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 한 조각

로마에서 동쪽으로 달리다가,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아드리아해 쪽으로 가다 보면 란치아노라는 도시가 나온다. 이탈리아에서 성체의 기적이 일어난 다섯 군데의 도시 볼세나, 시에나, 페라라, 알라트리 중의 한 도시다. 하지만 그중 란치아노는 가장 유명하다. 오상의 비오 신부님이 사시던 산 조반니 로톤도로 가는 길에 있다. 전해져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1200년 전 한 사제가 미사를 드리다가 성찬의 전례 중 불현듯, ‘정말 그럴까’라는 의심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밀떡이 살로 변하고 포도주는 피로 변하여 응고되며,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졌다고 했다. 신부는 너무 놀라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오 나의 주님이시며, 내 하느님이십니다” 하고 부르짖었고, 이는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다. 12세기가 지난 지금도 살 모양으로 변한 성체는 불그스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고 성혈은 불규칙한 다섯 개의 형상을 한 한 핏덩이로 보존되어 전시되어 있다. 1970년 아레초 병원의 교수이자 수석 의사인 리놀리가 이 성체 조직을 떼어 과학적 조사를 하는데, 밝혀진 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이 살과 피는 동일한 AB형이며, 살과 피는 인간의 것이다. 살은 심장 근육이다. 이 살과 피에 방부제를 사용한 흔적은 전혀 없다.” 이런 사실 자체가 우리를 얼마나 감동하게 할까 싶었다. 누가 모르나 말이다. 세례받을 때 이미 들은 말이었다. 그런데 막상 그 성체 성혈이 현시된 곳으로 다가가는데 가슴이 뛰었다. 뭐랄까 어떤 전혀 다른 자장의 동심원 속으로 들어서는 듯 다른 느낌으로 변했다는 말이다. 이것은, 파도바 성 안토니오 대성당에 들어서 성인의 혀가 보존된 곳으로 다가서며 수다를 떨던 나와 후배가 어느 순간부터 서로 동시에 입을 다물고 말았던, 그 사건과 비슷했다. 그리고 막상 그 성체 앞에 섰을 때 내 심장이 그 심장에 반응하고 있는 듯 느껴졌다. 통증과 아픔이 전해져 왔던 것이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벗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주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예수는 말씀하셨지만, 나는 이 지상에서 그런 사랑을 해 본 적이 없다. 다만 내 아이들을 두고, 만일 내 목숨을 내어주어 아이들의 영혼과 육신이 산다면 그건 기꺼이 ‘그러겠다’고 처음으로 생각해 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생각과 실천은 아마도 다를지도 모른다. 그 성당 지하에서 영광스럽게도 우리는 미사를 봉헌했다.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 “죄를 용서하여 주려고 너희를 위하여 흘린 내 피”라는 말에 더 참을 수 없이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동안 그걸 몰라서가 아니리라. 그걸 눈으로 봐야 깨닫는 어리석은 나였기 때문이리라. 얼마나 사랑했으면 심장의 조각을 찢어 내줄 수 있는 걸까. 언젠가 세계 최빈국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공항에서 내 가방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흰 광목 보따리가 컨베이어 벨트에 끝도 없이 실려 나오는 걸 본 일이 있었다. 새까맣고 쭈글쭈글한 얼굴의 노인들이 그 보따리를 짊어지고 공항을 떠나고 있었다. 알고 보니 평생 돈을 모아 메카와 메디나 순례를 다녀온 회교도 들이라고 했다. 그보다 백만 배는 더 잘사는 우리는 어떤 순례를 떠나고 있을까. 언제나 여행이나 순례를 떠나려고 돈을 모으면, 꼭 그만큼 쓸 일이 생기곤 했다. 내 생애 언제 다시 희년이 올까 싶어 대녀를 꼬드겨 함께 떠난 순례, 떠나오길 참 잘했다 싶었다. 아마도 그 후로 나의 기도는 약간 바뀐 듯했다. 심장을 내어준 분한테 뭘 더 달라고 할 수 있을까. 희년이 한 달쯤 남았다. 더 늦기 전에 떠나시길 권한다. 물론 국내에도 순례지가 많으니. 글 _ 공지영 마리아(소설가)

