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눈부신 교세 확장…한국 교회 체제 ‘완전한 틀’ 갖추다
1953년 휴전으로 남북 분단은 안타깝게도 기정사실이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남한과 북한은 같은 민족이면서도 가장 먼 나라가 되었고, 피를 나눈 형제들은 갈라진 채 서로를 그리워하며 오랜 세월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멈추고 사회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자, 남한의 교회는 황폐해진 조국에서 다시 교회를 복구하고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많은 교회 인사가 희생되었고, 할 일은 많았지만 일손은 부족했습니다.
다행히 외국의 선교사와 수도회의 지원은 큰 힘이 되었습니다. 특히 외국 교회의 물질적 지원은 남한 교회의 피해 복구에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가톨릭구제회(NCWC), 독일의 미세레올(Misereor), 오스트리아의 부인회 등은 한국 교회 재건을 위해 많은 도움을 제공했습니다.
남한 교회는 각고의 노력 끝에 교회를 재건하고 선교 활동에 힘쓰며 교세를 크게 확장시켰습니다. 이를 보여주듯, 1957년에는 한국에 주교 3명이 동시에 임명되었습니다. <가톨릭시보> 1957년 3월 14일 자는 이 반가운 소식을 1면 첫머리 박스 기사로 전했습니다.
"교황 성하께서는 3월 7일, 지금까지 지목구(Prefect Apostolic)였던 한국의 전주교구(전북지구)와 광주교구(전남지구)를 대목구(Vicariate Apostolic)로 승격시키는 한편, 대구교구 관할의 감목대리구로 있던 경상남도지구를 독립 교구(대목구)로 설정한다고 발표하셨습니다. 동시에 이상 3개 교구의 주교를 임명하셨는데, 전주교구에는 김현배(발도로메오) 교구장을 감목으로 승격시키고 ‘아그비아’ 주교의 명의를 부여하며, 광주교구 감목에는 하롤드 헨리(玄) 현 교구장을 승진시키고 ‘코리다라’ 주교의 명의를 부여하셨습니다. 또한 신설되는 부산교구(경남지구)의 감목으로는 현 대구교구 주교좌성당 주임신부 최재선(요왕) 신부를 임명하고 ‘푸사렌시스’ 주교의 명의를 부여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성청 발표에 따라, 전주와 광주 양 교구는 1937년 4월 15일 지목구로 설정된 지 20년 만에 대목구로 승격되었고, 부산교구는 1954년 6월 18일부터 감목대리구로 발족하여 교구 설정을 준비한 지 약 3년 만에 독립 교구가 된 것입니다."(가톨릭시보 1957년 3월 14일자 1면)
1957년 전주·광주·부산대목구 승격·신설되며 각각 주교 임명
수도회·사도직 단체 성장…휴전 이후 급격한 신자 증가세
교세 신장 따라 교구 증설
이 기사에 따르면, 당시 비오 12세 교황은 광주지목구와 전주지목구를 대목구로 승격하는 동시에 부산대목구를 신설하고 각각 주교를 임명했습니다. 전주와 광주교구는 1937년 지목구로 설정된 지 20년 만에 대목구로 승격되었으며, 부산교구는 1954년 대구교구 산하 감목대리구로 설정된 후 3년 만에 독립 교구가 되었습니다.
한반도에 처음 교구가 설정된 것은 1831년의 일이었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그해 9월 9일 조선대목구를 설정하고, 초대 교구장으로 브뤼기에르 주교를 임명했습니다. 이후 조선교회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꾸준히 성장하여, 1911년 4월 8일 조선대목구는 서울대목구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대구대목구가 분리되어 설정되었습니다.
1920년에는 원산대목구가, 1927년에는 평양지목구가 설정되었으며, 1928년에는 황해도 감목대리구와 연길지목구가 설정되었습니다. 1931년에는 조선대목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서울에서 다채로운 기념행사가 열렸습니다. 이어 1937년에는 연길이 대목구로 승격되고, 전주지목구와 광주지목구가 설정되었으며, 1939년에는 춘천지목구가 새로 설정되었습니다.
6·25 전쟁 발발 이후인 1952년에는 왜관 감목대리구가 설정됐고, 1955년에는 춘천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되었습니다. 그리고 1957년에는 전주지목구와 광주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되고, 부산교구가 독립교구로서 대목구로 설정되었습니다.
이후 1958년에는 청주대목구와 대전대목구, 1961년에는 인천대목구가 새로 설정되었습니다. 특히 1962년에는 그때까지 존재하던 13개 대목구가 모두 정식 교구로 승격되고, 서울·광주·대구교구가 각각 대교구로 승격되어 3개 대주교 관구로 나뉘었습니다. 이로써 한국교회의 교계 체제가 온전한 틀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전후 신자 증가율 경이로워
이처럼 조선교회에 교구가 빠르게 증설된 것은 휴전 이후 급격한 신자 증가율을 반영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1953년 당시 남한의 신자 수는 약 17만 명이었으며, 1950년대 신자 증가율은 연평균 무려 16.61%에 달했습니다. 특히 1958년에는 전년도보다 24.18% 증가하는 경이로운 성장률을 보였습니다.
이에 따라 1961년 신자 수는 50만 명에 육박했으며, 1962년에는 50만 명을 돌파했습니다. 1961년 말 기준으로 신자 수는 총 49만2464명이었고, 한국인 주교와 외국인 주교가 각각 4명, 몬시뇰은 4명이었습니다. 신부 수는 한국인 271명, 외국인 232명이었고, 수사는 한국인 51명, 외국인 45명, 수녀는 한국인 1,039명, 외국인 131명이었습니다.
대신학생은 330명, 소신학생은 323명에 이르렀으며, 본당은 261개, 공소는 1550개였습니다. 병원이 28개, 시약소 18개, 보육원 24개, 양로원 5개, 나병 수용소는 3개였습니다. 교육기관으로는 유치원 62개, 초등학교 6개, 중학교 26개, 고등학교 20개, 직업학교 3개, 대학교 3개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1950년대 전후 한국 교회의 놀라운 성장에는 수도회의 역할이 매우 컸습니다. 북한에서 혹독한 박해를 받은 덕원의 성 베네딕도회는 경상북도 왜관에 정착했으며,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도 새로운 도약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예수회를 비롯한 여러 남자 수도회가 새로 설립되거나 한국에 진출했으며, 여자 수도회도 눈에 띄게 성장했습니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가르멜 여자 수도회,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 성가소비녀회 등 많은 수녀회가 자리를 잡고, 한국교회와 사회 발전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또한 이 시기에 활성화된 각종 신심 사도직 단체들의 봉사와 활동은 한국 교회가 성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특히 한국교회의 가장 대표적인 신심 단체인 레지오 마리애가 1953년 전라남도 목포 산정동성당에서 처음 출발, 개인 신심 수양을 넘어서 선교와 교회 활동에 대한 신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냈습니다. 또한 전후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됐던 빈곤을 극복하기 위한 신용협동조합 운동은 이후 한국사회 안에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됩니다.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