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신앙 깊어가는 믿음

[내리신앙 깊어가는 믿음] (30·끝) 누군가 나의 신앙을 흔든다면 이렇게 이야기합시다

“저와 남편은 주일학교 교사회에서 만나 결혼하여 아이들의 신앙교육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그런 제가 동네 엄마들 사이에서 소위 왕따가 되어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복사를 서는 날에 학원 보충을 빠지게 하고, 영어캠프보다 성당캠프 일정을 먼저 챙기는 저는 이상한 엄마가 되어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제가 잘못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흔들립니다. 신부님, 지혜가 필요해요.” 신자로서 잘 살아가려고 애쓰는 부부와 그런 노력 안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흐뭇하고 한편으로는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며 신앙의 가치를 지켜내는 노력이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의 철학자 프랑코 베라르디(Franco Berardi)는 한국 사회를 ‘끝없는 경쟁, 극단적 개인주의, 일상의 사막화, 생활 리듬의 초가속화’라는 4가지로 짚고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이 특징 속에는 하느님께서 당신 모상대로 창조하신 ‘존엄한 인간’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치 지옥의 특징을 이야기하는 듯한 사회 속에 우리의 아이들을 밀어 넣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안의 자유의지는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뭔가 잘못되었다고 말입니다. 만약 이런 세상의 흐름 속에서 나의 자녀가 뒤처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조급하고 불안한 마음이 든다면 자녀가 아기였던 시절을 잠시 떠올려보길 바랍니다. 한 아기가 첫걸음마를 떼기 위해서는 수만 번 용을 쓴 끝에 먼저 뒤집기에 성공해야 하고, 뒤집고 나면 앉기를, 앉고 나면 잡고 서기를 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잡고 선 후에는 잡은 채로 걸음마를 연습하는 일을 수도 없이 반복한 끝에 아기는 비로소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는 듯 손을 뗍니다. 아주 의기양양하게 말이지요. 이처럼 자녀의 영유아기를 경험한 부모라면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첫걸음마가 빠르고 느린 것이 아이의 지능 발달이나 성장에 큰 영향을 주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성장에 지름길, 속성코스란 없으며, 아이들은 각자의 때가 왔을 때 끝내 도약을 이루어낸다는 것을 배우게 되지요.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재촉할수록 우리는 경쟁에 쫓기기보다 인간 삶의 궁극적인 목적인 행복을 향해 긴 숨으로 한 걸음 한 걸음을 가야 합니다. 막시밀리아노 콜베 성인은 삶이 행복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큰 뜻(의지)에 우리의 작은 뜻(의지)을 일치시켜야 한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이 두 가지가 일치할 때 인간은 평화와 기쁨, 안정감을 느끼며, 어긋나는 경우 십자가가 만들어져 고통과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는 시의 구절처럼 비록 하느님의 뜻과 나의 뜻 사이에서 흔들리면서도 줄기를 곧게 세워가는 과정, 즉 더 큰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며 뿌리를 튼튼하게 돋우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자녀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 보스코 성인은 자녀가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면서도 사회 안의 중요한 일원이 되도록 키워낼 것을 강조하며 ‘착한 그리스도인(Good Christian), 정직한 시민(Honest Citizen)’이라는 균형 있는 자녀교육의 목표를 제시합니다. 착한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와 개별적인 우정을 맺은 믿음의 사람, 가톨릭 공동체 안에서 신앙을 증거하고 일·가정·사회 안에서 사제직·왕직·예언직을 수행하는 사람, 인생의 단계마다 식별의 중심을 예수님의 뜻에 두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정직한 시민은 자신의 재능을 충실히 갈고 닦아 자아실현을 이뤄내는 사람, 복음 정신으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주는 사람, 인간 존엄성과 정의와 평화를 실천하여 공동선에 기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처럼 하느님 안에서 정당성을 가지면서 사회적으로도 복음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있도록 균형 있게 자라난 아이는 긴 호흡으로 자신이 받은 탈렌트를 잘 키워가며 행복을 향해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큰 뜻 안에서 굳건하게 우리 믿음의 방향에 확신을 가지십시오. 바오로 사도가 신앙의 전통 안에서 성장한 티모테오에게 “그대는 믿음의 말씀, 그리고 그대가 지금까지 따라온 그 훌륭한 가르침으로 양육을 받아 그리스도 예수님의 훌륭한 일꾼이 될 것입니다”(1티모 4,6)라고 찬사를 보낸 것처럼 신앙 안에서 자란 우리 자녀들도 하느님의 사람으로 그리고 이웃과 세상의 유익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으로 자라날 것입니다. 그러니 흔들리지 마십시오. ※그동안 ‘내리신앙 깊어가는 믿음’을 집필해 주신 햇살사목센터 소장 조재연(비오)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발행일 2022-03-20 제3286호 15면

[내리신앙 깊어가는 믿음] (29) 친구 없어 성당 가기 싫다는 아이 어떻게 도와줄까요?

