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문학의 거장 엔도 슈사쿠(1923~1996, 바오로)의 소설 「침묵」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로마 교황청에 한 가지 보고가 들어왔다. 포르투갈의 예수회에서 일본에 파견한 크리스토발 페레이라 신부가 나가사키(長崎)에서 ‘구멍 매달기’ 고문을 받고 배교(背敎)를 맹세했다는 것이다.”
페레이라 신부는 일본에서 33년 동안 체류한 일본 교회의 총책임자였다. 그의 제자인 세바스티앙 로드리고 신부는 큰 충격에 빠졌다. 그는 일본인 젊은이 기치지로를 만나 우여곡절 끝에 일본에 입국하게 된다. 로드리고는 신자들의 환영을 받고 사목활동을 이어가지만, 결국 나가사키로 쫓겨 가는 신세가 된다.
이후 로드리고 신부는 기치지로의 배신으로 관가에 붙잡히고, 수많은 신자가 고문을 당한 뒤 바다에 던져져 순교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힘없이 죽어가는 신자들을 바라보며 로드리고 신부는 하느님의 침묵에 점점 믿음을 잃어간다.
그는 배교한 자신의 스승을 직접 보게 되고, 더욱 혼란에 빠진다. 로드리고 신부도 후미에(예수나 성모 마리아 모습을 새긴 목판이나 금속판)를 밟게 된다. 후미에는 일본 내 기리시탄(가톨릭신자)을 색출하고 박해하기 위해 사용했던 도구였다.
그가 동판에 발을 올리자 예수님의 음성이 들린다.
“밟아라, 성화를 밟아라.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존재하느니라. 밟는 너의 발이 아플 것이니 그 아픔만으로 충분하리라.”
그제야 로드리고 신부는 하느님이 침묵하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 자신들과 함께 고통을 받고 계셨음을 깨닫는다.
엔도 슈사쿠는 평소 강연에서 자주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순교자를 존경하지만, 배교한 사람들을 경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럴 자격이 우리에겐 없습니다. 우리도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신약성경에 따르면, 그리스도교 최초의 순교자는 스테파노 부제였다. 그는 돌에 맞아 순교했다. 초대교회에는 예수님의 사도들 외에도 처음으로 일곱 명의 부제를 선출했다. 신자 수가 늘어나자, 사도들이 선교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신심 깊은 신자 중 일곱 명을 뽑아 부제로 세우고, 음식 분배와 재정 등을 담당하게 했다.
스테파노 부제는 사도들에게 안수를 받고, 하느님의 은총과 성령의 힘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기적을 행했다. 그러나 모세와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거짓 고발과 위증으로 체포되어, 의회에서 심문을 받은 후 성 밖으로 끌려 나가 돌에 맞아 순교했다.
그가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오른편에 ‘사람의 아들’이 서 계신 것을 보았다고 외치자, 군중은 더욱 격분해 그를 돌로 치기 시작했다. 스테파노는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사도 7,59)라고 기도하였다. 이어 더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60)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성 스테파노의 유해는 415년경 예루살렘 근처에서 발견되어 스페인, 아프리카, 콘스탄티노폴리스, 로마 등지로 나뉘어 전해졌다. 유해가 안치된 기념성당들에서는 많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전해진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