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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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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27) 정의구현사제단 결성

1974년 7월 6일, 해외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지학순(다니엘) 주교가 전격적으로 연행·구속된 사건은, 역설적으로 한국교회가 본격적인 사회 참여에 나서는 계기가 됐습니다. 이후 한국교회는 1970년대와 1980년대로 이어지는 민주화와 사회정의 구현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합니다. 바야흐로 교회가 세상 한복판으로 뛰어들기 시작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무엇보다 지 주교의 구속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시작된 교회 내 움직임이 ‘정의구현사제단’의 탄생으로 이어졌습니다. 공의회가 가르친 사회참여 한국교회가 이처럼 민족적 고통에 참여하고 교회 쇄신과 사회 참여에 몸담기 시작한 것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가르침에 크게 기인합니다. 시대의 징표에 민감할 것을 요청한 공의회는, 교회의 사회 참여를 촉구하며 사회교리에 근거한 체계적 이론을 제시했습니다. 한국교회는 1960년대 후반부터 인간 기본권의 보호와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 우리 사회의 시대적 아픔에 큰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급격한 산업화로 인한 많은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발단이 된 것이 1968년 초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이었습니다. 노사 분규에 관여한 가톨릭노동청년회(JOC) 회원들이 공산주의자로 매도당하자, 주교단은 공동사목교서를 발표해 노동운동의 정당성을 옹호했습니다. 이후 교회의 사목적 관심은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고도성장 위주의 경제 개발 과정에서 초래된 사회 문제 해결에 집중됐습니다. 이에 따라 가톨릭노동청년회 활동이 강화됐고, 1966년에는 가톨릭농민회가 조직됐으며, 1970년에는 주교회의 산하 공식 기구로 정의평화위원회가 발족했습니다. 지학순 주교 구속, 민주화 운동 촉발 한국교회는 1960년대 말부터 정치적 민주화에 대해 깊은 우려와 관심을 보여왔는데, 교회가 본격적으로 불의한 정치 구조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구체적인 실천으로 나서게 된 계기가 바로 지학순 주교의 구속 사건입니다. 고위 성직자의 구속에 대한 범 교회적 대응은, 그 과정에서 독재 체제에 대한 비판과 사회정의 구현의 요구로 발전했습니다. 지 주교는 일단 석방됐지만 7월 23일, 비상군법회의 소환을 거부하고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양심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다시 연행된 지 주교는 결국 8월 12일 재판에서 징역 15년이라는 중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지 주교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국 기도회가 연이어 열렸습니다. 초유의 사태 앞에서 기도회 때마다 대책을 숙의하던 사제들은 8월 26일, 인천교구 사제단 주최로 답동성당에서 열린 기도회에서 ‘기도하는 전국 사제단’이라는 이름으로 첫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사제들은 성명에서 지 주교의 양심선언을 지지하고, 민주주의와 인간 기본권이 보장될 때까지 기도회를 계속할 것을 천명했습니다. 서울대교구 소속 사제 34명은 8월 29일 명동성당 사제관에서 열린 회합에서 주교단의 명확한 입장 표명을 요구하고, “예언자적 소명에 따라 현실 참여에 뜻을 같이하는 사제들이 함께 행동해야 한다”고 뜻을 모았습니다. 정의구현사제단 결성 9월 11일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열린 기도회에서 ‘정의구현사제단’이라는 이름이 처음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가톨릭시보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습니다. “인간 기본권 회복 염원 - 조국과 정의와 민주회복, 옥중의 지 주교와 고통 받는 모든 이를 위한 기도회가 11일 오후 7시 명동대성당에서 열렸다. 200여 명의 신부들과 500여 명의 수도자를 비롯, 1500여 명의 신자들이 참여한 이날 기도회는 예기치 못했던 지학순 주교의 옥중 메시지 공표와 ‘정의구현사제단’의 결의문 발표로 그 절정에 달했다.”(가톨릭시보 1974년 9월 22일자 1면) 전국 각 교구에서 참석한 사제 300여 명은 9월 23일 원주에서 회합을 갖고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결성을 결의했습니다. 당시 한국인 사제가 639명, 외국인 사제가 285명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한 사제들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사제가 뜻을 함께했던 셈입니다. 그로부터 사흘 뒤인 9월 26일 명동성당에서 순교자 찬미 기도회가 열렸습니다. 기도회를 마친 뒤 사제 40여 명과 수도자 300여 명, 평신도 200여 명이 가두 시위에 나섰습니다. 이날 시위는 사제들이 주도한 최초의 가두 시위였으며, 훗날 ‘촛불 집회’로 이어질 평화적 시위 문화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특히 이날 사제들은 제1차 시국 선언을 발표, 인간의 존엄성을 선포하고 수호하는 것이 교회의 의무이자 권리임을 천명했습니다. 이때부터 정의구현사제단은 지속적으로 시국 기도회를 열어 우리 사회의 정치 현실을 비판하고 사회정의 실현을 촉구했습니다. 그리고 사제들의 이러한 사회적 실천은 독재 정권과의 긴장과 충돌로 이어졌습니다. 사제들의 시국선언 사제단은 11월 6일에는 제2차 시국 선언을 발표, “정부는 시민의 개인적 자유와 공공적 자유를 부당하게 억압하고 부정부패로 공동선을 위하기는커녕 소수 특권층의 사리만을 위해서 공권력을 남용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11월 20일에는 제3차 시국 선언 ‘사회정의 실천선언’을 발표, 종교인이 사회 참여를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자신들의 견해를 밝혔습니다. 사제단은 선언에서 “인간에게 희망과 이상을 제시한 하느님의 나라는 다가올 내세만이 아니고 인간화되고 그 구조와 면모가 일신된 현세까지를 포함한다”고 밝혔습니다. “우리 사회의 구조와 체제의 모순으로 인한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행동으로 선포할 때 그것이 정치적 여파를 몰고 오는 것은 불가피한 결과일 뿐 아니라 행동이 복음에 입각한 것임을 입증한다. … 정치와 종교를 분리한다는 구실로 가난을 제거하고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기 위한 행동을 포기한다면 그것은 교회의 자기모순이며 배신임을 확신한다.”(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제3차 시국 선언 ‘사회정의 실천선언’, 1974년 11월 20일) 지학순 주교의 구속과 정의구현사제단의 결성은 한국교회가 사회정의를 위한 활동을 자신의 선교정책 안으로 통합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습니다. 이는 곧 일제의 부역이라는 부끄러운 혐의를 받아온 교회가 인간의 기본권 수호라는 시대적 요청을 간파하고, 깊은 고뇌 속에서 민족과 민중의 고통 속으로 과감하게 걸어 들어가는 커다란 전환점을 의미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긴장과 갈등도 없지 않았습니다. ‘정교분리’라는 해묵은 이념 속에서, 교회 구성원의 사회 참여를 종교 본연의 역할에서 벗어난 것이라는 비판도 제기됐습니다. 그리고 그 오랜 논쟁은 지금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발행일 2025-11-16 제3466호 12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26) 지학순 주교 구속