소소함으로 보는 리더십

한국을 방문한 작은형제회 총봉사자 마시모 푸사렐리 신부를 처음 만났다. 전 세계 만 명이 넘는 회원을 보유하고 있는 세계적인 수도회의 총봉사자는 어떤 사람일지 내심 궁금했다. 만나기 전 그에 대해 아는 것은 이탈리아 사람이라는 것과 수도회 영성답게 이민자를 비롯한 약자들과 함께해 온 인물이라는 점 등이었다. 그는 12월 4일 경기도 파주시 파티마 평화의 성당에서 임진각 평화누리공원까지 수도자, 재속회원들과 함께 도보로 순례했다. 공원에 도착해 저만치 북한이 보이는 전망대에 오르자 재속회원들이 그에게 삼삼오오 몰려갔다. 아마 짧은 휴식 시간 동안 푸사렐리 신부는 이들과 스무 장은 족히 넘는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그는 그 와중에도 공원 내 분단과 평화를 상징하는 전시물들을 유심히 살펴보고, 한국 수도자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다. 무심한 듯 소소한 것에 관심을 두는 모습은 총봉사자라는 직책보다는 수도회의 평범한 ‘수사’에 더욱 가까워 보였다. 반면 그와 인터뷰를 시작하자 부드러움에 감춰졌던 확고함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간의 수도 생활을 통해 얻은 경험인 유럽 내 이민자들, 전쟁과 폭력, 불평등 문제와 이에 대해 수도회가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에 따라 행하는 활동들에 대해서는 일관되고 명확하게 이야기했다. 건전한 신념과 뚝심, 겸손함과 리더십을 갖춘 지도자를 찾기 어려운 세상이 됐다. 세심함보다는 거친 언행과 자극적인 발언을 곁들여 자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는 지도자가 마치 유행인 듯하다. 지도자의 발언 하나하나가 세계 경제를 술렁이게 한다. 하지만 리더십은 청중을 향해 크게 외치는 발언이 아니라 그 지도자의 작고 소소한 행동에서 드러난다. 그래서 더욱 푸사렐리 신부의 세심함이 유독 마음에 와닿았는지도 모른다.

발행일 2025-12-14 제3470호 23면

자선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내자

대림 제3주일이자 자선 주일을 맞아, 교회는 하느님 자비의 신비를 다시 마음 깊이 묵상하도록 우리를 부른다.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 조규만 (바실리오) 주교는 올해 자선 주일 담화에서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낮추어 우리에게 ‘밥’이 되어 주셨듯,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세상 안에서 자비의 표지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수님께서는 “자비로운 사람들은 자비를 입을 것”(마태 6,12 참조)이라고 선언하시며, 제자들에게 당신의 자비를 이웃에게 확장하라고 명하셨다. 이는 단순한 권고가 아니라 신앙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요구다. 그리스도인에게 자선은 선택적 선행이 아니라 성체성사에서 받은 사랑을 생활로 드러내는 성화(聖化)의 길이며, 교회가 세상 속에서 수행해야 할 사명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굶주림·고독·상실 속에 놓인 이들이 많다. 교회는 그들을 향한 하느님 연민의 시선을 가장 먼저 비춰야 한다. ‘밥이 된다’는 김수환 추기경의 말처럼 자선은 물질을 나누는 데 그치지 않고, 이웃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려는 영적 연대의 실천이다. 이는 교회가 하느님의 자비를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자리이며, 공동선을 향한 복음적 행위다. 교회는 누구도 홀로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고백하며, 모든 이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도록 서로를 책임지는 공동체적 사명을 지닌다. 그러므로 자선을 실천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사랑을 드러내는 교회의 본질적 임무이다. 대림 시기, 강생하신 주님의 자비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성찰하며, 이웃에게 그 사랑을 전하는 교회가 되도록 모든 신자가 자선활동에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발행일 2025-12-14 제3470호 23면

