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미술 이야기

[노성두의 성미술 이야기] (42·끝) 아기 예수의 탄생

카라바조. 1608~1609년. 314×211cm. 메시나 도립박물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찬송이 세상 구석구석에 메아리친다. 뒷북을 친다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진작에 구세주의 출현을 알아보았더라면 CNN과 로이터를 비롯해서 세계 유수의 언론사들이 인류 최대의 특종을 독점중계하려고 군침 흘리며 달려들었을 것이다. 아기 예수는 그러나 아무런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고 태어났다. 예수님이 만약에 자식 복이 지지리도 없었던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아들로 떡하니 태어났더라면 어땠을까,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그랬다면 수에토니우스를 비롯해서 로마 유수의 역사가들이 앞 다투어 새로운 황금시대의 도래를 부르짖으며 입술에 꿀을 바르고 다녔을 것이다. 아기 예수는 잘 알려진 것처럼 내세울 것 하나 없는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다. 탄생기록이라고는 루가가 몇 줄 구색을 맞추었고, 마태오는 그나마 한 줄뿐인데, 『마리아가 아기를 낳자 그 아기를 예수라고 불렀다』, 그리고는 그만이다. 이럴 때는 마태오의 과묵한 성격이 원망스럽다. 한편, 루가는 한 줄을 더 보태서 두 줄이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머물러 있는 동안 마리아는 달이 차서 드디어 첫 아들을 낳았다. 여관에는 방이 없었기 때문에 아기는 포대기에 싸서 눕혔다』인심들이 각박했던 탓일까, 산모가 식은 땀 흘리며 끙끙대는 걸 뻔히 보면서 자리를 양보할 생각을 안하고 헛간으로 내몬 사람들이나, 에라, 까짓 것 「이빨이 없으면 잇몸」이라고 한겨울에 외양간 구유를 아기 침대로 대용할 작정을 한 아버지 요셉 모두 수준들이 막상막하였던 것 같다. 목수였던 요셉은 산모가 출산을 앞두고 특히 예민해진다는 것을 전혀 몰랐었던 것 같다. 혹시 알고도 그랬다면 어지간히 간 큰 남자였을 것이다. 그날 밤 타지에서 한뎃잠을 자면서 구유에다 아기를 낳고도 나중에 신세한탄 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마리아도 무척 무던한 성격이었나 보다. 사실, 구세주 탄생의 황금빛 상상을 다 걷어내고 성서 기록만 읽으면 예수 탄생은 조금도 성스럽지 않은 사건이었다. 그러나 신성이 반드시 황금빛 광채를 띠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예언자 이사야의 말처럼 그분은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고 피해갈 만큼 고통과 멸시를 당할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혹독한 운명은 「야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기에」 이미 예정된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대신 앓아주었고, 우리가 받을 고통을 대신 겪어주었던』(이사야 53, 3. 6) 것이다.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의 그림은 베들레헴의 외진 장소를 무대로 삼고 있다. 마구간 구유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는 마리아의 품에 안겨 있다. 나무판자로 뒷벽을 바른 마구간은 너무 낡아서 황소 콧김 같은 바람이 벽 틈으로 씽씽 들어온다. 마리아는 모진 산고 끝에 무척 탈진한 것 같다. 몸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고 여물통에 비스듬히 기대 누운 자세로 포대기에 싼 아기를 끌어안았다. 손끝 하나 까딱할 기운이 없었을 텐데, 맥없는 엄지손가락으로 아기의 등을 조심스레 어루만지는 손길이 안쓰럽다. 한편, 아기 예수는 마리아와 뺨을 마주대고 옹알이를 한다. 앙증맞은 손을 더듬어 젖 냄새를 찾고 있나 보다. 여기서 서로의 뺨을 맞대는 행위는 원래 고대 로마 시대부터 죽은 사람과 이별을 의미했다. 뻣뻣하게 굳은 라자로를 끌어안고 뺨을 부비는 막달레나, 또는 피에타의 마리아가 무릎 위에다 십자가에서 떼어 내린 예수의 시신을 부둥켜안고 뺨을 맞대는 장면은 종교미술의 역사에서 무척 흔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아기 예수와 뺨을 맞댄 마리아도 마찬가지로 훗날 다가올 수난의 어두운 예감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사야의 예언이 그랬던 것처럼 핍박과 멸시의 운명을 타고 태어난 아기와 어머니 마리아에게 다가올 십자가 수난의 근심까지 덧씌우다니 종교 미술의 가혹 취미는 끝이 없는 것 같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은 아기 예수의 탄생 장면과 동방박사의 방문을 함께 다루기 좋아했다. 대개 금빛 자수가 요란한 붉은 옥좌에 마리아가 천상의 모후처럼 점잖게 앉아 있고, 아기 예수는 마리아의 무릎 위에 꼿꼿이 서 있는 자세로 축복의 손짓을 보이면, 동방박사들이 차례를 기다려 선물을 바치면서 왕 중의 왕께 머리를 조아리곤 했다. 또 뒤쪽으로는 동방박사를 시중드는 무리들이 낙타와 말과 코끼리 따위를 몰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 못지않은 요란한 행차로 그림 배경을 도배하기 일쑤였다. 여기서 잠시 이런 의문이 든다. 동방박사들이 바친 보물과 금덩어리는 혹시 아기 예수의 남루한 태생을 위로하려는 수사적인 장치가 아니었을까? 카라바조의 그림은 바로크 시대에 그려졌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독특하다. 바로크 미술라고 하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는 역동적인 구성의 동세와 강물처럼 범람하는 빛이 화면에 흘러넘쳐야 한다. 주인공들의 옷자락과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건 기본옵션이고, 금빛 구름과 사랑스런 아기천사들의 무리가 빠지면 아예 그림으로 쳐주지도 않았다. 그러나 여기에는 금술 새긴 옥좌도 왕중왕의 눈부신 위엄도 보이지 않는다. 선물 싸들고 찾아오는 동방박사의 행렬 따위는 눈을 씻고 보아도 없다. 이탈리아의 바로크 미술을 통틀어서 이처럼 어둡고 쓸쓸한 그림은 다시없을 것이다. 고요한 달빛이 어둠을 적신다. 달빛에 홍건하게 드러난 성가족의 가난한 모습은 보는 사람의 가슴을 엔다. 이 그림에서 아기 예수를 찾은 이들은 동방박사들이 아니라 양치는 목자들이다. 이들도 허름하고 별 볼일 없기로는 성가족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이 바치는 예배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경건의 최대치를 보여준다. 참된 예배는 묵은 포도주의 향기처럼 진실한 마음의 깊은 술통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닐까? 보잘 것 없는 삶을 살지라도 보잘것없는 진심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카라바조는 「아기 예수의 탄생」을 그리면서 예수의 삶에서 기적과 일화를 모두 걷어낸다. 종교라는 이름의 달콤하고 신비스런 환상이 덮고 있던 무거운 더께를 우리의 눈꺼풀에서 긁어내고, 영문 모르고 달려온 양치기 목자의 순박한 시선으로 예수의 삶을 증언한다. 그의 붓은 구유에 깔았던 짚더미처럼 소박하고, 그의 색채는 겨울밤 창백한 달빛처럼 가난하다. 동방박사와 천사들은 이곳에서 설 자리를 잃었다. 성탄절을 맞아서 오늘 우리들 가까이의 춥고 가난한 삶들을 생각해본다. 지금으로부터 400년전, 이런 엉뚱한 그림을 구상한 화가도 존경스럽지만, 도대체 어떤 교회에서 이런 그림을 걸어놓고 싶어 했을까 궁금하다. 이 작품은 완성되자마자 팔려나갔다. 구입한 곳은 메시나의 산타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 작품 값은 무려 1000 스쿠디였다. 그 당시 단일 작품 가격으로는 최고액수를 기록했을 뿐 아니라, 파격적인 내용으로 이탈리아의 미술계를 떠들썩하게 했다고 한다. 거장 미켈란젤로의 원작을 다섯 점, 또는 플랑드르 바로크 대가 루벤스의 작품을 여덟 점을 너끈히 살 수 있는 금액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을 것이다. ■ 연재를 마치며… “서툴고 무딘 글에 빛나는 지면 제공해준 가톨릭신문에 감사” 노성두씨「노성두의 성미술 이야기」는 이번 호로 지난 2년 동안의 격주 연재를 마칩니다. 서투르고 무딘 글에 빛나는 지면을 제공해주신 가톨릭신문사와 편집부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동안 기쁜 일이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아우가 인천 작전성당에서 예비신자교리과정을 마치고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은 것이 가장 기쁜 일이었습니다.

