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일 주교의 생명과 평화] 히로시마 상념(상)

한국과 일본 주교단은 1996년 이후 공통의 역사 인식과 협력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거의 해마다 각 교구를 방문하며 상대국 문화와 교회 사목 현황에 대한 이해를 심화해 왔다. 한국 주교단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도 방문한 적이 있다. 나는 옛날부터 가까이 지내던 지인들도 있어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두 도시를 여러 차례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기념관도 몇 차례 관람했다. 두 도시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원자탄에 모든 생명체와 건축물이 순식간에 잿더미가 된 비극의 현장이다. 1945년 8월 6일 10만여 명의 히로시마 시민들이, 8월 9일에는 7만여 명의 나가사키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나는 피폭 생존자들의 증언도 듣고 원폭 투하의 결과가 얼마나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과 참극을 불러온 것인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다. 내가 만난 히로시마 시민들은 참극을 직접 온몸으로 겪은 당사자나 그 후손들로서, 핵폭탄의 공포와 고통을 절감한 사람들이었다. 1945년 日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경험한 세계 유일의 도시 모든 생명과 건축물 잿더미 되고 각각 10만과 7만 시민 목숨 잃어 그들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원폭을 경험한 세대로 인류에게 평화의 소중함을 알리고 전할 소명이 있음을 확신하고 기회 있을 때마다 평화를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히로시마 시민들이 평화의 소중함을 절감하고 세계에 평화를 호소하는 심정은 수긍하면서도 ‘왜 자신들이 입은 피해만 생각하고 아시아 대륙의 수많은 시민에게 일본이 입힌 가해 책임에 대한 성찰과 사죄는 못 하는가?’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전쟁 중 히로시마에는 아시아 대륙을 향한 전쟁의 전초기지와 군부대가 있었고, 나가사키에는 무기와 군함을 건조하는 항만 시설들이 있었다. 미군에게는 당연히 이 두 도시가 다른 어느 지역보다 폭격의 최우선 대상이었다. 나는 히로시마 시민들 안에 일본이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먼저 군대를 파견하고 전쟁을 시작한 근원적 책임 의식과 회심이 느껴지지 않아 마음에 안타까움과 서운함이 가시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최근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씨가 쓴 「히로시마 노트」라는 저서를 읽으며 히로시마 시민들의 원폭 피폭에 대해 새로운 전망을 갖게 됐다. 어찌 보면 그 전의 나의 히로시마 인식은 주로 원폭이 폭발한 당일과 며칠간에 국한되어 있었다. 요즘 우크라이나에서, 또는 가자 지구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있는가를 각종 보도에서 보고 가슴 아파하고 안타까워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히로시마 노트」를 읽고 난 다음 나는 그동안 핵폭발이 가져온 참상의 지극히 작은 부분만을 접하고 있었음을 새롭게 인식하게 됐다. 오에씨의 「히로시마 노트」는 1965년 4월에 쓰였다. 원폭이 폭발한 지 20년이 지난 다음이다. 오에씨 본인은 히로시마에서 거리가 먼 에히메현에서 태어난 타지역 사람으로, 히로시마 시민들의 피폭에 대해서는 평소 그다지 실감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히로시마 시민들을 만나고 히로시마를 몇 차례 방문하면서 피폭 히로시마 시민들, 바로 죽지 않고 생존한 피폭자들이 20년이란 긴 세월을 두고 겪어간 고통과 죽음, 절망과 침묵을 들여다보며 엄청난 충격과 가책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이를 세상에 알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강한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이 책을 남긴 것 같다. 오에씨는 1994년 노벨문학상을 탄 문인이고 많은 소설을 남겼지만, 그가 쓴 이 「히로시마 노트」는 문학작품이라기보다는 히로시마를 여러 차례 찾고 피폭자들을 만난 후 기록한 현장 보고서에 가깝다. 세상은 큰 사고나 재앙 발생하면 규모와 사상자 수에 관심 많지만 평생 그날의 공포 안고 살아가는 사고 당사자와 후손 삶 생각해야 보통 큰 사고나 재앙이 터지면 언론은 사고 규모와 사상자 수를 먼저 알린다. 희생자 수가 많을수록 세상은 큰 관심을 보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우리 기억에는 수치들만 남는다. 그러나 피해를 겪은 당사자들에게는 피해에서 오는 신체적 고통과 트라우마로 시간이 멈추고 인생이 격변하고 세상이 뒤집히는 현재가 지속된다. 제주 4·3사건 관련 유가족, 세월호 유가족, 10·29 이태원 참사의 유가족들에게 시간이 멈추듯이 히로시마 피폭자들에게도 원폭 폭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런 현재가 이어지고 있다. 보통 우리가 히로시마 핵폭발을 거론할 때, 폭발 직후 사망자가 10만여 명이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부상자도 10만이 넘었다는 사실은 잘 의식하지 못한다. 피폭 당시 히로시마 시내에는 298명의 의사가 있었으나 건강한 상태로 구조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던 의사는 28명, 치과 의사 20명, 약사 28명, 간호사 130명이 전부였다고 한다. 의료진 자신들도 환자와 마찬가지로 그들이 겪는 고통과 상처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불안과 무력감에 휩싸여 피폭 구조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히로시마 의사회 원로 마쓰자카 요시마사(松坂義正)씨는 수기에서 이렇게 썼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나는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부상당한 시민을 구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움직이지 않는 내 몸을 채찍질해 가며 아들 등에 업혀서 다시 히가시 경찰서 앞으로 되돌아갔다. … 구조라고는 해도 보관하고 있던 자재가 모두 불타고 경찰서에는 기름과 머큐로크롬밖에 없어 모여드는 부상자들에게 화상에는 기름, 상처에는 머큐로크롬을 발라 줄 수밖에 없었다.” 히로시마의 의료인들은 한 번도 배운 적도 없고 경험한 적도 없는 원폭증에 속수무책이었다. 많은 부상자가 피폭으로 화상을 입고 피부가 켈로이드 상태로 녹아내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환자들은 전신 피로, 식욕부진, 탈모, 심한 가려움증, 검붉은 피부발진, 궤양 증세를 경험하다 결국은 서서히 죽어갔다. 글 _ 강우일 베드로 주교(전 제주교구장)

2024-05-26

[강우일 주교의 생명과 평화] 카인의 후예(하)