‘집’에 대하여

집은 상품이나 재화가 아니라 인간의 기본권인 ‘인권’이다. 이런 인식이 제도로 자리 잡은 것은 1900년 전후 유럽이었다. 자본주의의 발달과 도시화로 슬럼과 과밀주거가 확산하자 영국·프랑스·독일·네덜란드·오스트리아 등은 주택을 시장에만 맡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잇달아 ‘주택법’을 제정했다. 공공과 비영리 기관이 공공임대주택과 사회주택을 직접 공급하도록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임대료 상한과 세입자 보호 장치를 제도화했다. 주택법은 집을 ‘재화’가 아닌 ‘사회 인프라’로 올려 세운 출발선이었다. 그 결과 유럽 도시의 상당 부분은 사회주택과 공공임대로 채워졌다. 세계에서 가장 살고 싶은 도시로 늘 손꼽히는 오스트리아 빈의 시민 중에는 자가주택 거주자보다 임대주택 거주자가 훨씬 많다. 유럽의 대부분 임대주택은 사실상 평생 임대다. 세입자가 원하지 않는 한 쫓겨나지 않고, 임대료는 법으로 정해져 급등하지 않는다. 임대는 임시 거처가 아니라 정상적인 삶의 방식이며, 사회주택은 사회적 약자들만이 아닌 중산층까지 아우르는 보편적 주거 시스템이다. 우리 현실은 어떤가? 정반대다. 한국의 임대주택은 대부분 기한부 주거다. 민간 임대는 말할 것도 없고 공공임대도 대부분 5년, 10년으로 기한이 정해져 있다. 임대료는 시장 논리에 맡겨져 갱신 때마다 급등할 수 있다. 임대는 삶의 터전이 아니라 한시적 대기 공간이다. 불안하기 짝이 없는 위태로운 집이다. 이런 불안은 “영혼까지 끌어 빚을 내어 집을 사라”는 ‘영끌’과 “얼어 죽어도 신축”이어야 한다는 ‘얼죽신’이란 프레임을 낳았다. 집은 삶의 기반이 아니라 인생을 걸어야 할 투자 대상이 되었다. 역대 정부 정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예외 없이 ‘공급론’에 매달리며 ‘자가 보유율’로 성과를 평가했고, 임대는 소유 이전 단계로만 취급했다. 임대주택 수는 늘었지만, 비중은 여전히 한 자릿수에 머물러 있다. 임대를 안정적인 삶의 방식으로 만드는 데는 실패했다. 이제 목표를 바꿔야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집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사 걱정 없이 안심하고 오래 살 수 있는가?”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공공임대·사회주택 비율을 높이고, 단기 계약 중심의 임대차 제도를 장기 임대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 임대 주택을 공급하는 방식도 바꿔야 한다. 신도시와 대단위 재개발·재건축 등 ‘대규모 개발 방식’ 대신, 빈집·빈상가·빈사무실을 집으로 고쳐 쓰는 ‘소규모 재생방식’으로 임대주택을 확대해야 한다. 서울 SH공사가 추진했던 ‘연리지’와 ‘누리재’처럼 노후화된 저층주택을 공공에서 매입해 쾌적한 주택으로 갱신해, 원 거주자들은 거래 차액을 연금으로 받으며 새집에서 평생 살아가고, 추가된 주택을 청년과 신혼부부들에게 임대하는 좋은 대안이 많다. 주거정책은 인구·가족정책과도 결합해야 한다. 신혼부부에게 부담 없는 임대주택을 제공하고, 아이 수에 비례해 임대 기간과 평형을 10년씩, 10평씩 늘려주는 ‘다신공(다자녀 연계 신혼부부 공공임대주택)’ 같은 모델을 제도화해야 한다. 아이를 낳을수록 집 걱정이 줄어드는 구조가 만들어져야 저출생의 해법도 열린다. 전셋값이 오를까 밤잠을 설치는 청년과 신혼부부, 계약 만료 때마다 짐을 싸는 세입자들까지 집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의 절박한 주거 현실을 바라보며 가만히 묻게 된다. 청년 예수가 오늘 대한민국에 산다면 집을 가질 수 있었을까?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8)는 말씀처럼, 예수께서 지금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거처를 잃고 존엄이 흔들렸을지 모른다. 집은 소유의 성취가 아니라 함께 지켜야 할 인권이다. 집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생명이 태어나고 사랑이 자라는 존엄한 자궁이다. 집은 상품도 재화도 아닌 인간의 기본권 곧 인권이다. 집에 대하여 다시 묻는 것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응답해야 할 가장 절실한 신앙의 질문이다. ‘집’은 과연 무엇인가? 글 _ 정석 예로니모(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