발행일 2004-12-26 제2429호 18면

[노성두의 성미술 이야기] (41) 동방박사의 경배

독일 쾰른은 중앙역 앞에 있는 대성당이 볼만하다. 600년 넘게 걸쳐서 지었다는 시커먼 현무암 건축은 높이가 150m가 넘어서 쳐다보고 있으면 고개가 뒤로 꼴깍 넘어간다. 옛적 중세 시대에는 대도시에도 2층짜리 살림집이 드물었다니까, 그때 사람들의 비례 기준으로 보면 대성당 건축은 상상을 뛰어넘는 초현실적인 구조물로 보였을 것이다.쾰른에서 유학을 하면서 대성당을 노상 지나쳐 걷곤 했는데, 시내 어느 곳을 걷더라도 대성당과의 만남을 피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도처에 임재하는 신성과의 행복한 조우라고 할까. 쾰른 대성당을 올려다 볼 때마다 유학 뒷돈을 대주시는 아버지께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났다. 쾰른 대성당의 가장 큰 보물은 동방박사의 유해이다. 대성당 제단부에 이층집 모양으로 생긴 황금궤가 놓여 있고, 큰 절기가 돌아올 때마다 중간 고미다락부분을 개봉하면 거기 왕관을 쓴 유해를 목격할 수 있었다. 진짜다, 가짜다 하는 논란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원래 콘스탄티노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동방원정 때 골고타의 십자가와 함께 발굴해왔다가 우여곡절 끝에 밀라노를 거쳐 12세기 후반에 쾰른까지 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 덕분에 쾰른은 북유럽의 외딴 도시인데도, 로마, 예루살렘, 산티아고 디 콤포스텔라와 더불어 중세 4대 순례지로 부각되면서 관광수입이 짭짤했다. 지금도 12월이 되면 중앙 광장에 나무마다 꽃불이 걸리고, 집집마다 전나무 잎관을 짜서 촛대를 세운다. 대림절을 밝히는 것이다. 대림절 촛대는 4개를 세웠다가 첫 주에는 하나, 둘째 주에는 둘, 셋째 주에는 셋, 마지막 주에는 넷을 다 밝히는데, 여기서 잎관은 어둠을 누르는 승리의 상징이고, 4개의 촛불은 인류 출현부터 메시아의 재림까지 걸리는 4000년을 암시한다고 한다. 교황 그레고리오 대제가 그렇게 설명하셨으니까 딴 생각 말고 그냥 믿어도 좋을 것 같다. 대림절은 라틴어로 「아드벤투스」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오심」이라는 뜻이다. 아기 예수가 세상에 나심을 손꼽아 기다리는 설렘과 기대가 응축되어 있는 말이다. 그러나 대림절을 가장 애타게 기다리는 것은 아무래도 어린이들이다. 그건 순전히 대림절 선물 달력 때문이다. 대림절이 시작하면서 날짜에 맞추어 하루 한 장씩 우표딱지만한 달력 마분지를 뜯어내면 그 뒤에 앙증맞은 선물이 하나씩 들어 있어서, 아무리 아침잠이 많은 아이들도 대림절부터는 잠귀신이 싹 달아나는 것이다. 독일에서는 또 아이들이 입을 모아 골목길을 쏘다니며 대림절 노래를 합창했는데, 가사는 이랬다. 『대림절, 대림절, 작은 촛불이 피었네.촛불 하나, 촛불 둘, 촛불 셋, 촛불 넷.어느새 아기 예수가 문 앞에 서 계시네』동방박사들은 일찍이 별을 보고 베들레헴의 기적을 찾아왔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별점을 치거나, 점성술에 조예가 깊었나 본데, 이들은 곧장 현장으로 달려가지 않고 헤로데 왕을 먼저 찾았다고 한다. 헤로데 왕도 메시아의 탄생을 기뻐할 것이라고 어림으로 넘겨짚고 그랬던 모양인데, 그건 단단히 잘못 짚은 행동이었다. 『헤로데 왕이 당황한 것은 물론, 예루살렘이 온통 술렁거렸다』(마태오 2, 3). 단순히 당황해서 술렁거린 것이 아니고, 불안에 떨며 허둥댔다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긴급 정보를 입수한 헤로데 왕이 대사제와 율법학자들을 불러 긴급대책회의를 마친 뒤, 은밀하게 동방박사들을 속여서 못된 계획의 끄나풀로 삼으려고 했으나, 아기 예수를 알현한 동방박사들이 꿈에 천사를 만나고 나서 헤로데를 피해 딴 길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는 복음서에 한 편의 추리소설처럼 흥미진진하게 기록되어 있다. (마태오 2, 1~12)1195년 완성된 잉게보르크 시편의 채식필사그림은 위, 아래 그림이 줄거리 순서대로 나뉜 복층구조이다. 윗그림에는 헤로데 왕을, 아래 그림에는 아기 예수를 찾은 장면이 재현되었다. 그림을 살펴보면 둘 다 오른쪽에 보좌에 앉은 주인공이 위치하고, 왼쪽 화면을 동방박사 셋이 점유하고 있는 점에서 구성의 얼개가 거의 일치한다. 그러나 위 그림에서는 헤로데가 제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생뚱맞은 표정을 짓고 동방박사 역시 마뜩찮은 눈치여서 분위기가 영 썰렁하다. 그러나 아래 그림으로 내려가면 이와 대조적으로 따뜻한 온기가 넘쳐난다. 마리아의 다정한 미소와 아기 예수의 의젓한 표정, 그리고 동방박사들의 기쁨에 겨운 정성과 헌신을 보면 굳이 성서를 모르는 사람들도 참된 왕이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다. 안내자 역할을 마친 밝은 별이 마리아의 머리 위에서 맴돌이 춤을 추는가 하면, 심지어 동방박사들의 옷자락조차 즐거움을 감추지 못하고 펄럭거리는 것 같다. 이 그림에서 동방박사는 인생의 세 단계를 망라한다. 청년, 장년, 노년으로 대변되는 차림새와 외모는 아기 예수께 무릎 꿇고 경배 드리는 이가 동방에서 온 낯선 사람들이 아니라, 온 세상, 온 인류라는 보편 개념의 환유로 해석해야 한다. 12세기부터는 세 사람이 흑인, 황인, 백인의 얼굴로 등장해서 그 당시 지리학의 지식이 알고 있던 전 세계의 모든 대륙, 곧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을 대표하기도 하지만, 잉게보르크 시편 그림에서는 아직 옛 전통을 따르고 있다.동방박사의 경배를 흔히 「삼왕의 경배」로 일컫기도 하는데, 이들이 박사 칭호를 얻은 것은 순전히 테르툴리아노의 덕분이다. 성서공부를 열심히 했던 테르툴리아노는 구약에서 눈에 확 띄는 구절을 찾아냈다고 한다. 『민족들이 너의 빛을 보고 모여 들며,제왕들이 솟아오르는 너의 광채에 끌려오는구나』(이사야 60, 3).『만왕이 다 그 앞에 엎드리고 만백성이 그를 섬기게 되리라』(시편 72, 11).동방박사들에게 왕의 칭호를 처음 붙인 것이 222년인데, 미술에서는 그 뒤로도 한참동안 버섯꼭지처럼 생긴 프리기아 모자를 쓰다가 10세기부터 번듯한 왕관을 머리에 얹고 등장한다. 잉게보르크 필사본에서도 다들 왕관을 하나씩 챙겨 쓰고 있다. 동방박사가 셋이라는 사실은 3세기 교부 오리게네스의 생각이다. 성서에는 몇 명이 왔는지, 이름이 무엇인지 명시적으로 씌어 있지 않지만, 아기 예수께 드린 선물이 셋이니까 세 명이 아닐까 추측한 것이다. 또 동방박사들이 이름을 하나씩 얻어 가지게 된 것은 8세기의 일이다. 6세기 원본을 다시 베낀 8세기의 필사본 파편(Excerpta latina babrari)에서 발타살, 멜키올, 카스팔 이라는 이름이 우연찮게 발견되면서 동방박사들도 마침내 성서 인명목록에 등재가 된 것이다.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를 방문한 이야기는 일화와 예언, 그리고 신화와 역사의 경계를 넘나들며 메시아의 출현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말해준다. 동방박사 이야기를 가지고 성서그림을 장식했던 잉게보르크 시편의 필사화가들도 기다림과 설렘에 예술의 창의와 상상을 묻혀서 아름다운 채색과 살붙임을 입힌 것이 아닐까. 잉게보르크 시편. 1195년. 304×204mm. 콩데 미술관, 샹티이. 1181~1203년. 퀼른 대성당 제단부. 성유물궤의 중앙 마름모꼴의 고미다락 부분에 격자창 뒤로 왕관을 쓴 동방박사의 유골들이 보인다.