고대사회에서 농경문화를 이룬 종족은 부와 풍요를 구가했던 데 비해 유목민들은 평생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가축들 꽁무니만 따라다니다가 소박한 유랑 생활로 만족하는 가난한 삶을 살았다. 그러니 카인은 아벨보다 훨씬 더 유복하고 부족함이 없는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더 값진 자기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시고 오히려 아벨이 바친 보잘것없는 어린 양을 굽어보시자 카인은 몹시 화를 냈다. 문제가 있다면 그런 선택을 하신 하느님께 있다. 아벨은 아무 잘못도 없다. 아벨은 카인에게 아무런 해를 입힌 적도 없고, 열악한 환경에서 가축이나 따라다니면서 박복하고 가난한 삶을 살아왔을 뿐이다. 그런데 그런 아우를 카인은 애틋이 여겨 감싸고 돌보기는커녕 오히려 목숨을 빼앗기까지 하였으니 카인 안에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다. 내가 먼저 폭력 행사하지 않아도 누군가 폭력적 선택하게 되면 세상에 포악한 불씨 점점 번져가 그래서 하느님께서 카인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창세 4,6-7) 몹시 화를 내고 얼굴을 떨어뜨린 카인의 자세 안에는 하느님과 세상에 대한 원망과 불만이 가득한 것처럼 보인다. 하느님의 선택과 판단에 공감도 동의도 할 수 없는 부정적 태도의 표출이다. 세상에서는 더 부유하고 더 힘이 있는 자가 더 높은 자리와 앞자리에 앉고, 약하고 가난한 자는 아랫자리에 앉고 적은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고 관행이다. 카인은 하느님이 그런 세상의 상식에 따르지 않으시고 약자를 높고 좋은 자리에 앉히시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화를 냈다. 얼굴을 떨어뜨렸다는 것은 하느님을 마주 보기도 싫어서 얼굴을 돌렸다는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거부요 저항의 자세다. 하느님은 카인의 이런 태도를 보시고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그를 노리게 될 것이라 하신다. 카인 안에 하느님과는 공존하거나 어우러질 수 없는 죄악의 마그마가 부글부글 끓고 있는 모양새다. 이 용암이 폭발하여 친아우인 아벨의 목숨까지 빼앗았다. 살인에까지 이르는 포악은 카인 안에서 나왔다. 그리고 카인이 취한 하느님에 대한 거부의 자세는 이미 아담과 하와 안에 사탄이 씨앗을 뿌린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카인의 후예가 아닌가 싶다. 우리 모두 안에 스스로 제어가 안 되는 포악의 뜨거운 에너지가 끓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먼저 불의와 폭력을 행사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저지른 불의와 폭력의 화염은 우리 안에 옮겨붙으면서 새로운 포악의 에너지를 증산한다. 전쟁에 나간 병사가 처음에는 적이라 해도 눈앞의 살아있는 인간을 향해 방아쇠가 당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적이 쏜 총알로 내 옆의 전우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면 상황이 달라진다. 분노의 에너지가 활활 타올라 응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한 번만 방아쇠를 당기면 그다음부터는 거리낌 없이 적에게 보복의 총알을 무제한 난사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의 공통된 체험이다. 상대 포악의 에너지가 자신에게 전염되고 확대되어 끝없는 폭력의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것이 우크라이나, 팔레스티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력의 사슬이다. 인류는 과연 이 포악의 에너지와 폭력의 사슬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온 세상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우리 자신 안에 그럴만한 역량이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당신 외아드님을 보내주신 것 같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을 때 헤로데 왕은 무자비한 비인간적 폭력으로 두 살 이하의 어린이들을 몰살시키는 참극을 저질렀다. 폭력의 악순환 끊어버리려면 박해에도 힘으로 맞서지 않고 지혜 보여주신 예수님 따라야 그때 하느님이 보여주신 대처법은 도망치는 일이었다. 요셉과 마리아는 위험이 사라질 때까지 이집트로 몸을 숨겼다. 헤로데 왕의 폭력에 대한 대응은 하느님 몫이었다. 죄악의 우두머리와 싸우는 일은 하느님이 감당하셨다. 하느님은 시간으로 헤로데 왕을 심판하시고, 아기와 부모가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안배하셨다. 루카 복음 22장 36절에 예수님은 반대자들의 음모가 절정에 달하자, 제자들에게 겉옷을 팔아서 칼을 사라고 하신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정당방위를 인정하시는 모습이다. 그런데 정작 제자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온 무리에게 칼을 뽑아 대사제의 종 오른쪽 귀를 잘라버리자, 예수님은 “그만해 두어라” 하시고, 그 사람의 귀에 손을 대어 고쳐 주셨다. 마태오복음 26장에는 같은 장면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청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 주실 것이다.” 예수님은 박해자들의 음모와 폭력에 힘으로 맞서는 길을 포기하셨다. 자신을 온전히 비우시고 악의 우두머리와의 싸움을 하느님 아버지께 맡겨드리셨다. 이것이 우리 안에 포악과 폭력의 불씨를 심어놓은 악의 괴수에 승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고 지혜다. 카인의 후예인 우리가 그 포악의 사슬을 끊어버릴 수 있는 길이다. 글 _ 강우일 베드로 주교 전 제주교구장

2024-05-05

[강우일 주교의 생명과 평화] 카인의 후예(상)

우리는 내년이면 일본제국주의에서 해방된 지 80주년을 맞게 된다. 우리 겨레는 일본제국에 강제로 병합된 기간 36년 동안 일본에 저항하고 자주독립을 위해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싸웠다. 그런데 일본제국이 패전하고 우리는 잠시 해방의 기쁨을 맛보았으나 곧바로 세계열강의 동서 냉전 구도에 편입되면서 국토가 분단되고 체제가 대립하고 겨레의 혼도 반쪽으로 쪼개졌다. 일제 식민 통치 기간의 두 배가 넘었는데도, 한반도는 남북으로 갈린 채 분단을 극복하지 못하고 갈수록 멀어지고 증오심을 키우고 있다. 동포를 적대하며 비무장지대 양쪽에 한반도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고도 남을 엄청난 무기를 배치하고 해마다 수시로 전쟁 훈련을 반복하고 있다. 같은 핏줄이고 같은 언어와 문화와 전통을 이어받은 한 민족인데 왜 이렇게 오래 서로를 배척하고 단절과 대결의 자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그뿐 아니라 소위 자유민주주의 진영이라고 내세우는 남한 내에서도 보수와 진보의 대립은 갈수록 격화되고 소통이 단절되고 있다.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는 온라인 공간에서 주고받는 극단적인 언어의 구사는 공포와 전율을 느끼게 한다. 선거철이 되면 한 집안에서도 사회 문제에 대한 이념적 입장과 가치관 충돌이 두려워 가족 안에서도 솔직한 대화보다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런데 정치·사회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여러 영역에서도 우리는 가까운 사람들끼리 미워하고 공격하고 비난하고 응징하는 폭력적 상황을 연출하는 장면을 쉽게 볼 수 있다. 내가 잘 아는 한 직장인은 직장 상사의 집요한 괴롭힘과 악의적인 모함에 정신과 치료까지 받다가 견디지 못하고 퇴사하고 말았다. 학원에서 학생들 사이에 다양한 이유로 벌이는 따돌림과 폭행은 오래전부터 일상화되어 있다. 어린 나이의 학생들이 또래 친구에게 어떻게 그토록 몸서리쳐지는 잔인하고 난폭한 가학행위를 집단으로 자행할 수 있는지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상대방에게는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평생 치유되기 어려운 고통과 상처를 안겨주고도 별 가책이나 죄책감을 느끼지도 못한다. 이런 포악함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여가를 즐기고 서로 친목을 다지기 위한 각종 스포츠에서도 프로 영역으로 진입하면 선수들 사이에서는 따돌림과 폭력이 심심치 않게 드러난다. 나는 테니스나 배구 시합 중계방송을 즐겨 보며 좋아하는 선수들의 재능 넘치는 활약에 감탄과 박수를 보낸다. 그런데 어떤 시합에서는 즐거움보다 마음속에 서늘함과 씁쓸함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선수들은 경기 중 자신의 강력하고 절묘한 스트로크를 상대가 받아내지 못하였을 때 주먹을 불끈 쥐고 환호하거나 탄성을 지른다. 이는 선수 자신의 솜씨를 자랑하고 스스로 용기를 북돋는 몸짓이니 멋있고 장하게 보인다. 그러나 어떤 경우 선수들은 그런 순간에 외마디의 괴성을 지르며 상대 선수를 향해 거의 전투적이거나 위협적인 시선으로 쏘아보고 포효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 선수의 얼굴에는 비록 아주 짧은 순간이긴 하지만 단순한 성취감이나 기쁨보다는 먹잇감을 낚아채고 정복한 짐승의 포효나 강력한 적의가 여과 없이 묻어나는 난폭한 표정이 스친다. 나는 그런 표정을 볼 때마다 씁쓸함을 느끼며 인간의 내면에 숨어있는 흉포함에 놀라곤 한다. 그 사람 내부에 일상에서는 표출되지 않는 포악한 에너지가 숨겨져 있지 않고서는 그런 표정이 나올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옛날부터 창세기를 읽으며 제일 알아듣기 쉽지 않았던 것이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였다. 카인과 아벨 형제 사이에 무슨 큰 사건이 터졌거나 다툼이 있었거나 하지 않았는데 카인은 어느 날 갑자기 아우 아벨을 들판으로 끌고 가 죽여버렸다. 카인은 농사를 지으며 농부로 살다가 땅에서 난 소출을 하느님께 바쳤고, 아벨은 양치는 목자로 살다가 양의 맏배들과 굳기름을 바쳤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굽어보셨으나 카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 이에 카인이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고 한다. 사실 아벨이 바친 어린양 몇 마리보다 카인이 바친 농산물이 훨씬 값나가는 제물이다. 글 _ 강우일 베드로 주교(전 제주교구장)

2024-04-28

[강우일 주교의 생명과 평화] 종교와 폭력(하)