“수줍음이 많은 편이지만 단짝 친구들과는 잘 어울리는 초등학교 6학년 아이가 있습니다. 학교와 학원에서는 단짝 친구들이 있는데 성당에는 친한 친구가 없어요. 얼굴만 아는 아이들이 있기는 한데 친하게 여기는 친구가 없다는 이유로 성당을 재미없어하는 저희 아이를 어떻게 도와주면 좋을까요?” 자녀가 성당이 재미없다고, 성당에 가기 싫다고 한다면 부모는 그 이야기를 가벼이 넘겨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는 성당에서 친구를 사귀는 데에 어려움이 있거나, 성당 친구와 관계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대인관계이론으로 유명한 정신의학자 해리 설리번은 아동기와 청소년 전기에 이르면 단짝에 대한 강한 욕구를 갖게 되며, 단짝과 서로 신의와 충실함을 바탕으로 우정을 나눌 때 큰 만족과 안정감을 갖게 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 성당에 친구가 없어 가고 싶지 않다는 아이의 말은 과장이 아닙니다. 친한 친구가 없는 성당에서 아이는 만족과 안정감을 갖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평신도 신학자이자 교육학 교수인 제프리 캐스터 박사는 한 아이가 깊은 신앙을 갖는데 공통적으로 거치는 단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1단계는 성당 공동체에 초대되어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때 친구들과 재미와 의미가 있는 시간을 함께 보내며 단짝 친구를 사귀기도 하고 관계를 넓혀 나갑니다. 2단계는 친구들과 함께 교리를 배우고 교회 가르침에 익숙해지는 것이며, 3단계는 교회 공동체의 삶에 젖어들며 하느님의 시간 안에서 회심의 순간을 맞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단계로 미루어볼 때, 성당에서 친한 친구를 사귀는 것은 하느님을 알게 되는 하나의 관문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녀가 신앙 안에서 성숙해지길 바란다면 부모는 먼저 자녀가 성당 친구를 잘 사귈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다음은 성당에서 아이들이 친구를 사귀는데 도움이 될 몇 가지 팁입니다. 첫째, 성당의 조직(단체)이나 활동을 활용하십시오. 성당에는 첫영성체 교리반, 주일학교, 전례부, 성가대, 복사단을 비롯해 어린이와 청소년이 활동할 수 있는 여러 단체가 있습니다. 이런 조직(단체)에 소속되어 규칙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아이가 사제, 수도자, 교리교사의 동반을 받고 또래들과 친해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아이들은 함께 활동하며 같은 경험으로 공감대를 갖는 친구그룹을 갖게 될 것이고, 그 안에서 자신과 마음이 딱 맞는 단짝을 만들 기회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둘째, 때로는 부모의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때 다른 부모들과 함께하면 시너지 효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미사나 주일학교가 끝난 후에 바로 집으로 향하지 말고 딱 10분만 부모들끼리 커피 한 잔 하는 여유를 가져보십시오. 성당에 조금 더 머무르는 기회가 생겼을 때, 아이들은 비공식적인 시간 안에서 더욱 자유롭게 또래놀이를 즐기고 서로를 개방합니다. 다른 부모들과 함께 아이들이 같이 먹고 같이 놀 기회를 마련해주는 것은 부모가 마음을 많이 써야 하는 일이고, 부모 스스로도 노력해야하는 일임을 잘 압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부모의 의도적인 노력으로 아이가 단짝친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요. 셋째, 아이들끼리의 집중적인 시간을 가질 수 있는 락인(Lock-in) 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친구가 없는 아이가 캠프나 피정 같은 시간에 참여할 때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될 수도 있지만, 일정기간 서로 부대끼며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는 환경 안에서 아이들은 잠시 만났다가 다시 헤어지는 정규모임에서보다 더 금세 친구가 됩니다. 이미 하느님의 울타리 안에 있는 친구들이 내 아이를 하느님께로 끌어줄 거라는 것을 믿어주십시오. 하느님의 환경 안에서 아이들은 매우 좋은 우정을 맺고 긍정적인 영향을 서로 주고받는다는 것도요. 이 같은 노력으로 단짝친구가 생겼다고 부모의 역할이 끝은 아닙니다. 자녀가 친구들에 대해 하는 이야기에 늘 귀를 기울이며 좋은 영향을 주는 친구는 누군지, 그 안에서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지 혹시 갈등이나 다툼이 있는 것은 아닌지 살핀다면 성당에서 자녀가 친구 관계를 맺는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힌트를 얻게 될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하느님께로 나아가도록 함께 걷는 사람입니다. 자녀에겐 이 여정을 격려해주고 어려움을 헤쳐 나가도록 도와줄 부모도 필요하지만, 이 여정을 신나게 걸어 나가기 위해서는 티키타카(tiqui-taca)할 친구가 필요합니다. 자녀가 신앙 안에서 외로운 길을 가지 않도록 성당의 단짝친구를 만들어 주십시오.

