리 아기 예수는 붉은색 옷을 입고 있다. 붉은색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희생을 상징한다. 이렇듯 화가는 인물 형상을 분명히 구획된 실내외 공간 속에 배치하며 이야기 전달을 넘어 인상 표현과 심리 상태를 섬세하게 드러내고 있다. ■ 연결하는 손 화가는 천사들의 등장을 통해 아기 예수와 성모 마리아가 어떤 분인가를 더욱 명확하게 묘사했다. 관람자가 화면을 볼 때 가장 먼저 시선이 가는 곳은 옥좌의 아랫부분에 무릎을 꿇은 두 천사다. 흰옷을 입은 천사들은 각자의 손에 백합과 장미가 꽂힌 화병을 들고 있다. 백합은 성모 마리아의 순결함을 나타내고 장미는 아기 예수의 수난을 상징한다. 다음으로 옥좌 왼쪽과 오른쪽에 올리브색 옷을 입은 천사가 서 있다. 오른쪽 천사는 성체가 담긴 성합을 들고 있고 왼쪽 천사는 왕관을 들고 있다. 성합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희생양이 될 예수를 의미하고 왕관은 하늘의 여왕(레지나 첼리(regina caeli))인 성모를 상징한다. 무릎을 꿇은 아래쪽 천사들과 위에 서 있는 두 천사와의 거리감은 뚜렷하다. 옥좌의 계단을 중심으로 볼 때 성모자상 옆에 서 있는 두 천사는 천상적이고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한 공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아래 두 천사의 한 손은 신비의 성모자상을 향하고 있지만 다른 한 손은 지상을 향해 있다. 이 두 천사는 관람자의 영역을 향해 천상적 공간과 지상적 공간을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한다. 구에르치노의 ‘성모자를 그리는 성 루카’, 1652~1653년, 캔버스에 유채, 미국 캔자스시티 넬슨 아킨스 미술관. ■ 초대하는 손 이탈리아 화가 구에르치노(Guercino,1591~ 1666)의 작품에 등장한 미소년 같은 천사는 아름다운 흰 날개를 달고 있다. 날개는 신적인 분위기를 부여하며 인간과 구별되는 중요한 표식이다. 화가는 성 루카가 성모자를 그리는 모습을 자연주의적 화풍으로 섬세하게 묘사했다. 커다란 이젤 위에는 거의 완성된 듯한 성모자 그림이 놓여 있다. 이젤 앞 성 루카는 팔레트와 붓을 든 채 자신이 그린 성모자의 초상을 바라보도록 오른손을 가리키고 있다. 오른쪽 뒤에 있는 탁자 위에는 성 루카를 상징하는 황소와 복음사가를 의미하는 펜이 놓여 있다. 캔버스 화면에는 상체를 곧게 세운 성모 마리아의 무릎에 아기 예수가 앉아 있다. 성모 마리아의 표정은 다소 엄숙하고 위엄이 있어 보인다. 아기 예수는 오른손을 들어 축복하고 있고 왼손으로 말씀이 적힌 종이를 들고 있다. 천사는 성 루카의 그림에 빠져든 듯 감상하고 있다. 성 루카는 오른손을 들어 그가 그린 성모 마리아의 손짓처럼 성모자를 가리키며 우리를 그림 속 성모자 속으로 인도하고 있다.