2019년 4월 21일 주님 부활 대축일, 스리랑카에서는 여덟 군데에서 253명이 죽고 500여 명이 다치는 엄청난 폭발 테러가 발생했다. 호텔 네 곳과 주택가 및 세 곳의 가톨릭교회가 피해를 보았다. 이는 불교도와 힌두교도 간에 벌어진 종교 갈등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사실은 영국 식민지 시대에 비교적 특혜를 누렸던 소수파 타밀족과 다수파 싱갈족 사이의 충돌이었다. 많은 이들이 오늘의 자살폭탄 테러가 이슬람 과격파의 발명품이라고 알고 있으나, 사실은 1980년대부터 이미 스리랑카 타밀 타이거 게릴라 그룹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방법이었다. 이러한 과격 테러리즘은 불교도와 힌두교도의 종교 갈등 때문이 아니라 타밀족과 싱할리족 사이의 문화적 이질감과 사회적 차별로 인해 빚어진 참상이었다. 미얀마의 로힝야 부족이 겪고 있는 참극은 현재진행형이다. 미얀마 정부는 로힝야족을 대대적으로 학살하고 추방하는 인종청소를 저질러왔다. 이 사태는 일반적으로 불교도가 대다수인 미얀마에서 무슬림인 로힝야 부족에게 가한 차별과 탄압으로 인식되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군부가 합법적인 선거로 수립된 정부와 충돌하며 정부를 전복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대규모 폭력 사태다. 로힝야족은 이미 1780년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이주하여 국경지대에 살아왔다. 군대가 자행한 폭력의 표적이 된 것은 이미 미얀마 여러 도시에 살고 버마어를 사용하는 무슬림들이 아니다. 군부의 목표는 전략적으로 장악이 필요한 지역에 사는 이방인들을 제거하는 데 있다. 그들의 종교가 다르기는 하지만 종교가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현재 세계를 가장 혼란에 빠트리고 있는 사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분쟁이다. 이 사태의 함의는 대단히 복합적이다. 19세기 말 유럽 내에 반유다주의가 노골화되면서 유다인들 사이에는 유다 민족의 본향이었던 팔레스티나로 이주하려는 운동(시오니즘)이 일기 시작했다. 당시 팔레스티나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하고 영국이 중동 지역을 점령하자 유다인들의 팔레스티나 이민이 가속화하고 유다인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아랍 민족주의자들은 시오니즘 대두에 크게 반발하였다. 192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유다인의 증가와 아랍인에 대한 차별에 반발하는 아랍인들의 폭동, 테러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유다인들의 시오니즘은 점점 국가주의적 성향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유다인 국가의 설립을 바라는 이들, 시오니스트들 대다수는 무신론자이거나 종교에 무관심한 이들이었다. 그리고 유다인에게 테러를 자행하는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자들도 종교적 색채와는 무관한 마르크스주의 조직에 속한 이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그리스도교 출신도 이슬람 출신도 있었고 종교가 그들 투쟁의 우선적인 동기가 아니었다. 유다인과 팔레스타인 사이 갈등의 핵심은 땅이었다. 종교는 땅(상징적으로는 양측에서 성지로 자리매김하는 예루살렘)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동원된 구실이었다. 그러나 대중언론은 이를 유다인과 무슬림 사이의 분쟁이라고 단순히 포장하여 소개하였다. 사안의 중심은 한 지역의 땅덩어리를 놓고 두 개의 다른 정치공동체가 벌이고 있는 분쟁이다. 20세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류 역사에서 유례없이 가장 많은 희생자를 쏟아낸 주체는 합리적 이성을 앞세우는 이데올로기였다. 구체적으로는 나치즘과 공산주의였다. 둘 다 종교와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모든 종교를 탄압하고 배척한 무신론적 이념체계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들 사이의 갈등과 분쟁의 뿌리에 종교가 있다는 막연하고 왜곡된 통념을 떨쳐버려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2019년 2월 4일 아랍에미리트 방문에서 알아즈하르의 대이맘 아흐메드 알타예브와 공동으로 인류를 향해 이렇게 호소하였다. “우리는 종교가 결코 전쟁, 증오, 적개심, 극단주의를 선동해서는 안 되고, 폭력이나 유혈 사태를 조장해서도 안 된다고 단호히 선언한다. 이러한 비극적 현실들은 종교 가르침에서 벗어나고 종교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데에 따른 결과들이다. 또한 역사적으로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강렬한 종교심을 악용하여 사람들을 종교 진리와 무관한 방식으로 행동하게 종용해 온 종교 단체들의 곡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정치적 경제적 목표들이나 세속적이고 근시안적인 목표들을 달성하려는 목적에서 자행된다. 따라서 우리는 증오, 폭력, 극단주의, 맹목적 광신주의를 선동하는 데에 종교를 이용하는 행태를 척결하고, 또한 살인, 추방, 테러, 억압 행위들을 정당화하는 데에 하느님의 이름을 도용하지 않도록 모든 이가 관심을 가져달라고 촉구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서로 싸우거나 죽이도록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또한 인간이 그들의 삶과 그들이 놓인 상황 안에서 핍박과 멸시를 받도록 인간을 창조하신 것도 아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데에 당신 이름이 악용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신다.” 글 _ 강우일 베드로 주교(전 제주교구장)

2024-04-07

[강우일 주교의 생명과 평화] (7) 종교와 폭력(상)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국제무역센터 테러 사건 이후 세계의 모든 나라는 끊임없이 비인간적이고 비이성적인 테러리즘의 위협에 시달려 왔다. 런던과 파리, 니스 등 평화롭던 도시에 예기치 못한 폭탄 테러가 일어나고, 시리아와 파키스탄, 나이지리아, 스리랑카 등지에서 대량 학살 사건이 터졌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테러와 폭력 사건의 원인과 배경에 항상 고질적인 종교 갈등이 도사리고 있다고 평한다. 종교는 원래 폭력의 고리를 끊고 사람을 갈등과 폭력으로부터 해방하고 평화로 이끌기 위해 존재하는데, 종교로 말미암아 폭력이 증가하고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은 너무 큰 모순이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 안에 종교와 폭력이 이미 오래전부터 동반자로 작동해 온 현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유럽에서는 중세 이후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군주들 사이에 분열과 전쟁이 100년 넘게 이어졌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십자군 전쟁과 이슬람의 세력 팽창을 위한 전쟁이 있었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도 우리는 지구 곳곳에서 종교의 차이로 인한 분쟁과 갈등이 배태되는 모습을 본다. 종교와 폭력의 연결 고리는 현실적으로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그러나 종교와 폭력이 연결되어 있다는 이 오랜 통념이 진실로 근거 있는 명제인지 우리는 좀 더 깊이 따져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 여정에서 분명히 종교의 이름을 걸고 응징과 복수와 폭력을 불사하는 이들이 여기저기 출현해 왔다. 그러나 종교에 온전히 투신한 많은 이들은 남을 괴롭히는 폭력과는 정반대의 삶을 산다. 오늘도 세계 구석구석에는 종교의 가르침을 진실로 실현하려는 수십만 명의 수도자와 평신도들이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가난하고 굶주리는 이들에게 음식을 나누고, 병자들을 치료하고, 옥에 갇힌 재소자들을 방문하며 위안과 평화를 선물하고 있다. 나는 병원에서 하루에도 혼자 100명 가까운 환자를 진료하며 녹초가 되는 일정을 소화하다가 유일하게 쉴 수 있는 휴일에 이주노동자와 노숙자 진료를 위해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아낌없이 봉헌하는 의료인(의사, 약사, 간호사 등)들을 여럿 안다. 그런데 안 보이는 데에서 이런 지고한 선행과 희생을 실천하는 이들은 스스로 크게 떠벌이지도 않고 나팔을 불지도 않는다. 언론은 매일 지속되는 이런 이들의 조용하고 드러나지 않는 활동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몇 안 되는 과격분자들이 어쩌다 벌이는 잔인한 폭력과 극단적인 사건은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해설한다. 그리고 그 폭력의 주인공들이 특정 종교에 몸담은 일이 있으면 마치 그 종교 전체가 그에 가담한 것으로 낙인을 찍어 일반화하고 확대 해석한다. 현실 속에서 종교는 순수한 가르침이나 교리로만 존재하지 않고 조직과 제도와 사람을 통하여 세상 안에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유지된다. 그래서 종교는 초연하게 정신적인 영역에만 머물러있지 않고 세상에 영향을 주고 세상에 개입하고 세상과 어울린다. 종교는 항상 세상과 함께 작동해 왔다. 고대의 제국들은 종교를 바탕으로 실존했다. 동서양 제왕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권위와 정체성이 신들에게서 나왔음을 전제로 국가와 국민을 다스렸다. 이집트의 제왕은 태양신의 아들로 처신했고, 중국의 제왕도 스스로 하늘의 아들로 칭하고 제사장 신분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고대 국가들은 제정일치를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고 실행했다. 로마 제국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받아들임으로써 황제의 정치적 권위로 교회의 영역까지 개입하고 다스리려 하였다. 세속의 정치 지도자들은 종교를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최대한 활용했다. 사실 종교적 갈등으로 소개되고 해석된 사건의 배경에는 종교 자체의 차이보다는 갈등 당사자들의 세속적인 이해관계가 동기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갈등이 일어나는 배경에는 종교적 가르침의 차이가 아니라 땅을 더 확보하려는 욕구, 땅에 매장된 석유, 금, 다이아몬드 같은 고가의 지하자원이 원인으로 작용한다. 국가 간에 전개되는 전쟁도 모두 물질적인 이해관계로 촉발된다. 제한된 공간에 묻혀있는 지하자원이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고 소수가 독점하는 불의에 대해 다수가 분노할 때 갈등이 일어나고 분쟁이 터진다.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된 북아일랜드의 분쟁은 주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신자들 사이의 충돌로 소개됐다. 그러나 이는 영국이 아일랜드를 식민지화하는 과정에 야기된 분쟁이지,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의 갈등에서 빚어진 것이 아니다. 북아일랜드의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원래 자신들의 교회를 보유하고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그들이 아일랜드 공화국에서 떨어져 나가 영국에 귀속하려 했던 것은 자신들의 종교가 프로테스탄트였기 때문이 아니다. 북아일랜드 종교 분쟁이 발생한 원인은 18세기 스코틀랜드 장로교인들이 아일랜드에 이주하면서 시작되었다. 북아일랜드에 이주 온 장로교인들은 가톨릭신자들을 밀어내고, 그들의 많은 인구를 바탕으로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기득권을 차지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다. 이후 기존의 아일랜드 인들이 차별과 억압을 받았으며, 이들의 갈등은 무장 투쟁으로 발전했다. <다음 호에 계속> 글 _ 강우일 베드로 주교(전 제주교구장)

