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그니스와 커뮤니케이션

오대산이었다. 방아다리 약수터로 가는 길은 돌밭과 같았다. 운동이라고는 숨쉬기운동밖에 하지 않고 살던 어느 날, 가톨릭 언론인 선후배들과 산행을 하게 되었다. 발은 무겁고 걸음은 느리고 숨은 가빴다. 말과 글로 평생 살아온 분들이라 여기저기서 ‘깊은 산 고요’(정지용 프란치스코, 「장수산 1」)를 깨우는 탄성이 나오곤 하였으나, 중력을 실감하며 걷는 한 중년에게 그것은 아득하기만 했다. 그래도 산행을 마치고 나눠 마신 막걸리는 달콤했다. 너나없이 세파 속에서도 언론인의 정도를 걸으며 살아온 이들이기에 수다스러워도 가볍지 않았고, 농담에도 뼈가 있었다. 으레 그렇듯 뒤풀이가 본풀이가 되려는 순간 산행 대장의 버스 승차 명령이 떨어졌다. 평창에서 서울까지 이동하는 시간이 있으니 그의 판단은 옳았으나, 다들 엉덩이 무게를 감당하기 힘든 눈치였다. 일은 귀경하는 버스 안에서 벌어졌다. 고속의 주행음 속에서도 다들 산행의 피로와 막걸리의 취기로 눈을 붙이고 있는데 두 선배가 옆자리로 와서 말하는 것이었다. ‘가톨릭독서아카데미’의 사무국장을 맡아 달라. ‘가톨릭언론인산악회’ 총무가 되어 달라. 그렇게 한 자리에서 두 가지 제안을 받았다. 다들 좋아하고 존경하는 선배들이었기에 쉽사리 말하기 어려웠다. 실은 세례를 받던 해에 느닷없이 가톨릭 방송인들의 모임인 ‘서울커뮤니케이션협회’(시그니스) 사무국장을 맡아 정신없이 일하던 기억이 있었기에 더욱 답하기 어렵기도 했다. 일천한 신앙생활에 교회의 사정을 전혀 모르는 처지였던지라 2년의 임기 동안 참으로 부실한 사무국장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KBS, MBC, SBS, EBS 등 시그니스 소속 교우회들의 연합 미사를 기획하고, 합동 피정과 성지순례를 추진하는 동안 조금씩 길눈을 뜨고 신앙생활도 깊어졌음을 느꼈던 터라 고민 끝에 가톨릭독서아카데미 사무국장을 맡겠노라고 말했다. 아무래도 방송계 선배가 회장으로 있는 쪽을 택한 셈이다. 그런 점에서 신문사 출신 선배가 회장으로서 어렵사리 부탁한 가톨릭언론인산악회 사무국장을 수락하지 못한 것은 못내 송구한 일이기도 하다. 그렇게 시작된 가톨릭 언론인 공동체에서의 봉사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 가운데 지난 2022년 8월 서강대학교에서 개최된 ‘시그니스 세계총회’는 유난히 기억에 남는 일이다. 무더운 여름 날씨에다 언어가 다른 형제자매들을 영접하고 프로그램을 진행하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전 세계 커뮤니케이터들이 4년마다 모여 회의도 하고 세미나와 이벤트도 펼치는 자리에 미력이나마 전시공연 PD로서의 경험을 보탤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기도 했다. 역시 오대산이었다. 방아다리 약수는 신체 건강에만 도움을 준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 초기의 어리숙한 한 신자가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일에 뛰어들어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버스 안에서 내게 사무국장을 제안했던 한 선배는 말했다. “봉사가 은총입니다.” 실로 그렇다. 글 _ 김재홍 요한 사도(시인·문학평론가, 가톨릭대 초빙교수)