발행일 2025-12-14 제3470호 23면

엄격함과 관대함 사이에서

작년에 큰애가 첫영성체를 했다. 미사 중 아이가 처음으로 성체를 받아 모시는 순간을 지켜보며 나는 거의 오열했다. ‘어흑! 이 장면을 위해 그 고생을 했단 말인가!’ 우리 본당은 첫영성체를 받기까지 과정이 까다로운 편이다. 해마다 조금씩 달라지긴 하지만 짧게는 5개월 길게는 8개월간 매주 어린이미사에 참례하는 것은 기본이고 새벽미사를 포함한 평일미사에 일정한 횟수 이상 참례하며 기도문을 외우고, 성경을 필사하고, 과제를 하고, 교리 시험을 치른다. 매년 30~40명 어린이가 첫영성체반에 들어오는데, 탈락하는 아이는 거의 없고 대부분 완주한다. 다른 지역의 주일학교 이야길 들으니 첫영성체 대상자가 한 명뿐이라 서너 번 정도 일대일 교리 수업을 한 후 온 교우의 환영 속에 첫영성체를 했다고 한다. 8개월 동안 숨 가쁜 과정을 거친 첫영성체와 단기간에 달성한 첫영성체, 그 둘은 은총의 크기가 다를까. 주일학교 교사를 하면서 자주 갈등한다. “성당에서까지 엄격할 필요가 있을까?”, “성당이라고 느슨해선 안 되잖아?” 결혼 전엔 괜히 엄격하고 융통성 없는 교사 시늉이었는데 결혼 후 아이들을 성당에 데리고 가려고 구슬리고 협박하는 학부모가 돼보니 교사로서 엄격해지기 어렵다. 다행인 건 내가 어떤 기준을 정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신부님이 회칙과 본당 사정에 근거해서 정한 기준을 따르면 된다. 다만 평교사가 할 수 있는 한에서 조금 유연성을 발휘한다. 주일학교에 등록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행사에 처음 온 어린이가 참여 의사를 밝혔을 때, 일단 행사에 참여하도록 하고 가급적 빨리 주일학교에 등록하도록 안내하는 식이다. 성당에 오는 아이가 갈수록 줄고 있는 시대에 등록을 했든 안 했든 행사에 참여하고, 첫영성체도 기준을 완화하는 것이 좀 더 보편교회다운 방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시대에 뒤떨어진 탓일까.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귀하게 여기기 어렵단 생각이다. 많이 내어놓은 만큼 많은 것을 얻는 건 당연한 이치다. 1을 내놓으면 고작 1을 얻지만 10을 내놓으면 무려 100을 얻기도 하는 게 삶 아니던가. 어쩌면 이것은 신앙의 신비를 깨닫지 못한 자의 어리석은 셈법일지도 모른다. 하느님은 아주 커다란 은총을 때론 아무 힘들이지 않고도 얻게 하신다. 나 역시 값없이 받은 은총으로 지금껏 살아오고 있다. 내년에 첫영성체 반에 들어가는 둘째는 엄마의 호들갑 때문에 다소 긴장한 상태다. 울상인 얼굴로, 지금도 성당에 자주 가는데 3학년이 되면 얼마나 자주 가는 거냐고 묻는다. 이번 주는 주님의 기도, 다음 주는 식사 후 기도를 외우자고 했더니 아이가 첫영성체를 꼭 해야 하냐고 반문한다. 아이는 앞으로 몇 번쯤 더 같은 말을 할 거다. 가뜩이나 잠이 많은 아이이니, 새벽 미사를 드리는 날엔 짜증을 내겠지. 그런 지난한 과정 끝에 마침내 처음으로 성체를 모시는 날, 나는 또 미사 중에 오열할 거다. ‘아직 막내가 남았다’ 하면서. 울 땐 울더라도 잊지 않으려 한다. 복음을 필사하고 기도문을 외우는 동안 이미 우리 일상의 무게중심이 주님에게로 기울어졌음을. 그분이 우리 삶에 깊이 관여하도록 스스로 몸을 낮추는 과정이었음을. 글 _ 정신후 블라시아(방송작가)