2024-03-31

[강우일 주교의 생명과 평화] (6) 강정 이야기④

‘강정 생명평화대행진’이 펼쳐지던 2016년 8월 1일 강우일 주교(왼쪽에서 두 번째) 등 참가자들이 약천사~안덕 구간을 걷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평화 운동가들은 제주 최남단의 작은 포구 강정과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대형 해군기지의 이질적 형상이야말로 동북아의 평화를 저해하고 아름다운 제주 자연생태계를 파괴하는 올무요 덫임을 세상에 알리고 호소하는 ‘생명평화운동’으로 전환하였다. 생명평화운동의 상징으로 강정에서는 해마다 제주도 해안가를 도보로 일주하며 평화를 호소하고 알리는 ‘생명평화대행진’이 펼쳐졌다. 나도 거르지 않고 이 행진에 함께 합세하여 걸었다. 행진 참가자들은 전국 각처에서, 해외에서까지 모여온 남녀노소 평화의 일꾼들이다. 이들은 긴 도보 행진 기간 내내 생명과 평화의 가치를 호소하고 알리는 깃발을 들고 걷는다. 강동균 회장은 해마다 이 긴 여정 내내 가장 큰 깃발을 들고 꼿꼿이 맨 선두에 서서 걸었다. 불어대는 거센 제주 바람에도 큰 깃발을 똑바로 세우고 걷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그래도 강동균 회장은 교대도 마다하며 꿋꿋하게 걸었다. 그 밖에도 나는 강정에서 놀라운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영화평론가 양윤모는 2011년 강정 해군기지 건설 반대 운동에 동참하다가 현장에서 크레인 차량 밑으로 들어가 공사 업무를 방해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는 다른 이들과 함께 몸에 쇠사슬을 감아 연결하고 공사 현장에 트럭이 진입하지 못하도록 저지하며 결사적인 행동으로 막아섰다. 그 과정에서 다섯 차례 구속되고 1년 6개월의 수감생활을 하고 단식을 이어가며 평화에 대한 자신의 신념과 의지를 결연히 표현했다. 그는 2016년 제주를 비무장 평화의 섬으로 만드는 장기적인 목표를 세우고 일반 대중과 함께하는 문화운동을 기획, 강정국제평화영화제를 개최하며 문화예술계에 평화운동의 막을 열었다. 그의 이러한 줄기찬 활동은 다른 문화예술인들에게도 평화의 중요성에 대한 공감과 새로운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강정에서는 지금도 길거리 미사가 매일 11시에 거행되고 있다. 미사 집전은 성프란치스코 평화센터장인 김성환(콜베) 신부를 비롯하여 전국 곳곳에서 방문하는 사제들이 번갈아 가며 맡지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필요한 제구와 전례를 준비하고 미사 주송을 보고 묵주기도를 선도하는 역할은 정선녀(잔다르크) 공소회장이 한다. 그녀는 공사 반대 시위가 한창일 때 현장에서 농성자들을 압박하던 경찰들 안에 낯익은 얼굴을 보았다. 작은아버지의 아들, 사촌 동생이었다. 집에서 마주친 작은어머니가 이렇게 말했다. “너는 뭐가 잘나서 데모하니?” 그 후로 전에는 살갑게 대해주던 삼촌 내외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고 서로 마음이 편치 않은 관계가 되어버렸다. 또 언니 아들 부부가 경찰이 되어 제주도에 내려왔는데 오자마자 강정에 왔다. 조카 부부가 꼬박 1년 강정에서 근무했다. 캠코더를 들고 이모를 포함해 반대 농성자들을 채증하기도 했다. 잔다르크는 당시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한다. “활동가들이랑 경찰이랑 대치 상황에서 서로 힘으로 밀기도 하다 보니 조카 부부가 욕도 듣고 몸도 힘들었을 거예요.” 그녀는 성녀 잔다르크처럼 강정의 긴 갈등의 역사 속에서 불굴의 굳센 투지와 깊은 영성과 복음적 온유를 잃지 않고 삶의 현장에서 온몸으로 평화를 실천해 온 선교사다. 그녀는 지금 강정을 찾는 방문객들에게 마을을 안내하며 강정 평화운동의 역사와 체험을 전수한다. 그녀는 강정에 오기 전에 우도공소에서 10년 선교사로 살면서 공소 신자들을 동반하며 시간 날 때마다 우도 명물 땅콩 농사를 지었다. 그녀는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엄청난 인내와 끈기로 땅을 살리는 일을 먼저 했다. 주변 농민들은 불가능한 짓을 한다며 만류했다. 처음에는 거의 열매도 달리지 않던 우도 토종 땅콩이 해를 거듭하면서 옛날의 고소함과 맛을 되찾아 갔다. 되살아난 옛날 땅콩의 맛을 본 이웃 농부들 입에서 절로 이런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 이 맛이야!” 그녀는 지금도 강정에서 틈만 나면 밭에 가서 각종 채소를 가꾸며 돌보고, 감귤이나 딸기로 잼을 만들어 강정 생명평화운동의 재원에 보탠다. 진짜 생명과 평화를 수확하는 일꾼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나한테 농사는 비폭력 행동 중 한 방법이었어요. 생산적이면서도 평화로운 방법으로 마늘을 다듬고, 들깨를 털고, 국화꽃을 따고 땅콩을 까고 바느질했어요. 시위도 농사도 내 삶의 일부예요. 땅콩 짓고 마늘을 심으면서 ‘생명과 평화는 사람이 스스로 키워나가야 하고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땅으로부터 배웠어요!” 그 밖에도 나는 강정을 거쳐 간 수많은 평화의 일꾼들을 만났다. 일 년에 며칠 안 되는 휴가를 강정에 와서 보내고 강정 소식을 전국에 알리는 열성적인 남녀 수도자들도 여럿 보았다. 멀리 미국에서, 영국에서, 프랑스에서, 일본 오키나와에서 몇 번씩 온 이들도 있다. 이들 중에는 농성과 시위에 참여했다가 연행되고, 추방당하고 재입국을 거절당한 이들도 여럿이다. 이들은 강정을 세상에 알려준 평화의 사도들이었다. 그런데 잠시 다녀가는 사람들 말고, 이곳에 여러 해를 눌러앉아 강정을 지키는 놀라운 지킴이들이 있다. 출신 지역도 다양하고 전력도 참으로 다양하다. 광고업계에서 광고 만들던 사람도 있고, 춤 명상과 춤 테라피를 하던 춤꾼도 있고, 서양화가도 있고, 영화감독도 있다. 벌써 여러 해 강정을 떠나지 않고 매일 길거리 미사, 평화를 염원하는 100배, 평화의 인간띠 잇기에 참여하고 각자의 재능과 전문성을 살려 다양한 문화활동을 펼치며 평화의 몸짓을 계속하고 있다. 나는 이들을 보며 정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보태주는 사람 아무도 없고 생기는 것도 없다. 오히려 가족이나 친지들로부터는 손가락질과 외면을 받기 십상이다. 고향과 안락한 보금자리를 떠나 조악한 의식주를 마다하지 않고 손에 잘 잡히지도 않는 생명평화를 바라며 강정에 머무는 이들의 영혼과 활동에 나는 경이로움과 존경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아무런 조직이나 규범도 만들지 않고 평화를 향한 각자의 노력과 선의를 존중하며 모든 종류의 상하관계에서 오는 차별을 거부하려고 사회적 직함이나 이름 사용을 마다하고 별명으로 소통하고 어울리는 신기한 무리다. 이런 이름 없는 돌멩이들의 존재와 활동은 참으로 진실하고 아름답다. 이 돌멩이들이야말로 살아있는 평화를 만드는 디딤돌들이다. 이 돌멩이들의 외침과 현존이 오늘 강정을 평화의 기지로 만들고 있다. 내가 강정에서 만난 이들은 참으로 어두운 세상을 밝히고 정화하는 빛이요 소금이다. 이런 의인들이 있는 한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멸망시키지는 않으시리라 믿는다.

