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하느님에 대한 직관에서 이루어지는 진정한 행복

이승훈
입력일 2025-05-28 09:06:39 수정일 2025-05-28 09:06:39 발행일 2025-06-01 제 3444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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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여정은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 나아가는 과정
‘지복직관’은 인간의 최종 목적
하느님의 본질 직관함으로써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어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세상에 있는 창조된 선 안에서는 참된 행복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양한 이유를 들어 밝혔다. 이어 그는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우주의 근거이며 스스로 최고의 무한한 선인 하느님의 본질을 직관함으로써만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I-II,4,4) 그리스도교 전통은 인간의 지극(至極)한 행복(幸福)이 하느님의 본질을 직관(直觀)하는 데 있다는 의미에서 이를 ‘지복직관’(至福直觀, visio beatifica)이라고 불러왔다. 매우 추상적으로 들리는 이 개념은 정확하게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토마스는 「신학대전」에서 세 문제(I-II,qq.3-5)에 걸쳐 이 개념을 상세히 설명한다.

자연적 인식과 사랑에 의해서 지복직관이라는 궁극적인 선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오직 이성적인 피조물뿐이다. 따라서 지복직관이야말로 인간이 창조된 목적이기도 하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은 “무엇 때문에 사는지 모르고 있다면, 그것은 어디로 가는 기차인지도 모르고 남이 타니까 덩달아 자기도 타고 가는 사람과 같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최종적인 진리, 즉 제1원인의 본질을 알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토마스는 이를 더욱 발전시켜 인간이 지상에서의 여행을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는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분의 본질을 직관하는 일이라고 분명하게 밝혔다.(I-II,3,8)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이 이 세상에서의 인간적 행위에 대한 윤리학이었다면, 토마스는 내세에서만 얻을 수 있는 진정한 행복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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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우주의 근거이며 스스로 최고의 무한한 선인 하느님의 본질을 직관함으로써만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구스타브 도레, <천국을 바라보는 단체와 베아트리체> 「신곡」에 판화, 1892년. 출처 위키미디어

의지를 강조한 아우구스티누스와 대비되는 토마스의 지성 강조

우리는 이러한 토마스의 결론을 보면서, ‘하느님을 소유할 때에만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지닌 자유의지를 통해 자연사물을 향유하느냐, 아니면 하느님을 향유하느냐 하는 태도에 따라 행복이 결정된다.(「신국론」 8,8) 두 성인의 가르침에 차이가 있다면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라는 의지를 강조한 아우구스티누스와 달리 토마스는 그 지성적인 인식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토마스는 더 나아가 인간의 참행복은 실천적 지성의 작용보다는 사변적 지성의 작용, 하느님에 대한 관상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많은 일에 사로잡히는 실천적 삶보다는 진리를 관상하는 삶이 더 행복하다.(I-II,3,2,ad4) 이러한 관상이야말로 가장 고상한 인간적 행위이며, 이는 다른 것들보다 그 자체로 갈망되기 때문이다.(I-II, q.3, a.5) 

그런데 토마스에 따르면, 현세에서는 신앙이 있든 없든 완전한 행복이 없다. 인간 인식이 육체적 역량에 본질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현세의 조건 아래에서는 신적 본질 직관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I,12,11) 토마스는 이를 올빼미나 박쥐가 너무도 밝은 태양을 뚜렷이 보지 못하는 것에 비유한다. 마찬가지로 현세의 인간도 본성만으로는 진리의 근본인 신적 본질을 온전히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삶이 끝난 뒤에야 우리 자신의 참된 행복에 이를 수 있다.”

지복직관이 지닌 중요한 특성들

어렸을 때부터 교리를 통해서 내세에 얻게 될 ‘지복직관’이란 개념을 배운 신자들에게도 이 개념은 너무 추상적이어서 멀게만 느껴진다. 도대체 지복직관은 어떤 구체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토마스에 따르면, 참행복이란 완전한 상태이므로 그 상태에서 모든 행위와 욕구는 정지되며 획득한 선을 지속적으로 소유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천상에서의 참된 행복은 결코 상실되지 않아야 한다. 지복직관에 도달하게 되면 의지는 적절한 질서를 가지게 됨으로써 어떠한 잘못도 불가능하게 된다. 외부적 요인도 지복직관을 위협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악을 배제하는 셈이고, 따라서 그것을 상실할 두려움까지도 사라지게 된다.(I-II,5,4)  

그런데 인간은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하느님의 본질을 볼 수 없으므로, 지복직관에 이르기 위해서는 초자연적인 은총과 도움이 필요하다.(I-II,5,6,ad1) 인간의 자연적 본성만으로도 불완전한 행복을 가질 수 있지만, 완전한 행복에 도달하는 데는 하느님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지복직관’이라는 진정한 행복은 인간의 성취로서가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약속으로만 나타날 뿐이다. 

세상의 선은 진정한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

하느님은 홀로 인간의 의지와 지성이 지복직관에 이를 수 있게 할 수 있지만, 각 개인의 선행과 공로를 통해서 이를 추구하기를 원하신다.(I-II,5,7) 현세의 삶에서 하느님을 사랑했던 의지는 궁극적 단계에서의 ‘즐거움’으로 보상받게 된다.(I-II,4,1,ad1) 이런 의미에서 인간이 얻게 되는 지복직관이라는 참행복은 “덕스러운 행위들에 대한 포상”(I-II,5,7)인 셈이다. 

비록 불완전한 행복을 주는 ‘세상의 선’은 필연적인 것이 아닐지라도 진정한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의 삶에서도 우리는 가장 좋은 것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토마스에 따르면, 우리가 이제까지 고찰해 온 외적인 선(재물, 명예, 권력 등)이나 육체와 영혼의 선들이라도 이를 올바로 추구한다면, 내세에서의 완전한 “행복으로 향하는 원동력”(I-II,5,8,ad3)이자 이를 누리기 위한 준비가 될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이 지닌 자연적 역량과 도달해야 하는 진정한 행복 사이의 차이는 ‘공로’(meritum)의 성격을 가지는 행위들을 통해서 극복되어야 한다.

현세에서 ‘나그네’(viator)로서 살아가는 인간이 걷는 여정은 끝없는 방황으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영원으로부터 그를 위해 마련하신 초자연적인 목적인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지복직관’이 인간의 최종 목적이라고 해도, 짐승들이 자연법칙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이, 인간도 이를 향해 달려가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지복직관이란 목적지를 향해 끝까지 여행할지, 또는 도중에 있는 역에서 머물러 이를 포기할지는 인간의 의지와 자유에 달려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의지와 자유를 어떻게 사용할 때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을까? 이어지는 논의들을 통해 진정한 행복에 다가가는 방법들에 대해서 본격적인 성찰을 시작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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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