발행일 2022-03-13 제3285호 15면

[내리신앙 깊어가는 믿음] (28)아이가 성소를 잘 식별하도록 도와주고 싶어요

“며칠 전 아이가 “아빠, 내가 신부님이 되면 어떨 것 같아?”하고 물어왔습니다. 아이가 사제가 되는 것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아이의 생각을 알고 나니 부모로서 많은 생각이 듭니다. 아이가 잘 식별할 수 있도록 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영화 ‘저 산 너머’에는 김수환 추기경의 어머니가 어린 수환 형제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마음 밭에 저마다의 씨앗을 묻어주셨다… 전에는 잘 몰랐는데 너희들 마음 밭에는 아주 특별한 씨앗이 심겨져 있지 싶다. 너희 마음속에는 하느님의 씨앗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성소는 우연의 결과도, 결정지어진 운명도 아닌 하느님의 놀라운 계획이 담긴 씨앗과 같습니다. 우리 자녀의 마음 밭에는 하느님께서 어떤 씨앗을 심어주셨을까요? 성소(聖召)는 넓은 의미에서 생명과 사랑의 길로의 초대이며 주님과 맺는 우정으로의 초대를 모두 아우르는 거룩함에로의 부르심을 의미합니다. 성소의 의미를 조금 좁히면 생명 창조의 신비에 동참하도록 초대하는 결혼 성소, 성품성사를 통해 하느님 사랑의 계획에 참여하는 사제 성소, 그리고 하느님께 청빈·정결·순명의 삶으로 자신을 봉헌하는 수도 성소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부르심은 하느님의 큰 계획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계획 안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사제, 수도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는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의 계획을 자각한 이들도 있지만, 많은 이들은 자신이 받은 부르심을 식별하기 어려워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식별하는 것은 매우 섬세한 과정이기 때문에, 비록 부모라 할지라도 성소의 여부를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자녀가 알아서 성소를 식별하게 내버려 두어서도 안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성소 식별에 대해 말씀하시며 “젊은이들의 자유를 존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에게는 동반도 필요합니다. 가족은 그러한 동반의 첫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곧 자녀들이 주님과의 우정 안에서 성소를 잘 식별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동행자, 바로 부모의 도움, 동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동반하는 법은 엠마오로 가는 길의 예수님의 모습(루카 24,13-35)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절망과 혼란에 빠진 두 제자에게 다가가 나란히 함께 걸어주시지요. 또 그들에게 삶의 본질을 향한 질문을 던지시고 경청하시며 당신의 경험을 충분히 나누어 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마음이 하느님을 향해 타오르는 순간, 동행자로서의 역할을 마치셨다는 듯 사라지십니다. 이처럼 부모는 자녀를 이끌기도 하고, 밀어주기도 해야 하지만 때로는 나란히 걸으며 힘을 주기도 해야 합니다. 또 예수님께서 하셨듯 질문을 던져 주고 마음속 갈망을 들어주어야 하며, 자신의 경험, 하느님과 나눈 우정의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의 갈망이 타오르는 순간, 그리고 성소를 식별해야 할 하느님의 시간에 한 걸음 물러나 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자녀가 성소를 잘 식별하도록 돕기 위해서는 사제직에 대한 이해도 필요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사제직무를 티베리아스 호수에서 폭풍우 치던 밤에 예수님과 베드로에게 일어난 일화(마태 14,22-33 참조)를 통해 4가지 단어로 표현하셨습니다. 삶의 올바른 항로를 향하여 배를 저어가는 것은 그저 우리 노력에만 맡겨진 일이 아니며, 주님께서 방향이 되어 주시고 도와주시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사제직은 언제나 도와주시는 주님께 감사를 드리는 삶입니다. 삶은 혼란과 두려움 속에 있으며, 사제로서의 삶도 이 모든 거친 파도를 뚫고 나아가야 합니다. 따라서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하신 주님의 초대처럼 사제직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때로는 역풍이 사제를 지쳐 쓰러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마음을 짓누르는 고립감, 성소의 불꽃이 사그라져 타성에 젖어 버릴 위험,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함을 직면할 때에도 사제는 복음을 전하는데 따른 고통(고단함)을 받아들이고 부활하신 주님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파도 한복판에서도 사제의 삶은 찬미를 향해 열려있습니다. 사제는 성모님처럼 믿음을 간직하며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삶이 주님을 향한 찬미의 노래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부모는 이처럼 자녀가 감사, 용기, 고통, 찬미의 삶의 태도를 갖도록 도우며 하느님께서 심으신 씨앗을 북돋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젊은이들에게 이 길을 따를 의향이 있는지 자문해보라고 권유할 용기를 낼 수 있고 또 용기를 내어야 합니다.”(「그리스도는 살아계십니다」274항. ※자녀, 손자녀들의 신앙 이어주기에 어려움을 겪는 부모, 조부모들은 이메일로 사연을 보내주시면, 지면을 통해서 답하겠습니다. 이메일 : hatsal94@hanmail.net

발행일 2022-03-06 제3284호 15면

[내리신앙 깊어가는 믿음] (27) 미사를 지루해하는 아이를 어떻게 하지요?

“네 살 아이와 함께 주일미사에 가려고 노력해봤어요. 하지만 아이와 함께 하기에 미사시간은 너무 길게 느껴집니다. 미사 중에는 미사가 언제 끝나는지 계속 묻는 아이 때문에 주변 신자들 눈치도 보이고, 떼를 쓰기라도 하면 아이를 달래려고 성당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오기를 반복해야 하고… 미사 드리는 게 이렇게 어렵다 보니 한동안은 미사참례를 쉬기도 했어요. 어떻게 하면 아이와 온전히 미사를 드릴 수 있을까요?”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신앙 문화 안에서 키우려고 마음먹은 부모들은 종종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에 부딪히곤 합니다. 미사에 늦지 않게 아이를 데려가기 위해 허둥지둥하고, 놀이터를 방불케 하는 유아방에서 미사를 드리다 보면 혼이 빠지는 일이 허다하지요. 어쩔 땐 아이가 지루해하는데 내가 억지를 부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기까지 합니다. 이처럼 수많은 도전 속에서도 아이에게 신앙을 전하고자 노력하는 부모들에게 지지와 격려를 보내고 싶습니다. 보채고 떼를 쓸지라도 아이가 미사 시간에 자리를 지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아이가 성당 공간과 분위기에 익숙해지기까지 부모의 많은 노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정말 미사를 지루해할까요? 미사를 드리는 아이를 잘 살펴보십시오. 사제가 입은 제의나 사제의 행동을 보며, 신자들이 성체를 향해 절하는 것을 보며, 성상이나 유리화를 보며 아이가 관심을 가지거나 질문을 던지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사실 유아들도 하느님을 궁금해하고 미사에 매력을 느낍니다. 다만 시기적 특성상 한 가지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기 때문에 처음과 같은 집중력으로 끝까지 버티기가 어려울 뿐이지요. 사실 아이들이 미사를 지루하게 여기기 시작하는 것은 어른들의 통제와 야단에서 비롯됩니다. 아이가 미사 중에 주의가 산만해지고 힘들어한다면 의자 위에 서게 해도 좋고 부모가 안아 제대를 볼 수 있게 해주거나 자리에 앉은 채로 성경 그림책을 보게 해주어도 괜찮습니다. 전례에 크게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아이가 미사를 친숙하고 편안하게 받아들이면서 전례의 참맛을 느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이를 위해 몇 가지 팁을 드립니다. 첫째, 자녀와 함께 유아방이 아닌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려고 애쓰십시오. 아이들은 유아방을 먹어도 되고, 장난을 쳐도 되는 놀이공간으로 인식합니다. 그런 인식은 아이에게 정서적, 영성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지요.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면 아이들은 신자들의 기도소리와 톤, 행동 등을 통해 신앙 감각을 키워갈 수 있습니다. 또한 함께 기도하고, 일어서고 앉기도 하며 행렬하고 노래하는 가운데 아이들은 공동체를 몸소 체험하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풍성한 정서를 총체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둘째, 영성체 때에는 아이를 데리고 나가 사제의 축복을 받도록 해주십시오. 영성체 때 그것이 어려웠다면 미사 후에 축복을 청해도 좋습니다. 사제의 손이 이마에 닿는 그 자체로 아이든 어른이든 거룩함을 감지하게 됩니다. 이때 아이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너에게 오는 거야”하고 속삭여 주면 아이가 그 축복을 귀하게 여기고, 하느님을 가까이 느낄 것입니다. 셋째, 평소에 여러 가지 도구를 활용하여 아이와 신앙 대화를 나누어보십시오. 하느님과 미사에 대한 이야기책이나 놀이책도 많이 있고, 유아용 동영상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또한 미사 후에 아이와 함께 성당을 둘러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습니다. 성당의 각종 장식과 사제의 움직임에 대해 아이가 하는 질문은 신앙 대화의 훌륭한 도구가 됩니다. 그리고 가정에서 집에 있는 물건들을 이용하여 ‘미사 놀이’를 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당에서 드렸던 미사야” 하고 상기시켜 준다면 아이는 미사를 친근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린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이 미사 시작부터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맛들이게 하기 위해 애쓰는 그 노력을 가상히 여기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사에 아예 참여하지 않는 것보다는 아이와 함께 늦더라도 혹은 중간에 나가더라도 참여할 것을 권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유아세례를 집전하며 “아기들이 울도록 내버려두십시오. 교회에서 우는 아기들의 울음소리는 아주 아름다운 강론이 될 수 있습니다”고 하셔서 큰 울림을 주신 적이 있습니다. 교황님의 시선과 같이 우리 교회 공동체가 한 아이가 미사에 왔을 때 그 아이를 환대해주는 성숙함을 갖게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다음 세대에 신앙을 전수해주기 위한 부모들의 노력을 지지해주리라는 기대를 가져봅니다. ※자녀, 손자녀들의 신앙 이어주기에 어려움을 겪는 부모, 조부모들은 이메일로 사연을 보내주시면, 지면을 통해서 답하겠습니다. 이메일 : hatsal94@hanmail.net