2024-03-10

[강우일 주교의 생명과 평화] (5) 강정 이야기③

강우일 주교가 강정마을에서 미사를 주례하고 있다. 강우일 주교 제공 강정을 통하여 많은 사람을 만났다.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사람에게 실망하는 경우가 많다. 선거철만 되면 도저히 실현하지도 못할 허구의 약속을 대놓고 외쳐대다가 당선된 후에는 까맣게 잊어버리는 이들, 아니면 자신이 내세운 현실을 도외시한 공약에 발목이 잡혀 약속이행을 무리하게 밀어붙이다가 밥상을 통째로 엎어버리는 정치인들을 보면서 우리는 실망한다. 학문의 영역에서 진리를 탐구하고 연구와 교육에 헌신하던 이들이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 속물적 욕망을 노골적으로 발휘하며 금력과 권력의 종살이를 하는 학자들을 보며 실망한다. 한때 사법부에서 정의와 공정의 수호자로 처신하였으나 퇴임 후 유명 로펌에 영입되어 전관예우의 고속열차에 올라타 보통 사람은 꿈도 못 꿀 거액 연봉을 단기간에 챙기는 법관들을 보며 우리는 실망한다. 그런데 나는 강정에 다니면서 이런 이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사람들을 만났다. 영혼이 맑고 아름다운 사람, 진실한 사람들을 만났다. 이들을 만나면서 나는 세상에 빛과 희망을 엿본다. 강정 구럼비 바위 들판이 폭파되기 전 우리는 강정의 평화를 염원하며 바닷가 구럼비 위에서 강정의 평화를 기원하는 야외미사를 봉헌한 적이 있다. 1월 한겨울 구럼비는 바닷바람으로 체감온도가 뚝 떨어져 너무나 추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는 장백의에 제의를 껴입었는데도 어찌나 추웠는지 손가락이 얼어들어 오고 아래위 치아가 딱딱거리며 마주칠 정도로 덜덜 떨려서 강론을 겨우 했던 기억이 난다. 미사를 주례하고 있는 강우일 주교. 100여 명 가까운 미사 참례자가 있었는데 그중 당시 그 지역 국회의원이었던 김재윤(스테파노) 형제가 미사 내내 함께 칼바람을 견디며 자리를 지켰다. 국회의원이라 미묘한 입장이었을 텐데도 그는 얼굴만 비치고 사라지는 인사치레를 하지 않고 미사 시작부터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미사 후에 고마워서 다가가 인사를 하니 손이 꽁꽁 얼어있었다. 박근혜 정부 시절 그는 야당의 언론정상특별위원장으로 정부 정책을 비판하고 저항하는 일을 감당하다가 미운털이 박혀 ‘입법 로비’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누차 억울함과 무죄를 호소하였으나 재판부는 4년 형을 선고하였다. 나는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몇 차례 찾아가 면회하였다. 그의 얼굴은 하늘을 우러러 조금도 부끄럼이 없는 맑고 청아함으로 빛났다. 나는 그의 무죄함을 의심치 않았다. 또 정권이 바뀌었으나 그는 풀려나지 않았고 2018년 8월 4년 만기를 다 채우고서야 석방되었다. 석방된 후 제주에 오자마자 그는 나를 찾아왔다. 오랜 수감생활로 햇빛을 못 봐서 그런지 하얀 얼굴에 환하고 밝은 표정으로 출소 인사를 했다.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시가 진실을 담고 있는 것 같아 시를 많이 썼고, 이제는 시인으로 살겠다고 했다. 그런데 2021년 6월 29일 그가 갑자기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바로 그 전날 과거에 그에게 4년 형을 선고하고 문재인 정부 초대 감사원장까지 지냈던 판사가 대선 후보로 출마를 선언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그가 거짓과 불의가 버젓이 득세하는 부조리한 이 세상에 너무나 큰 분노와 좌절을 느끼고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 항의하며 떠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내가 만난 정치인 중 가장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강정은 많은 사람을 평화의 일꾼으로 키워냈다. 문정현(바르톨로메오) 신부는 1970년대부터 군사독재에 저항하며 민주화와 노동자들의 인권, 통일과 평화를 위해 온몸으로 싸움을 벌여온 평화의 사도다. 전국 어디서나 자본과 권력에 짓눌려 신음하고 고통받는 작은 이들이 있는 곳에 망설이지 않고 달려가던 문정현 신부는 강정에도 어김 없이 달려왔다. 주민들이 막강한 군대와 정부를 상대로 너무나 힘겨운 싸움을 벌이는 모습을 보고 그는 서둘러 강정에 이주했다. 일흔이 훨씬 넘은 노구를 이끌고 군사기지 건설 반대를 외치며 공사 현장 선두에서 젊은 경찰관들과 온몸을 부대끼며 농성하고 버티었다. 앉아있던 의자 채로 공중 부양으로 들려 쫓겨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 번은 바닷가에 설치된 방파제용 콘크리트 구조물 테트라포드 위에서 농성하다가 경찰과의 실랑이 과정에서 떠밀려 아래로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테트라포드 여러 개를 쌓아놓은 꼭대기에서 땅바닥까지의 거리는 10m에 가까웠으니 노인이 그 높이에서 바닥까지 추락하여 살아남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소식을 듣고 너무 놀라 병원에 달려가 보니 문 신부는 의식이 또렷했고 죽다 살아났다며 스스로 놀라워하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검사 결과 뇌에는 아무런 출혈이 없었고, 몸 곳곳에 골절과 타박상만 관찰되었다. 천사가 받아안고 땅바닥에 살짝 내려놓았다고 밖에 달리 상상할 수가 없어 정말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문정현 신부는 평소 농담 반 진담 반 내게 주교들과는 별로 사이가 좋지 않다고 서슴없이 말하곤 했다. 그러던 문 신부가 어느 날 내게 할 말이 있다며 주교관을 찾아왔다. 자신이 1976년 명동 3·1 민주구국선언에 동참했다가 투옥되었으나 최근 이에 대한 재심이 청구되고 무죄가 선고되어 국가로부터 배상금을 받았는데 그 돈으로 강정에 땅을 조금 샀다고 했다. 강정에서 평화 운동을 계속 펼쳐가기 위해서는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이들이 모이고 함께하는 보금자리가 있어야 하겠기에 서둘러 땅을 매입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주머니를 탈탈 털어 땅을 확보는 하였으니 그 위에 집을 짓는 일은 제주교구 주교가 추진해 달라는 것이었다. 대화를 나누고 있는 강우일 주교와 강정마을 주민들. 강우일 주교 제공 사실 이즈음 나는 나대로 지속적인 평화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강정에 땅을 물색하고 있었다. 몇 군데 후보지가 나왔으나 마을 외곽이어서 망설이고 있던 차에 문 신부가 마을 한복판의 땅을 매입해 버린 것이다. 나는 교회가 한 가지 목적을 위해 두 군데에 공간을 마련하는 것은 낭비이니 문 신부의 제안을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후 우리는 즉시 함께 건물의 성격과 용도를 논의하고 전국 여러 교구에서 모금을 전개하여 2015년 5월 현재의 성프란치스코 평화센터를 완공하였다. 지금도 문 신부는 그곳에 기거하며 매일 길거리 미사를 봉헌하고 나무토막에 좋은 글귀를 새기는 서각으로 시간을 보낸다. 강정은 마을 주민 대부분이 밭농사나 어업에 종사하는 평범한 시골 사람들이다. 군사기지 건설이 강행되면서 이 시골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막강한 군대와 경찰과 공무원들을 상대로 버티고 싸워야 하는 고달픈 나날을 맞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평범한 농부가 차츰 평화 활동가로 양성되고 성장해 갔다. 나는 해군기지 건설 기간 중 마을 주민을 대표하여 앞장서고 행동했던 강동균 마을회장을 보며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마을회장이란 평소 동네 이장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소박한 봉사직이었으나 해군기지 갈등이 초래된 이후 상당히 중요한 사회적 비중을 띄게 되었다. 강동균 회장도 평범한 농부였으나 주민들을 대표하여 군사기지 건설 반대를 외치며 주민들의 뜻을 대변하고 자신들의 생각과 논리를 당당하게 정부의 공무원들 그리고 언론에까지 펼치는 평화의 일꾼으로 성장해 갔다. 해군기지가 완공된 후 군사기지 건설 반대 운동은 새로운 단계와 성격으로 변화되었다.