가톨릭시보, 70년대의 전망 가톨릭시보는 1970년 1월 1일자 지령 700호에 맞춰 ‘70년대 한국교회를 전망한다’는 제목의 지상 좌담을 2개 면에 걸쳐 실었습니다. 이 좌담은 교회 안팎의 시급한 과제를 두루 짚으면서, 한국교회와 한국 사회가 맞게 될 새로운 10년을 전망했습니다. 55년 전의 좌담임에도 참석자들은 교회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놀라운 혜안을 보여주었습니다. 교회 운영과 관련해 한 참석자는 “공의회의 진정한 대화 정신을 교회 운영에서 살려야 한다”며 “주교와 신부 간, 신부와 신자 간의 격의 없는 대화와 협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참석자는 “교회가 이제까지 신자를 통치한다는 관념을 갖고 있다”며 “교회를 민주화·현대화해 교회 기구 안에 평신도를 참여시켜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논의는 오늘 보편교회가 강조하는 ‘시노달리타스 교회’를 향한 여정을 미리 보는 듯한 대목입니다. 경청과 식별을 통한 성령 안에서의 대화, 그리고 여성을 포함한 평신도에 대한 존중의 필요성을 이미 오래전부터 감지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사회 참여의 시대적 요청 그런데 이 좌담에서 우리는 더욱 놀라운 전망을 발견합니다. ‘사회 참여’와 관련된 논의에서 참석자들은 교회가 사회악을 방관하는 것은 곧 교회의 사명 자체를 포기하는 일이라는 인식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한 참석자는 강화 심도직물 사건에서 교회가 보여준 태도와 메시지 발표를 높이 평가하면서, 단순히 메시지 발표에 그치지 말고 보다 적극적인 사회 참여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전망은, 한국 사회와 교회가 이후 어떤 시대적 상황을 겪게 될지를 예견함과 동시에, 한국교회가 그 시대적 요청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를 보여준 선구적 제안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1970년대 한국교회는 적극적인 사회 참여와 더불어, 시대의 아픔과 시련을 민족과 함께 겪으며 성장하고 발전하게 됩니다. 그 시련의 여정은 곧 한국 천주교회 사상 초유의 사건이었던 원주교구장 지학순(다니엘) 주교의 구속으로 본격화됩니다. 지학순 주교 구속 “원주 지학순 주교 징역 15년 선고 -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가 12일 내란 선동 및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피의사건 선고 공판에서 비상보통군법회의 제3심판부로부터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았다. 보도된 판결문 내용을 요약하면 ‘피고인 등은 유신체제에 불만을 품고 유신체제를 부정, 학생들의 현실 참여를 명분으로 한 학원 소요를 이용해 현 정부의 타도를 획책해 오던 자들로서 민청학련에 주도된 국가변란기도 사건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고도 당연히 할 일을 다 한 양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고 돼 있다.”(가톨릭시보 1974년 8월 18일자 1면) 한국 민주화 운동의 결정적 전환점은 1974년 7월 6일, 해외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던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가 김포공항에서 연행·구금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지 주교의 체포 정황은 당시 가톨릭시보에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고, 신속한 후속 보도도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당시 정부는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1월 14일에는 긴급조치 3호를, 4월 3일에는 민청학련 관련 활동을 전면 금지하는 긴급조치 4호를 잇따라 선포해 정국을 강하게 조였습니다. 긴급조치 9호는 이듬해인 1975년 5월 13일의 조치였습니다. 이어 5월 29일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기업공개와 건전한 기업 풍토의 조성을 위한 특별지시’가 내려졌습니다. 숨 가쁘게 이어지는 정국 속에서 교회의 사회 참여는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는 듯하다가, 지 주교 사건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원주교구 부정부패 추방운동 지 주교가 이끌던 원주교구에서는 1971년 10월 5일부터 사흘 동안 부정부패 추방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직접적인 계기는 원주교구와 5·16장학회가 공동 투자해 설립한 원주문화방송국 내부가 부정·부패로 얼룩져 있음이 확인된 것이었습니다. 교구장인 지 주교가 직접 “부정부패를 근절하고 사회정의를 이룩하자”고 앞장서 시위와 농성을 주도했기에 파문은 더욱 컸습니다. 원주에서의 움직임은 전국으로 번져 각지에서 부정부패 규탄 시위가 이어졌고, 가톨릭시보는 10월 17일자 사설에서 이렇게 논평했습니다. “…일제의 식민 통치하에서 안중근(토마스) 의사를 제외하고는 가톨릭 신자로서는 항일투쟁과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런 교회가 이제 공공연하게 데모를 강행했다는 것은 우리 교회 안에 변화가 일어났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가톨릭시보 1971년 10월 17일자 사설) 이 논평이 말해주듯, 한국교회는 이후 불의한 현실에 대해 훨씬 더 명확한 입장을 내기 시작했고, 불의한 정치와 독재정권에 대한 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됩니다. “불의는 우리의 공동 책임” 1974년 7월 21일자 가톨릭시보 1면 중앙에는 ‘불의는 우리의 공동 책임’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전국의 주교들과 수도회 장상들은 10일 오후 6시 명동대성당에서 ‘사회정의와 평화를 위한 미사’를 공동 집전했다. 전국 각지에서 급거 상경한 신부, 수도자, 평신도 등 지도급 인사 1500여 명이 참석한 이날 미사에서는 법 절차 없이 박해받는 이들과 사회 정의를 외치다가 고통받는 모든 이들을 위해 엄숙히 기도했다.” 바로 그 아래에는 ‘지 주교 귀국, 성모병원서 가료 중’이라는 제목으로, 지 주교가 7월 6일 오후 4시43분 CPA 항공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해 성모병원에 입원 중이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 옆에는 사고 형식으로 “부득이한 사정으로 지난 7월 14일자 신문은 발행하지 못했습니다”라는 안내가 붙어 있습니다. 지 주교가 7월 6일 귀국했는데 7월 14일자는 휴간했고, 10일에는 전국에서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들이 급거 상경해 미사와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지 주교의 신변에 매우 긴박한 사정이 전개되고 있었음을 알아챌 수밖에 없었습니다. 박해시대를 제외하면 한국교회사에서 처음으로 벌어진, 고위 성직자에 대한 ‘용공’ 혐의와 체포 그리고 중형 선고는, 이후 한국 민주화 과정에서 천주교회와 정권 사이에 놓일 첨예한 긴장과 갈등의 성격을 예고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시대의 요청에 응답해 사제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결성, 이후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고비마다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발행일 2025-11-09 제3465호 12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25) 1974년 한국교회 신자 수 100만 돌파

“한국 가톨릭 총 신자 1백만 돌파, 전체 인구의 3.1%인 101만 2209명 - 1974년 12월 31일 현재, 한국 가톨릭 총 신자 수는 드디어 1백만을 돌파한 101만 2209명으로 밝혀졌다. 최근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CCK)가 집계, 발표한 ‘74년도 한국 천주교회 교세 통계표’에 의하면 남자가 42만 719명, 여자가 56만 4655명, 교적 미정리자 5003명, 군인 영세자 2130명으로 73년에 비해 5만 8410명의 신자가 늘어 지난 한 해 동안 6.12%의 신자 증가율을 보였으며 신자 수는 전체 인구의 3.1%로 불어났다.”(가톨릭시보 1975년 6월 1일자 1면) 신자 100만 명 돌파 한국교회 신자 수가 1974년 12월 31일 기준 100만 명을 돌파했습니다. 한 해 동안 5만 8410명이 늘어 연간 6.12%의 증가율을 기록하며, 마침내 100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신자 수가 10만 명을 넘어선 때가 44년 전인 1930년 말이었음을 감안하면 매우 뜻깊은 이정표입니다. 한국교회가 본격적인 성장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순간이었습니다. 1973년의 신자 증가율은 18.7%였으나, 1974년에는 6.12%에 그쳐 의문을 낳았습니다. 얼핏 성장세가 급락한 듯 보이지만, 이는 1973년 집계에서 ‘행방불명자’가 전체 신자 수에 가산되어 증가율이 비정상적으로 높게 잡혔기 때문입니다. 1974년부터는 이러한 가산 없이 통상적인 증가만 반영되면서 증가율이 낮아 보인 것입니다. 6.12%는 정상적인 기준으로도 상당히 높은 증가율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100만부터 600만까지 신자 수 100만 명 돌파는 이후 교세의 급격한 팽창을 알린 신호탄이었습니다. 10만 명에서 100만 명이 되기까지 44년이 걸렸지만, 100만 명이 두 배가 되는 데에는 불과 11년(1985년 말)이 걸렸습니다. 이어 200만 명이 300만 명으로 늘어난 시점은 1992년 말이었고, 8년 뒤인 2000년 말에는 400만 명을 돌파했습니다. 2008년 말에는 500만 명을 넘어섰으며, 최근 집계인 2024년 말 현재 신자 수는 약 599만 명으로 600만 명에 육박합니다. 신자 수 100만 명 돌파에 크게 기여한 요인으로는 1950년대부터 이어진 높은 증가율을 들 수 있습니다. 전후 산업화·도시화가 가속하는 가운데,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자국어 전례 정착과 평신도 사도직 강화가 확산됐습니다. 교구 확장과 본당 신설이 빠르게 이루어졌고, 교리·예비신자 교육도 체계화됐습니다. 1980년대, 사회적 갈망과 종교적 응답 한국교회의 급속한 양적 성장은 1980년대에 특히 두드러졌습니다. 이 시기 신자 증가율은 연평균 7.54%라는 높은 수치를 기록해, 전후 1950년대의 폭발적 성장에 필적했습니다. 분단 체제가 고착된 가운데 산업화·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고, 억압적 통치 속에 인간 소외와 인권 침해가 빈발하자 종교가 제공하는 위안과 연대에 대한 사회적 갈망이 커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천주교회의 성장은 다른 종교와 비교해도 이례적이었습니다. 배경에는 한국교회가 시대의 징표를 올바로 식별하고, 복음적·민족적 소명에 충실히 응답한 점에 있습니다. 당시 한국교회는 사람들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예언자적 사명을 실천해 시대의 양심으로 기능했습니다. 민주화와 정의 구현을 위한 헌신을 통해 인간 존엄을 수호하려는 노력이 이어졌고, 그 모습이 널리 알려지며 많은 이가 신앙 공동체로 합류했습니다. 1989년 서울 세계성체대회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두 차례 방한 등 대규모 행사는 교회의 대사회적 인지도를 크게 높였습니다. 그 결과 신자들은 신앙적 자부심과 긍지를 새롭게 확인했고, 이는 곧 교세 확장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이후 이러한 우호적 이미지는 점차 약화됐습니다. 사회 전반의 탈종교화 경향이 확산됐고, 교회 전반의 중산층화와 미사 참례율 저하 등 신앙의 활력이 떨어지는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청년층의 이탈로 교회의 고령화도 심화되고 있습니다. 시대적 아픔과 함께하는 교회 한국교회의 역사를 돌아보면 신자 수의 증감은 그 시대 교회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하느님 백성의 정체성을 얼마나 충실히 살아냈는지를 드러냅니다. 신자 수가 크게 늘던 시기의 교회는 거의 예외 없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며 하느님의 정의를 드러내고자 노력했습니다.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신자가 늘어난 것은 힘없고 고통받는 사람들과 교회가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교회가 고통스러운 민중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던 시기에는 신자 증가율이 떨어졌습니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일제강점기 교회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일제의 억압으로 고통받는 민족의 현실을 외면한 교회를 당시 사람들은 어쩌면 일제의 부역자로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전후 굶주린 이들을 먹이고, 독재 정권의 장기 집권에 맞서 싸운 1950년대와 1960년대 초반에는 신자 증가율이 크게 높아졌습니다. 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화 투쟁에 나서고, 핍박받는 노동자를 옹호하며 사회정의에 투신한 1970~1980년대 교회에는 정의와 평화를 바라는 이들이 넘쳐났습니다. 1970년대 초반, 한국 교회는 독재 정권과의 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합니다. 1968년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을 시작으로 고조된 긴장과 갈등은, 한국교회가 신자 수 100만 명을 돌파한 1974년, 지학순 주교 구속 사건을 거치며 본격화됐습니다.