발행일 2025-12-14 제3470호 22면

‘국민주권’은 사회적 약자를 돌봄이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와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는 인권 주일 및 사회 교리 주간을 맞아 기념 세미나를 개최하고, 이른바 ‘국민주권 정부’의 국정 방향을 제안했다. 세미나에서는 전환기의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 과제를 점검하며, 국민주권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사람을 목적으로 하는 정책, 특히 사회적 약자에 대한 돌봄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위헌적 비상계엄 사태가 국민의 뜻에 의해 종식되는 과정을 겪으면서 국민주권의 의미와 소중함을 다시금 깨달았고, 새 정부 역시 스스로를 ‘국민주권 정부’로 선언했다. 이번 세미나는 국민이 주인인 나라에서 국가 정책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제시한 것으로, 그 핵심은 사회적 약자의 권리 보호를 최우선에 두어야 한다는 점이다. 세미나에서는 가장 취약한 계층의 현실과 그들을 어려운 처지로 내모는 불의한 사회 구조와 제약을 지적하고, 정부와 사회가 취해야 할 대처 방안을 제안했다. 여기에는 이주민·난민·장애인·비정규직 노동자·여성·청년뿐 아니라 교권을 잃어버린 교사, 의료 혜택에서 배제되는 소외계층 등 우리 사회의 모든 약자가 포함된다. 정부는 공동선을 향한 참된 정치를 통해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최우선으로 보호해야 한다. 교육·주거·돌봄 등 모든 이가 함께 누릴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고, 어떤 이도 배제되지 않도록 구조적 지원을 강화하는 것이 국가의 책무이다. 국민주권 실현의 최종적인 가늠자는 배제되는 이가 없이 모든 국민의 인간 존엄이 존중되는가에 달려 있다.