2024-03-03

[강우일 주교의 생명과 평화] (4) 강정 이야기②

며칠을 고민하던 끝에 나는 강정 문제와 관련하여 제주의 목자로 취할 선택을 결심하고 2007년 5월 제주교구민에게 ‘평화의 섬 제주를 염원하며’라는 사목서한을 보냈다. “제주는 4·3사건으로 무고한 생명 3만 명이 무참히 학살된 땅입니다. … 제주의 땅은 그들이 흘린 피를 헛되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주의 땅은 그들의 희생을 거름으로 참된 평화의 섬이 되어야 합니다. 더 이상 어떤 이유로든 인간들이 형제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무기나 무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땅으로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4·3에 무고하게 죽임을 당하신 분들의 희생은 정말 보상받을 길이 없습니다.” 이 사목서한에서 나는 가톨릭교회의 사회교리에 지적된 세계평화를 위한 그리스도인의 인식과 사명을 알렸다. “군비 경쟁은 평화를 보장하지 못하며, 전쟁의 원인을 제거하기보다는 오히려 증대시킬 위험이 있다. 언제나 새로운 무기를 마련하는 데에 소요되는 엄청난 재원의 낭비는 가난한 사람들의 구제를 막고, 민족들의 발전을 방해한다. 과잉 군비는 분쟁의 원인을 증가시키고, 분쟁이 확산될 위험을 증대시킨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315항) “많은 국가들이 보호책으로 삼는 군비 경쟁은 평화를 확고히 유지하는 안전한 길이 아니며 또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이른바 균형도 확실하고 진실한 평화가 아니라는 확신을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한다. 군비 경쟁으로 전쟁의 원인들이 제거되기는커녕 오히려 점차 증대될 수밖에 없다. … 군비 경쟁은 인류의 극심한 역병이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견딜 수 없는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군비 경쟁이 계속된다면 그 수단이 이미 마련되어 있는 가공할 온갖 재앙을 언젠가는 일으키고 말리라는 것을 몹시 두려워하여야 한다.”(「사목헌장」 81항) 2016년 9월 제주 성 프란치스코 평화센터에서 열린 ‘강정평화 컨퍼런스’ 참가자들. 군사기지와 군함이 버티고 있는 강정마을에 항의와 반대의 표징으로 세워진 성 프란치스코 평화센터는 평화를 염원하는 이들의 순례지가 됐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이 사목서한 발표 후 교회 안팎으로부터 많은 이들이 공감과 연대의 의지를 보내왔다. 제주교구 사제단은 해군기지 건설 철회를 요구하며 단식을 감행했다. 여러 교구의 정의평화위원회와 평화 활동가들이 강정을 찾았다. 그러나 제주교구의 입장에 반대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정부 고위층 인사가 제주를 방문해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정부의 입장은 변하지 않았고 대화는 평행선을 그었다. 정부 측만이 아니라 교회 내에서도 생각이 다른 이들이 적지 않았다. 국책사업 특히 국가안보와 상관있는 군사기지 건설에 교회가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하는 데 대한 거부반응이 컸다. 그러나 이런 논란이 확대될수록 제주 지역사회 안에서는 거의 꺼져가던 해군기지 건설 반대의 불씨가 다시 살아나고 강정 주민들도 큰 용기와 힘을 얻는 것 같았다. 또 전국 각지의 시민단체들이 강정 해군기지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하며 세계 각국으로 강정마을 이야기를 발신하기 시작하였고 미국과 유럽에서도 강정을 찾아 여러 날 머물다 가는 방문객이 늘었다. 2009년 5월, 나는 강정과 관련한 두 번째 사목서한 ‘제주를 평화의 섬으로 만들기 위한 호소’를 발표하였다. 여기서 나는 정부의 해군기지 건설 재고를 요청하며 네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군비 증강은 평화를 결코 보장하지 않습니다. 현대의 역대 교종은 한결같이 군비 증강에 의한 평화 유지에 분명히 반대의 뜻을 밝히셨습니다. 이는 교도권이 가르치는 교회의 사회교리에도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한 국가가 무기를 보강하면, 다른 국가들도 더욱 크게 무기를 보유해야만 합니다. 또한 한 국가가 핵무기를 생산하면, 다른 국가들도 비슷한 파괴적 핵무기를 생산해야 하는 악순환이 계속됩니다.’(성 요한 23세 교종 「지상의 평화」 110항) 둘째, 도민 3만여 명이 학살당한 제주는 평화를 배우는 섬이 되어야 하며 전쟁을 준비하는 기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제주 4·3은 대한민국 국민 전체가 두고두고 가슴을 치며 용서를 빌고 참회와 속죄의 발원을 하여야 할 피맺힌 역사입니다. 이런 제주 땅에 군사기지를 새로 건설하려는 것은 희생자들의 억울한 죽음을 무위로 돌리고 그 무덤을 갈아엎는 행위나 다름없는 무지막지한 행위입니다. 제주를 총칼과 무력으로부터 정화할 때 비로소 우리는 고인들의 희생에 늦게나마 참된 위로와 사죄의 제사를 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강정 앞 바다는 제주에서 가장 청정한 해역이고 제주도민의 생명의 젖줄입니다. 환경은 인류가 공유하는 공동선의 터전이고 모든 인간은 이를 존중할 의무를 지닙니다.(성 요한 바오로 2세 교종 「백주년」 40항) … 강정 앞 바다에서 발견된 연산호 군락지는 그곳 해양 생태계가 아직 살아 있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최근의 현지 탐사 결과 이곳은 군사기지 건설을 하기에 타당하지 않은 생태계의 보고로 밝혀졌습니다. … 그러나 행정당국은 이러한 탐사 결과도 묵살한 채 공사를 강행할 수순을 밟고 있습니다. 이는 이 나라 전체에 유일하게 보존되고 있는 청정해역을 회복 불가능한 형태로 훼손하는 생태계에 대한 폭력입니다. 넷째, 해군기지 건설 문제로 인하여 강정 지역 공동체가 파괴되고 주민들 사이에 심각한 대립과 상호 적대감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제주의 지역사회는 본디 서로 문을 열어놓고 한 집안처럼 오가는 독특한 친교의 문화를 이어오고 있으며 아직도 길흉사를 함께하고 끈끈한 정을 나누는 인간관계를 형성해 왔습니다. 그러나 행정당국이 주민들의 충분한 의견 수렴 과정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추진한 해군기지 건설 계획으로 말미암아 마을 공동체에 금이 가고 한집안 안에서 서로를 외면하고 혐오하는 대결 관계가 형성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가상의 적에 맞서기 위하여 같은 마을 공동체에서 한 집안끼리 대립하는 일은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부와 해군은 이런 호소에 도무지 귀를 기울이지 않고 공사를 강행했다. 정부와 제주도가 서귀포시 강정마을을 해군기지 건설지로 확정한 이후 9년이 지난 2016년 2월 강정 해군기지는 완공되었고 한국해군과 미해군의 전함들이 수시로 정박하다 떠난다. 강정 기지가 완공됨으로써 강정 기지 건설을 반대한 사람들의 모든 활동은 자동적으로 종료되고 더 이상 동력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해군기지가 들어서고 군함이 정박하고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지만, 강정에는 여전히 군사기지 없는 평화의 마을 회복을 위한 평화운동이 9년째 지속되고 있다. 평화로운 어촌과는 어울리지 않는 군사기지와 군함이 버티고 있기에 오히려 더 이에 대한 항의와 반대의 표징으로 성 프란치스코 평화센터(프코 센터)가 세워졌다. 프코 센터는 평화를 염원하는 이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여전히 매일 강정을 찾는 방문객들과 생명평화를 위한 길거리 미사가 거행되고, 인간띠잇기, 백배가 이어지고 활동가들은 콘크리트가 점거한 강정의 땅을 살리기 위해 땀 흘려 유기농 농사를 짓고 있다. 활동가들은 이제 활동가가 아니라 강정의 생명과 평화를 지키는 지킴이로 살고 있다. 강정은 끝나지 않았고 현재 진행형이다.