발행일 2025-11-02 제3464호 12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24) 모자보건법 제정

“모자보건법을 반대 - 합법적인 낙태 수술의 범위를 확대하고 실질적인 강제 불임 수술의 근거를 마련해주는 모자보건법이 1월 30일 비상국무회의에서 통과되자, 교회 내에서는 이 법으로 인해 생겨날 인명 경시 풍조와 가치 질서의 전도, 도덕적 피폐, 모체의 건강 위험 등 갖가지 부작용을 크게 우려하면서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다.”(가톨릭시보 1973년 2월 4일자 1면 중에서) 유신 체제 아래서 통과된 반생명적 악법 1973년 1월 30일, 유신 체제하 비상국무회의는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훼손한다는 종교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결국 모자보건법을 통과시켰습니다. 국가가 강제로 인구 증가를 억제하기 위해 이른바 가족계획 사업의 일환으로 제정한 이 법률은 이후 우리나라에서 낙태가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만연하게 만든 주범으로 지목돼 왔습니다. 가톨릭교회를 비롯한 종교계의 강력한 반대가 있었으나, 당시는 박정희 정권이 1972년 10월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한 직후였기 때문에 억압적인 국가 시책에 대한 반대 여론은 사실상 봉쇄됐습니다. 가톨릭시보는 관련 소식을 즉각 보도하며 이 반생명적인 법률의 문제점을 지적했습니다. “전문 14조와 부칙으로 구성된 이 법안은 제8조에서 인공임신중절(낙태)의 허용 한계를 ①본인 또는 배우자가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②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③강간 또는 준강간에 의한 임신, ④혈족 또는 인척 간의 임신, ⑤임신의 지속이 보건의학적 이유로 모체의 건강을 해치는 경우 등으로 규정했다. 특히 이 규정에는 여론을 의식한 듯 종래의 중절 수술 허용 이유 중 ‘경제적인 이유’를 삭제했으나, 문제의 ‘경제적인 이유’가 제8조 제5항 ‘모체의 건강을 해치는 경우’에 은폐돼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가톨릭시보 1973년 2월 4일자 1면 중에서) 주교단의 즉각적 대응과 사목교서 한국 천주교 주교단은 즉시 사목교서를 발표하고, 2월 18일 주일미사 때 모든 신자 앞에서 이 교서를 낭독하도록 사목자들에게 지시했습니다. 또한 일부 조항의 삭제와 개정을 요구하는 건의서를 대통령과 보건사회부 장관에게 발송했습니다. 가톨릭시보는 주교단의 교서 관련 소식을 2월 18일자에 보도하고 사목교서 전문을 2면에 게재했습니다. “한국 천주교 주교단은 지난 1월 30일 비상국무회의에서 의결·통과된 ‘모자보건법’에 대해 ‘낙태 수술의 자유화는 생명 경시 풍조, 모체 건강의 파괴, 노동력 부족 등 국가적 내지 민족적 불행을 초래하는 독소를 내포하고 있다’며, 이의 삭제와 개정을 촉구하는 사목교서를 발표했다.”(가톨릭시보 1973년 2월 18일자 1면 중에서) 모자보건법에 대한 논의는 이미 1960년대초부터 시작됐습니다. 교회는 모자보건법 제정이 가져올 심각한 부작용을 우려하며 줄곧 반대 입장을 견지해 왔습니다. 가톨릭시보는 1965년 11월 7일자에서, 보건사회부가 10월 24일 가족계획사업의 강력한 추진을 목적으로 형법상 낙태죄를 합법화하는 모자보건법을 마련해 법제처에 회부하기로 한 사실을 보도하고, “낙태는 살인죄”라며 강경하게 반대하는 사설을 실었습니다. 서울대교구장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은 1970년 6월 21일 사목교서를 발표해, 법제처에서 심의 중인 모자보건법에 대해 모든 신자가 적극 반대해 줄 것을 호소했습니다. 주교단은 같은 해 6월 30일부터 7월 2일까지 열린 주교회의 임시총회에서 모자보건법 제정을 막기 위한 전국적 기구를 구성하기로 합의하고 이를 김 추기경에게 일임했습니다. 경제 개발 위한 인공적 산아 제한 10년 넘게 끈질기게 추진된 모자보건법은 우리 사회의 생명문화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 독소 조항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은밀하게 이루어지던 낙태를 합법화한 제14조(인공임신중절수술 허용 한계)가 대표적입니다. 이 법은 낙태를 허용하는 조건을 지나치게 폭넓게 인정함으로써 사실상 낙태를 합법화한 악법이자, 인간 생명의 존엄성과 가치를 훼손함으로써 우리나라에 ‘죽음의 문화’를 확산시킨 주범이었습니다. 정부가 이처럼 끈질기게 모자보건법 제정을 추진한 직접적인 이유는 산아 제한과 경제개발이었습니다. 모든 국가 정책을 경제개발에 맞추고 있던 정부는 전후 베이비붐으로 급격히 증가한 인구로 인해 산업 경쟁력 약화를 우려했고, 산아 제한을 효과적으로 추진할 방안을 모색했습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모자보건법을 통한 낙태 합법화였습니다. 강화도 심도직물 사태를 계기로 정부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던 가톨릭교회는 생명 문제에 대해서도 한결같이 단호한 입장이었습니다. 비록 모자보건법 제정을 막지는 못했지만, 주교단은 이후에도 이 법의 폐지를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습니다. 낙태 반대 운동의 확산과 사회 변화 모자보건법이 제정된 1970~1980년대는 사실상 국가 주도의 산아 제한과 인구 억제, 낙태 허용 정책이 강력하게 시행되던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에 낙태 반대 운동은 가톨릭교회와 일부 생명운동 단체들에 국한되었습니다. 1990년대 들어 인구 감소세가 뚜렷해지면서 1996년경부터 정부는 산아 제한 정책을 중단했습니다. 이에 맞춰 주교회의 산하에 ‘생명운동본부’가 설치돼 낙태 반대 및 생명 존중 캠페인이 활발히 전개되었습니다. 반면 여성 단체들은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주장하며 법 개정 논의를 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헌재 결정 이후 혼란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출산율 급감으로 정부는 저출산 대책을 내세우기 시작했고, 종교계를 중심으로 생명 수호 캠페인이 강화되며 미혼모 지원 활동도 확산되었습니다. 동시에 여성계는 낙태죄 폐지 운동을 전개하면서 낙태를 둘러싼 찬반 논쟁이 심화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2019년 헌법재판소는 우리나라의 낙태 논쟁에 중대한 분수령이 된 결정을 내렸습니다. 헌재는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고 2020년 말까지 법 개정을 명령했습니다. 이에 따라 2021년 1월부터 낙태죄 조항의 법적 효력이 상실되었지만, 아직 새 입법이 이루어지지 않아 법적 공백 상태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올해 들어서는 낙태를 무제한적으로 허용하는 개정 법률안이 잇달아 발의되면서 심각한 우려를 낳고 있습니다.

