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둥과 아치의 조화로 르네상스 건축 ‘상징주의’ 극대화 1500년경 브라만테가 회랑 설계…1·2층 다르지만 서로 융합돼
도나토 브라만테는 밀라노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교류하면서 밀라노의 공작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전속 건축가로 일하였습니다. 이 당시 유럽의 강대국들은 이탈리아를 지배하기 위해서 수차례 전쟁을 벌였습니다. 1499년 프랑스 왕 루이 12세가 밀라노를 침공하여 점령하였을때 레오나르도는 잠시 피신하였다가 밀라노에 다시 돌아와 프랑스 왕과 일했지만, 브라만테는 밀라노를 떠나 로마로 갔습니다.
로마에 왔을 때 이미 50대 중반이었던 브라만테는 생을 마칠 때까지 14년간 로마에서 활동하였습니다. 그중 교황 율리오 2세를 만나기 전인 처음 3년에서 4년 동안 그는 로마에 성당 두 곳을 지었습니다. 먼저 1500년에 산타 마리아 델라 파체 성당(Chiesa di Santa Maria della Pace)의 회랑을 지었고, 이어서 1502년에 몬토리오의 산 피에트로 템피에토(Tempietto di San Pietro in Montorio) 공사를 시작하였습니다.
로마는 건축 분야에서 고대로부터 항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지만, 르네상스 건축이 피렌체에서 피어오르면서 15세기까지 르네상스 건축의 중심은 피렌체였습니다. 하지만 15세기 후반 교황 식스토 4세(1471~1484 재위)의 선출로 피렌체를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던 메디치가는 위기를 맞이하였고, 결국 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의 사망으로 피렌체는 정치와 외교에서 힘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6세기 율리오 2세(1503~1513 재위)가 교황이 되었을 때 정치와 예술의 중심은 로마로 옮겨졌습니다.
건축 분야에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15세기 피렌체의 건축가 브루넬레스키와 알베르티는 고대 로마의 건축을 배우기 위해서 로마에 갔지만, 결국 그들이 작품 활동을 한 곳은 르네상스의 중심인 피렌체였습니다. 하지만 16세기의 건축가 브라만테와 라파엘로 그리고 미켈란젤로에게 로마는 건축의 고전을 배울 수 있는 장소를 넘어 그들의 삶과 활동의 무대였습니다. 16세기 르네상스 건축의 중심지는 확실히 로마였습니다.
브라만테가 로마에 와서 처음 수주한 공사는 나보나 광장 근처 산타 마리아 델라 파체 성당의 ‘회랑’이었습니다. 교황 식스토 4세는 피렌체의 메디치가와 파치가의 충돌이 전쟁으로 확대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평화의 성모 마리아께 성당을 봉헌하기로 결심하고, 1482년에 공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1500년에 이 성당의 회랑 공사가 계획되어, 밀라노의 산탐브로조 성당 회랑을 설계한 브라만테에게 공사가 맡겨졌습니다.
이 회랑은 회랑의 폭을 한 변으로 하는 정사각형의 모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회랑의 기둥들 역시 회랑의 폭과 같은 간격으로 배치되어 16개의 기둥이 정사각형의 회랑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둥들로 둘러싸인 정사각형의 마당은 한 변이 4개의 모듈에 해당하기에 마당의 크기는 4x4, 곧 16개의 정사각형 모듈이 됩니다.
브라만테가 밀라노에서 실험한 오더를 통한 상징주의는 이 성당에서 큰 발전을 보입니다. 1층에는 벽체와 벽기둥이 함께 나타나는데, 연속되는 아치를 토스카나식 사각기둥이 받치고 거기에 이오니아식 벽기둥이 더해진 형태입니다. 그리고 2층은 벽기둥과 콤포지트식 원형 기둥이 교대로 구성되었습니다. 구조적인 면에서 1층과 2층은 서로 다르면서도 융합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먼저 1층은 벽체 구조로 볼 수 있는데 여기에 이오니아식 벽기둥이 첨가되어 2층의 오더 구조와 연결되고 있으며, 2층은 오더 구조이지만 코너에 벽기둥을 사용하여 1층의 벽체 구조와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브라만테의 이 회랑에서 특이한 점은 1층의 아치 상부 한가운데에 독립 원형 기둥이 놓여있는 점입니다. 당시 고전주의 건축의 규범에 의하면, 아치로 되어 있는 빈 공간 위에는 빈 공간이 오는 것이 맞는데, 이 회랑은 그것에 어긋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존 건물과 이어지는 회랑이기에 회랑의 1층과 2층 높이는 정해져 있었고, 따라서 2층이 1층처럼 아치를 가질 수 없었기에, 상부의 엔태블러처를 지지하기 위해서 중간에 원형 기둥을 설치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브라만테가 로마에 도착하여 지은 건물 중에서 성당이 아닌 주거용 팔라초가 한 채 있습니다. 1502년 착공한 이 건물은 사도좌 공증인(Protonotario Apostolico) 아드리아노 데 카프리니스를 위해 지어졌기에 ‘팔라초 카프리니’(Palazzo Caprini)라고 불렸고, 라파엘로가 1517년에 구입하여 1520년에 죽을 때까지 살았기에 ‘라파엘로의 집’(Casa di Raffaello)이라고도 불렸습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성 베드로 대성당 광장에 이르는 길인 ‘비아 델라 콘칠리아치오네’(Via della Conciliazione)의 건설로 단지 전체가 헐리어 현재는 이 건물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단지 안토니오 라프레리의 판화와 팔라디오의 드로잉으로 팔라초 카프리니의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팔라초는 두 개의 층과 다섯 개의 베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층(지상층)의 벽은 울퉁불퉁하게 표면을 처리하고, 2층의 벽은 상대적으로 평평하게 처리함으로써 건물이 구조 면에서 안정적으로 설계되었습니다. 1층의 출입문들은 상부에 아치가 있으며 양 끝에는 중간에 아치를 한 번 더 설치하였습니다. 1층은 로마 고전에 기초하고 있는데 지상층에 가게를 두고 상부층에 주거 공간을 두었던 고대 로마의 공동주택인 ‘인술라’(insula)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따라서 2층에는 전통적인 팔라초에서 볼 수 있는 ‘피아노 노빌레’(귀족의 층: 건물에서 가장 중요한 2층)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키트레이브(기둥 위에 수평으로 얹힌 부분)와 프리즈(아키트레이브 위의 장식이 들어가는 부분)를 받치는 쌍으로 되어 있는 도리스식 원형 벽기둥이 다섯 베이를 정확히 구분하여 공간의 차별 없이 세워져 있습니다. 2층에는 발코니가 있으며 창의 상부는 삼각형 페디먼트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대칭과 반복, 기능 등의 원리는 브라만테의 팔라초에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브라만테의 팔라초 카프리니는 15세기 피렌체식 팔라초와 구별되면서 16세기를 대표하는 로마식 팔라초가 되었으며 이후 이탈리아 팔라초의 주류 양식이 되었습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