발행일 2022-02-27 제3283호 15면

[내리신앙 깊어가는 믿음] (26) 누구 동생으로 불리기 싫어 성당 가기 싫다는 아이

“며칠 전 자기만 보면 자꾸 형이랑 연관 짓는 사람들 때문에 성당 다니기 싫다는 둘째의 말을 듣고 당황스러웠습니다. 둘이 두 살 터울인데 차분하고 신중한 성품의 둘째가 어딜 가나 인기가 많은 형을 잘 따르기도 하고, 첫째도 동생을 잘 챙겨서 둘이 주일학교 생활도 잘하고 있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둘째가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니… 우선 둘째를 달래긴 했지만,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우애 깊은 형제자매는 평생의 둘도 없는 벗이 됩니다.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께서도 형님 김동한 신부님을 당신 일생의 가장 소중한 벗으로 꼽으셨습니다. 소신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한시도 떨어진 적 없었다는 형님은 평생 동생을 많이 사랑해 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동생이 추기경이 되자 행여나 불편을 끼칠까 봐 일부러 피하시며 결핵 환자를 돌보는 사목에만 매진했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추기경께서는 그런 형의 착한 성품과 좋은 성적, 깊은 신앙 모두 당신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노라 여러 차례 나누어 주셨지요. 이처럼 좋은 형제자매 관계는 서로를 북돋는 소중한 자양분이 됩니다. 그런데 좋은 형제자매 관계는 자연히 생겨나지 않습니다. 자녀들이 서로 좋은 관계를 맺도록 돕기 위해서는 발달 단계에 따라 형제자매 관계도 점차 변화한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관계가 취약해질 수 있는 시기에는 부모가 적절히 개입하여 서로를 포용하고 협력하며,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기술을 익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영유아기에는 자신의 형제자매를 부모의 관심을 나누어야 할 경쟁자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첫째에게 동생의 출생은 상당한 심리·정서적 부담으로 다가오지요. 하지만 가족들이 변화에 적응하도록 돕는다면 차츰 서로를 좋은 친구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아동기에 들어서면 학교생활을 비롯한 일상을 공유하며 형제자매와 동료의식을 형성합니다. 그리하여 서로를 부모에게 이야기할 수 없는 주제까지도 나눌 중요한 조언자로 여기게 됩니다. 그러다가 초기 청소년기에 이르러 각자 심리적 독립을 추구해 나가기 시작하면 친밀감은 감소하고 갈등은 증가합니다. 특히 학교, 성당 등에서 활동 반경이 겹칠 때 갈등이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경우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역동까지 더해져 가정 내에서의 갈등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기도 하지요. 다음의 10가지 계명은 형제자매가 공동체의 다양한 관계 안에서 서로를 포용하며 성숙해지도록 돕기 위해 부모와 공동체의 지도자가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1) 형제자매라 할지라도 그들이 서로 비슷할 것이라고 치부하지 말고 각자의 공간, 관계, 취향, 감정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주고 배려해야 합니다. 2) 형제자매 각각을 독립된 개인으로 인정하고, 각자에게 형제자매의 일을 묻거나 형제자매에게 있었던 사건을 연결 짓지 않아야 합니다. 3) 아이들 또한 공동체 생활 중에 형제자매 각자의 활동과 각자가 맺는 관계를 존중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4) 때때로 자신의 형제자매가 누군가와 갈등하는 관계에 놓였을 때 자신의 형제자매와 정서적으로 동일시하여 자신과의 관계와는 상관없이 상대를 부정적으로 여기는 일이 없도록 형제자매의 관계와 자신의 관계를 분리할 수 있게 도와야 합니다. 5) 공동체 안에서 형제자매를 비교하거나 편을 갈라 경쟁 관계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6) 서로의 강점을 북돋고 약점은 보완할 기회를 자주 제공해야 합니다. 7) 큰 아이에게 당연하게 동생에 대한 책임을 맡기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큰 아이에게는 원치 않는 책임을, 작은 아이에게는 손위 형제에게 종속된 듯한 마음을 줄 수 있습니다. 8) 자신이 형제자매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일 때, 다른 이들도 나의 형제자매를 존중한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합니다. 9) 형제자매가 늘 친밀할 수는 없으며 갈등의 시간도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하고, 때로는 그들 스스로 갈등을 해결해 나가도록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10) 형제자매 간의 갈등은 불공평하다고 느낄 때 생겨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공평하도록 노력해야 하지만, 아이들 또한 매 순간 완벽하게 공평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도와야 합니다. 형제자매는 숙명의 라이벌이기도 하지만 부모보다 오랜 시간 함께 살아갈 벗이며 동반자입니다. 이들이 공동체 안에서 서로 존중하는 법도 배우고 갈등을 맞아 함께 해결해 보기도 하면서 좋은 관계로 성숙해나갈 기회를 제공해준다면, 이들은 다가올 삶의 우여곡절 속에서 서로 보듬으며 친밀한 우애로 일생을 함께 걸어갈 더 없는 친구로 성장해 나갈 것입니다.