[독자마당] 왜관 홀리페스티벌 초청 공연을 마치며

올봄,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에서 열리는 ‘2025 왜관 홀리페스티벌’의 초청 연락을 받고, 우리 성가대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설렘으로 가슴이 뛰었습니다. 이번 초청은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진 행운이 아니었습니다. 2024년 5월, 대구대교구 월성성당에서 열린 ‘성모의 밤’ 초청 공연, 그리고 그 해 12월 말 대구대교구 갈밭성당에서 선보였던 어린이 영어 뮤지컬 무대를 보신 분들이 기억해 주신 덕분입니다. 아이들의 작은 목소리와 그 안에 담긴 순수함이 누군가의 마음을 울렸고, 그 울림이 왜관이라는 더 넓은 무대로 이어졌다는 사실에 하느님의 섭리를 깊이 느낍니다. 7월 12일 오후 6시. 그날의 감동은 지금도 제 가슴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날이었지만, 하느님의 손길인 듯 불어온 시원한 바람은 무대에 선 아이들에게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김동건 지휘자님의 세심하고 따뜻한 인도 아래, 초등학교 1학년부터 중학교 1학년까지 15명의 아이들이 수도원 전체에 울려 퍼지는 맑은 음성으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공연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께서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셨고, 박수로 응답해 주시며 함께 노래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아이들의 눈동자 속에는 떨림보다도 감사와 기쁨이 가득했고, 그 진심이 관객 한 분 한 분의 마음을 두드렸을 것이라 믿습니다. 음이 다소 흔들리거나 박자가 조금 엇갈리는 순간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 모든 것이 더 큰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그것은 진실된 모습이었고, 하느님께 드리는 가장 순수한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에게 이번 무대는 단순한 무대 경험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두 달간의 준비 과정에서 아이들은 함께하는 기쁨을 배웠고, 서로 다른 생각을 나누며 양보하고 배려하는 공동체 정신도 익혔습니다. 노래를 함께 부르며 마음을 모았고, 틀릴까 걱정하던 순간에는 서로 손을 잡아주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그 모든 과정이 이미 하나의 ‘작은 천국’이었습니다. 갈밭성당 성 페트릭 어린이 성가대는 조완 리카르도 신부님의 깊은 사랑과 지지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아이들이 주일학교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을 음악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장을 마련해주신 신부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번 공연은 우리에게 하나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아이들은 이번 경험을 통해 자신감과 희망을 얻었고, 더 큰 세상 속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작은 사도’가 되고자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아직은 부족하고 서툴지만, 진심만은 누구보다 깊고 간절한 이 성가대의 노래가, 세상 곳곳에 하느님의 평화와 사랑을 전하는 씨앗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글 _ 박수진 모니카(대구대교구 갈밭성당 성 페트릭 어린이 성가대 단장)

발행일 2025-07-20 제3451호 22면

서울대교구 새 보좌주교 탄생을 축하하며

서울대교구에 새 보좌주교가 탄생했다. 레오 14세 교황이 7월 8일 최광희 신부를 교구 보좌주교로 임명함에 따라 서울대교구는 총 네 명의 보좌주교를 두게 되었다. 특히 최 주교는 47세로 한국 주교단 가운데 최연소 주교라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최 주교를 곁에서 지켜본 이들은 한결같이 깊은 배려심, 경청의 자세, 그리고 사려 깊은 성품을 높이 평가한다. 주교 임명 후에도 “부족한 저를 위해 기도해달라”며 겸손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최 주교는 성서신학을 전공해 하느님의 말씀을 삶의 중심에 두고, 오랫동안 가톨릭 청년성서모임을 통해 젊은이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신앙을 이끌어왔다. 또한 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과 대변인으로도 활동하며 교회 안팎에서 소통의 다리를 놓는 데 앞장서 왔다. 특별히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WYD)’를 앞둔 시점에서, 한국교회는 이 세계적인 행사가 단지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세계의 모든 젊은이들이 자신의 삶과 소명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신앙을 확인하고 삶으로 실천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따라서 행사 준비에 만전을 기하는 동시에 청년사목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이처럼 중요한 시기에, 새 보좌주교에 임명된 그의 청년 사목에 대한 깊은 이해와 경험, 그리고 문화와 복음의 접점을 찾는 감각은 특히 소중하게 다가온다. 젊은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새로운 세대의 주교가 탄생한 것은 한국교회에 큰 기회가 될 것이다. 최광희 보좌주교의 임명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그의 사목 여정에 주님의 은총이 함께하길 기도한다.