발행일 2025-10-26 제3463호 8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23) 가톨릭시보, 시국 보도로 회수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나라와 민족의 고난에 대해 눈뜨기 시작한 한국교회는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폭압적 통치를 강화하는 정권과 날카롭게 대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첫 발로가 1968년 강화 심도직물 사건이었습니다. 공의회 후 한국 천주교회가 처음으로 시국 문제에 대해 자기 입장을 표명한 이 사건 이후, 교회는 독재와 부정부패, 불의한 사회 현실을 고발하고 개혁을 향한 예언자적 목소리를 높여갔습니다. 정부가 이러한 교회의 모습에 불만을 표시하고 정책적 억압을 강화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뜬금없는 ‘예수 수난기’ 급기야 교회와 정부의 대립을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사태가 1972년 8월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가톨릭시보가 있었습니다. 독자들이 받아 본 가톨릭시보 8월 13일자 1면은 얼핏 뜬금없는 예수 수난기가 실렸습니다. “예수 십자가에 처형되다”라는 제목의 1면 톱기사는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로 시작됐습니다. 이 수난기는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마친 뒤 고통스럽게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숨을 거두기까지 모습을 하나의 이야기로 서술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수난기 형식의 톱기사 옆에는 “김추기경 시국관 밝혀”라는 제목의 다음과 같은 짤막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김수환 추기경은 광복절을 기해 지난 9일 오전 9시40분 CCK서 기자회견을 갖고 7·4 남북공동성명과 8·3 긴급재정명령에 따른 교회 입장을 밝히는 6000여 자에 달하는 장문의 ‘현 시국에 부치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주교회의, 비상사태와 보위법 철회 요구 예수 수난기가 실린 8월 13일자 가톨릭시보는 시국 현안을 다루지 못하게 한 정부 당국의 강압적 조치 때문에 다시 인쇄한 것이었습니다. 가톨릭시보 편집진은 당초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의 메시지 발표 소식을 상세하게 전하고, 아예 메시지 전문을 모두 1면에 게재한 신문을 이미 발행했습니다. 그래서 8월 13일자 신문은 두 가지가 발행된 셈입니다. 처음 발행된 신문은 김 추기경의 메시지와 기자회견 소식을 다음과 같이 전했습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김수환 추기경은 9일 오전 7·4 남북공동성명과 8·3 긴급재정명령에 관한 교회 입장을 밝히는 ‘현시국에 부치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오전 9시40분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CCK)에서 가진 기자회견을 통해 김 추기경은 천주교회는 국제 정세와 이에 따라 소용돌이치는 국내 정세를 직시하면서, 우리나라는 어디에 서 있으며, 우리 겨레의 진운은 어디로 향하여 나가고 있는지 심각한 우려를 표명치 않을 수 없다고 전제, ‘지난 연말 비상사태 선포와 변칙 통과한 보위법을 비롯하여 최근 예측 불능의 상태에서 발표된 7·4 남북공동성명과 8·3 긴급재정명령 등에 접하여 정부는 도대체 이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가려는 것인지 종잡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이 나라가 민주 사회인지 통제 사회인지 분간키 어려운 것이 솔직한 인상이라고 말했다.” 김 추기경은 또 7·4 남북공동성명이 집권 세력의 정권 유지 차원이 아니라 참된 평화통일을 이룰 수 있는 초석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는 한편, 정부의 통일 논의 독점을 반대했습니다. 아울러 8·3 긴급재정명령이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더욱 격화시키는 졸속한 경제정책이 될 독소가 많다”고 단언했습니다. 시국 현안 다룬 가톨릭시보 모두 회수 정부에 대한 천주교회의 비판적 기조로 인해, 당시 교회 관련 정보와 소식의 집결지였던 가톨릭시보사에는 정보기관 요원이 상주하다시피 하고 있었습니다. 김 추기경의 메시지 내용을 파악한 정부 기관은 가톨릭시보에 이 메시지와 관련된 기사를 게재하지 말 것을 종용했습니다. 당시 가톨릭시보 주간 김경환(토마스) 신부는 교회신문의 예언자적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이 메시지를 상세하게 보도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1면 전체를 메시지의 내용으로 꽉 채웠습니다. 다만 이후 사태를 예상하면서 모든 직원을 먼저 퇴근시키고, 자신이 직접 인쇄된 신문을 차에 실어 기차역으로 향했습니다. 가톨릭시보는 통상 인쇄 후 철도편으로 전국 각지로 발송되었기 때문입니다. 김 신부가 신문 발송을 마치고 숙소인 주교관으로 돌아온 뒤, 정부 기관원들은 당시 대구대교구장 서정길(요한 세례자) 대주교를 앞세워 찾아왔습니다. 서 대주교는 조용한 목소리로 신문 회수를 명령했고, 김 신부는 신문을 회수하기 위해 다시 역으로 향해야 했습니다. 이미 전국으로 발송된 신문은 모두 도착역에서 되돌아오고 있었고, 다음날 우편발송도 원천 봉쇄됐습니다. 결국 독자들은 김 추기경의 메시지가 게재된 신문을 받아볼 수 없었습니다. 박해받는 현실, 수난기로 암시 신문을 모두 회수한 김 신부는 깊은 고뇌에 빠졌습니다. 인쇄된 신문을 모두 회수했으나, 어떻게든 교회가 현 시국과 관련해 비상한 관심을 갖고 자신의 입장을 표명했다는 사실, 그 입장은 현 정부의 나라 통치와 정책 방향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라는 점, 그로 인해 교회와 가톨릭시보가 정부로부터 극심한 압박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1면만 백지상태로 발행해야 할지, 혹은 해당 날짜의 신문을 발행하지 않을지, 고민 끝에 그는 1면을 다시 제작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고심 끝에 그는 예수 수난기를 싣기로 했습니다. 인류 구원을 위해 고난의 길을 걸어간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불의한 사회 현실에 저항해야 할 예언자적 소명과 연결 짓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다만, 1면 중앙에 김 추기경이 시국과 관련한 메시지를 발표했다는 한 문장으로 된 간략한 기사를, 내용에 대한 아무런 설명도 없이 게재함으로써 독자들이 뜬금없는 예수 수난기의 의미를 짐작하리라 기대했습니다. 김 추기경의 메시지, 그 소식을 전하고자 했던 가톨릭시보의 시련은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관통한, 민주화 운동과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천주교회의 참여와 연대, 고난과 희생의 서막이었습니다. 암울했던 독재시대를 뚫고 나와 정치적 민주화를 이끈 천주교회의 모습은 가히 시대의 징표에 응답하려 했던, 예언자로서의 교회 모습이었습니다. 그 길고 지루했던 여정의 시발점에 원주교구 지학순(다니엘) 주교가 있었습니다.