발행일 2022-02-20 제3282호 15면

[내리신앙 깊어가는 믿음] (25) 아이와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신부님, 저는 모태신앙이지만 부끄럽게도 아직 기도하는 법을 잘 모르겠고, 소리 내어 다른 사람들과 기도하는 것이 쑥스럽기도 해요. 얼마 전 미루고 미루던 6살 딸아이의 유아세례가 있었는데요, 이걸 계기로 매일 아이와 함께 기도하고 싶어요.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요?” 저의 작은 친구, 안젤라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안젤라는 제가 사목했던 한 본당에서 만난 2살짜리 친구입니다. 본당에 머물렀던 5년 동안 엄마와 함께 교중미사에 참례하는 안젤라를 보는 것은 본당신부로서의 기쁨이었습니다. 어른들의 성가 소리 사이로 음률도 없이 열창하던 안젤라의 어설픈 성가 소리는 무엇보다 아름다운 찬미였고, 부모의 초대로 기도손을 하고 제대를 응시하는 눈빛은 누구보다 빛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씩씩하게 성전을 향하던 안젤라가 엄마의 등에 업혀 성당에 왔습니다. 안젤라 엄마는 “신부님, 안젤라가 아파요. 기도해주세요”하고 기도를 청해왔고 저는 안젤라를 애처롭게 바라보며 머리를 향해 손을 올렸습니다. 그러자 엄마에게 업혀있던 안젤라는 십자 모양으로 두 손을 가슴에 모았습니다. 영성체 때 축복을 받던 그 모습으로 말입니다. 많은 부모들이 기도하는 법을 잘 모르겠다며 자녀와 함께 기도하는 것을 자신 없어 하곤 합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것을 너무 진지하게 접근할 필요는 없습니다. 기도는 우리 친구 하느님과 말을 주고받는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만남이 어떠한 공식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듯 기도에도 특별한 공식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일상의 언어로 하느님께 말을 건네면 하느님은 당신의 신비로운 언어, 즉 마음의 언어로 응답해주십니다. 안젤라는 기도가 대화이며, 인격적인 관계를 이루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전례 안에서 목소리를 내어 성가를 부르며, 제대와 십자가를 응시하며, 그리고 경건히 두 손을 모으는 것으로 안젤라는 하느님과 즐겨 만나고 있었습니다. 안젤라의 이 자연스러운 모습이 바로 기도입니다. 안젤라가 이렇게 즐겨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데에는 하느님을 향한 마음을 표현하고 직접 보여준 부모의 영향이 컸습니다. 매주 엄마, 아빠와 함께 드리는 미사 안에서 안젤라는 엄마, 아빠와 함께 찬미하는 기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픈 안젤라에게 치유의 은총을 베풀어주시길 청하는 엄마의 기도를 통해 당신께 청하는 자녀들의 기도를 잊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법을 배우게 되겠지요. 이레네오 성인은 ‘하느님께서는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분’이라 이야기합니다. ‘완전 그 자체’이신 하느님에게는 인간이 바치는 기도가 당신에게는 어떤 보탬이 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우리의 구원에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은 기도라는 당신과의 소통 통로를 열어두어 세상에서 부서지고 깨져 상처받은 우리가 당신의 자비와 사랑 앞에서 생명을 얻고 또 얻어서 세상을 살아가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와 함께 기도할 때 너무 경건한 자세나 정제된 언어를 요구하거나 엄격한 태도를 보일 필요는 없습니다. 부모의 엄격한 태도는 자칫 하느님을 어렵고 두려운 분으로 만들 수 있어 하느님께 나아가는 기쁨을 해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아이의 마음이 편한 그대로 기쁘게 바치게 하고, 예의는 천천히 가르치는 것이 좋습니다. 기도하기 좋은 때는 가정의 상황에 따라 또는 아이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분주한 아침 시간이 부담스럽다면, 굳이 아침을 고집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히려 함께 모여 하루를 돌아볼 수 있는 저녁 시간이 가족이 함께 기도드리기에는 좋습니다. 하루 중 언제라도 자녀가 일상의 언어 그대로 하느님께 말을 건넬 수 있게 열어줄 수 있다면 그 모든 순간이 바로 기도하기 좋은 때입니다. 단, 좋은 습관은 덕이 되듯이 루틴한 습관을 갖게 도와주십시오. 자전거를 배울 때 스스로 페달을 밟아 나가기까지 의지할 대상이 필요하듯, 기도도 처음에는 부모의 도움이 필요하겠지만 아이는 점차 하느님과의 대화 안에서 자신이 주체가 되어갈 것입니다. 어린 사무엘이 하느님의 소리를 들었을 때 하느님의 음성임을 알아채고 다시 하느님께로 나아가도록 도왔던 그의 스승 엘리처럼 부모 또한 자녀가 하느님께 민감할 수 있도록 초대하는 시선을 갖기를 바랍니다. “누군가 다시 너를 부르거든,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하고 대답하여라.”(사무엘상 3,9)

발행일 2022-02-13 제3281호 15면

[내리신앙 깊어가는 믿음](24)성당 활동에 너무 빠져 있는 아이 어떻게 하죠?