발행일 2004-12-12 제2427호 14면

[노성두의 성미술 이야기] (40) 아브라함과 이사악

렘브란트. 1635년. 193.5×32.8cm. 에르미타주 미술관, 상트 페테르부르크. 렘브란트는 「유럽의 왕관」으로 일컬었던 17세기 암스테르담에서 미술의 기적을 일구었던 화가이다. 그러나 그가 그린 그림들은 잘 나가는 무역도시의 눈부신 햇살 대신에 인간의 영혼이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어두운 응달에 집중한다. 칼뱅주의가 판치던 네덜란드에서 민감한 종교 주제를 다루기란 살얼음을 걷는 것처럼 무척 위험한 일이었다. 그림 한 점 때문에 교회의 반목을 사는 일도 빈번했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은 렘브란트의 그림 가운데 가장 까다롭고 골치 아픈 작품이다.이 주제는 원래 르네상스 이후 병아리 화가들의 입시시험에 단골 출제되던 문제였다고 한다. 우선 등장인물들을 꼽으면 할아버지와 알몸의 어린이, 천사와 수양이 고루 나온다. 또 풍경화까지 배경에 깔린다. 더군다나 아버지가 아들을 잡아 죽이는 살벌한 줄거리 설정에다 하늘에서 날아온 천사까지 개입하는 극적인 반전까지 드라마틱하게 재현하려니 병아리 화가 지망생들은 머릿기름깨나 짰을 것이다. 그러나 렘브란트가 활동했던 시대에는 약간 사정이 달라져서 정치적인 색깔이 하나 덧붙는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가톨릭 종교개혁의 관점에서는 아브라함을 가톨릭교회 그리고 이사악을 프로테스탄트 교회로 보고, 죽이려다 살려준다는 창세기의 이야기를 프로테스탄트의 재개종을 권유하는 교화수단으로 삼았다. 그런 이유에서 네덜란드에서는 이 주제가 화가들이 결코 다루어서 안 될 「위험 주제」로 분류되었다고 한다. 그런 안팎의 사정들을 감안하면 『그런 거, 난 몰라』 하고 뚝심대로 밀어붙이는 렘브란트의 배포가 새삼스럽게 실감난다. 아브라함과 이사악 이야기는 모리야라는 곳의 산행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모리야가 어떤 곳인지는 알 수 없다. 성서를 통틀어서 딱 한 차례 더 나오는데, 둘이 같은 지명인지도 딱 부러지게 말하기 어렵다. 『솔로몬은 선왕 다윗이 환상으로 본 예루살렘 모리야 산에 야훼의 성전을 짓기 시작했다』(역대기 하 3, 1).모리야가 보이는 곳에서 하인들과 나귀를 멀찌감치 떼놓고,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에게 장작을 지게 한다. 불씨와 칼은 직접 챙겼다. 불씨는 작은 단지에 따로 보관했을 텐데, 위험한 물건을 아들에게 맡기지 않는 아브라함의 부성을 엿볼 수 있다. 창세기 22장의 기록을 보면 이사악이 이상한 낌새를 챘는지 아브라함에게 장작과 불씨는 있는데 왜 제물이 없는지 묻는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한다. 『얘야! 번제물로 드릴 어린 양은 하느님께서 직접 마련하신단다』참으로 지혜로운 대답이다. 나잇값을 제대로 한달까, 연륜이 곰삭아서 묻어나오는 이런 대답을 들으면, 우리는 아브라함을 도저히 미워할 수 없다. 여기서 잠시 창세기를 읽는 기분이 좀 이상해진다. 이사악은 지금 영문을 모르고 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아들에게 진실도 거짓말도 말할 수 없는 아브라함의 딱한 처지를 이해하면서도 무서운 비밀을 공유한 공범이 되어버린 심정이다. 아브라함은 이윽고 제단을 짓고 장작을 쌓는다. 그리고 아들을 찌르기 위해 팔을 뻗어 칼을 쥐었다(extenditque ma num et arripuit gladium ut immolaret filium 공동번역 성서에는 「아브라함이 손에 칼을 잡고 아들을 막 찌르려고 할 때」라고 옮겼다). 바로 그때 천사가 출현한다. 정확히 말하면 하늘에서 천사의 음성이 들려왔다. 당장 그만두라는 것이었다. 결국 이사악은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건진다는 해피엔딩으로 이야기가 끝마무리된다. 렘브란트의 그림에는 우리의 눈길을 끄는 부분이 있다. 천사와 아브라함과 이사악이 한 몸처럼 연결되어서 큰 S 형태의 구성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이 한 몸을 이루는 삼위일체에 대한 비유가 아닐까? 또 이사악이 알몸이 아니고 허릿수건을 두르고 있는 것도 다른 화가들의 작품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모티브이다. 렘브란트는 이사악을 혹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같은 운명이라고 해석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한 가지, 천사가 칼을 쥐었던 아브라함의 손목을 잡아채는 것처럼 그린 것은 약간 과장된 표현이다. 성서에는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라고 두 차례 소리쳐 부르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극적인 구성에 양념을 치느라 한 걸음 더 나간 것 같다.여기서 이사악의 운명을 그리스도의 수난과 연결 지어서 생각한 것은 렘브란트가 처음이 아니다. 사실 알고 보면 꽤 오랜 전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초기 교부문헌 가운데 가장 오래된 바르나바 서신(기원후 1세기)에 이미 이사악을 그리스도와 같은 의미의 맥락에 두고 있는데, 이사악이 미처 마무리 하지 못한 것을 그리스도가 완성한다는 논리이다. 이사악은 번제물(victima holoca usti)로 바쳐졌으나 실제로는 고통을 겪지 않았는데, 그리스도는 인간의 모든 고통을 다 겪고 또 그것을 넘어섰다는 식이다. 제사가 행해졌던 모리야도 예루살렘과 동일시된다. 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215년)는 「파이다고구스」에서 나무 장작을 진 이사악이 나무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의 모습과 닮았으니, 이사악은 그리스도의 예형이 틀림없다고 말한다. 교부 오리게네스(~254년)는 한 술 더 떠서 「창세기 주해」에서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면서 장차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미스터리를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시원시원하게 넘겨짚는다. 히브리서 11장을 근거로, 하느님은 죽은 사람까지 살릴 수 있다고 믿고 아들을 제물로 바쳤으니, 아브라함이 부활을 확신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만약 오리게네스의 답안지를 독일 고전문헌학자 니체가 읽었으면 F 학점을 매겨서 낙제를 시키지 않았을까,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한편, 바른생활 사나이로 유명한 베로나의 제노(~371/372년)는 아브라함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고 그럴 듯한 설명을 덧붙인다. 아브라함은 자식을 죽여야 하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기는커녕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는 것이다(Abraham nec dolor patrilacry mas persuasit sed exultat et gaudet). 인간으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또 실행할 수 있으니, 아브라함은 마치 선생님이 시키는 심부름을 즐겁게 해치우는 초등학생처럼 순수한 영혼이 아니겠냐고 말한다. 제노는 이사악도 스스로 제물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좋아했다고 주장한다. 바로 이 점이 그리스도와 닮았다는 것이다. 『이사악의 인격에는 그리스도의 경축할만한 탄생이 예시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의심할 여지없이 주님이시고 또 천상의 태생이지만, 인간의 씨앗에서 비롯되지 않았기에 유다인들이 그리스도에 적대하며 몹쓸 계획을 실행하였다. 한편, 이사악은 제단으로 끌려갔으나 죽음의 운명을 여의었다. 그러나 몹쓸 인간들은 기어이 그리스도를 끌고 갔다. 그리스도는 죄인취급을 받고도 아무 말씀이 없었고, 다만 그들이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슬퍼하셨을 뿐이었다』 제노의 설교는 이어진다. 『이사악을 대신하여 수양이 죽임을 당했다. 대신 죽은 것이다. 그리스도는 아담이 지은 죄를 대신하여 고통을 짊어지셨다. 남의 죄를 대속하신 것이다』「영의 전쟁」(Psychomachia)을 쓴 프루덴티우스도 아브라함을 참된 믿음의 본보기로 삼을만하다고 부각시킨다.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는 자는 모름지기 아브라함처럼 가장 귀한 것, 가장 사랑하는 것, 자신의 아들을 바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 당시에 팬 카페가 있었다면, 기꺼이 카페지기로 나섰을 것이다. 교부 아우구스티노(~430년)는 그의 책 「신국」에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히브리서 11장과 연관시켜서 설명한다. 아들을 장작에 살라서 번제물로 바치더라도 하느님이 언제든 되살려 주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것이다. 놀이기구 바이킹을 무서워하는 아이가 엄마가 옆에 앉아서 손을 잡아주면 조금도 겁을 내지 않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는 논리이다. 물론, 렘브란트가 교부들의 수많은 기록들을 시시콜콜 다 찾아서 읽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그러나 영혼의 가장 깊은 구석을 들여다보는 눈을 가진 화가에게 성서의 숨은 구절들이 결코 읽어내기 힘든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발행일 2004-11-28 제2425호 14면

[노성두의 성미술 이야기] (39) 성 예로니모

유학 시절 이웃에 살던 독일 할아버지는 작은 목조 이층집을 지어서 비둘기를 키웠다. 2차 대전 때 발을 다치는 바람에 비둘기 사육을 생계수단으로 삼고 있었는데, 어느 날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주셨다. 똑같은 사료를 먹고 보살핌을 받는 비둘기인데, 어떤 놈은 한 마리 가격이 20마르크, 어떤 놈은 2000마르크나 나간다는 것이었다. 무슨 차이가 있어서 그런지 여쭈었더니, 비둘기 발에다 편지를 매달아서 프랑크푸르트에서 뮌헨까지 날려 보내면 비싼 놈은 한 눈을 파는 법 없이 온갖 장애를 무릅쓰고 죽기 살기로 최단 시간에 임무를 완수한다고 했다. 그런데 싸구려 비둘기는 중간에 마인츠에 들러서 이웃 안부도 물어보고 또 레겐스부르크에서는 어여쁜 비둘기와 소개팅을 하고 정분이 나서 살림을 차리는 등 언제쯤 뮌헨에 편지를 전달할지 그야말로 하세월이라는 것이다. 할아버지의 설명을 듣고 문득 구약성서 욥기가 떠올랐다. 야훼께서 사탄과 내기를 하시는데, 욥이라는 이름의 바른생활 사나이를 사탄이 의심과 유혹으로 실컷 흔들어본다는 내용이다. 욥기 첫머리에서 야훼께서는 사탄에게 『너는 어디 갔다 오느냐?』고 물으신다. 사탄의 대꾸가 인상적인데, 『땅위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왔습니다』라고 말한다(욥 1, 7 circuivi terram et perambulavi eam). 하느님께서 사탄 같은 말도 안 되는 악종과 친히 대화를 나누신다는 것은 좀 뜻밖이다. 속으로 무척 내키지 않으셨을 텐데, 아마 우리들에게 세상을 쓸데없이 나돌아 다니며 방황하는 행위가 못돼먹은 사탄의 속성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그러신 것 같다. 그런데 독일의 시인 괴테는 『방황하는 영혼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욥기의 교훈과는 정반대이다. 이 말은 삶의 방황을 다 겪고 나서 시냇가 차돌맹이처럼 영혼이 말갛게 씻긴 다음에 털어놓는 파우스트적인 고백으로 들린다. 사실 교회의 웃어른으로 섬김을 받는 교부 가운데 아우구스티노도 얼마나 처절하게 방황을 겪었던가. 빈들에서 고행했던 안토니오에게는 사탄이 달콤한 처녀로 변신해서 알몸으로 유혹의 공세를 펼쳤다고 한다. 또 이탈리아의 플라젤란티라(flagellanti)고 불리는 수도자들은 영혼의 방황을 경계하려고 속에 엉큼한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참회의 각오를 다지기 위해 채찍이나 회초리를 들고 제 몸을 사정없이 후려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그러면 상처가 무척 심하게 날 텐데, 아마 품속에다 늘 빨간 약을 상비하고 다니지 않았을까, 쓸데없는 상상을 해 본다. 안토넬로 다 메시나. 46×36.5cm. 1474년. 국립미술관. 런던.성 예로니모(347년~419년)도 시쳇말로 한 방황을 한 인물이다. 우리가 오늘날 즐겨 읽고 인용하는 라틴성서가 바로 이 분의 번역이라고 한다. 학창시절에 외국어 영역에서 내신 일등급을 항상 도맡았던 모양인데, 이처럼 빛나는 성서 번역을 완성하고도 번역저작권 개념이 없던 시절이라서 인세도 변변히 못 챙기셨을 게 분명하다. 이탈리아 화가 안토넬로 다 메시나의 그림에서 성 예로니모는 서재에 앉아 있다. 옷이 추기경 차림이지만, 이건 약간 오해가 있다. 화가들이 성 예로니모를 두고 그렇게 박식하신 분이니까 틀림없이 추기경의 지위에 오르셨을 거야, 하고 막연히 어림짐작으로 그리기 시작한 것이 그만 후대의 미술 전통으로 굳어져버린 것이다. 널찍한 실내에는 근사한 서가가 서 있고, 책도 많이 꽂혀 있다. 그림 앞쪽에 테두리 형식으로 문을 내고 관찰자의 시선을 바깥으로 밀어낸 것은, 집필에 집중하고 있는 성자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화가의 조심스런 배려일 것이다. 덕분에 평면 그림 속에 그럴 듯한 원근법적 공간이 짜여졌다. 겉으로야 이렇게 착하고 똑똑한 모범생처럼 보이지만, 사실 성 예로니모도 젊은 시절에는 로마에서 못된 친구들과 사귀면서 인생을 탕진하기 바빴다고 한다. 그러나 많은 위인들이 그런 것처럼 성 예로니모는 곧 자신의 지난 과오를 깨닫고 뉘우친다. 고행의 좁은 오솔길을 선택한 것이다. 쓸쓸한 광야에서 홀로 전갈의 무리와 사귀고, 야생동물과 어울리던 성 예로니모는 때로는 지난 자책과 회한으로 몸부림친다. 해괴한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다. 한없이 이름다운 처녀들이 눈앞에 떼지어 나타나 맴돌이 춤을 출 때면, 꿈속에서 에로니모의 꺼진 욕망의 불길이 살아나곤 했다. 잠에서 깬 예로니모는 마음을 터놓는 옛 친구 에우스토키오에게 편지를 써서 영혼의 몹쓸 방황을 하고 말았노라고 털어놓는다. 남아 있는 편짓글을 읽으면 채찍과 단식으로 평화를 되찾은 수도자의 눈에 말라붙은 눈물자국을 확인할 수 있다.『그럴 때면 나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눈물을 흘리면서 내 가슴을 사정없이 때리지. 그러고 나면 하느님의 평화가 다시 깃들곤 한다네』위인전을 들추다가 이런 대목을 만나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많은 사람들이 칭송해마지 않는 위대한 인물들의 삶이 다만 휘황한 금박으로 덧칠되어 있다면 오히려 몇 줄 읽다말고 코웃음을 날렸을 것이다. 그러나 잘난 학식이나 체통 따위 걸림 없이 벗어던지고 알몸의 영혼을 드러내 보이는 것, 성 예로니모에게서 배울만한 참된 교훈은 이런 것이 아닐까. 위 그림의 부분 그림.