2024-02-04

[강우일 주교의 생명과 평화] (3) 강정 이야기①

나는 2002년에 제주교구장으로 부임하였다. 제주에 오기 전 나는 서울 명동에서 20년이 훨씬 넘는 세월을 살았다. 그 시대의 명동이라 하면 젊은이들에게는 옛날부터 볼일이 없어도 괜히 한 번 바람 쐬러 나가 차를 마시거나 친구와 술로 밤을 지새우고 싶은 낭만의 고향이었다. 그러나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와 90년대 격동의 시대를 그곳에서 먹고 자고 생활한 나에게 명동은 매연과 취객들이 토해낸 오물, 식당마다 밀어낸 쓰레기 더미, 시위대가 던지는 화염병, 경찰이 쏘아대는 최루탄 가스가 범벅이 되어 오래 머물고 싶지 않은 동네였다. 그런 곳에서 사반세기를 보낸 이력을 감안해 주셨는지 하느님께서는 나를 서울에서 제일 먼 남쪽 섬나라 제주도로 보내셨다. 제주에 오니 숙소 창에 보이는 광경은 꿈만 같았다. 북쪽을 보면 파란 수평선이 그어져 있고 남쪽을 보면 한라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어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은 소임지에 나를 보내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이런 복을 누릴만한 공덕을 쌓은 기억이 없는데 이런 특전을 누리게 하시니 너무 과분하여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몰랐다. 그런데 얼마간 살다 보니 겉으로 보기에는 아름답기만 한 제주도이지만 그 속살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섬사람의 피와 고통과 죽음으로 멍들고 썩고 골병든 육신임을 알고는 이런 곳에서 내가 어떻게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을 것인지 자신감이 생기지 않고 마음이 아려왔다. 우리나라 현대사를 일별할 때 어느 지역이든 해방정국에서 좌우의 이념 갈등으로 혼란과 갈등이 끊이지 않았으나, 제주는 가장 큰 상처를 입은 지역이다. 제주인들은 1947년부터 1954년까지 ‘4·3’이라는 참혹한 사태로 인하여 도민의 10%가 넘는 3만여 명이 희생되는 비극을 겪고 그 유가족들은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강요당한 침묵과 무너진 억장을 끌어안고 악몽과 트라우마 속에 신음하며 살아왔다. 4·3 사태 기간 중 제주에서 벌어진 참극이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가 벌인 유다인 학살보다 규모와 인원으로 볼 때 훨씬 작기는 하여도 미군정과 대한민국의 공권력이 벌인 폭력과 무자비함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나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경찰과 군대가 제주 중산간 지역 마을들을 차례로 포위, 초토화 작전을 감행하고 순박한 농부들을 좌익으로 몰아 노인에서 어린아이들까지 무차별 학살하였음을 알고 경악하였다. 제주교구 신자들과 사제들의 가정사를 들어보아도 대부분 가족이나 가까운 친척 가운데 누군가는 반드시 4·3과 관련된 아픈 기억을 안고 산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나라 국민 대다수는 이 땅에서 벌어진 참혹한 역사적 사실을 거의 모르고 살아왔다. 국가가 저지른 죄를 국가가 묵살하고 역사 기록과 서술에서 지워버리고 학교 교육에서도 배제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나라 안에서 동포들에게 자행된 이런 참극을 우리 자신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제주도에 관광객으로 놀러만 다녔다는 사실이 참으로 부끄럽고 송구하고 양심의 가책을 금할 길이 없었다. 강정 평화 컨퍼런스와 평화대회가 처음으로 열렸던 2014년 9월 27일 강정순례 참가자들이 강정마을과 한반도 동북아 평화를 기원하는 묵주기도를 바치며 걸음을 옮기고 있다. 강정포구 뒤편 해군기지 공사현장에 어지럽게 늘어선 대형 크레인과 구조물들이 보인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그런데 2005년 1월 노무현 정부는 제주도를 ‘세계평화의 섬’으로 선포하였고 제주에 내리는 비행기에서 제주 착륙을 알리는 승무원의 인사가 매번 ‘세계평화의 섬 제주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는 말로 시작되었다. 나는 국가수반이 제주도에 이런 별칭을 선포한 것은 과거 공권력이 저지른 폭력으로 수많은 무고한 생명이 희생된 비극의 역사에 대한 간접적인 반성과 회오를 깔고 앞으로는 차별과 억압과 폭력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다짐으로 알아들으려 했다. 그러나 이는 나의 사사로운 개인적 소망으로 끝났다. 그 선언 이후 제주 땅에 동북아와 세계의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단 한 줄의 구체적인 계획이나 전망도 보이지 않았다. 제주도정이 내세운 유일한 전망은 평화를 브랜드로 내세워 국제회의 및 투자유치를 하고 제주국제자유도시의 성장동력으로 삼겠다는 추상적 상업적 구상뿐이었다. 그러다 2007년 5월 노무현 정부는 38선에서 제일 먼 남쪽 작은 강정포구에 해군기지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민주적이고 개혁적 정치를 하겠다는 노무현 정부가 왜 한반도 최남단 평화로운 제주의 작은 포구에 거액의 국가 예산을 투입하여 군사기지를 건설하려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민의 가슴에 깊이 새겨진 4·3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고 진상도 밝혀지지 않고 치유도 되지 않은 피맺힌 제주의 땅 주인들의 반발과 의사를 무시하고 거대한 군사기지를 건설하여 군부대를 주둔시키겠다는 발상은 아직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제주인들의 마당에 또다시 피 묻은 군화발로 저벅저벅 행군해 들어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과거의 역사를 망각하고 반성도 하지 않는 권위주의적 정부로 인식하였다. 더구나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11월 제주를 방문한 기회에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4·3 유족과 제주도민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전하며 무고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하고 삼가 명복을 빌기까지 한 사람이다. 육지 같으면 시민단체나 지식인들이 즉시 들고 일어나 비판적인 견해를 밝히고 저항의 연대를 꾸려나갔을 것 같은데 제주에서는 강정마을 주민들만 반대의 목소리를 올릴 뿐 제주 지역사회 전체의 반응은 너무 미약하고 소극적이었다. 필시 과거의 국가 공권력으로부터 당한 폭력과 재앙의 기억이 너무 선명하여 국책사업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공개적으로 표현하는데 무의식중에 큰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힌 것이 아닐까? 그대로 가면 큰 저항 없이 해군기지 건설이 곧 시작될 것으로 보였다. 이런 상황을 보며 내 마음이 많이 산란해졌다. 국가가 세계평화의 섬이라 선포해 놓고 돌아서서는 평화와는 정반대의 군사기지 건설을 추진하는 모순을 수용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북한과의 대치가 이루어지는 38선에선 제일 먼 남쪽 섬에 대규모 군항을 설치한다는 결정도 납득이 안 되고, 국가가 앞장서서 제노사이드에 준하는 민간인 집단학살을 저지른 땅에 주민들의 동의 절차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군사기지를 배치한다는 것도 참으로 용납하기 어려운 폭거로 보였다. 내 가슴 한구석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이럴 때 교회마저 침묵하고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나중에 우리 후손들이 뭐라고 할 것인가, 가톨릭교회는 도대체 그때 무슨 생각을 하고, 무얼 하고 있었나 하며 되묻게 될 때가 올 것이다.’ 국가가 하겠다고 나섰으니, 새만금이나 평택 미군기지 같은 사례를 보아도 정부는 반드시 강행하고야 말 것임을 알았다. 그러나 교회마저 제주도민의 미래와 한반도의 평화에 치명적 악수를 두는 정권의 결정에 아무런 대응도 입장도 내세우지 않고 방관하고 있으면 교회는 후에 얼마나 큰 부끄러움을 맛볼 것인가 하는 생각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2024-01-28