발행일 2025-07-20 제3451호 23면

두 개의 깃발 아래 서 있는 세계 – 겸손과 오만 사이에서

이스라엘 텔아비브의 한 공동체에 감도는 긴장을 수도원 게시판을 통해 목격하면서, 다시금 이 세계에 만연한 ‘깨진 평화’를 마주하게 된다. 불안한 국제 정세, 고조되는 전쟁의 위험과 기후 위기는 모두 인류의 존립을 위협한다. 이 복합적 위기의 중심에는 세계 질서를 주도해 온 강대국, 미국이 있다. 군사 개입, 지정학적 외교, 기후 문제에 대한 소극적 대응 등 미국의 정책은 국제사회에 깊은 영향을 끼쳐왔다. 그러나 이러한 영향력이 과연 평화를 향하고 있는지에 대해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다. 이렇게 체감하게 되는 불안은 정치의 본질과 지도자의 자격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게 한다. 성 이냐시오는 「영신수련」에서 ‘두 개의 깃발’이라는 묵상을 제시하며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지향을 두 가지 길로 묘사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깃발’, 곧 겸손과 가난, 자기 비움으로 향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루시퍼의 깃발’, 부귀와 명예, 오만과 자기 영광으로 이끌리는 길이다. 이 두 깃발은 단지 신학적 상징이 아니라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결정과 가치의 선택 앞에 실재하는 실존적 기준이다. 오늘날 국제사회의 갈등과 위기의 뿌리 역시 이 깃발 사이의 선택 혹은 이끌림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정의’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정의로운 국가란 각 계층이 자신의 역할을 다하면서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 통치자는 지혜로, 보조자는 용기로, 노동자는 절제로 삶을 유지할 때 정의가 실현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의는 단순한 정치제도의 문제를 넘어서 각 개인의 영혼과 연결되어 있고, 이성·기개·욕망의 질서 있는 조화 속에 깃든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성 이냐시오가 제시한 두 개의 깃발과도 깊이 상통하는 부분이 아닐까. 국가란 하나의 유기체이며, 그 지향이 어디를 향하느냐에 따라 평화 혹은 파괴의 길로 이끌릴 수 있다. 현 세계에서 이러한 성찰이 더욱 필요한 이유는 지도자들의 결정이 단순한 정책이나 전략 차원을 넘어 인간 생명과 공동체의 존엄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관련 뉴스나 대외정책 그리고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깃발이 아닌 매캐한 연기로 가득한 루시퍼의 깃발이 미국 전역에 펄럭이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권력의 논리, 무력의 우위 그리고 자국의 이익을 절대시하는 결정들은 이데아적 정의보다는 ‘강자의 이익’을 정의라고 착각하는 노선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에 서는 삶은 전혀 다른 길을 제시한다. 그것은 평화와 사랑, 겸손과 희생의 길이다. 미국이 진정한 아름다움을 회복하고 세계를 선도하기 위한 국가가 되려면 ‘사사로운 이익’을 내려놓고, 무력과 제재를 통한 통제 대신 공감과 연대의 리더십을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 이민자 추방이나 군사적 개입은 정의의 기준에서 벗어난 행보로 읽힌다. 청교도 정신을 바탕으로 건국되어 이상주의와 공동체적 책임을 중시했던 나라가 자국 중심의 현실주의에 매몰되어 타자의 고통에 무관심한 모습은 도덕적 위기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정의란 어느 한 계층의 이익이 아닌, 모든 이의 삶을 보장하고 약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갈등이 아닌 이해를 바탕으로 형성되는 질서이기 때문이다. 전쟁을 미화하거나 권력을 정당화한 담론은 실제 고통받는 이의 현실은 가린 채, 마치 그것이 ‘정의’인 양 왜곡된 인식을 조장한다. 이 정황 속에서 우리가 바라볼 곳은 분명하다. 비폭력과 온유, 공동체의 일치를 지향하는 선택은, 현실 정치에서는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삶에 근간이 됨을 기억하며 예수님께로 시선을 두어야 한다. 이 세계가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로 이끌려 평화를 향한 참된 여정을 다시 시작하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하고 성찰한다. 글 _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이은주(마리헬렌) 수녀