발행일 2025-10-05 제3461호 11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22) 김수환 추기경 탄생

한국 최초 추기경 탄생 “김수환 대주교, 한국 최초 추기경에…수난 얽힌 200년사의 결실. 교황 바오로 6세는 28일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대주교(스테파노·47)를 추기경으로 임명, 1백92년의 한국교회 사상 최대 영광의 좌(座)를 한국에 부여했다. 바오로 6세 교황은 이날 김 추기경 외에 다른 34명을 추기경으로 임명, 추기경단을 가톨릭 역사상 최대인 134명으로 늘렸다. 김 스테파노 추기경을 비롯한 이들 새 추기경들은 오는 4월 28일 비밀추기경 회의에서 교황으로부터 공식 추기경 임명을 받는다.”(가톨릭시보, 1969년 4월 6일자 1면) 바오로 6세 교황은 1969년 3월 28일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대주교를 추기경에 임명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47세. 전 세계 추기경 가운데 최연소였습니다. 한국 최초의 추기경 탄생의 소식은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의 경사로 받아들여졌고 환호의 물결이 전국을 뒤덮었습니다. 당시 김 추기경은 일본에서 발표 소식을 들었고, 이튿날인 29일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했습니다. 가톨릭시보는 4월 6일자 3면에서 ‘알렐루야!! 우리의 영광 김수환 추기경’이라는 제목의 머리기사에서 추기경 탄생에 환호하는 한국교회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했습니다. “28일 오후 8시 반 교황대사관으로부터 이 소식이 명동 주교관에 전해지자 전혀 상상도 못 했던 소식을 들은 사람은 모두 즐거운 흥분 속에서 영광의 주인공인 새 추기경 김 대주교가 귀국하기만을 기다리며 환영 준비에 동동걸음을 치면서 하룻밤을 지냈다.” 이어 김 추기경의 귀국 장면을 감격에 겨워 묘사했습니다. “새 추기경을 축하하기 위해 공항에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은 노기남 대주교, 그의 노안에 기쁨이 가득했다. … 두 개의 귀빈실은 꽉 찼고 광장엔 「환영, 우리의 영광 김수환 추기경 탄생」이라고 쓰인 플래카드가 나부꼈다. 한국 성직자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이토마(86세) 신부는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 그 기쁨을 표시하기도.” 당시 바오로 6세 교황은 제3세계 지역 추기경 수를 18명에서 29명으로 대폭 늘려 가톨릭의 세계화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한국교회는 전년도에 거행된 병인박해 순교자 24명의 시복식으로 모두 103위의 복자를 갖게 되는 경사에 이어, 이날 최초로 추기경이 탄생하는 겹경사를 맞았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가톨릭시보 일제의 강점에 신음하다가 해방됐지만, 분단의 비극 속에서 민족상잔의 참혹한 전쟁을 겪어야 했던 아시아의 작은 나라. 폐허를 딛고 이제 막 일어서던 한국교회에 첫 추기경의 탄생은 그야말로 하느님의 은총이었습니다. 1922년 순교자의 집안에서 태어난 김수환 추기경은 사제품을 받은 후, 1956년 독일 뮌스터대학에 유학했습니다. 이때 접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는 사제로서 자신의 정체성과 직무 수행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게 됩니다. 세상을 향해 문을 열고 쇄신을 통해 시대 변화에 적응하려는 교회의 노력은 훗날 주교와 추기경으로서의 소임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유학에서 돌아온 후 김 추기경은 1964년 6월 가톨릭시보사 사장으로 취임했습니다. 이때는 공의회가 한창 무르익던 시기로, 그는 한국교회 그 누구보다도 공의회 관련 소식을 가장 먼저 가장 깊이 접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비용인 20만 원을 통신사에 내고 공의회 관련 기사를 모두 받아 번역, 게재했습니다. 그는 한국교회가 공의회의 근본정신인 변화와 쇄신의 흐름을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가르침들을 바탕으로 한국 사회와 교회가 무엇을 쇄신해야 하는지, 그 고민의 성과들을 기사와 사설로 풍성하게 지면에 담아냈습니다. ‘신문사 사장이 되기 전부터 애독자’였던 김 추기경은 2009년 가톨릭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당시의 열정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밥 먹는 시간이 아깝게 여겨질 정도로 열심히 뛰던 때가 가톨릭신문 재직 시절이었습니다. 정말 하루 24시간 중 밥 먹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 비타민 같은 것으로 대신할 수 없을까 고민할 정도였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2009년 2월 16일 선종하기까지, 김수환 추기경이 한국 교회와 사회에 미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그리고 그 평생을 요약하는 핵심적인 단어는 바로 인간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는 곧 인간을 위해 외아들을 내어놓으신 하느님의 사랑, 모든 이를 위해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신 예수님께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은 특별히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과 불의한 사회 구조를 타파하고 정의를 실현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집니다. 김 추기경은 서임 한 해 전인 1968년, 한국교회 처음으로 대사회적 발언에 나섭니다. 가톨릭노동청년회(JOC) 총재주교였던 그는 합법적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노동자를 불법 해고한 ‘강화 심도직물 사건’에 맞서 ‘사회 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주교단 공동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교회는 사회 정의 실현과 민주화를 위한 지난한 여정을 본격적으로 걷게 됩니다. 김 추기경은 시대적 요청이었던 이 싸움의 한가운데 항상 서 있었습니다. 가장 자주 회자되는 이야기, 시대적 징표에 대해 김 추기경이 취한 입장과 자세를 대변하는 장면이 1987년 6·10 민중항쟁 당시였습니다. 민주화 투쟁에 나섰던 학생들이 명동성당으로 몸을 피했고, 공권력 투입이 예상되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 속에서 김 추기경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당 안으로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우리를 다 넘어뜨리고 난 후에야 학생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오.” 한국교회의 추기경들 한국교회가 두 번째 추기경을 맞이한 것은 김수환 대주교가 추기경에 임명된 후 무려 37년 뒤였습니다. 한국교회가 이미 엄청난 성장을 이룬 2006년 2월 22일,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서울대교구장이며 평양교구장 서리였던 정진석(니콜라오) 대주교를 추기경으로 임명했습니다. 2014년에는 염수정(안드레아) 대주교, 2022년에는 유흥식(라자로) 주교가 추기경에 임명됐습니다. 특히 유 추기경은 한국교회에서는 처음으로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에 임명되기도 했습니다. 정진석 추기경은 2021년 선종, 현재 생존한 추기경은 2명입니다.

발행일 2025-09-28 제3460호 12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21) 한국 순교자 24위 시복, 총 103위 복자