발행일 2004-11-07 제2422호 14면

[노성두의 성미술 이야기] (38) 마리아의 승천

마리아의 삶을 훑어보면 참 기구하다는 생각이 든다. 평생 사는 동안 기쁨과 은총도 많았고, 슬픔과 고통은 그보다 더 많이 겪었다. 신성을 잉태하고 인류를 구원하실 분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이천 년 전 한 시골마을 이름 없는 처녀로서는 쉽사리 감당하기 힘든 운명이었을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 스물 네 해나 더 살았다고 한다. 처음 천사를 만나서 아기를 점지 받았을 때가 열네 살이었고 이듬해 아기를 낳았다니까 여기에 예수님이 살았던 서른 세 해를 더하면 마리아는 일흔 살이 넘도록 수를 누린 셈이다. 물론 기록에 따라 임종 시점을 조금씩 다르게 보기도 한다. 성서에는 실려 있지 않지만, 제노바의 주교 야코부스 다 보라기네가 쓴 「황금전설」에는 마리아가 지상에서 보낸 마지막 나날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주교 야코부스는 13세기말, 그때까지 전해지던 수많은 성자전과 관련 문헌들을 수집하고 비교하면서 성서의 인물들과 성인들의 삶에 대한 기록들을 가감 없이 정리해두어서 교회전례력의 기초를 이루고 또 성 미술의 주제를 다루는 많은 화가와 조각가들에게 중요한 신학적 근거를 제공했다. 마리아는 노년에 산중에 은거하면서 단식과 기도의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사무치는 마음이 피어올라 먼저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의 생각이 마리아의 흉중을 사로잡는다. 또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솟으면서 마음을 흔들었다. 그 순간 마리아는 천사를 목격한다. 빛나는 광채를 뿜으며 날아온 천사는 손에 들고 있던 종려나무 가지를 마리아에게 건넨다. 임종의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마리아는 천사에게 두 가지 부탁을 한다. 첫째, 그리운 예수의 제자들을 살아 있는 동안 두 눈으로 다시 보았으면 좋겠다는 소망과 둘째, 못된 사탄이 당신의 영혼에 근접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천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건넨 종려나무 가지에는 어린 새순이 파랗게 나 있었는데, 잎사귀 하나하나가 마치 샛별처럼 아름답게 빛났다고 한다. 제자들이 마리아를 뵙기 위해 모인다. 소망이 이루어진 것이다. 마침 에페소에서 설교를 하고 있던 요한은 난데없이 흰 구름이 엉기면서 벼락이 치더니 곧 하늘로 들려 올랐다고 한다. 그리고는 곧바로 마리아의 대문 앞에 내려섰다. 마리아는 아들처럼 사랑하는 요한을 보자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근심을 털어놓는다. 유다인들이 마리아가 죽기만을 기다리면서 시신을 훔쳐다 태우겠다고 벼르고 있다는 것이다. 순진한 요한이 혼자서 마리아를 안심시키느라 진땀을 흘리는데, 때마침 다른 제자들이 모두 구름을 타고 마리아의 집 앞에 도착하면서 한 시름 놓았다고 한다. 여기서 수증기나 불포화 대기가 상승기류를 타고 응결점에 도달해서 생성된 구름이란 놈이 어떻게 인간을 탑승시킬 수 있으며, 항로표지장치도 없이 무슨 수로 마리아의 집으로 달려올 수 있었는지 신통한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런 문제야 공학도들이 해결할 문제고, 그림 그리는 화가들로서는 그날 마리아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모인 등장인물의 머릿수만 맞추면 되니까 공연한 일에 골치 썩일 필요가 없다. 루벤스는 「마리아의 승천」을 열두 차례나 그렸다. 똑같은 주제를 싫증도 안 내고 줄기차게 붙들고 있는 것도 어지간한 뚝심이지만, 빈 미술사박물관에 있는 작품은 높이가 4.58m나 되는 제단화라서 보는 사람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그림 앞에 서면, 그림 속 기적을 목격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그림 속 실물대 크기의 등장인물들이 그림 바깥으로 쏟아져 나올 것 같다. 마리아는 천사들의 시중을 받으며 승천하시는데, 밝고 고운 노랫소리가 하늘 가득히 울려나왔다고 한다. 아기 천사들은 그림에서 회오리바람처럼 휘감아 도는 구성을 이루고 있다. 이처럼 자연스러우면서 생동감 넘치는 역동적인 구성은 루벤스의 장기이다. 루벤스는 그림을 상단부와 하단부로 나누어서 마리아가 승천하는 장면과 제자들이 빈 무덤을 발견하고 당황하는 장면을 함께 재현한다. 마리아가 묻혔던 빈 무덤에는 웬일인지 시신은 간 데 없고 옷과 장미와 백합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마리아가 무덤에 남기신 옷은 믿는 이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가령, 노르망디 공작이 샤르트르를 침공했을 때였다. 샤르트르의 주교가 창끝에 마리아의 옷을 걸어서 깃발을 만들자 시민들은 두려움 없이 적군과 맞싸우기 위해 돌진했고, 깃발을 본 적군병사들은 모두 눈이 멀거나 미쳐서 사시나무 떨 듯 몸을 흔들다가 뻣뻣이 굳어서 죽어갔다는 것이다.마리아는 또 지상에 육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승천하셨는데, 이것을 두고 여러 교부들이 그 까닭을 설명한다. 가령 성 베르나르도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순교하시고 지상에 많은 성지를 만들어 우리에게 순례지를 정하셨는데, 굳이 마리아까지 그렇게 할 필요가 있겠는지 되묻는다. 예수님이 다른 제자들과 약간 차등을 두는 의미에서 마리아는 하늘로 불러들이셨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나아가서 성삼위일체론과 삼단논법을 무척 애용하는 성 아우구스티노는 세 가지 근거로 마리아의 육신 승천을 뒷받침한다. 첫째, 그리스도와 마리아는 한 가지 같은 몸인데 무릇 인간의 죄 많은 육신들처럼 벌레나 부패가 스며들 수 있겠느냐. 둘째, 그리스도의 보좌(寶座)가 하늘나라에 거한 것처럼 마리아의 고귀한 존재도 천상에 처소를 마련해야 하지 않겠느냐. 셋째, 마리아의 몸은 온전히 정결하시며 아기 예수를 잉태하고 낳으실 때도 온전히 정결하셨으니, 그로부터 영원히 온전하고 정결해야 함은 마땅한 노릇이 아니겠느냐. 책을 뒤적일 때마다 떠오르는 생각이지만, 성 아우구스티노는 영성도 뛰어나고 머리도 엄청 명석한 천재였던 것 같다. 더군다나 남들이 어려워하는 문제마다 족집게로 정답을 가르쳐 주니 여간 고맙지 않다. 화가 루벤스도 아마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굳건한 신학의 토대가 없었더라면 아무리 플랑드르 바로크 미술의 거장 루벤스라도 제단화를 그리는 붓이 이처럼 신바람을 내기는 어려웠을 테니까. 페터 파울 루벤스. 1613년. 458×297cm. 빈 미술사 박물관.