발행일 2025-07-20 제3451호 23면

성적 타락의 반대말은

시골에 와서 깨닫는 것이지만, 육체노동만큼 우리를 겸손하게 하는 일은 또 없다. 농사일은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이제는 200여 평의 정원을 돌보는데 매일 최소 한 시간에서 세 시간 정도의 노동이 소요된다. 해가 뜨면 너무 뜨거워 늦어도 6시 전에는 일을 시작해야 했다. 별것도 아닌 것 같은 평범한 정원을 만드는데 이렇게 지난한 노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난 후, 이제는 잔디와 세상의 모든 정원이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자연을 상대로 했을 때 하루에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너무 작다. 지난여름에는 너무도 오랜 장마에 죽은 잔디를 어쩔까 하다가 붉은 벽돌을 주문해서 길을 만들었다. 혼자서 3천 장의 벽돌을 다뤄야 하는 일이었다. 시골 생활에서 깨달은 대로, “욕심부리지 말자. 할 수 있는 만큼 하자. 남은 것은 내일 하자” 다짐했다. 무리를 했다가는 열사로 쓰러질 위험도 있었고, 아니면 앓아누워 며칠을 중단해야 했으니 겸손하게 페이스를 조절하는 일도 새로 배우게 되었다. 어느 날은 일을 마치고 밥을 먹었다. 나는 먹는 것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양이 작았다. 그래서 평생 거의 한 번도 밥을 한 공기 이상 먹어 본 일이 없었다. 그날도 밥을 한 공기 먹기 시작했는데, 내 밥숟갈의 크기가 내가 생각해도 예사롭지 않았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한 공기가 비워졌고, 정말이지 아무 갈등 없이 나는 한 공기를 더 비우고 있었다. 목구멍 아래에서 마법의 손이 나와 밥을 다 가져가 버리는 것 같았다. 평생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고, 신기했다. ‘이게 바로 배고픔이고 이게 바로 ‘꿀맛’이라는 거구나’라는 깨달음의 기쁨은 얼마나 컸는지. 그날 저녁엔 좋아하는 막걸리를 반 잔도 못 들이켜고 자리에 누웠다. 침대 밑에서 커다란 자석이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고 ‘불면은 무슨, 고민은 무슨.’ 나는 아마도 코까지 골며 잘 잤다. 돌아보니 육체 노동 – 가사 노동 말고 아니 어쩌면 그 가사 노동조차도 – 이런 강도로 해보는 것은 평생 처음이었다. 어쨌든 우리 집에는 늘 도와주시는 분이 계셨고, 정원일을 혼자 도맡아 하는 것도 처음이었으니까. 수많은 동서양의 성인들께서 노동을 왜 강조하셨는지 새삼 또 납득이 되었다. 어린 시절 나는 수많은 제국의 멸망 원인에 항상 있었던 ‘지배층들의 성적 타락’이 항상 궁금했었다. 어떻게 개인적 일탈이라고 할 수 있는 성적 타락이 제국의 멸망을 가져오는지 말이다. 그러다가 알게 된 것이 있었다. 성적 타락의 반대말이 건강한 육체노동이라는 것을. 톨스토이도 그의 소설 「크로이체르 소나타」에서 ‘기름진 음식을 먹고 그 에너지를 건강하게 쓸 수 없는 자들이 빠지는 함정이 성적 타락’이라고 썼다. 육체노동을 하지 않는 혹은 하지 않았던 지도자들은 결국 기름진 에너지들을, 제국을 멸망하게 만드는 데 쓴다. ‘힘든 일은 내가 할 테니, 너는 공부나 하거라’라는 말만 들은, 좋은 대학에 간 모범생이 학생회장이 되어 세상을 호령하다가 남의 돈으로 공부하고 남의 돈으로 유학하러 가서 남의 돈으로 살고 돌아와 정치인이 된다면, 그는 모든 노동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인도할까. 만 원짜리 한 장을 더 얻어내기 위하여 가끔은 내 자존심마저 짓밟히는 수모를 견뎌야 했던 사람들의 눈물을 알까. 그리고 이건 비단 정치인들만의 일일까. 어쩌면 성직자들은? 햇볕이 뜨겁지만, 풀을 뽑으러 나가야겠다. 육체노동은 울화에도 효험이 있다. 글 _ 공지영 마리아(소설가)