“우리나라의 순교자 24위를 한국교회 전체의 가경자로 선언하는 시복식이 6일 오전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엄숙히 거행됐다. 전 세계로부터 약 5만 명의 신자들이 운집한 이번 시복식에는 7명의 추기경을 비롯해 25명의 대주교 및 주교들과 500명이 넘는 한국 신자들, 그리고 약 2500명의 프랑스 신자들이 참석했다. 시복식이 끝나자 순교자를 찬양하는 성가가 찬란하고 장엄하게 장식된 대성전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대주교가 대미사를 주례했다.” (가톨릭시보 1968년 10월 13일자 1면 중에서) 새 복자 24위 탄생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은 온통 눈물바다가 됐습니다. 이날은 병인박해 때 순교한 24명의 한국 순교자가 복자품에 오른 감격스러운 날이고, 시복 경축 대미사를 한국교회 사상 처음으로 우리말 기도와 성가로 우리나라 주교가 주례하는 감동을 만끽한 날이기도 합니다. 특히 이날 시복식에는 500여 명의 한국 신자들이 참석, 24명의 신앙 선조들이 복자로 선포되는 역사적인 순간을 지켜보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시복식에서는 시복 선언에 이어 서울대교구장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의 선창으로 ‘테 데움’(Te Deum)이 울려 퍼졌고, 24위 복자들의 초상화가 대성당 정면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복자로 선포된 24위는 1866년부터 6년 동안 조선 전역을 휩쓸었던 병인박해로 순교한 1만여 명 가운데 선발된 이들로, 프랑스인 선교사 7명과 한국인 평신도 17명입니다. 당시 시복 미사를 집전한 김 추기경은 그날의 감동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그날 예상하지도 않았는데 시복 미사 집전의 영광이 내게 주어졌다. 선조들이 복자품에 오르는 감격스런 장면을 지켜보는 신자들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흐르는 것은 당연했다. 유럽에 사는 교포 신자들까지 합쳐 한국인 500여 명이 모인 그날은 바티칸 전체가 한국의 날이었다.”(「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178쪽) 24위 시복식의 의미 이날 시복식은 한국교회에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천주교 전래 과정에서 수많은 박해를 겪었으며, 특히 신유박해(1801년)·기해박해(1839년)·병오박해(1846년)·병인박해(1866년) 등 4대 박해는 참으로 혹독한 수난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병인박해는 8000명에서 1만 명에 이르는 순교자를 낳은, 한국교회 역사상 가장 참혹한 박해였습니다. 기해박해와 병오박해 순교자 79위는 이미 1925년에 시복돼 이날 시복식으로 한국교회의 복자는 모두 103위가 됐습니다. 그리고 이분들은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984년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모두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79위 시복식은 파리 외방 전교회 주도로 일제 강점기에 거행된 까닭에, 한국 순교자가 아니라 ‘식민지 조선의 순교자’로 알려졌습니다. 시복식에 참석한 한국인도 단 3명뿐이었습니다. 게다가 일제 강점기와 해방, 6·25 전쟁, 그리고 전후의 혼란 속에서 순교자와 복자에 대한 공경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교황청이 병인박해 순교자 24위 시복을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국교회는 순교자 현양과 순교 영성에 대한 관심을 본격적으로 쏟기 시작했습니다. 한국교회가 혹독한 박해와 순교자의 피와 땀 위에 세워졌음을 비로소 깊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실상 순교 영성 연구와 현양 운동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불붙은 순교자 현양 운동 이러한 인식을 반영하듯, 한국교회 안에서는 시복식을 전후해 순교자 현양 운동이 들불처럼 타올랐습니다. 가톨릭시보는 시복식을 앞두고 10월 6일자에 특집면을 4면 증면해, 시복식과 한국교회 순교자들에 대한 상세한 소식을 전했습니다. ‘진리 위해 쓰러진 피꽃 영광의 열매 맺다’라는 벅찬 감격을 담은 제목 아래 시복식의 일정과 의미를 전한 기사가 1면에 실렸습니다. 전면에는 24위 복자들의 모습이 담긴 그림이 게재됐고,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써서 가톨릭시보에 전달한 ‘진리불변 충절상청’(眞理不變 忠節常靑)이라는 휘호도 함께 실렸습니다. 같은 날짜 신문 3면에는 시복되는 24위의 간략한 생애가, 4면에는 ‘순교정신 현양사업의 어제와 오늘’을 주제로 열린 좌담회의 내용이 실렸습니다. 5면에는 병인박해의 역사적 의의와 함께 시복에서 누락된 순교자들, 순교자 후손과의 만남이 보도됐고, 6면에는 순교의 현대적 의미와 기념 문예공모전 당선작이 소개됐습니다. 그 외에도 24위 시복의 감격을 담은 다양한 기획 기사들이 지면을 채웠습니다. 시복식의 감격은 10월 내내 이어졌습니다. 한국병인순교자시복경축집행위원회는 ▲순교자료전시회(절두산 양화진성당(현 절두산 순교성지) ▲경축대미사(남산 야외음악당) ▲예술제(국립극장) ▲강연회(신문회관) ▲시복일 기념미사 ▲백일장과 사생대회 등을 통해 24위 시복을 경축하고 순교자 현양운동을 확산시켰습니다. 시복식은 교회뿐만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도 경사였습니다. TBC TV는 5만여 명의 신자들이 참석한 10월 13일 남산 야외음악당 경축대미사를 2시간 동안 중계해, 온 국민이 함께 기쁨을 나눌 수 있도록 했습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24위 시복식이 거행된 날 오후 성 베드로 대성당에 들어와 새 복자들에게 경배한 뒤, 연설을 통해 “24위의 한국 순교자는 영웅적인 정신과 굳건한 신앙의 귀감”이라며 “서구 신자들은 한국 순교사를 연구하여 훌륭한 표양을 본받으라”고 촉구했습니다. 일제 강점기를 벗어난 뒤 처음으로 이뤄진 시복의 결실이었던 24위 시복은 한국교회 순교 영성을 일깨우고, 한국이 순교자의 땅임을 온 세상에 선포한 소중하고 뜻깊은 사건이었습니다.

발행일 2025-09-21 제3459호 12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20) 노동문제에 대한 첫 관심, 강화 심도직물 사건

불평등의 심화, 노동자 착취 극심 1960년대 후반, 박정희 정권은 반공주의와 경제 성장 제일주의를 앞세워 권위주의적인 정치 및 경제 개발 정책을 억압적으로 밀어붙였습니다. 그리고 이와 결탁한 자본가들의 혹독한 노동 착취는 수많은 가난한 이의 삶을 참담한 지경으로 내몰았습니다. 1970년대 초까지 한국은 심화된 권위주의적인 정치 상황과 함께 경제적 불평등이 고착되고 있었습니다. 피폐해진 농민들은 생존을 위해 매년 50만 명 이상이 도시로 흘러들었습니다. 성장 제일의 경제 정책은 도시로 몰려든 과잉인구를 저임금과 노동 착취로 내몰았습니다. 노동자들은 저임금, 산업재해와 직업병에 시달리며 궁핍한 삶을 이어가야 했지만 스스로를 보호하고 인간다운 삶을 지켜나갈 아무런 방편도 없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인간의 존엄과 현세에 대한 깊은 관심을 촉구했습니다. 1960년대 후반, 한국교회는 공의회의 가르침을 수용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여전히 당대의 시대적 요청을 온전히 능동적이고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런 가운데에서도 하느님 백성이 처한 시대 상황을 공의회 정신에 비추어 성찰하고 삶으로 실천하려는 노력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공의회가 촉발한 노동문제에 대한 관심 1967년 7월, ‘우리의 사회 신조’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한국 주교단 공동선언은 세상 속 교회를 선언한 공의회 정신에 바탕을 두고 노사 관계와 국가의 역할, 그리스도인의 소명에 대한 입장을 밝혔습니다. 선언은 “현 한국 사회의 사회적, 경제적 제반 사정을 실감하며, 한국 국민들로 하여금 스스로 인간의 존엄성을 가지고 서로의 권리를 보장하고 또한 자신과 가족과 사회와 하느님께 대한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기본적인 목표와 방법들을 제시”한다며 총 23개 항목을 ‘신조’로 제시했습니다. 선언은 특히 모든 노동자는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정당한 임금이 지불돼야 함은 물론,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고용주와 집단적으로 교섭할 수 있는 권리가 인정돼야 한다고 규정했습니다. 공의회를 통해 세상 속 교회라는 자의식을 더 분명하게 인식하기 시작한 한국교회는 고통스러운 노동자들의 삶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68년 강화 심도직물 사건은 교회 안의 그런 인식과 움직임이 처음으로 사회 현실과 첨예하게 맞부딪힌 사건이었습니다. 강화 심도직물 사건과 JOC 가톨릭시보는 1968년 1월 21자 3면에서 심도직물 사건을 여러 꼭지의 기사를 통해 매우 자세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강화 직물업자, 종교 자유 침해 신자 채용 거부 – 가톨릭노동청년(JOC)운동 정신에 입각한 강화도 JOC의 정당한 임금 지불 및 노동 시간 준수 등 노동운동이 현지의 20개 직물업자들의 부당한 반응으로 시비가 벌어졌다. 이 시비는 4일 ‘심도직물’에서 동 직물 노조 분회장을 해임한 후 시작하여 업주들이 천주교 신자는 채용하지 않기로 결의하고 강화본당 JOC 지도신부의 성무 집행과 노동운동 지도를 방해하고 현지 경찰서장이 지도신부에게 ‘반공법 위반’ 운운으로 협박하는가 하면 업주 측 노동자들의 시위 등이 벌어졌다.”(가톨릭시보 1968년 1월 21일자 3면) 1925년 벨기에 조셉 까르딘 추기경이 창설한 가톨릭노동청년회(JOC)는 1958년경 한국에 처음 도입됐고 이후 전국으로 확산돼 청년 노동자의 존엄성을 사회에 일깨우고, 노동의 가치와 보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인천교구 강화도본당 주임이자 JOC 지도신부였던 외국인 선교사 전 미카엘(Michael Bransfield, 1929~1989) 신부가 강화도본당을 중심으로 JOC 활동을 조직하고 지원했습니다. 1967년 5월 14일 JOC의 지원으로 심도직물이라는 직물공장에 근무하던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 1200여 명의 노동자 중 900여 명이 노동조합에 가입했습니다. 사측은 노조를 와해시키려고 회원 2명을 부당 해고했고, 이에 노조원들은 강화도성당에 모여 진상 보고대회를 개최했습니다. 이때 경찰이 출동해 30여 명의 천주교 신자를 연행했고, 심도직물 사주와 강화경찰서장이 전 미카엘 신부를 찾아와 노조 활동에 계속 개입하면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심지어 강화도 내 21개 직물회사 연합체인 ‘강화직물협의회’는 JOC 회원은 앞으로 고용하지 않겠다는 결의문을 중앙 일간지에 게재하기도 했습니다. 이어 사측은 150여 명의 노동자들을 동원해 전 신부를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경찰은 전 신부를 연행해 사과를 요구했습니다. 나아가 인천교구장 나길모(굴리엘모) 주교에게 전 신부를 다른 곳으로 전출시키도록 압력을 가했습니다. 교회의 대응 악화일로로 치닫던 상황 속에서, 나길모 주교는 담화를 통해 사측과 경찰 당국에 항의하고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침해하는 사례에 대해 강력한 유감을 표시했습니다. 나 주교는 특히 이 사건을 단순한 하나의 노사 분규를 넘어 교회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으로 간주했습니다. 당시 JOC 총재는 1969년에 한국 첫 추기경에 서임된 서울대교구장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이었습니다. 김 추기경은 사태의 전모를 파악하고 주교들을 설득, 주교단은 1968년 2월 9일 ‘사회정의와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한다’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성명서는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과 단체 행동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을 포함해 노동문제에 대한 교회의 기본적인 입장을 담았습니다. 주교단의 성명서는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급진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었지만, 바오로 6세 교황은 한국 주교단에 격려와 지지의 서한을 보내옵니다. 한국교회 전체의 일관된 항의와 교황청의 지지가 전해지면서, 정부는 비로소 사태 수습에 나서게 되고 심도직물이 이끄는 강화직물협의회는 이전의 결의를 폐기하고 해고자들을 복직시키게 됩니다. 강화 심도직물 사건은 공의회 이후 한국교회가 처음으로 시국 문제에 자기 입장을 적극적으로 표명하고 나선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한국교회는 이 소중한 체험을 바탕으로, 노동문제는 물론 민주화와 인권운동, 민족화해, 사회정의 실현 등 우리 사회 각 부문의 다양한 현실 참여 영역에서 예언자적 역할을 하게 됩니다.

