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끊임없이 기도하라!(하)

이주연
입력일 2025-06-18 08:47:50 수정일 2025-06-18 08:47:50 발행일 2025-06-22 제 3447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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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사랑한다면 끊임없이 대화할 것
겸손·감사·인내의 자세 강조···사랑 실천할 때 기도 완성돼

지난 호에서는, 끊임없는 기도를 위한 사막 교부의 수행을 살펴보았다. 그 핵심은 하느님 기억을 간직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한 실천적 방법이 ‘멜레테’(되새김) 수행이었다. 이번 호는 기도 자체에 대한 그들의 가르침을 볼 것이다. 기도는 관상생활의 핵심 내용이다. 악습과의 싸움을 통해 마음을 순수하게 정화하고 내적 평정심을 얻은 수행자는 하느님과의 친교와 일치를 목표로 하는 관생생활로 들어선다. 관상가가 된 그는 이제 마음 안에서의 순수한 기도를 통해 본격적으로 하느님과의 일치와 친교로 나아간다. 기도에 대한 교부의 이해는 우리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것이다.

하느님과의 대화

수도승들은 한때 기도를 학문 중의 학문인 ‘거룩한 철학’이라고 불렀다. 철학은 언제나 궁극적 토대와 모든 실재의 존재 이유를 추구하였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궁극적 토대는 하느님이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초월적이자 동시에 인격적인 분이다. 따라서 그분께 다가감은 대화를 전제한다. 기도는 바로 하느님과의 대화다. 이 정의는 동방 그리스 교부들에게서 나왔는데, 특히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와 에바그리우스가 기도를 하느님과의 대화로 정의했다.

교부들은 신학자와 기도의 관계를 말하며,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에바그리우스는 말한다. “그대가 신학자라면 그대는 참으로 기도할 것이다, 그대가 기도한다면 그대는 진정 신학자다.”(기도론 60) 고대에는 신학자란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과 대화하는 관상가를 뜻했다. 따라서 진정한 신학자란 하느님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생각하고 하느님과 대화(기도)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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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기도할 것을 강조하며, 하느님 섭리에 모든 것을 맡기는 자세로 그분의 뜻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고 말한다. 11세기 「바실리오스 2세의 메놀로기온」 삽화 <비티니아의 성 벤디미아노스가 동굴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 위키미디어

대화의 본질

대화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할 때, 우리는 기도의 본질에 더 깊이 다가가게 될 것이다. 대화를 ‘말을 주고받는 것’이라 여기는 우리의 이해가 참된 대화를 가로막는다. 우리의 관심과 초점은 말을 주는 데 있기에, 각자 상대에게 자기 생각이나 관점을 주입하거나 자기 의견을 관철하려 한다. 그러다 보니 남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다.

하느님과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자기 말만 늘어놓고, 하느님 말씀을 경청하려 하지 않는다. 말씀을 통해서 나를 위한 하느님의 계획이나 뜻을 파악하지 못한다. 참된 대화는 ‘말을 받고 주는 것’이다. 먼저 듣고 응답하는 것이다. 대화는 ‘들음’과 ‘응답’으로 되어 있다. 하느님과의 대화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먼저 하느님 말씀에 대한 경청이다. 그리고 경청한 말씀에 대한 응답이다. 우리의 응답은 우리가 경청한 말씀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일상에서 실천함으로써 완성된다. 하느님 말씀의 핵심은 사랑이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할 때, 기도는 완성되고 우리 삶이 곧 기도가 될 것이다.

기도의 방법

사막 교부들은 기도에서 단순성을 강조한다. 기도는 짧고 단순해야 한다는 것이다. 압바 마카리우스는 말한다. “빈말을 늘어놓을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손을 펼치고 이렇게 말씀드리십시오. ‘주님,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또 당신께서 아시는 대로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유혹이 다가오면, ‘주님, 도와주십시오’라고 말씀드리십시오. 그분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아시고 우리에게 당신 자비를 베푸실 것입니다.”(마카리우스 19) 에바그리우스는 “기도의 탁월성은 단순히 그 양에 있지 않고 질에 있다. 이것은 성전에 들어간 두 사람을 통해 입증된다”(기도론 151)고 말한다. 

요한 클리마쿠스도 이렇게 권고한다. “단순하게 기도하십시오. 세리와 탕자는 간단한 기도로 하느님께 호의를 구했습니다. … 기도할 때 말을 세세히 고르려 애쓰지 마십시오. 어린아이의 단순하고 꾸밈없는 재잘거림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마음을 달랩니다. 그대는 많은 말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걱정은 정신을 분산시킵니다. 세리는 한마디 말로 주님을 달랬고, 믿음에서 나온 한마디가 강도를 구원했습니다. 많은 말은 정신을 망상으로 가득 채워 기도 중에 주의를 흩뜨립니다. 한마디 말이 정신을 집중하게 해줍니다.”(천국의 사다리 28,188.189)

교부들은 기도의 순수성도 강조한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거래가 아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순수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 섭리에 모든 것을 맡기는 자세로 그분의 뜻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성모님의 기도, ‘당신 뜻이 제게 이루어지소서!’(fiat voluntas tua)는 가장 성숙하고 이상적인 기도다. 기도는 우리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도구로 당신의 뜻을 이루시도록 우리 자신을 비우는 것이다.

기도의 자세

기도의 첫 자세는 겸손이다. 겸손은 복음 속 세리의 자세로, 기도의 토대다.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 안에서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을 추구함으로써 자아에 대한 추구를 포기하는 것이다. 또 다른 자세는 감사다. 기도는 먼저 우리가 받은 은총에 대한 감사의 응답이다. 끝으로 인내다. 안키라의 닐루스는 “인내심을 가지고 지혜롭게 견딜 줄 안다면 기도에서 열매를 얻을 것입니다.”(닐루스 5)라고 말한다. 

클리마쿠스의 다음 말은 울림을 준다. “그대가 오랫동안 기도하며 청했던 것을 받지 못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대는 영적으로 이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과 결합해 있을 수 있고, 그분과 부단한 일치를 지속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지고한 선이 어디 있겠습니까?”(천국의 사다리 28,191)

기도는 우리의 영적 진보 상태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기도를 사랑할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강렬할수록 우리 마음은 하느님과의 대화로 이끌릴 것이다. 기도는 사랑을 바탕으로 한다. 그래서 지속성을 띤다. 누가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면 특정한 때만이 아니라 항상 사랑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낮이나 밤이나, 심지어 잠잘 때조차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고 그와 대화를 이어갈 것이다. 

끊임없는 기도는 결국 우리가 하느님 사랑으로 나아갈 때 실현 가능할 것이다. 그 길은 항상 하느님 기억을 유지하고 그분 현존을 의식하며 살려 노력하는 것이다. 또한 일상에서 그분의 뜻, 곧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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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대구대교구 왜관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