[강우일 주교의 생명과 평화] (2) 생명의 못자리(하)

내가 제주에 와서 20년이 흘렀다. 현직에 있을 때나 은퇴한 후에나 내가 맛보는 가장 큰 기쁨과 휴식은 숲길을 걷는 일이다. 그런데 그동안 수십 년 된 나무들이 수없이 잘려 나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속이 쓰리다. 내가 몇 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큰 충격적 사건은 자태가 너무 아름답고 장엄한 소나무가 어느 날 갑자기 잎이 시들어 가더니 얼마 후 자취를 감추고 사라진 일이다. 이 노송은 보기에 수명도 오래되었을 뿐 아니라 그 줄기가 옆으로 두어 번 휘어서 하늘로 뻗어 오른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고 품격을 갖춘 국보급 보물이었다. 그런데 이 노송이 제주대학교로 들어가는 길과 제주시에서 서귀포로 넘어가는 중앙로가 교차하는 도로변에 서 있었고 중앙로 확장 공사로 인해 길 한복판에 놓이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노송을 교차로 한가운데 남겨둔 채로 도로 확장과 포장 공사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노송의 잎이 누렇게 변색하더니 빠르게 말라 죽어가고 있었다. 누가 밤중에 독을 주입한 모양이었다. 신제주와 구제주를 잇는 편도 1차로의 구실잣밤나무 가로수 풍경. 강우일 주교 제공 처음에는 지역 언론에 노송이 말라 죽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그리고 그만이었다. 아무런 추적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누가 봐도 분명히 도로공사 관계자들과 연관이 있는 사건이었다. 제주에서도 소나무 벌채는 당국의 허락을 받아야 했고, 이를 어길 시에는 형사 입건되어 엄한 벌을 받았다. 당시 도지사와 만날 기회가 있어 대화를 나누던 중 이 노송이 사라진 사건을 거론하며 당국에서 반드시 범인을 찾고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러나 후속 조처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백주에 도로 한복판의 국보급 소나무에 누군가가 독을 주입해 나무가 잘려 나갔는데, 아무런 수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냥 넘어간 것이다. 우리나라 지도층의 생태 감수성이 얼마나 미개한가를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두 번째로 내가 충격받은 일은 내가 매일 숙소에서 교구청 사무실로 출퇴근하는 중앙로에서 일어났다. 제주도정은 어느 날 제주에서 제일 통행량이 많은 중앙로에 버스전용차로제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중앙로 한 구간에는 전국에서 손꼽히는 아름다운 가로수길이 100m도 훨씬 넘게 이어져 있었다. 가로수가 차도와 인도를 구분하는 가장자리에만 있을 뿐 아니라 차도 가운데에 길게 서 있어 상하행선의 분리대 구실을 해주고 있었다. 이 가로수는 구실잣밤나무라고 하여 도토리보다 조금 납작한 열매가 열리는 참나뭇과인데 수령이 꽤나 오랜 듯 둥치가 상당히 굵었다. 해마다 가을이 되면 근처 주부들이 열매를 주우러 통행하는 자동차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나도 이곳을 지날 때마다 도심 한복판 고목들의 도열에 마음을 뺏겨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제주시에서 통행량이 제일 많은 도로에 이런 보물 같은 구실잣밤나무들이 용케도 생존해 주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행정당국이 버스전용차로제를 도입하면서 이 보물들이 또 사라져 버렸다. 버스전용차로가 생겨 버스의 통행속도가 몇 분 빨라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버스가 몇 분 더 빨리 달리는 것이 수십 년 자란 고목을 수십 그루 베어낼 만큼 중대한 일이었을까? 이뿐이 아니다. 제주시민이 제주시에서 동쪽 끝머리에 있는 성산포 쪽으로 이동할 때 여러 길로 갈 수 있으나 비교적 선호도가 높은 길이 중산간 지역을 달리는 ‘비자림로’다. 비자림로는 2002년 건설교통부가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로 선정했다. 자치단체들이 추천한 전국 88개 도로 가운데 미관이 뛰어나 대통령상까지 받았다. 당시 건교부는 도로 및 환경전문가, 여행가, 사진가 등으로 구성된 심사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비자림로가 “천혜의 자연경관이 잘 보존됐고, 환경과의 조화, 편리성 등에서 좋은 점수를 받아 아름다운 도로로 선정됐다”고 발표했다. 제주시와 성산포 사이를 오가려면 일주 도로나 다른 간선도로 이용도 얼마든지 가능한데 행정 당국은 2018년 굳이 2.9㎞의 아름다운 삼나무 2400여 그루를 베어내면서 비자림로를 두 배로 확장하는 공사를 시작했다. 환경단체 전문가들이 불과 며칠이라는 매우 짧은 시간 동안 조사해 보니 비자림로에는 천연기념물 팔색조, 멸종위기종 애기뿔쇠똥구리를 비롯해 법정보호종으로 지정된 다수 생물들이 확인되었다. 이 공사로 인한 자연 훼손과 생태계 파괴에 대한 비판과 항의가 전국에서 빗발치고 공사가 세 번이나 중단되었으나 행정당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밀어붙이고 있다. 생태계에 대한 인간들의 무신경한 전횡과 폭력이 도에 넘친다. 그런데 최근 또 비슷한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다. 출퇴근 시간에 제주 시내의 서쪽과 동쪽을 오가는 차량 통행이 많아 길이 좀 막힌다. 대부분 차량은 편도 차로가 둘 이상인 간선도로를 이용한다. 그러나 옛날부터 익숙하던 신제주와 구제주를 잇는 편도 1차로의 구도로를 이용하는 시민들도 여전히 적지 않아 출퇴근 시간에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런데 최근 이를 편도 2차로로 확장하려는 계획이 발표되자 논란이 적지 않다. 이 길에 수령 50년이 넘은 구실잣밤나무 75그루가 가로수로 늘어서 있다. 키가 10m를 넘고 여러 갈래로 뻗은 줄기가 길 양편에서 도로 가운데로 뻗어 숲 터널을 이룬다. 굵은 몸통에 새파란 이끼까지 끼어있어 오랜 세월을 버텨온 관록을 자랑하듯 장엄하게 버티고 서있다. 겨울이 되어 다른 나무들은 잎들이 색을 잃거나 떨어져 가지만 앙상하지만, 구실잣밤나무는 여전히 검푸른 잎을 가득 달고 하늘을 가리며 오가는 행인들의 마음을 푸근하고 엄숙하게 해준다. 45년 세월을 두고 한자리에 굳건히 서서 추위와 더위를 견디어 내고 줄지어 오가는 자동차들의 매연을 마셔가며 시민들에게 햇빛을 가려주는 그늘을 제공하고 새들의 보금자리가 되어준 75그루의 귀한 생명들을 출퇴근에 몇 분 더 빨리 가기 위해 모조리 베어버린다면 이는 인간 편의주의의 야만적 문명에 의한 것이다. 기후위기에서 오는 생태계 교란으로 지구상의 생명체 군이 급속도로 멸종되고 있다. 북극곰, 코끼리, 고래, 두루미와 같은 크고 아름다운 동물은 사람들 눈에 띄지만, 눈에 잘 안 들어오는 작은 곤충이나 절지동물은 이미 상당수 사라졌다. 곤충이 사라지면 이를 먹이로 살아가는 조류도 생존이 불가하다. 우리나라에서도 가축을 인간의 반려로 간주하고 그 식용을 법으로 금할 만큼 동물권에 대한 감수성이 예민해진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생태계에 대한 우리 감수성을 이제는 집에서 키우는 몇 종의 동물에 한정하지 말고 나무와 풀로까지 확장해야 하지 않을까? 어차피 도로를 확장해도 도로 면적이 확장된 만큼 현대인들은 자동차 대수를 또 늘려 새로운 도로가 다시 자동차로 꽉 막히게 만드는 것이 우리들의 끝없는 욕망의 속성이다. 생명의 못자리를 무차별 파괴하는 반생태적 폭력과 탐욕에서 벗어나야 우리 공동의 집을 지키고 후손들에게 아름답고 살기 좋은 보금자리를 물려줄 수 있지 않을까?

2024-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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