발행일 2025-09-07 제3457호 12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19)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한국교회

세상을 향한 창을 활짝 열고, 교회 쇄신을 위해 소집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1965년 12월 8일 모든 일정을 마치고 폐막 미사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가톨릭시보는 이 감격적인 순간을 다음과 같이 전했습니다. “공의회 8일 역사적 폐막 - 교종 바오로 6세는 8일 현대 가톨릭교회의 좌표를 정하고 새로운 세기의 문을 연 역사적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폐회하면서, 이 공의회가 노력한 바는 가톨릭교회뿐 아니라 전 인류 세계를 새로운 성신 강림으로 혁신하기 위해서라고 언명했다. 교종은 세계 주교들을 모은 이 공의회가 교회 안에 일대 정신 쇄신을 가져오게 하였음을 강조하고, 2천 년 교회사상 제21차인 이번 공의회가 가장 위대한 것이었다고 천명했다. 바오로 6세는 공의회가 목적한 것의 실현은 이제부터라고 다짐하고,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이를 신속히 실천에 옮겨 온 세계를 그리스도 안에 구원하는 데 전력을 다하라고 호소했다.”(가톨릭시보 1965년 12월 12일자 1면) 한국교회의 과제 당시 가톨릭시보 사장은 훗날 한국교회 첫 추기경으로 서임된 김수환 신부였습니다. 공의회의 가르침을 한국교회에 전하기 위해 힘쓴 김 추기경은 12월 25일자 칼럼 「공의회의 의의」에서 폐막에 즈음한 한국교회의 과제를 일깨웠습니다. “공의회가 내일의 교회와 인류 사회에 과연 기대한 바대로의 성과를 가져올지 여부는 아직 속단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성과 여부는 결의된 바를 앞으로 어떻게 실천에 옮기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생활 재생도, 교회 쇄신과 일치도, 세계와의 대화도 이제부터의 과업이다. 공의회는 교종 바오로 6세 친히 하신 말씀대로 쟁기로 땅을 갈아제친 데 불과하고, 풍성한 결실을 가져올 과목(果木)을 심는 일은 지금부터 우리 각자가 해야 할 일이다.” (가톨릭시보 1965년 12월 25일자 3면) 김 추기경은 공의회가 열어젖힌 새로운 세기의 문으로 “우리의 동포들을 천주께 인도하는 것”이 한국교회의 과제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이에 앞서 “공의회라는 거울에 우리 신앙생활과 사목 자세를 비춰보는 일”, 이러한 “반성과 각성이 있을 때 우리도 쇄신된 교회가 될 수 있다”고 당부했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현대 교회 새로운 세기 열어 가톨릭시보, 칼럼·기사 통해 공의회 가르침 적극 독려 주교회의, ‘공동교서’ 발표…공동체적 신앙 의식 함양 강조 주교단 공동교서 발표 한국 주교회의는 공의회 폐막 후 처음 열린 1966년 5월, 사흘간의 총회를 마치고 「바티칸공의회와 한국교회」라는 이름으로 공동사목교서를 발표했습니다. 주교단 공동명의로 작성, 발표된 이 사목교서는 공의회의 가르침을 한국교회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적용하려는 의지를 다지고, 그 근본적인 원칙과 지침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교서는 각 교구의 모든 사목 정책 방향이 공의회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실천해 나가기 위한 노력에 집중될 것임을 밝혔습니다.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개인적 구령관’에서 벗어나 ‘공동체적 신앙 의식’을 키워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가톨릭시보는 5월 22일자에서 공동사목교서 소식을 1면 톱기사로 소개하고 전문을 함께 게재했습니다. 교서는 우선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교회사상 미증유의 기념탑적 업적”이며, 어떤 면에서는 “성교회 생명을 좌우하는 중대한 계기”가 될 것이라며 그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공의회 후 처음으로 개최된 한국 주교회의는 공동사목교서에서 공의회의 모든 교령과 정신을 투철하게 실천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는 것이 우리의 지상 과업이라고 전국 성직자·수도자 및 신자들에게 유시했다. 남한의 12개 교구장과 북한의 2개 교구장 서리가 공동 서명한 동 교서는 형식적이 아닌 내적 쇄신으로 교회의 인류 구원 사명감에 각성하고, 현대에의 적응을 유효적절하게 수행하는 운동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천명했다.”(가톨릭시보 1966년 5월 22일자 1면) 교서는 공의회가 폐막되었지만 그 가치를 “한낱 역사적 사건으로 돌려 아름다운 추억을 다소 간직함으로써 만족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특히 한국교회가 공의회를 “지나가는 행사로 보는 인상”을 준다고 지적하며, 그 이유를 공의회의 가르침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이에 따라 주교단은 ‘공의회를 연구하고 묵상’할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혹시라도 공의회를 통해 가톨릭의 근본 교리가 변질된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 된다고 주지시켰습니다. 또한 ‘교회 쇄신’은 부분적인 개편이 아니라 신자 개개인과 하느님 백성 전체가 진정으로 내적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공의회 후 긴장과 갈등의 과도기 공의회 폐막 후 한국교회 안에서는 공의회 정신 구현을 위한 실천 노력이 미흡하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이를 반영하듯 가톨릭시보는 1966년 5월 29일자 2면 사설을 통해 한국 주교단의 분발을 촉구했습니다. 사설은 “공의회가 한낱 아름다운 추억화(追憶化)의 골동품이 되어가는 위기”를 지적하고, 주교단 공동사목교서가 공의회 정신에 대한 신자들의 의식을 각성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공의회 이후 과도기적 혼란의 현실을 상기시키며, 교회 지도층의 “조속한 지도력 발휘”를 기대했습니다. 한편, 공의회 이후 개혁과 쇄신, 전통과 보수라는 두 가지 흐름이 긴장 관계를 형성하는 과도기가 나타났습니다. 김 추기경은 「사목」지 1967년 8월호 기고문 「공의회는 왜 있었는가?」에서 한국교회가 공의회 정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질타하며, 부분적이고 형식적인 쇄신이 아니라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성 베네딕도회 백 플라치도 신부는 「공의회 정신 구현을 위한 쇄신의 도정」이라는 제목으로, 가톨릭시보 1968년 3월 3일부터 4월 21일까지 총 8차례에 걸쳐 전례 개혁의 의의에 대한 글을 연재했습니다. 이 글들은 전례 토착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종교적 제국주의’의 병폐를 신랄하게 비판했는데, 당시 교황대사는 그 내용이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공의회 정신에 위배된다며 항의했습니다. 공의회는 세계교회와 지역교회 모두에 커다란 변혁의 계기를 마련했고, 그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긴장과 저항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공의회 정신이 교회 안팎에 새로운 시대정신과 시대적 징표를 드러냈으며, 한국교회는 근현대 교회사와 민족사 안에서 공의회 정신에 바탕을 둔 새로운 인식과 실천의 역사를 만들어 갔다는 것입니다.