발행일 2004-10-24 제2420호 14면

[노성두의 성미술 이야기] (37) 유다의 입맞춤

조토 디 본도네. 1302~1305년. 200×185cm. 파도바 스크로베니 경당의 프레스코 벽화. 유다는 노란 옷으로 예수님을 감싸고 입을 맞춘다. 예수님의 등 뒤에는 베드로가 보인다. 요한의 복음서를 보면 베드로가 칼을 빼어서 대사제의 종 말코스의 귀를 잘랐다고 한다. 루가의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그의 귀를 다시 붙여주셨다고 한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칼을 든 자는 칼로 망한다』고 말씀하시면서 만류했다는데, 이 기록은 마태오가 남겼다. 어린이들이 열광하는 해리포터 영화 시리즈 가운데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를 보면 시커먼 망토를 걸치고 허공을 날아다니는 괴수들이 나온다. 이들을 디멘터라고 부르는데, 아즈카반 감옥을 지키는 간수들이다. 디멘터는 「기억을 지우는 자」라는 뜻인 것 같다. 디멘터와 입술이 닿은 수감자들은 머리 속에 간직하고 있던 행복한 기억들을 모조리 빼앗기고 만다. 괴수들이 좋은 추억을 빼앗아 삼키면 죄수들은 나쁜 기억만 남아서 고통의 늪에서 몸부림치게 되는데, 디멘터는 아무래도 드라큘라보다 나쁜 쪽으로 레벨업된 족속들로 보인다. 우리는 공공연히 입을 맞추는 관습이 없었지만, 서양 사람들은 오랜 입맞춤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가령 고대 로마 시대에는 죽은 사람과 마지막으로 입을 맞추면서 이별 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미술에서도 성모 마리아가 죽은 아들과 뺨을 맞대며 슬픔을 드러내거나, 막달레나가 죽은 라자로와 입을 맞추는 장면을 심심찮게 확인할 수 있다. 몇 해 전에 파리에 여행을 갔다가 지하철이나 에스컬레이터에서, 심지어 백주대로에서 횡단보도를 반쯤 건너다 말고 남들이 보든 말든 막무가내로 키스를 나누는 청춘남녀를 보고 공연히 쑥스러워 눈길을 피하던 기억이 난다. 아무래도 당대에 국제화가 되기는 어려울 모양이다. 예수님도 입맞춤의 추억이 있다. 베다니아에서 막달레나로부터 발에 입맞춤을 받으신 적이 있고, 또 유다로부터도 입맞춤을 받았다. 막달레나는 죄를 짓고 나서 입을 맞추었고, 유다는 입을 맞춤으로써 죄를 지었다는 점이 다르다. 유다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아주 못된 사람이다. 예수님을 배반한 죄목 때문에 그렇게 된 것 같은데, 덕분에 「배반자」라고 하면 서양에서는 감히 입에 담아서는 안 될 최고의 욕설로 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배반자」라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총이나 칼을 뽑아들고 결투를 할 정도였다. 가령 이탈리아 시인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서 지옥대왕 루시퍼와 나란히 동격으로 앉아 있는 악의 괴수가 다름 아닌 유다인 것만 보아도 배반자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얼마나 혹독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태초에 처음으로 죄를 지어서 우리 모두에게 유죄판결 받게 한 아담이 가장 나쁘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로마서 5, 18), 아담은 슬쩍 눈감아주고 유다만 썩은 고기 취급하는 것이 좀 특이하기도 하다. 이 그림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 조토가 그린 「유다의 입맞춤」이다. 조토는 미술 역사에서 「미술의 혀를 풀어주었다」라는 평가를 받는 화가이다. 미술사학자 뵐플린이 그런 평가를 내렸다. 고대의 시인들은 그림이란 입이 없어서 말을 못하는 벙어리 예술이라고 했다. 그런데 회화의 혀가 풀리고 굳었던 턱이 움직여서 말문이 틔었다니 조토의 그림 솜씨는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 조토 이후 르네상스 미술은 수다스러워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조토의 그림을 보면 입발린 말주변을 뽐내기보다 간결한 어휘로 뱉어내는 소박한 말투가 심금을 흔든다. 「유다의 입맞춤」은 여러 복음서에 기록이 남아 있는 중요한 사건이다. 예수님은 올리브 산에서 기도를 마치시고 잠든 제자들을 깨워서 내려오던 참이었다. 그때 경비병들과 무장을 갖춘 한 떼의 군인들이 등불과 횃불을 들고 다가왔는데(요한 18, 3), 이들은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보낸 무리로서 칼과 몽둥이로 무장하고 있었다(마태오 26, 47). 유다는 예수님을 발견하고 다가가서 입을 맞춘다. 그렇게 하기로 군인들과 약속을 해 두었던 것이다. 유다에게는 배신의 입맞춤이요, 예수님께는 수난을 예고하는 죽음의 입맞춤이었다. 조토의 그림에서 유다는 아주 흉악한 인상을 가진 전형적인 악당 유형으로 그려졌다. 그런데 유다는 왜 하필 입맞춤을 신호로 삼았을까? 그 당시 입맞춤은 흔한 인사 형식이었다고 한다. 우리로 치면 눈인사 정도하고 비슷하다. 그런데 올리브 산에서 일어난 그날의 사건 시점은 어두운 밤이었다고 한다. 또 으슥한 산중에서 일어난 일이니까, 기척이 잘 분간되지 않았을 것이다. 가령 산에서 캠핑을 하다보면 캄캄한 밤에는 아는 사람끼리도 지척에서 잘 알아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랬으니 유다를 따라온 무리들이 엉뚱한 사람을 용의자로 체포하는 낭패를 저지를 수도 있고, 예수님과 동행하던 제자들이 『내가 당신들이 찾는 사람이요』하면서 대신 나설 수도 있었을 것이다. 유다의 입맞춤은 이런 문제들을 일거에 해소해준다. 또 이런 것도 궁금하다. 유다는 예수님의 온갖 기적과 행적을 따라다니면서 다 목격했으니, 그분이야말로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예언자요 구원자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유다는 더구나 머리도 명석하고 매사가 딱 부러져서 회계 담당까지 맡았던 인물이다. 그랬으니, 자신이 저지를 죄악의 무게와 배반의 대가가 은전 몇 냥의 가치와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순전히 돈 욕심에 천하에 몹쓸 일을 저질렀다고 보는 것은 너무 단순한 해석이 아닐까? 예수님은 그날 밤의 비극이 「예언자들이 기록한 말씀을 이루려고 일어난 것」이라고 유다의 입맞춤과 배반행위를 설명하신다. 또 바울로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느님이 당신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 넘기셨다고 중언부언한다. 유다에게 책임을 묻는 대신, 하느님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해석한 것이다. 유다는 주님을 팔아넘긴 뒤, 크게 뉘우친다. 그리고 대사제들을 찾아가 돈을 돌려주고 『내가 죄 없는 사람을 배반하여 그의 피를 흘리게 했으니, 나는 죄인입니다』고 고백한다(마태오 27, 4).그의 뉘우침은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너희 가운데 나를 배반할 사람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저마다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불안하게 되물었던 제자들처럼 얼굴이 뜨거워진다. 우리는 오랫동안 유다를 상종 못할 인간 말종으로 취급했다. 예수님도 그렇게 생각하셨을까?