발행일 2025-12-14 제3470호 23면

[독자마당] 주님께 바치는 판공성사

나는 워낙에 머리가 나빠 계산이 빠르지 못했습니다. 산다는 것이 수학 문제를 풀어야 하는 숙제처럼 고민스러웠어요. 생각해 보니 머리 좋은 사람은 어렵지 않을 문제인데도 내겐 왜 그렇게 어렵게만 느껴졌는지, 머리가 나쁘긴 확실히 나쁘다는 걸 다시 인식합니다. 그러다가 남편이 파킨슨을 데리고 오면서 그만 수렁에 빠지고 말았지요. 마치 네 살 먹은 장애아처럼 느껴졌어요. 그렇게 십여 년이 넘게 살았습니다. 간단한 문제 앞에서도, 기쁨조차도, 즐거움조차도 그의 아픔의 반을 나눠 지고 살았습니다. 칠십 년을 넘게 살아온 내 등도 척추관 협착증으로 휘어져 있는데 그 무게가 참 많이 무거웠습니다. 어느 순간 죽음을 붙잡고 씨름하는 내가 보였습니다. 샅바를 잡고 넘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면서 쓰러지면 죽겠다는 절망감이 보였습니다. 고통스러울 남편보다 내가 먼저 더 걱정스러운 극히 이기적인 인간의 속성이 가소롭기도 해서 그것이 또한 괴로웠습니다. 두 개의 콧구멍에 산소와 유동식 줄을 꽂고 그 줄을 뽑을까 봐 두 손이 묶인 채 살아가는 남편의 모습을 마주하는 일은 제겐 고문이었어요. 맥없이 시간을 보낼 수 없는 조급함을 다스리려 톨스토이의 중편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으며, 일리치가 오랜 고통 끝에 ‘죽음은 빛이다’라고 깨달았던 처절한 앎이 내게 화살처럼 와서 박혔습니다. 그러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됐고 이별이 왔습니다. 슬픔보다 자유를 느꼈습니다. 긴 터널 속에서 빠져나와 햇빛 쨍한 산과 들이 눈앞에 아름다웠습니다. 이반 일리치에게 빛이어야 할 죽음이 산 자에게도 빛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절박한 순간에 왜 나는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교만한 마음이 아니었는지 주님 앞에 앉아 통회합니다. 그러면서도 이 평온함은 숨길 수 없는 진실입니다. 그것이 죄라면 주님, 용서하여 주십시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짧은 내 인생. 이젠 구구단 외우듯이 쉽게, 진지하지 않게, 그동안 참았던 웃음보따리 풀어 맘껏 웃으면서 미쁘게 살다 가렵니다. 당신께서 용서해 주신다면. 글 _ 김정희 가타리나(수원교구 죽전1동본당)

발행일 2025-12-14 제3470호 22면

보편적 형제애로 이주민 감싸안자

오늘은 대림 제2주일이자 제44회 인권 주일이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장 김선태 주교는 올해 인권 주일 담화에서 우리 사회 곳곳에서 확산하고 있는 혐오의 현실을 날카롭게 짚어냈다. 특히 이주민 혐오는 두려움과 불안에서 비롯된다는 지적처럼, 경쟁과 배제의 논리가 팽배한 우리 사회에서 타인을 향한 연대성은 급격히 약화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교회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모든 이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행동해 왔다. 최근 대전교구 이주사목부 천안 모이세가 마련한 ‘국악과 함께하는 대림 특강’, 서울대교구 이주사목위원회가 추진하는 ‘희망 날개’ 사업 등은 교회 공동체가 펼치는 중요한 연대의 실천이다. 제주교구 이주사목위원회 나오미센터와 주변 신자들의 도움으로 제주에서 둥지를 내리고 있는 나디아 씨 오 남매의 사례에서 보듯,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든 이를 보듬을 수 있다. 이주민 혐오는 결코 개인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거짓 정보와 집단적 불안이 뒤섞일 때 혐오는 사회를 병들게 하고 약자를 공격하는 힘으로 변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두려움의 벽을 허물고 ‘공감의 영역’을 넓히는 데 앞장서야 한다. 낯선 이와 인격적으로 마주하고, 허위와 편견에 저항하며, 공동선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오늘 그리스도인이 져야 할 책임이다. 우리가 혐오해야 할 대상은 인간이 아니라 악이다. 이주민과 난민, 사회적 약자를 향한 배척을 멈추고, 우리 안에 오신 아기 예수의 마음으로 보편적 형제애를 선택하자. 교회가 걸어온 이 연대의 실천에 모든 신자가 함께 나설 때 인권 주일의 외침은 우리의 삶 안에서 열매 맺을 것이다.

발행일 2025-12-07 제3469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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