“아이가 성가대, 복사단, 학생회… 성당 활동에 푹 빠져 있어요. 다른 집은 아이가 나쁜 짓 안 하고 성당 활동 열심히 하니 얼마나 좋냐고 하지만, 시험 기간에도 밤낮없이 성당에서 살다시피 하는 아이를 보면 솔직히 부모로서 속이 터집니다. 이 아이를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새는 두 날개를 펴고 날갯짓을 하면서 하늘을 활공합니다. 한쪽 날갯짓으로 왼쪽, 혹은 오른쪽으로 날기도 하고 두 날개를 힘차게 움직여 저 멀리 날아가기도 합니다. 우리 인간 또한 두 날개를 가지고 세상을 활공합니다. 오른쪽 날개(right wing)는 보수적인(conservative) 날개로 실질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경제적·사회적인 능력, 지위 등을 의미합니다. 이 날개를 강화하기 위해 우리는 스펙을 쌓고, 학위를 취득하고, 더 많은 보수를 주는 직업을 갖기 위해 애씁니다. 한편 왼쪽 날개(left wing)는 진보적인(progressive) 날개입니다. 이 날개는 가슴 뛰게 만드는 꿈과 이상, 의미와 가치, 행복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새들이 두 날개 모두 힘차게 날갯짓을 할 때 더 멀리 날아갈 수 있듯 인간 또한 이 양 날개가 고루 발달할 때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삶의 양날개론’이라 칭하며 청소년 사목을 하면서 만났던 많은 젊은이들에게 강조해왔습니다. 부모들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자녀의 삶을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자녀가 성당 활동을 열심히 할 때 부모들은 신앙을 지닌 또래 친구들과 함께 교회 울타리 안에서 잘 지내는 아이의 모습이 보기 좋고, 그런 아이의 앞날을 하느님께서 예비해 주시리라는 믿음으로 긍정적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성당을 오가는 횟수가 늘어나고, 친구들에게 몰두 되어 공식적인 활동 외에 노는 시간이 늘어날 때 부모의 염려는 깊어집니다. 이럴 때 부모들은 주로 성당 활동을 끊고 공부와 성적에 몰두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친구 관계를 중요시하는 청소년에겐 극약의 처방입니다. 제가 만난 친구 중에 바오로라는 고1 남자아이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문제아로 불리며 부모의 속을 썩이는 친구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여름, 바오로는 성당 여름 캠프에 참여해 좋은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고, 성당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죽돌이’가 되었습니다. 바오로는 여전히 친구들과의 시간을 즐겼지만, 성당 친구들과는 비행에 노출될 일이 없어 가족 모두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안정적으로 학교생활을 하는 성당 친구들과 지내면서 학업성적도 점점 좋아졌습니다. 그러자 바오로의 부모님은 욕심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성당 친구들로부터 좋은 영향을 받고 있긴 하지만, 그 친구들과 성당에서 허비하는 시간을 줄이면 더욱 학업에 몰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이지요. 결국 부모는 바오로의 성당 활동을 끊어버렸습니다. 그렇게 성당 친구들을 만날 수 없게 된 바오로는 이전의 친구들에게 돌아갔고, 결국 가출을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처럼 성당에서 살다시피 하는 자녀를 둔 부모의 마음은 무척 답답하겠지만, 이럴 때일수록 넓은 시선 속에서 자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당에 너무 몰입해서 본인의 시간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걱정에 빠지다 보면 부모 또한 균형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자녀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서는 충분한 학업 시간을 마련하고, 성적을 유지하는 오른쪽 날개와 친구 관계, 놀이와 여가, 그리고 하느님과 만나는 시간인 왼쪽 날개가 모두 필요합니다. 따라서 이 문제에 있어 부모와 자녀 모두 한쪽으로만 치우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대화를 통해 균형 있는 성장을 위한 방법을 찾아가야 합니다. 이때 금령으로 일관하거나, 부모의 의견이 최선인 것처럼 강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변화의 주체는 자녀 자신이기에, 무엇을 어떻게 변화시켜나가는 것이 좋을지 스스로 정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당장 변화를 이루기 버거운 목표보다 작은 목표부터 실천해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자녀의 노력과 변화를 알아 차려주고 격려해주며 천천히 균형을 잡아가도록 기다려주십시오. 마음 없이 몸만 움직이는 삶을 살 때 인간은 공허함을 느끼고, 메마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의 움직임을 따라 그 안에서 ‘감동’을 느끼는 순간, 삶은 기쁨으로 가득 찹니다. 자녀가 친구와 ‘티키타카’를 하는 기쁨을 아는 삶, 좋아하는 것에 설레는 삶, 그렇게 마음이 움직이는 삶을 살아가도록 격려하면서도 자신의 책임과 해야 할 일을 잊지 않으며 균형을 지켜나가도록 넓은 시선으로 함께 걷는 부모가 됩시다. 그때 우리 자녀들은 스스로 양날개를 고루 발달시키며 균형 있게 성장해나갈 것입니다. ※자녀, 손자녀들의 신앙 이어주기에 어려움을 겪는 부모, 조부모들은 이메일로 사연을 보내주시면, 지면을 통해서 답하겠습니다. 이메일 : hatsal94@hanmail.net