발행일 2004-10-10 제2418호 14면

[노성두의 성미술 이야기] (36) 성 게오르기우스와 악룡

「성 게오르기우스 코덱스」 출전. 14세기 후반. 372×252cm.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의 문서 수집실. 테러 탓에 세상이 뒤숭숭하다. 세상살이가 불안할수록 헤라클레스처럼 화끈한 영웅이 출현해서 교통정리를 좀 말끔히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한데, 신화에 자주 나오는 영웅담들도 혹시 이런 시대적 요구에서 탄생한 것이 아닐까? 그리스도교에도 헤라클레스와 쌍벽을 이루는 호쾌무연한 영웅이 없지 않다. 그 이름은 성 게오르기우스. 서기 303년경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대대적인 그리스도교 박해 때 굽힐 줄 모르는 소신 발언으로 참수형을 당한 순교성자이자 멋쟁이 기사였다. 여기서 잠시 옛날이야기 모드로 전환. 게오르기우스는 카파도키아의 귀족가문 출신으로, 창술이 뛰어난 군인이었다. 기록에는 없지만 체구도 무척 당당하고 얼굴도 관옥으로 빚은 듯 잘 생겼을 것이다. 게오르기우스는 어느 날 말을 타고 리비아의 해안 도시 실레나를 지나다가 이상한 풍경을 목격한다. 바닷가에서 아리따운 처녀가 겁에 질려 눈물을 흘리는데, 사람들이 잔뜩 모여서 처녀의 우는 모습을 쳐다보고만 있는 것이었다. 사연이나 들어볼 요량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처녀는 게오르기우스의 출현을 반기기는커녕 얼른 달아나라고 떠민다. 이 순간이었다. 가라, 못 간다, 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데 난데없이 악룡이 바다에서 머리를 내밀었다. 그리고 아가리를 쩍 벌리고 돌진하는 게 아닌가. 용은 서양미술에서 대개 못된 배역으로 나온다. 우리나라에서는 용꿈 꿨다면서 길운을 점치지만, 서양문화에는 묵시록의 영향 때문인지 좋은 말 듣는 용이 거의 없다. 바닷가에서 울던 처녀는 원래 실레나의 공주님이었다. 운 나쁘게 제비뽑기에서 양 한 마리와 함께 악룡의 끼니로 바쳐진 참이었다. 국왕이 딸의 희생을 애통해했지만, 악룡을 대적할 길이 없으니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로마 베드로 대성당의 문서 수집실이 소장한 채식 필사본 「성 게오르기우스 코덱스」에 실린 그림은 바로 이 순간을 재현하고 있다. 공주님이 두 손을 모으는 순간 말에 올라탄 우리의 주인공이 꼬나 쥔 창의 날끝은 이미 악룡의 아가리에 박혔다. 변변한 저항도 못하고 일격을 당한 악룡은 긴 꼬랑지를 뒤틀면서 고통에 몸부림친다. 바야흐로 영웅탄생의 순간이다. 게오르기우스의 겉옷이 신바람을 내며 펄럭인다. 잘난 주인을 태운 백마도 꼬리를 흔들어대는 것은 필사화가의 재치다. 게오르기우스의 잘 생긴 용모는 앞서 예견했던 그대로다. 여기서부터 전개되는 상황은 숱한 옛날이야기와 똑같이 진행된다. 임자 만난 악룡은 게오르기우스의 창을 정통으로 맞고 길게 드러눕고, 오늘의 주인공은 천행으로 목숨을 건진 공주님과 다정하게 손을 맞잡고 왕궁으로 돌아온다. 왕국의 절반을 뚝 잘라서 준다는 포상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도 어디서 많이 읽었던 내용이다. 「황금전설」에 기록된 성 게오르기우스의 영웅담이 혹시 헤라클레스가 물뱀 히드라를 때려잡는 장면에다가 페르세우스가 바다괴물을 퇴치하고 에티오피아의 공주 안드로메다를 구하는 장면을 보태고 여기에다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가멤논이 공주 이피게니아를 전쟁 제물로 바치는 장면을 얹어서 섞어 주물럭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 슬며시 의혹이 든다. 1막이 여기서 끝나고, 2막의 줄거리는 성안에서 이어진다. 게오르기우스는 공주에게 허리띠를 풀어서 숨이 아직 덜 끊어진 악룡의 목을 매게 한다. 목줄이 달린 악룡은 순둥이 애완견처럼 공주를 졸졸 따른다. 이들이 악룡을 끌고 성안에 들어오자 사람들은 산으로 바다로 도망치기 바빴다고 한다. 악룡이 내뿜는 독 기운이 도시를 몰살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게오르기우스는 국왕을 만나 담판을 벌인다. 악룡의 목을 칠테니, 그 대신 국왕더러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교에 입문하라는 요구였다. 국왕은 마치 방학 내내 미루어둔 숙제를 개학 전날 뚝딱 해치우는 초등학생처럼 얼른 세례를 받는다. 게오르기우스가 악룡의 목을 치자 세례를 받기 위해 몰려든 사람이 하루 동안 자그마치 2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게오르기우스의 슬기로운 총명을 읽을 수 있다. 다른 영웅들 같았으면 악룡의 목을 잘라 바치고 국왕의 사위가 되어서 권력을 나눠먹고 1막에서 물러났을 것이다. 그러나 게오르기우스는 악룡의 목숨을 붙여두었다가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비즈니스 수완을 발휘한다. 스토리는 3막으로 넘어간다. 약속했던 대로 산더미 같은 재물이 게오르기우스 앞에 쌓였다. 그런데 게오르기우스는 제몫의 재물을 챙기기는커녕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준다. 나랏님도 못한다는 빈민구제를 보란 듯이 실행해 보인 것이다. 잘 생겼지, 용기 있지, 싸움 잘 하지, 착하지, 이웃사랑의 정신에 충만한 데다 황금을 돌보듯 하고 비즈니스 감각마저 뛰어나니 이런 사윗감 요즘 세상에 쉽지 않다고 생각한 국왕은 게오르기우스의 빛나는 행적을 기려 교회를 큼직하게 짓고 성모 마리아께 헌정한다. 그러나 만날 인연이 있으면 헤어질 인연도 있게 마련. 게오르기우스는 어느 날 국왕을 친견하고 네 가지 긴요한 가르침을 새기게 한다. 첫째, 교회를 잘 보살필 것. 둘째, 사제들을 공경할 것. 셋째, 미사를 빼먹지 말 것. 넷째, 가난한 사람들을 항상 돌볼 것. 할 말을 마친 게오르기우스는 올 때 그랬던 것처럼 빈 몸으로 홀연히 떠나간다. 이런 점도 다른 영웅들과 다르다. 가령 헤라클레스는 테스피우스가 다스리던 왕국을 찾아가서 나라의 근심거리였던 흉폭한 사자를 목 졸라 죽인 뒤, 그 대가로 하룻밤에 공주님 쉰 명을 몽땅 임신시키지 않았던가! 그리고 열 달이 지난 뒤 배가 부른 공주님 쉰 명이 모두 한날에 도합 쉰두 명의 아들을 본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아기가 쉰둘이 된 것은 첫째와 막내 공주가 쌍둥이를 낳아서 그랬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시시콜콜한 뒷사정이 중요한 것은 아니고, 요컨대 게오르기우스는 헤라클레스와 달리 실레나 왕국의 공주님이 보내는 애타는 눈길을 본 척 만 척 사심 없이 제 갈 길을 떠날 줄 알았다는 사실만큼은 짚어둘 만하다. 그 후 게우르기우스가 전 세계 그리스도 교인들의 앙케트에서 「휴가를 함께 가고 싶은 남자」, 「단 둘이 데이트하고 싶은 남자」, 「무인도에 함께 남고 싶은 남자」 등등 모든 조사 분야에서 1순위를 휩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앙케트 통계수치는 신뢰도 99%에 오차 범위 ±1%.

발행일 2004-09-19 제2416호 14면

[노성두의 성미술 이야기] (35) 십자가 책형

올림픽 경기를 관람하다가 눈길을 끄는 장면을 목격했다. 우리나라 구기 종목 선수들 가운데 승리가 확정되자 경기장 바닥에 덥석 꿇어앉아서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올리거나 성호를 긋는 것이었다. 전 세계 시청자들의 이목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의 종교적 신념과 의지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한 배짱으로 보였다. 다른 나라 선수들은 애써 이겨도 기껏 두 손을 번쩍 들고 자기네끼리 얼싸안을 뿐, 눈을 지긋이 감고 합장을 하면서 묵주를 돌린다거나 알라신을 모신 성지를 향해 카페트 깔아놓고 큰 절을 올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배짱들이 아무래도 우리 선수들보다 좀 떨어지는 것 같았다. 이런 식의 손짓 몸짓 언어는 사실 오랜 상징적인 의미를 감추고 있다. 종교마다 제각기 이런 상징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그리스도교의 대표 상징을 하나 들라면 가장 먼저 십자가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십자가는 원래 예수님의 수난 도구였다. 해골산이라는 뜻의 골고타에 올라서 나무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당하신 이야기는 요한 복음서 19장에 나와 있다. 그때는 아직 사형폐지론 같은 논의가 없던 때라서 시시때때로 처형이 이루어졌던 모양인데, 예수님이 매달리실 때도 도적 두 명이 함께 집행되었다. 그림1은 카스틸리아의 블랑카 기도서에서 그리스도의 수난 이야기를 다룬 장면을 보여준다. 고딕 전성기에 탄생한 작품답게 그림 구성이 꼭 중세 고딕 성당의 색유리창과 닮았다. 그림 안에 모두 네 개의 원이 서로 겹쳐 있는데, 각각의 내용에 따라 위계가 정해졌다. 맨 위쪽 둥근 그림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그 아래를 지키는 마리아와 요한을 그렸다. 십자가 어깨 위로 해와 달이 붙었다. 원래 「유다인의 왕 나자렛 예수」라고 쓴 명판도 붙어 있어야 하는데, 웬일인지 보이지 않는다. 요한 복음서에는 빌라도가 직접 써서 십자가 위에 붙였다고 하니, 빌라도의 필력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아쉽다. 가시나무로 엮은 왕관도, 발받침대도 빼놓고 안 그렸다. 그림에서 두 번째 아래에 붙어 있는 원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내리는 장면을 재현한다. 이때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가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었다고 한다. 이들은 침향을 섞은 몰약과 고운 베를 준비해 와서 약식 장례를 치렀다는데, 밤에 십자가에 올라가서 일을 하려면 횃불과 사다리 그리고 대못을 뺄 때 쓰는 장도리 같은 것들도 다 챙겨왔을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조연급이라서 그런지 조금 작게 그렸는데, 이것은 등장인물의 역할과 중요성에 따라 크기에 차등을 두는 이른바 「가치 비례」의 원칙을 따랐기 때문이다. 실제로 눈금자를 갖다대면 안 그렇겠지만, 심리적으로는 존경하는 사람이 좀 우러러 보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까까머리 시절, 학력고사 성적이 잘 나온 친구를 보면 괜히 나보다 키가 더 커 보이고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것처럼 생각되던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림의 좌우에 붙은 원 안에는 여자 모습을 한 에클레시아와 시나고그가 서 있다. 이들은 교회와 유다교 회당을 나타낸다. 교회를 의미하는 스페인어 「이글레시아」, 이탈리아어 「키에사」, 프랑스어 「에글리즈」 따위가 알고 보면 모두 「에클레시아」에서 나온 말이다. 그림에서 에클레시아는 십자가와 잔을 하나 손에 들고 있다. 유럽에서는 로마네스크 시대부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흘리신 붉은 핏방울을 그냥 땅에 흘리기 아깝다고 생각하고 귀하게 여기기 시작했는데, 이 그림에서 에클레시아가 들고 있는 것이 바로 보혈을 담은 성배이다. 고딕 시대로 넘어가면 비탄에 빠진 날개 달린 천사들이 십자가 주위에 몰려들어서 에클레시아가 들었던 성배를 대신 들게 된다. 한편 시나고그는 두 눈을 띠로 묶어서 가리고 부러진 창을 쥐고 있다. 시나고그는 이따금씩 남자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미술에서는 여자로 나타날 때가 더 많다. 십자가는 애당초 처형과 고통과 수치의 상징이다가 예수님이 달리시는 바람에 의미가 180도 달라진다. 수난과 대속과 구원의 상징이 된 것이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그런 몹쓸 데 달리신 모습으로 그릴 수 없다고 해서 아예 그림을 그리지도 않다가, 586년 라불라 수사가 시리아의 자그바 수도원 복음서 그림에 처음으로 그려넣은 것이 현재 피렌체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에 남아 있다. 그 후 692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앞으로는 십자가를 한쪽 다리로 세워 들고 있는 어린 양 대신 예수님을 직접 그리기로 결정하면서 십자가 책형의 도상이 미술에서 봇물을 이루기 시작한다. 이것은 십자가가 양떼를 치는 선한 목자나 물고기 같은 전통적인 상징을 밀어내고 그리스도교의 명실상부한 얼굴을 대신하면서 일어난 현상인데, 세속의 황제들도 왕관에 십자가 표식을 붙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라틴 지역에서는 황제 발렌티아누스 3세(서기 402~455년 재위), 동로마제국에서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518~528년 재위)가 십자가 왕관을 처음으로 만들어서 머리에 썼다고 한다. 카스틸리아의 불랑카 기도서에 등장하는 「십자가 책형」(그림2)을 보면 십자가 나무의 너비가 꽤 좁다. 십자가 나무는 처음에 몸의 윤곽선을 다 덮을 만큼 넉넉한 크기로 켜서 쓰기 시작하다가 1000년경부터 차츰 좁아진다. 십자가가 주인공도 아닌데 공연히 키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비슷한 무렵, 예수님도 있는 대로 다 껴입었던 겉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갑자기 허리수건 하나만 걸치는 대담한 변화를 보이는데, 이런 대담한 파격 패션은 그 후에 그리스도교 미술의 정식 도상으로 굳어진다. 감정 기복이 심했던 북유럽 화가들이 예수님의 허리수건을 울부짖듯 바람에 펄럭이는 형상으로 재현하면서 종교적 격정과 수난 드라마의 클라이막스를 표현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예수님의 두 발에 못을 각각 하나씩 두 개 친 것도 눈길을 끈다. 미술에서는 고딕 시대 전성기를 지날 무렵 두 발을 겹쳐 모으고 못 한 대를 치는 새로운 관례가 유행한다. 그러니까 사지에 못을 네 개 치다가 세 개로 줄인 셈인데, 못을 한 대 줄이면서 완전히 다른 도상이 탄생한다. 못을 하나씩 따로 치면 뻣뻣한 차렷 자세밖에 나오지 않는데, 한 대의 못으로 두 발을 모아서 치면 두 다리의 자세를 우아하게 변화시킬 수 있어서 화가와 조각가들이 무척 선호했다. 못 세 개는 또 육신, 정신, 영혼의 세 가지 고통을 의미한다는 해석도 덧붙었다. 그림 속에서 예수님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무척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계신다. 팔 다리도 힘없이 늘어져 있다. 이것도 달라진 것이다. 이전에는 두 팔을 활짝 펴고 수염 없는 얼굴에 눈빛을 빛내면서 고개를 똑바로 들고 있는 씩씩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덥수룩한 수염에 고통과 신음을 뱉어내는 모습으로 바뀐다. 영웅적인 승리자가 갑자기 죽음 앞에서 번민하는 인간적인 모습으로 돌변한 것이다. 이런 변화는 종교 미술의 사회적 기능이나 전시맥락과도 관계가 없지 않았다. 옛날 사람들은 이런 그림을 보면서 수난의 의미를 새기고 인내와 겸손의 가치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교부 아우구스티누스가 「교만」을 누르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십자가 수난의 기억을 들었던 것도 이해가 간다. 카스틸리아의 블랑카 기도서. 1230년경. 280×200cm. 파리 아르세날 도서관.조토의 제자. 1330년경. 58×33cm. 베를린 쿨투어포룸. 예수님의 두 발은 못 하나로 모아서 쳤다. 십자가 발치에 막달레나가 매달렸다. 성모 마리아가 쓰러지면서 요한의 부축을 받는 것은 14세기 이후의 미술 전통이다. 이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탈리아 화가들은 가시나무 왕관을 그리는 일이 드물었다.