발행일 2019-08-18 제3158호 18면

[성화로 만난 하느님] (16) 십자가 - 생명나무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린 그림은 많이 보았을 것이다. 십자가 처형은 로마인들에게 지독한 혐오의 대상이었다. 당시 십자가는 저주와 공포의 표상으로 고통과 수난, 치욕과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의미하는 잔인한 사형 도구였다. 그러나 처형 도구로서의 십자가는 부활이라는 관점에서 재조명되며, 그리스도교 시각으로 재해석돼 공식 인호로 정립된다. 바오로 사도에 따르면, 불명예스러웠던 십자가는 유다인들과 다른 민족에게는 걸림돌과 어리석음이었지만, 신앙인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 안에서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1코린 1,24)를 바라본다. 걸림돌이자 어리석음의 표지였던 십자가 안에서 하느님의 신비와 구원의 신비를 볼 수 있다. 죽음의 표지인 십자가는 구원의 상징이요, 생명의 의미로 변모됐다. 또 십자가를 생명과 풍요로 가득한 구원의 상징을 담은 아름다운 생명의 나무(lignum vitae)로 표현하기도 했다. 파치노 디 보나구이다의 ‘십자가 나무’, 1305-1310, 패널 위에 템페라와 금, 이탈리아 피렌체 아카데미아 갤러리. ■ 나무: 선악과 새 생명 예수께서는 ‘십자가 나무’라 불리는 커다란 나무 위에 매달려 있다. 목재로 잘 다듬어진 일반적인 십자가와는 달리 십자가 나무는 잎과 꽃, 열매 등이 달려 살아 있는 나무의 모습을 하고 있다. 십자가 나무는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생명나무의 속성을 가진다. 예수가 매달린 나무 안에 죽음과 생명의 신비가 나타나는 것이다. ‘십자가 나무’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활동한 파치노 디 보나구이다(Pacino di Bonaguida·1280경~1340)가 몬티첼리(Monticelli)의 클라라수도회 의뢰로 제작한 작품이다. 예수가 매달린 십자가 나무의 맨 아래쪽에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창조되고 타락하는 과정이 묘사돼 있다. 나무는 인류의 죄로부터 기인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아담과 하와 이야기 바로 위에는 두루마리를 든 모세, 성 프란치스코, 성녀 클라라, 복음사가 요한이 있다. 모세는 ‘하느님께서 에덴동산에 탐스러운 온갖 나무를 자라게 하시고 그 가운데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생명나무를 자라게 하셨다’(창세 2,9)는 글을 들고 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바오로 사도의 고백인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 6,14)라는 글로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명시하고 있다. 클라라 성녀에는 “임금님이 잔칫상에 계시는 동안 나의 나르드는 향기를 피우네”(아가 1,12)라고 적혀 있다. 요한은 ‘다달이 열매를 내놓는 강에는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 쓰이는 나뭇잎이 열리는 생명나무가 있다’(묵시 22,2)는 말씀을 들고 있다. 십자가 나무 위에 있는 펠리컨 양 옆에는 예언자 에제키엘과 다니엘이 두루마리를 들고 있다. 에제키엘의 두루마리에는 ‘강가에 잎이 시들지 않고 풍요로운 과일이 열리는 과일나무가 자라고 있다’(에제 47,12)고 적혀 있다. 잎이 시들지 않는 근원이 예수인 것이다. 다니엘은 ‘튼튼하게 자란 나무가 높이 올라가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있다’(다니 4,8)며 십자가 나무의 규모와 위엄을 말하고 있다. 결국 십자가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새 생명의 나무로 묘사되고 있다. ■ 나무: 희생 파치노의 ‘십자가 나무’는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장인 보나벤투라(Bonaventura)가 「생명나무」(lignum vitae·1259)에서 서술한 명상방법에서 영향을 받았다. 보나벤투라의 텍스트는 구조적으로 나무 형태를 띠며, 12개 가지와 48개의 장으로 예수의 삶과 죽음, 부활 등을 언급한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은 머릿속에 나무 하나를 그리고 명상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게 된다. 예수의 삶을 기억하고 따라가는 동안 믿음의 가지가 자라고, 신자들은 더욱더 그리스도를 닮은 성숙한 사람이 돼 가는 명상방법이다. 커다란 ‘십자가-생명나무’에 예수가 매달린 줄기로부터 오른쪽과 왼쪽으로 뻗은 12개의 가지가 있다. 이것은 12사도 혹은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한다. 영원성을 상징하는 아칸서스 잎이 달린 가지에 매달린 47개의 원형 메달에는 예수의 탄생부터, 성장, 수난, 죽음, 부활, 승천을 담은 내용이 묘사돼 있다. 그림은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아래부터 위로 읽어나가면 된다. 성찬식 때 사용되는 성체를 연상케 하는 가지의 원형 메달은 예수의 희생을 기억하며 파스카의 신비를 드러내고 있다. 예수의 희생은 십자가 나무 맨 위에 그려진 펠리컨에서도 강조되고 있다. 아칸서스 잎으로 둘러싸인 둥지 안에 어미 펠리컨은 자신이 쪼아 벌린 가슴에서 흐르는 피로 배고파하는 새끼들을 먹이고 있다. 펠리컨의 사랑은 예수께서 피의 희생으로 인간의 죄를 구원한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하느님은 예수의 ‘십자가-생명나무’를 통해 에덴동산에서 시작된 죄의 역사를 인류 구원의 역사로 뒤바꾼 것이다. 베르톨트 푸르트마이어의 ‘죽음과 생명의 나무 - 베른하르트 폰 로어의 미사경본’, 1481년경, 채색 필사본, 독일 뮌헨 바이에른 주립도서관. ■나무: 죽음과 생명 나무에는 에덴동산의 나무에서 시작된 죽음과 골고타 언덕의 십자가 나무에서 이뤄진 생명의 신비가 담겨 있다. 인간은 나무로 인해 죄를 짓고 나무로 인해 죄사함을 얻은 것이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의 대주교였던 베른하르트 폰 로어의 미사경본에는 독일 채색 필사본 화가인 베르톨트 푸르트마이어(Berthold Furtmeyr·1446 ~1501)가 한 나무에서 죽음과 생명을 표현한 작품이 있다. 성경은 생명나무와 선악의 나무를 각각 다른 듯 설명하지만, 그는 한 그루 나무로 묘사해 그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가운데 선악과를 상징하는 나무에는 사과와 죽음(죄)을 상징하는 해골과 생명(구원)을 상징하는 십자고상이 달려 있다. 나무 양쪽으로는 성모 마리아와 하와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열매를 나눠 주고 있다. 왼쪽의 성모 마리아는 십자가를 통한 생명-성체를, 오른쪽의 하와는 죄를 통한 죽음-사과를 선사하고 있다. 에덴동산의 나무는 생명과 죽음을 함께 지닌 한 그루로 나타나고 있다.

발행일 2019-08-04 제3156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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