발행일 2022-01-30 제3280호 14면

[내리신앙 깊어가는 믿음](23)아이가 신앙을 굳게 하도록 도와주고 싶어요

“저희 아이는 주일미사도 거르지 않고, 주일학교도 잘 나가고, 전례부 활동도 열심히 합니다. 가족들과 식사 전후 기도나 아침 저녁기도도 거부감 없이 잘 바치고요. 그런데요, 지금은 가족들과 함께하니 이렇게 열심히 성당에 다니지만 가끔은 ‘얘가 성인이 되어서도 스스로 신앙생활을 이어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될 때가 있어요. 아이가 자기의 신앙을 굳게 하도록 도와주려면 어떻게 도와야 할까요?” 살면서 관계 맺은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그것은 그저 아는 사람과 친밀한 사람입니다.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바로 관심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관심이란 상대에게 마음을 기울이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상대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관심을 말합니다. 이러한 관심이 일방적인 것이 아닌 상호 간의 관심일 때 우리는 친밀한 사람, 바로 친구로 여깁니다. 특별히 유년기에 이러한 친구를 만드는 일은 중요한 과업입니다. 이 시기는 개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대상이 부모, 교사에서 친구로 전환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친구와 우정을 맺으며 충분한 정서적 지원과 인정을 받은 아이는 자아존중감을 갖는데 큰 도움을 얻게 됩니다. 따라서 부모는 자녀가 성장 과정 안에서 진실한 친구인 ‘베프’(Best Friend)를 사귈 수 있도록 애써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자녀의 신앙 여정에서 부모는 자녀가 예수님을 그저 좀 아는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무엇을 원하실까?’를 고민하고 예수님을 향한 깊은 관심을 표현하는 베프로 여길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그리스도는 살아계십니다」에서 예수님의 우정 어린 초대를 마주한 두 인물을 언급하십니다. 바로 베드로와 부자 청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시몬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6)고 묻습니다. 이는 곧 “너는 나를 벗으로서 사랑하느냐?”하시는 물음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기꺼이 응답하며, 그물을 버리고 사랑하는 벗 예수님을 따라 우정 어린 삶을 살아갑니다. 한편 좋은 지향을 두고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켜온 부자 청년이 있습니다.(마르 10,17-27)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던 예수님은 그 청년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으니,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손을 내미십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그는 자신이 가진 많은 재물을 버릴 수 없었기에 슬퍼하며 떠나갔고, 예수님의 사랑 가득한 시선을 깨닫지 못한 채 멋진 우정이 될 수 있었던 만남의 기회를 놓칩니다. 만약 그가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했다면 그는 어떤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까요? 복음 속의 두 인물의 예를 통해 자녀의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우정 어린 초대에 얼마나 열려있는가’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아이가 가정의 신앙 문화 안에서 기도와 전례, 교회공동체 활동에 꾸준히 참여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 시간을 통해 아이는 신앙의 습관을 익히고, 무엇보다 예수님을 접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만이 한 아이가 진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지는 않습니다. 자녀가 깊은 신앙을 갖도록 돕기 위해서는 자녀가 의무감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은 교회 공동체의 재미있는 활동이나 친구 관계에만 매력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교리대로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설령 죄를 짓고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더라도 늘 사랑으로 기다리시며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와 우정을 맺고 싶어 하시는 분이시지요. 그런 예수님을 자녀가 알고 느끼도록 부모는 자녀에게 내가 만났던 예수님에 대해, 그리고 예수님과의 만남 안에서 느꼈던 사랑을 자주 나누어 주십시오. 그때 자녀 또한 부모가 예수님과 맺고 있는 친밀한 우정 안으로 초대될 것입니다. 사랑이신 예수님과 벗이 된다면 우리의 자녀들은 세상의 가치가 예수님의 가치와 반할 때 그것을 식별해 낼 것입니다. 예수님과 친구가 되고자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헤아리려 하고, 가르침을 따르고자 할 것입니다. 그렇게 눈앞의 작은 일들보다 더 큰 하느님의 꿈을 품고 실천하는 복된 삶으로 나아가게 되겠지요. 오로지 자발적인 기대와 기쁨으로 기꺼이 그분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 자녀들에게 우정의 초대를 건네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자녀, 손자녀들의 신앙 이어주기에 어려움을 겪는 부모, 조부모들은 이메일로 사연을 보내주시면, 지면을 통해서 답하겠습니다. 이메일 : hatsal94@hanmail.net

발행일 2022-01-23 제3279호 15면

[내리신앙 깊어가는 믿음](22)아이에게 미사 참례를 강요하는 게 맞을까요?

“최근 아이와 신앙생활과 관련해서 갈등을 빚는 일이 몇 번 있었어요. 친구들 생일잔치에 빠지더라도 미사참례는 꼭 하던 아이였는데… 얼마 전 아이가 주일미사에 빠지면 왜 안 되는지, 그게 고해성사까지 볼 죄인지 강한 불만을 표시하더라고요. 신자로서의 의무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줘야 할 것 같은데, 한편으로는 자꾸 강요하는 것 같아 불편한 마음이 듭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부모의 좋은 의도와는 다르게 부모의 가르침이 자녀가 사랑의 하느님을 알고 느끼도록 하는 것을 방해하는 일이 가정 안에서 종종 일어나곤 합니다. 특별히 신자 생활의 의무를 알려주는 과정에서 그렇습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지금 당장 알려주지 않으면 자녀가 교회 가르침을 모르고 지나가거나, 지키지 않는 것을 당연히 여기게 될까봐 염려스러운 마음이 들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의무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불편한 마음도 있습니다. 이러한 내적 갈등은 신자의 의무와 교회의 가르침을 왜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 부모 자신조차 혼란스럽기 때문에 생기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에 관해 「가톨릭교회 교리서」의 서문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교리와 그 교육은 모두 끝없는 ‘사랑’을 향해야 한다. 믿고, 바라고, 꼭 해야 할 것을 가르쳐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늘 우리 주님의 사랑이 드러나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이가 그리스도인 완덕의 근원이 ‘사랑’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고 그 목적도 ‘사랑’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하여야 한다.”(25항) 그렇습니다. 자녀에게 신자의 의무를 강조하고 교회의 가르침을 알려주는 것은 바로 자녀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세상 안에서 그 사랑을 살아가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만약 이 목적을 잃고 부모가 자녀에게 본질이 아닌 외형적인 형식이나 신자로서 지켜야 할 의무만을 강조한다면 자녀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사랑의 이끄심을 듣기 싫은 잔소리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부모와 자녀 사이가 틀어지는 것은 물론 하느님과 자녀 사이 또한 멀어지게 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주일미사 참례와 고해성사와 관련하여 부모와 자녀가 갈등을 빚는 상황입니다. 이 갈등은 주로 주일미사에 참례하지 않는 것이 죄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놓고 부모와 자녀가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며 다투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안타깝게도 이 다툼 속에서 미사가 우리를 사랑하는 예수님께서 당신을 온전히 내어주러 오시는 만남의 자리라는 사실은 잊히고 맙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을 앞두고 그 시간에 참석하지 않는 것이 죄가 되는지 아닌지를 따져서 참석 여부를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혹시 참석하고 싶지 않거나, 참석이 어려운 상황이 오더라도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고민하겠지요. 또한 참석을 못 했을 때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얼른 그 사람을 찾아가 미안한 마음을 털어놓으며 용서와 화해를 청하고 싶어질 것입니다. 주일미사 참례하는 것과 주일을 지키지 못했을 때 고해성사를 드리는 것에 대해서 교회가 거듭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주일미사에 빠진 것을 단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미사를 통해 우리를 만나러 오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게 하고, 미사에 참례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다시 고해성사를 통해 기쁨 안에서 화해를 할 수 있도록 북돋기 위한 것이지요. 그래서 고해성사를 화해의 성사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교리서인 「YOUCAT Friends」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가 굳건한 믿음을 지닌 신앙인으로 자라 스스로의 신앙을 증거 하려면 정도를 넘어선 일도 해봐야 합니다. 따라서 부모는 죄에 대해 아이에게 지나치게 까다롭게 굴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죄를 짓는데도 가만히 두라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이 죄인지 아이가 잘 분별할 수 있도록 도우라는 말입니다.” (138항) 하느님은 결코 우리에게 당신 계명을 지키도록 윽박지르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자유의지를 주셔서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고 선택할 수 있게 하셨으며, 당신 뜻을 거스르는 선택을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메시지를 자녀에게 꼭 이야기해주십시오. 자녀의 신앙은 계속 성장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 자녀에게 필요한 것은 윤리적인 판단이 아니라 바로 사랑의 하느님을 기쁨 안에서 만나게 돕는 것, 그리고 그분과 우정의 관계를 맺도록 돕는 부모의 시선임을 꼭 기억하십시오. ※자녀, 손자녀들의 신앙 이어주기에 어려움을 겪는 부모, 조부모들은 이메일로 사연을 보내주시면, 지면을 통해서 답하겠습니다. 이메일 : hatsal94@hanmail.net