발행일 2004-09-05 제2414호 14면

[노성두의 성미술 이야기] (34) 부자와 라자로

어디선가 우리나라가 OECD 회원국 가운데 빈부격차가 최고라는 통계를 읽은 적이 있다. 떼돈 들여서 자식들 줄줄이 조기유학 보내고는 기러기 아빠의 애환 운운하는 거야 그런대로 봐 준다 쳐도, 해외 골프원정이랍시고 동남아 캐디들 성희롱하다 나라 망신시키는 코리언 기사를 읽을 때면 한 번 만나서 골프채로 이마라도 한 대 갈겨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 이렇게 기분 심란할 때 읽기 좋은 것이 바로 루가의 복음서다. 루가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무척 각별했던 것 같다. 가령 예수님의 입을 빌어서 이런 말을 한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루가 6, 21).이런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에서 좀처럼 찾을 수 없는 통쾌한 발언이다. 그 당시 부자들이 이런 말 듣고 내심 뜨끔했을 텐데, 이러다 루가가 있는 사람들한테 따돌림 당하지 않았을까 걱정스러워진다. 루가는 마리의 노래에서도 일방적으로 가난한 사람들 손을 들어준다. 『배고픈 사람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루가 1, 53).가사가 참 좋다. 그런데 여기서 「배고픈 사람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다」(esurientes implevit bonis)는 말은 「맛 나는 먹을 것으로 포식을 시키신다」는 뜻이 아니라 「재산을 늘려주신다」, 또는 「재물을 넉넉히 베풀어서 살림살이가 활짝 펴지게 도와주신다」라는 뜻이다. 또 「부자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신다」(divites dimisit inanes)라는 번역도 표현이 너무 완곡하다. 「부자들은 빈털터리로 만들어 쫓아내신다」로 고쳐 읽는 것이 나을 것 같다.어쨌든 루가가 개인적으로 가난에 무슨 한 맺힌 과거를 가진 사람인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가난한 사람을 늘 가엾게 여기고 부자들은 왠지 곱지 않은 눈으로 보았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무엇보다 루가의 속마음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을 하나만 더 꼽으라면 그건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일 것이다. 이 그림은 독일의 세종대왕으로 불리는 오토 시대의 하인리히 3세의 에히터나흐 필사본 그림이다. 성서에 나오는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를 삼 층짜리 그림 띠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는데, 위로부터 한 칸씩 내려가면서 읽으면 된다. 맨 위 그림은 부자가 식탁이 부러지게 진수성찬을 즐기고, 문밖에서 라자로가 음식 부스러기가 혹시 떨어지지 않을까 고대하는 장면이다. 라자로는 온몸에 종기가 난 거지였다. 부잣집 대문간에 「사람들이 들어다놓았다」(qui iacebat. 루가 16, 20)고 하니까 추측컨대 풍이 심하게 들어서 운신이 부자연스러웠던 것 같다. 한편 부자는 「화사하고 값진 옷」을 입고 날마다 먹고 마시면서 즐거운 인생을 보냈다고 한다(루가 16, 19). 그러니까 로마 시대 원조 웰빙족쯤 되었던 모양이다. 여기서 부자가 입은 「화사하고 값비싼 옷」(purpura et bysso)은 「자홍색 겉옷과 고급삼베로 짠 속옷」인데, 자홍색 겉옷은 예로부터 그리고 로마 시대에 황제와 일가 귀족들의 특권이었고 (판관기 8, 26과 창세기 49, 10) 고급삼베는 이집트 수입직물로 지은 사제의 옷감(batistes. 출애굽 25, 4와 28, 5)이니까 옷차림만 봐도 주인의 신분을 대강 짐작할 만하다. 필사본 그림에서 둘째 계단은 라자로가 죽고 그의 영혼을 천사들이 인도하는 장면이다.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라자로는 마치 어머니 품에 기어든 아기처럼 편안해 보인다. 말이 좋아서 천사의 인도를 받았다지만, 장례식도 못 치르고 어디 외진 곳에 버려져서 까마귀밥이 되었을 게 틀림없다. 필사본의 마지막 계단에는 부자의 임종 장면이 보인다.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고 난 뒤, 곧 죽음의 세계에서 고통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실감나게 그렸다. 루가의 비유 이야기는 줄거리 설정이 무척 자극적이다. 부자와 거지라는 신분 대립도 그렇지만, 생전과 사후에 두 사람의 운명이 180도 바뀐다는 극적인 뒤집기도 너무 작위적인 연출의 냄새가 풍긴다. 게다가 줄거리에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루가에 따르면 라자로가 천국 자리를 차지한 이유는 생전에 가난하고 굶주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꼭 경건한 삶을 살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가난했던 것도 천성이 게으르거나 아침형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일 수 있다. 너무 앞뒤가 생략되어 있어서 성서를 읽다가도 얼떨떨할 지경이다. 그러나 루가의 관심사는 라자로보다 부자에게 있는 것 같다. 부자는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다. 이 결말도 너무 전형적이다. 대관절 비유의 속뜻은 무엇일까? 루가는 비유를 통해서 부의 소유자로서 부자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부를 소유하고 누리는 방법에 대한 경고를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닐까? 옛날 옛적에 부자와 거지가 살았는데, 제각기 지옥과 천국으로 갔다는 플롯의 설정은 권선징악이나 사람 팔자 돌고 돈다는 식의 뻔한 상투적인 내용을 넘어서 우리에게 또 다른 교훈을 가리켜보인다. 그것이 기쁨이든 고통이든 혼자서 끌어안고 짊어지는 삶보다 이웃에게 눈을 돌리고 더불어 나누는 삶이 가치 있다는 그런 교훈. 담장으로 울타리를 둘러치고 행복의 나라에 안주하고 만 것,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즐기느라 식탁 아래의 그늘진 풍경을 살피지 않은 것, 이처럼 자신의 삶과 세계 바깥의 다른 삶과 세계에 대한 무관심은 스스로 깨닫기 어렵다는 점에서 참으로 무섭고 두렵다. 누구에게도 무관심한 부자라면 하느님과의 관계에도 무심했을 게 뻔하다. 『나는 누가 뭐래도 이대로 행복해. 하느님? 웃기지 말라고 그래!』 하면서 콧방귀를 뀌었을 테니까. 부자는 비록 죽은 뒤였지만, 또 다른 세계, 홀로 행복할 수 없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의 자각이 실로 충격적인 체험이었을 것이다. 뒤늦게 깨우친 부자는 살아 있는 제 형제들이 회개하도록 라자로를 다시 세상에 보내달라고 아브라함에게 간청한다. 제 처지에 아랑곳하지 않고 남은 형제들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것을 보면 부자도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비유의 칼날이 뿜어내는 부드럽고 오싹한 냉기를 실감한다.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는 착하고 나무랄 데 없는 성품을 지닌 부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남의 고통과 아픔을 못 본 척 지나친다는 점 하나만 빼놓으면 서로 마음 터놓고 평생 친구로 사귀고 싶은 그런 인간미 넘치는 부자들이! 하인리히 3세의 에히터나흐 필사본. 1030년경. 446×310㎜. 뉘른베르크 게르만 박물관. 라자로는 그리스어로 「도움 받을 길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히브리어 이름으로 쓰면 엘사자르 또는 엘리제르가 되는데, 이번에는 거꾸로 「하느님이 도우신다」(El-azar)는 뜻이 된다. 지옥에 떨어진 부자는 아브라함을 아버지(pater)라고 부른다. 또 아브라함은 부자를 아들아(fili)라고 부른다. 더구나 부자와 그 형제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을 섬긴다는 대목을 보면 부자가 바로 이스라엘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루가 16, 24~31).