발행일 2025-07-20 제3451호 22면

우리농 나눔터 적극 활용해 생명의 지킴이가 되자

농촌은 단순한 농산물 생산의 공간을 넘어 생명을 보듬고 지키는 삶의 터전이다. 주교회의 생태환경위원회 박현동(블라시오) 아빠스는 올해 농민 주일 담화에서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리는 먹거리의 뿌리를 다시금 돌아볼 것을 요청했다. 교회는 1994년부터 ‘우리농 나눔터’를 중심으로 농민들과 함께 생명을 살리는 운동을 펼쳐 왔다. 이는 단순한 유기농산물 구매를 넘어선 생태적 신앙의 실천이었다. 오늘날 도시의 식탁 위에 오르는 음식은 수많은 농부가 흘린 땀과 헌신의 결과이다. 그러나 농업의 위기는 여전히 깊고, 농촌 인구는 줄어들며, 생명의 터전은 점차 황폐해지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농 나눔터’는 도시와 농촌을 잇는 다리가 되어, 유기 순환 농업을 지지하고 생태적 삶의 가치를 나누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이 나눔터를 통해 우리는 소비자이자 신앙인으로서 창조 질서에 응답하는 구체적 실천을 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회칙 「찬미받으소서」에서 생태적 회심과 절제의 삶을 요청했다. 이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이며, 우리 모두가 ‘생명 지킴이’로서 일상에서 실천해야 할 과제이다. ‘우리농 나눔터’를 찾는 일은 단순한 장보기가 아니다. 그것은 생명을 살리는 선택이고, 지구를 위한 기도이며, 고통받는 농민과의 연대이다. 이제 우리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우리농 나눔터’를 통해 생명의 지킴이로 살아가자. 소비의 방향이 곧 신앙의 방향이 되도록, 감사의 마음으로 땅의 선물을 나누며 창조 질서를 보존하는 여정에 함께하자.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맡겨진 시대적 사명이다.

발행일 2025-07-20 제3451호 23면

여름이 재난이 되지 않도록

“날씨는 이데올로기다.” 프랑스의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그의 저서 「신화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날씨는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 해석되고 사용되는 기호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여름은 축제의 계절이지만,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여름은 생존의 문제였다. 기후재난의 책임을 지우는 동안, 폭염으로 수많은 이가 삶을 마감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1세기 사람들의 건강을 위협하는 가장 큰 요소로 폭염을 지목했으며, 질병관리청 조사 결과 지난해 여름철 폭염으로 인한 사망자 수가 34명으로 집계됐다. 간접 사인인 경우까지 고려하면 실제 피해자 수는 더 많다는 해석도 있다. 취재하며 만났던 쪽방 주민은 “쪽방과 거리에 사는 사람들은 매년 여름마다 어떻게 살아남을지 고민한다”고 전했다. 시카고 폭염 사태를 다룬 「폭염사회」의 저자 에릭 클라이넨버그(Eric Klinenberg)는 “가장 위험에 처한 사람이 가장 도움받기를 꺼린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현장에서 만난 쪽방 주민들은 무더운 날씨에도 에어컨 없는 방 안에만 머물며, 몸을 꽁꽁 싸매고 있었다. 하지만 현장에는 ‘희망’이 존재했다. 누군가에게 여름이 재난이 되지 않도록 관심을 기울이고 꾸준히 다가가는 이들이 있었다. 타인의 처지를 내 일처럼 여기며 ‘생존’이 아닌 삶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집 없는 이들의 권리를 외치는 사람들도 많았다. 올해는 정기 희년이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 5,5)라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희년 메시지를 기억하며, 이제는 희망의 불씨가 더 널리 퍼질 수 있도록 노력할 차례다.

발행일 2025-07-20 제3451호 23면

[독자마당] 비로소 알게 된 ‘말씀의 맛’