발행일 2022-01-16 제3278호 15면

[내리신앙 깊어가는 믿음](21)그리스도인다운 태교

“저는 결혼 1년 만에 아기를 가지게 된 35살 루시아라고 합니다. 결혼 시기가 늦다 보니 빨리 임신하기를 바랐는데, 막상 아기가 찾아오니 기쁘면서도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성모님처럼 의연하고 기도하는 엄마가 되고 싶은데, 제가 잘 할 수 있을까요?” 임신과 출산은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인간의 협력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부부는 사랑으로 출산의 조건을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서로를 향한 사랑의 친교가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드러내시는 도구가 되길 간절히 청하고,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하느님의 축복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젊은 두 남녀가 혼인면담을 청해왔을 때, 그것이 언제일지 모르지만 하느님께 아이를 보내 주시길 청원하며 매일 성모송 3번을 54일 동안 함께 바칠 것을 강조합니다. 미래를 위한 이 기도는 부부가 하느님 계획 안에 있기를 바라고, 하느님의 계획이 부부의 계획과 맞도록 해주시기를 청하는 기도입니다. 하느님께서 두 사람에게 아기를 선물로 보내주신 후에는 다시 한번 두 사람이 마음을 모아 아기의 좋은 부모가 될 수 있게 도와주시길 청하며 매일 성모송 3번을 54일 동안 함께 바치라고 권고합니다. 그리고 주일날 부부가 함께 사제에게 가서 뱃속의 아기와 두 부부를 위한 특별한 축복을 청할 것을 이야기합니다. 다가올 미래에 대한 이 기도는 하느님의 섭리를 받아들이는 인간을 위한 것입니다. 이 기도를 통해 부부는 출산을 앞두고 느끼는 긴장과 불안을 하느님께 맡겨드리면서, 부모가 될 준비를 해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곧 태교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태어날 아이에 대한 기대를 부모가 미리 그려놓고, 그런 아이로 자라나게 하기 위한 제반사항을 준비하는 태교가 아니라, 부부 두 사람이 부모가 되는 준비를 하고, 가정을 하느님의 사랑과 축복 안에서 아이를 영육 간에 건강히 자라날 수 있는 터전으로 만들어 가는 태교 말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다운 태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준비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아기에 대한 환대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하느님께서는 모든 아이의 탄생을 기다리시고 그 아이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시며 아낌없이 환대한다”고 말씀하시며 세상의 모든 아기는 환대받아야할 존재임을 강조하십니다.(「사랑의 기쁨」 170항) 그리고 부모들이 아기를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이길 바라며, “두려움, 걱정, 다른 사람들의 말 또는 문제들 때문에 새 생명을 세상에 내어 놓는 기쁨이 줄어들지 않도록” 주님께 도움을 청하도록 초대하십니다. 이를 기억하며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우리 가정에 소중한 생명을 선물로 보내주셨음을 경축하는 기도를 뱃속의 아기와 함께 바치길 바랍니다. 그 자체가 아기에게 훌륭한 환대이자 태교가 될 것입니다. 태담을 건네고, 책을 읽어주고, 좋은 음악을 들려주고, 좋은 것들을 보고 듣기 위해 노력하는 것 또한 부모의 환대와 사랑을 아기에게 보여주는 좋은 방법들입니다. 두 번째는 부모가 되는 준비입니다. 임신과 출산의 긴장감에 변화에 대한 두려움까지 더해져 부부 두 사람 모두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긴장과 불안은 아기에게까지 고스란히 전해지게 되지요. 임신 중에 부부가 함께 기도하는 것이 더욱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다행히 하느님께서는 부모가 될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열 달의 시간을 주셨습니다. 이 시간 동안 서로 협력하고 기도하며 인간적인 성숙과 정서적인 안정을 이루고 영성적인 깊이를 더해 부모가 될 준비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당신께 의탁하는 부모들을 끝까지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아기의 탄생을 준비하고 마침내 새 생명을 만나는 기쁨을 누린 후에 그리스도인 부모는 반드시 유아세례를 통해 아기가 영원한 생명을 향해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아기는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시편 2,7) 하시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영적인 탄생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의연하셨을 것 같은 성모님도 의로운 아버지 요셉 성인도 부모로서 마주하는 매순간이 순탄치 않았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하느님께 의탁하고,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려 하셨던 성가정의 모범을 기억합시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고 찬미하며, 우리 가정에 선물로 주신 아기가 태중에서부터 하느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도록 부부가 먼저 의탁하고 기도합시다. 그리고 아기가 우리 가정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으며 마침내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누리는 그날까지 지금의 이 기도의 불씨를 지켜나갑시다. ※자녀, 손자녀들의 신앙 이어주기에 어려움을 겪는 부모, 조부모들은 이메일로 사연을 보내주시면, 지면을 통해서 답하겠습니다. 이메일 : hatsal94@hanmail.net

발행일 2022-01-09 제3277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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