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만테의 돔 수용하면서도 ‘라틴 십자가’로 전환 시도
4세기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바실리카 양식으로 건립된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은 서로마제국의 멸망(476년)으로 로마가 역사적 난관을 맞이했을 때도 베드로 사도의 무덤이 있는 순례 성당으로 굳건히 자리를 지켜왔습니다.
그렇게 중세 천년의 세월도 견뎌온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은 15세기에 이르러 니콜라오 5세 교황(1447~1455 재위)의 지시로 베르나르도 로셀리노가 제단과 성가대석의 공간을 확장하는 계획을 시행하였습니다. 이후 바오로 2세 교황(1464~1471 재위) 때, 줄리아노 다 상갈로(Giuliano da Sangallo, 1445~1516)가 성 베드로 대성당의 공사를 일부 진행하였습니다.
16세기에 들어 율리오 2세 교황(1503~1513 재위)은 선대 교황이 시작한 확장 및 보수 공사를 이어 나가려고 하였지만 브라만테,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 거장들의 조언으로 르네상스 양식의 새로운 대성당을 건립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리고 1506년 새로운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가 브라만테의 설계로 시작되었으나, 1513년 율리오 2세 교황의 선종과 이듬해 브라만테의 사망으로 돔을 떠받치는 네 개의 거대 기둥을 위한 기초를 놓는 작업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1514년 브라만테의 후계자로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 1483~1520)와 줄리아노 다 상갈로가 대성당 공사를 이어받았습니다. 줄리아노 다 상갈로는 새로운 대성당 계획의 초기 단계부터 브라만테에게 영향을 주었고, 브라만테 사후에 대성당 공사의 총괄 책임자로 있었지만, 특별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피렌체로 귀향했습니다. 이제 성 베드로 대성당의 공사는 온전히 라파엘로에게 맡겨졌습니다.
건축가로서 라파엘로는 고대 로마의 고전을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물에 구현한 브라만테와 줄리아노 다 상갈로의 영향을 받았는데, 브라만테와 함께 산텔리지오 델리 오레피치 성당(Chiesa di Sant'Eligio degli Orefici)을 설계했습니다. 하지만 라파엘로가 새로운 성 베드로 대성당의 총괄 책임을 맡았을 때, 그는 많은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파엘로는 비트루비우스의 「건축론」(De Architectura) 연구를 통해 고대 로마의 건축에 필적하는 대성당을 지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라파엘로의 대성당 설계는 단계적인 몇 개의 계획안에 담겨있습니다. 1514년 브라만테 사후에 곧이어 설계한 초안이 있고, 1515~1518년의 멜론 본(Codice Mellon), 그리고 라파엘로의 설계라고 일컬어지는 1519~1520년에 계획한 최종안이 있습니다. 하지만 레오 10세 교황은 대성당 건설에 적극적이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게다가 로마 교회를 둘러싼 시대 상황도 녹록하지 않아서 라파엘로의 계획안은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라파엘로의 대성당 설계 최종안을 보면, 브라만테의 중앙집중형 계획과 다르게 라틴 크로스의 선형 평면을 취하고 있습니다. 3랑식 평면에서 네이브는 다섯 베이로 되어있으며 양측에 아일이 있고 네이브와 아일 사이에 거대한 기둥이 세워져 있습니다. 라파엘로가 라틴 크로스 평면을 선택한 것은 신자들을 위한 공간이 충분히 확보되어야 한다는 교회의 요구에 의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트란셉트와 앱스의 삼엽형 반원형 공간은 라틴 크로스의 선형성을 줄이고 평면의 중앙집중성을 보여줍니다. 또한 네이브와 아일과 경당으로 이어지는 세 겹의 공간 역시 선형성을 약화시키고 있는데, 이는 알베르티가 산탄드레아 성당에서 시도한 방식입니다. 이는 라파엘로의 평면이 라틴 크로스 형태라고는 하지만 그 역시 그릭 크로스의 평면을 선호하는 르네상스의 경향을 거스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라파엘로는 네이브와 아일 사이에 두꺼운 벽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상부의 하중을 견디기 위한 거대한 벽기둥과 같은 두께의 벽 공간으로, 아일 바깥쪽에 있는 경당과 경당 사이의 벽기둥도 같은 형태를 보입니다. 크로싱에는 브라만테가 설계한 돔을 받치기 위해 모든 구조물을 내력벽체로 구성하였는데, 이는 라파엘로가 브라만테의 돔을 그대로 수용하려고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라파엘로는 서른일곱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갑자기 사망하였고, 그의 대성당 계획도 함께 멈추었습니다.
이어서 1527년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가 로마를 공격하여 약탈하고 클레멘스 7세 교황이 산탄젤로성으로 피신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대성당 공사는 다시 중단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오로 3세 교황 때인 1538년, 브라만테가 만든 로마의 건축 공방 출신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바네(Antonio da Sangallo il Giovane, 1484~1546)가 대성당 공사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고, 부서진 대성당의 보수 공사를 이어갔습니다.
그는 브라만테가 놓은 기초를 바탕으로 돔과 기둥의 형태를 새롭게 설계했는데 그것을 담은 판화가 남아 있습니다. 또한 상갈로는 고령으로 인해 자신이 공사를 마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설계에 따라 대성당이 건설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목재로 대성당의 모형을 만들었으며, 지금도 성 베드로 대성당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상갈로의 평면 계획은 브라만테의 그릭 크로스 평면과 라파엘로의 라틴 크로스 평면을 결합한 것으로 보입니다. 상갈로의 설계에도 중앙에 대형 돔이 있는데 브라만테가 설계한 로마 고전의 돔 형태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그의 돔은 브라만테의 돔보다 구조와 장식 면에서 매우 정교한데, 아케이드로 구성된 2단의 원통형 구조물 위에 반구형 돔이 리브와 함께 있고, 그 위에 매우 커다란 랜턴이 올려져 있는 모습입니다.
파사드 양쪽에는 높은 종탑이 있는데, 입면 상 이 종탑은 중앙의 돔에 대한 집중성을 흩어 놓고 있습니다. 또한 파사드는 평면의 구성에 따라 수직으로 다섯 등분되고, 양쪽 탑은 십여 층, 중앙 돔은 여섯 층, 그 아래는 다섯 층으로 수평 분할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페디먼트의 신전 파사드가 수평 분할의 중간층에 삽입되어 있습니다. 상갈로의 평면과 입면 계획은 그의 사후 미켈란젤로에 의해서 파기되었는데, 미켈란젤로는 그의 평면을 비판적으로 평가했습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