“성경을 모르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손상희 베드로 수녀님의 말씀에 자극을 받고 성경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지금껏 성경을 제대로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나는 참 어이없는 신자다. 수녀님 말씀을 못 들었다면 성경 공부에 열중하는 지금의 나도 없을 것이다. 복음을 안내하고 성경 공부를 권유하는 한 사람의 역할이 나에게 미치기까지 수고하신 많은 분의 노고를 귀하게 받아들인다. ‘성서 그룹공부’를 하고 있다. 말씀 봉사자와 그룹원 합하여 8명이다. 앞으로 적지 않은 시간 동안 함께 공부할 내 믿음의 이웃이다. 몇 번 모임을 했는데 한 번도 8명 모두 모인 적은 없다. 이 사람 저 사람 번갈아 가며 빠진다. 그날 누가 빠지면 그 사람을 생각한다. 왜 빠졌을까? 그냥 궁금하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속으로 짧게 기도한다. 안 좋은 일이 없기를! 다음 주엔 함께 공부할 수 있기를! 나눌 줄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부자가 아니라고 한다. 그렇지! 혼자만 잘 사는 것보다 나도 잘살고 너도 잘살고 이웃과 함께 우리 모두 잘살면 그게 좋은 세상이지! 재물 나눔, 재능 나눔뿐 아니라 말씀 나눔도 마찬가지다. 음식을 나누어 먹듯이 영혼의 양식인 성경 말씀이나 묵상도 나누면 미처 알지 못했던 것도 깨닫게 되고, 내가 겪어보지 않았던 다른 사람의 경험도 귀 기울여 듣다 보면 감동과 은혜가 더 크게 다가올 때가 있다. 성경 말씀을 반복해서 함께 읽고 묵상을 나눌 때 언제 어떤 사람이 이야기하는 말씀 한 구절, 묵상 한 마디가 내 가슴을 ‘쿵’ 하고 울릴지 모른다. 성경 공부하러 갈 때마다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되고 감동과 기쁨이 넘치는 말씀과 묵상을 만나게 해주십사 기도한다. 아울러 지금의 배움과 묵상이 나중에 이웃을 예수님께 인도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공부에 열중하고, 신앙적으로 크게 성장하여 신앙의 열매를 맺게 되기를 기대한다. 그저 기계적으로 겨우 주일미사만 참례하던 지난날의 소극적인 신앙생활을 자주 돌아본다. 나는 내가 이웃을 예수님께 인도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지만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싶은 친구가 몇 있다. 그 믿지 않는 친구를 믿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성경 말씀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도 이해 못 한 것을 친구에게 잘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고 차분히 묵상하는 생활에 기쁨이 있고 보람이 있어 스스로 뿌듯하고 행복하다. 틈날 때마다 성경을 필사해서 마태오 복음을 끝내고 나니, 이렇게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는 성경 전체를 다 필사할 날이 오겠지 하며, 벌써 설렌다. 성경을 공부하면서 어느 때는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깨달음을 얻었고, 또 어느 때는 고통을 통하여 드러나는 하느님의 섭리에 감탄하기도 하였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배우고 경험했던 일들이 성경 이해에 의외로 종종 도움이 되어 놀라기도 하였다. 어쩌면 청년일 때 성경 공부를 시작했더라면 더 좋았겠다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노년에 시작한 공부도 아직 늦지 않았고 어떤 의미에서는 더 잘 이해되는 부분도 있는 것 같아 그나마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 이대로 꾸준히 공부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믿을 만한(?) 신자가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어본다. 글 _ 배정수 프란치스코(서울대교구 답십리본당)

발행일 2025-07-13 제3450호 22면

악의 평범성

‘자기결정권’(헌법 제10조) 행사는커녕 기초 의사소통도 어려운 중증 발달장애인들 편에서 강제 탈시설에 반대해 온 가톨릭 사회복지계에 상처를 준 사건이 석달 전 있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4월 프란치스코 교황 선종 애도 기간에 서울대교구 혜화동성당 종탑을 무단 점거하고 탈시설 주장 플래카드를 내걸며 농성과 집회를 벌였다. 한 수도권 교구 주교좌성당에도 허락 없이 들어가 교황 빈소의 영정을 배경으로 플래카드를 내걸고, 조문 온 신자들에게 ‘성부와 성령의 이름으로 투쟁’이라는 공격적 언사도 했다. 6월 30일 서울 여의도동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장애인거주시설 혁신방안을 위한 토론회’에서 발제자로 나선 이중교 신부(야고보·수원교구 중증 발달장애인 거주시설 ‘둘다섯해누리’ 시설장)는 이를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으로 해석했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계 독일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을 분석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제시한 개념이다. 개개인으로 보면 상식과 대화가 통하던 인간이 집단화하자,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비합리적 수단도 동원하고 아무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 개개인은 선량할 시민들이 집단 논리에 매몰돼 ‘대수롭지 않게’(Banal) 이행한 이해타산 때문에 최중증 발달장애인들이 실제로 피해를 봤다. 2022년 1월부터 탈시설 시범 사업이 진행되며, 장애인 당사자 중 3개월 만에 욕창 패혈증으로 사망하거나 2주 만에 장폐색으로 죽는 일이 속출했다. 그래서 기원하게 된다. 우리 모두 집단 헤게모니를 떠나 사람 대 사람으로 관계를 맺으며 더 큰 참극을 막을 수 있기를.

발행일 2025-07-13 제3450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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