발행일 2025-08-31 제3456호 12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18)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개최

1962년, 한국교회는 성숙한 지역교회로 인정받아 정식 교계제도가 설정됩니다. 교황청은 선교지 교회가 자립 능력을 갖춘 교회가 되면 이처럼 정식 교계제도를 설정해서 교회 안의 입법, 사법, 행정 업무와 관련되는 완전한 재치권(裁治權, Jurisdictio)을 인정합니다. 한국교회에 교계제도가 설정된 바로 그해, 세계교회는 현대 교회의 모습을 형성하는 역사적 사건을 맞이했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열리게 된 것이지요. 가톨릭시보는 10월 7일자 1면 톱기사와 사설을 통해 10월 11일 개막하는 공의회의 성공적 개최를 위한 신자들의 기도를 청했습니다. 아울러 공의회 참석을 위해 로마로 떠나는 한국 주교단 소식을 전했습니다. “한국 주교단 로마 등정(登程), 7日 일본주교단과 합류 - 오는 10월 11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특설된 공의회 본회의장에서 엄숙히 막을 올리게 될 제21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하는 한국 주교단은 10월 7일 일본 도쿄 하네다 공항을 SAS편으로 향발한다. 하네다 공항 출발에 앞서 각 주교들의 한국 출발은 2, 3일의 간격을 두고 있다. 인천 굴리엘모 주교께서는 9월 27일 출발했다. 광주 현 대주교께서는 10월 3일 도쿄로 향발했으며, 춘천 귄란 구 주교 출발은 5일, 청주 파 주교께서는 6일 각각 김포공항을 출발했다.”(가톨릭시보 1962년 10월 7일자 1면 중에서) 공의회의 의미 10월 14일자에서도 1면 톱기사 ‘우리는 공의회에 무엇을 바라는가’와 사설 ‘동정성모와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게재했습니다. 또한 10월 21일자에서는 일반 언론의 공의회에 대한 성급하거나 잘못된 보도들을 지적한 ‘공의회 보도의 조급성’에 대해 사설로 꼬집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공의회에 무엇을 바라는가? - 공의회가 우리와 같은 평신자에 불과한 개인에게 무슨 뜻이 있는 것일까? 공의회에 기대할 것이 무엇인가? 혹시 있다면 공의회가 무슨 효과를 나 개인의 신앙 생활에 끼칠 것인가? 이런 의문도 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너무도 부주의한 편이다. 이 굉장한 역사적이며 종교적인 중대성을 띤 행사를 위해 9일 기구까지 바치고 있으니 말이다.”(가톨릭시보 1962년 10월 14일자 1면 중에서) 기사는 이어 공의회의 목적과 의미에 대해 신자들이 알기 쉽도록 상세한 해설을 하고 있습니다. 즉, 이번 공의회는 “지난 20차의 공의회처럼 어느 특별한 이단에 대하여 성교회를 방위하자는 것이 아니다. 무슨 새 신덕 도리를 공의회가 성문화하지 아니할 것만은 확실하다”고 설명했습니다. 특히 이번 공의회는, 지난 1000년 동안보다 더 큰 변화가 지난 100년 동안 이뤄지고 있는 가운데 열린 것이며, 따라서 교회가 이러한 급격한 시대적 변화에 적응할 방도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1962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개막 현대 교회 올바른 방향 제시…열린 자세로 세상과 대화 나서 보편교회 일원 된 한국교회, 공의회 가르침 실천 위해 노력 공의회, 현대 교회를 형성하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열렸습니다. 요한 23세 교황이 공의회를 개최하면서 제시한 화두는 아조르나멘토(Aggiornamento), 즉 현대 세계와 사회에 대한 적응과 쇄신이었습니다. 세상의 급격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립되어 가던 교회가 빗장을 풀고 세상과 대화하려는 의지를 보인 것이지요. 그 결과로 발표된 4개의 헌장과 9개의 교령, 3개의 선언은 이후 교회 쇄신 지침이 되어 현대교회의 모습을 형성합니다. 정식 교계제도 설정으로 보편교회의 일원이 된 한국교회는 공의회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국 사회와 민족의 일원으로서의 정체성을 더욱 확고하게 깨닫습니다. 그리고, 조국과 민족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며 쇄신 여정을 걸어가게 됩니다. 교회일치에 대한 관심과 노력, 타종교에 대한 관용, 가난한 이들에 대한 적극적 관심, 사회정의 실현과 민주화 운동 등 사회 참여에 열린 자세, 토착화에 대한 열의가 모두 공의회의 결실이었습니다. 특별히 1984년 열린 한국 천주교 200주년 사목회의는 공의회 정신을 한국적 토양에 적용하고자 한 가장 걸출한 성과였습니다. 사목회의의 성과를 교회 안에 적용하고 실천하는 과정은 부족했지만, 이는 한국교회 역사상 가장 내실 있는 사목적 회의로 평가됩니다. 그리고 2000년을 전후해 열린 각 교구의 시노드들은 바로 이러한 쇄신 노력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끝나지 않은 공의회 공의회는 그 자체로 역사적인 사건이었지만 그 참된 의미는 폐막과 함께 구현되기 시작됐습니다. 공의회가 폐막한 지 올해로 60년이 됐지만 여전히 공의회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공의회의 가르침이 교회의 모든 삶에 적용되고 실천되기에는 아직도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공의회 폐막 20주년을 기해 공의회 문헌 해설 총서를 저술한 H. V. 스트라렌은 공의회의 의의를 전체적으로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을 만한 시야가 주어지기 위해서는 수 세기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공의회를 둘러싼 논란, 확신과 의혹은 공의회가 진행되던 그때, 폐막한 지 얼마 안 된 때도 있었습니다. 그 한 가지 사례를 가톨릭시보 기사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톨릭시보는 공의회 폐막 후에도 공의회 이후 변화되는 교회의 모습들을 자주 기사로 전했습니다. 특히 주교회의의 활동에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1967년 6월 18일자 가톨릭시보에 실린 사설 ‘주교회의에 건의한다’는 주교회의에 매우 비판적이었습니다. 사설은 공의회 정신 실현에서 주교회의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주교회의의 활동이 소극적이고 때로는 ‘임기응변’에 머물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주교단 공동의 노력이 미비함을 지적하고, 한국교회 전체의 사목적 전망을 모색하고 구체적인 사목계획을 수립, 추진하지 못하고 있음을 신랄하게 지적했습니다. 이 사설은 당시 교회 지도층의 ‘분노’를 유발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당시 젊은 사제들과 평신도들이 공의회의 결정에 동의하고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것과 대조적으로, 교회 지도층은 이러한 혁신적인 모습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고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가 공의회의 결정 사항들을 최대한 빨리 받아들이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한국 주교단은 공의회 폐막 직후인 1966년경 공의회의 결정 사항들을 바탕으로 한국의 모든 신자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그 구체적인 실천 사항들을 제시했습니다.

발행일 2025-08-24 제3455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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