발행일 2004-08-15 제2411호 14면

[노성두의 성미술 이야기] (33) 가나의 혼인잔치

살림살이가 힘들고 고단할 수록 한 방의 인생역전을 노리는 사람들이 늘어난다고 한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는데, 내 인생에도 화끈한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 복권이나 로또에 목을 맨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기대와 실현 사이의 극단적인 편차가 만들어낸 순수한 가공의 괴물이 기적이란 놈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기적처럼 실제로는 드물게 일어나면서 모든 사람이 소망하는 것이 세상에 또 있겠느냐 말이다. 요한의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이 일곱 가지나 열거되어 있다. 요한처럼 정직하고 꽉 막힌 사람이 깜짝 기적 레퍼토리로 이야기 꾸러미를 풀어가다니, 그 때 사람들도 기적을 무던히 좋아했나 보다. 그 가운데 첫 번째(initium signorum)가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다. 예수님과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제자들이 갈릴래아 근처의 가나라는 조그만 시골마을에서 벌어진 혼인잔치에 초대를 받았다고 한다. 옛날 잔치는 호텔식이 아니라서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았던 모양이다. 저물도록 먹고 취하면서 제법 흥이 오르고 있는데, 갑자기 분위기를 깰 수 있는 중대 사안이 발생했다. 술이 떨어진 것이다. 술 없는 잔치는 판돈 없는 노름판처럼 시시한 법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마리아가 예수님께 은근히 눈치를 주셨다고 한다. 예수님의 반응은 이랬다. 『어머니, 그것이 저에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아직 제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어머니께 드리는 말대답치고 꽤 무뚝뚝하게 들린다. 여기서 『저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말은 다윗과 엘리사도 같은 말을 쓴 일이 있고 성서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인데, 직역을 하면 단순히 『우리 사이에는 무슨 공통점이 있습니까?』라는 뜻이고, 구어체로 옮기면 『됐네요』라고 하면 그만이다. 그러니까 결코 무례한 응대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아직 때가 오지 않았다』는 또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일까? 요한의 복음서를 뒤적이면 아니나 다를까, 한참 뒤쪽에 기다렸던 표현이 등장한다. 『아버지, 이제 때가 왔습니다』 (요한 17, 1). 이 말은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과 함께 있었던 시간을 정리하고 기도를 하시면서 내뱉은 말씀이다. 배신과 체포 그리고 예정된 수난을 앞두고 예수님은 오죽 속이 상하셨을까? 그런데 오래 전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했던 말과 아귀를 맞춰내시는 것을 보면 기억력과 논리력 평가점수에 만점을 드려도 좋을 것 같다. 혼인잔치의 기적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일이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순순히 그 입장을 수용하신다. 다만 하인들에게 이렇게 이르셨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 5).마침 그곳에 물독이 여섯 개 있었는데, 하인들더러 물을 가득 부어서 채우게 하고 다시 퍼서 잔치 맡은 이에게 갖다 주게 하셨는데, 어느새 물이 포도주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요한의 증언에 따르면 이것이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행하신 첫 번째 기적이었단다. 그런데 기적치고는 좀 시시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상황도 좀 어색하다. 우선 이런 궁금증이 든다. 예수님은 왜 그런 자리에 참가하셨을까?예수님이 참석하신 것은 혼인식이었다. 설교를 하거나 병든 이를 고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하객들 사이에 자리 잡고 신랑신부 앞날을 축하하고 피로연을 즐기기 위해서였다. 예수님은 늘 무거운 짐 진 자, 박해받는 자, 고통에 신음하는 자들 사이에만 계시는 줄 알았는데, 경우에 따라 술도 몇 사발 흔쾌히 들이키는 유쾌한 면모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포도주는 성서에 기쁨과 즐거움의 상징으로 자주 나온다. 혼인식도 축복이라는 말뜻과 하느님의 잔치 초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가령 이런 대목이 떠오른다. 『하늘나라는 어느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를 베푼 것에 비길 수 있다』(마태오 22, 2).『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기다리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갔고 문은 잠겨졌다』(마태오 25, 10).『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자. 어린 양의 혼인날이 되었다』 (묵시록 19, 7).더군다나 태초에 하느님이 보시기에 혼자 있는 아담이 딱해서 짝을 만들어 혼인을 시켜주신 것을 보아도 혼인의 긍정적인 의미는 충분히 알 수 있다(창세기 2, 18).말하자면, 예수님은 축하인사를 겸해서 또 축의금 봉투 대신에 술을 한 턱 쏘셨다는 이야기인데, 다운 된 결혼 피로연 분위기 업 시키는 일이 정말 초자연적인 능력의 개입을 요구할만큼 심각하고 긴박한 사안이었는지 의구심이 든다. 그러나 냉큼 술도가에 달려가서 새 술 받아오라며 두툼한 지갑을 꺼내들고 하인들에게 고액권 지폐를 건네는 예수님의 모습은 더 상상하기 어렵다. 그냥 요한의 기록대로 놓아두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이 날 포도주로 바뀐 것은 두 세 동이 돌 항아리 여섯 개였다고 한다. 여기서 「동이」는 「메크레테스」의 단위를 옮긴 말인데, 39리터에 해당한다. 두세 동이 들이 여섯 항아리면 대강 600리터쯤 된다. 하객들이 이미 엔간히들 취했을 텐데, 피로연 파장할 무렵에 좋은 새 술이 나왔으니, 그날 다들 집에도 못 들어가고 외박을 했을 것이다.기적이 일어난 돌 항아리는 원래 유다인들이 정결예식을 행하는데 쓰는 물독이었다고 한다(요한 2, 6). 유다인들은 가령 죽은 사람과 접촉을 하면 제 몸이 불결해졌다고 생각하고 정결의식을 행하였다. 그렇다면 이날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이 선보이신 최초의 기적은 혹시 지금껏 행해지던 유다인들의 정결의식을 물이 아닌 포도주로 대신함으로써 영혼의 참된 정결을 꾀하려던 의도는 아니었을까? 여기서 포도주를 구원이란 말로 바꾸어 읽으면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마리아의 말은 「구원을 베풀어 달라」는 요구로 들린다. 그리고 나중에 「때가 되었다」는 말씀도 이해가 간다. 예수님은 대수로울 것도 없는 일상사의 그릇 안에 이처럼 신성한 의미를 담아내기 좋아하신다. 잔치 맡은 이는 예수님의 기적을 눈치 채지 못하고 신랑이 새 술을 꺼낸 것으로 생각한다. 신랑만 치사를 받게 된 것이다 영문도 모르고 비싼 포도주를 베푼 것으로 된 그 신랑은 그러나 주님을 그 자리에 초대했다는 것으로 우리의 본보기가 된다. 주님을 우리의 삶에서 언약을 이루는 혼인식에 증인으로 모시는 것, 참으로 훌륭한 결정이었던 것 같다. 우리도 앞으로 신랑신부의 청첩장 발송 리스트에 주님 이름을 빼먹지 말아야 하겠다. 포도주의 주성분이 물이기는 하지만, 물에서 뚝딱 포도주를 만든다는 것은 바위에서 물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또는 죽음에서 새 생명을 피워내는 것처럼 아주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님의 권능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뒤늦게야 깨닫는다. 따지고 보면, 성서 기록처럼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것은 별로 대수롭지 않은 기적일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들 사이에 절망이 희망으로, 불신이 경건으로, 미운 마음이 사랑으로 바뀌는 기적다운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면. 장 드 베리 공작의 기도서. 28×20㎝. 1404~1408년. 파리 국립도서관 소장. 결혼식 신부가 그림 한복판에 뻣뻣하게 앉아 있다. 오른쪽은 마리아와 예수님, 왼쪽은 신부의 부모로 보인다. 하인 둘이 식사를 시중하고 물독을 대령했다.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에서 예수님은 마법의 지팡이를 자주 사용하셨지만, 여기서는 축복의 손짓 하나로 기적을 행하신다. 마리아는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그림에서는 북유럽 특유의 덧셈식 원근법적 공간처리가 눈길을 끈다. 두쵸 디 부온인세나. 47.6x50.1cm. 1308~1311년. 시에나 두오모 박물관 소장

발행일 2004-08-01 제2409호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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