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갈라진 민족 비극…‘정의 실현’에 묻혀버린 사랑과 화해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던 우리 민족은 다시 한번 민족적 비극을 만나게 됩니다. 남과 북에 각각 소련군과 미군이 진주하여 열강의 다툼 속에 놓인 한반도에서 6.25전쟁이라는 민족 상잔의 참극을 맞게 됩니다.
1949년 4월 1일 자로 16년 만에 복간된 「천주교회보」도 전쟁이 발발하면서 6개월 동안 다시 휴간됩니다. 그리고 11월 10일 자로 다시 발행된 814호에서 사설을 통해 반공주의를 가톨릭 신자의 마땅한 자세로 선언합니다.
“우리는 만천하 가톨릭 신자에게 또한 만천하 애국 동포에게 대하여 다시 한번 반공정신을 강조하지 아니치 못하겠다. 1. 무신론은 우리의 적이다. 어떠한 이름을 가장하던지 천주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의심하거나 또는 무관심하는 모든 주의사상은 우리의 적이다. 2. 유물론은 우리의 적이다. 물질을 과도히 존중하고 과학을 너무나 과대평가하는 자 역사를 물질 방면으로만 고찰하고 인간의 자유를 한경의 지배에 예속시키고자 하는 자들이 사람의 영혼을 무시하고 진리의 영원성을 부인하므로써 가장 새로운 이치를 깨달은 듯이 체계의 사조를 혼돈케하는 모든 주의사상은 우리의 적이다..... 위에 말한 몇 가지 가장 중요한 정신으로 공산주의 및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국가를 비판하여 본다면 우리는 명백히 알 바, 그들에 대한 철저한 말살의 신념이 생길 것이다. 지금 우리가 북한 괴뢰와 싸우는 근본 이유가 곧 이것이다. 동족에게 대한 그리스도교적 사랑 때는 이미 지났다. 이제는 그리스도의 정의가 앞서야겠다.”(「천주교회보」 1950년 11월 10일 자 사설)
「천주교회보」는 해방과 함께 복간됐던 「가톨릭청년」, 「경향잡지」 등과 함께 한국천주교회의 반공주의를 열렬하게 선전하는 매체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공산주의에 대한 경계와 비판적이고 적대적인 태도는 역대 교황과 교황청의 입장이었습니다.
“종교는 아편”이라는 카를 마르크스의 명제대로 공산주의는 종교를 사회 변혁의 장애로 여겼습니다. 역대 교황들은 공산주의의 위험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경고해 왔는데, 1891년에 회칙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을 반포한 레오 13세 교황은 공산주의가 발호하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병폐에 대한 지적과 함께 공산주의자들의 폭력 혁명 노선에 대해 분명한 반대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1917년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국가가 탄생하고 그리스도교에 대한 탄압이 현실화됩니다. 이에 비오 11세 교황은 계급투쟁과 사유재산제의 완전 철폐를 주장하는 공산주의를 비판했고, 무신론적 공산주의를 ‘전염병’이라고까지 표현했습니다. 비오 12세 교황(1939~1958)은 가장 강력한 반공주의자 교황이었습니다. 그는 러시아를 성모 성심에게 봉헌하고 소련의 ‘붉은 군대’에 대항하는 의미에서 파티마 성모의 뜻을 따르는 ‘푸른 군대(파티마의 세계 사도직)’를 승인해 러시아의 회개와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하도록 권고했습니다.
한국교회 강한 반공주의 노선, 천주교회보 등 언론이 앞장서
탄압으로 고통받은 북한교회 외면한 역사적 과오 아쉬워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때는 이처럼 공산주의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비판이 거센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한국 교회 역시 공산주의에 대한 보편교회의 비판적 입장을 따르게 됩니다. 하지만 한국교회가 본격적으로 반공주의를 명확히 표명하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 소련이 북한 지역을 점령하고 이에 따라 교회가 큰 피해를 보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북한 지역의 공산주의 정권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3월 토지개혁을 전격 시행합니다. 이미 적지 않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천주교회는 큰 피해를 보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함흥 덕원에 소재하고 있던 성 베네딕도회가 수도원 내 정원과 일부 건물 대지 외의 모든 토지를 몰수당했습니다. 이로 인해 생계 유지 자체가 어려운 절박한 사정에 내몰리게 됩니다. 「경향잡지」는 당시 상황을 전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덕원을 바라보면 역시 점점 더 곤궁에 빠지고 있다. 수도원 전체와 대소신학생 47인은 모두 식량난으로 굶주리고 있는 형편이다. ⋯가톨릭과 악마의 전쟁은 벌어졌다.”(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47, 「경향잡지」 90-91쪽)
이제 한국 천주교회는 공산주의 세력을 ‘악마’라고 부르면서 악마와의 전쟁이 시작됐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러한 반공주의 노선에 앞장섰던 것은 교회가 펴내는 매체들이었습니다. 특히 해방 후 1947년 4월부터 속간된 「가톨릭청년」이 대표적입니다. 1950년까지 실린 기사 가운데 반공과 관련된 기사가 절반은 넘습니다.
「가톨릭청년」은 특히 조선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양대 진영의 투쟁이 벌어지는 현장이라며 그 의미를 세계사적으로 확장하고 바티칸과 소련의 대리전의 모습을 띠고 있다고 묘사했습니다. 이러한 논리는 「천주교회보」의 여러 사설과 기사에서도 거의 유사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공산주의와의 싸움은 순교자의 정신으로까지 이어집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반공 투쟁을 강조하면서 “일반 신자들에게 순교 정신을 가지고 반공 투쟁에 나서기를 호소”했습니다. 「가톨릭청년」은 ‘볼셰비키적 공산주의를 배격함’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암흑의 권력, 천주를 저주하는 마귀가 천주께 항전하였으니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은 우리 모든 신자뿐만 아니라 천주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일치단결하여 최후의 승리를 천주께 의탁하며 그 보호를 믿고 이 도전에 응전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가톨릭청년」, 1947년 11월호, 6-11쪽)
교회의 반공주의 노선은 남한 지역뿐만 아니라 북한 지역에도 전해졌고 북한 공산주의 정권과 교회의 적대적 관계와 충돌은 더욱 극심해졌습니다. 특히 북한 정권의 교회에 대한 탄압은 점점 더 강화됐습니다. 사제와 수도자들이 연이어 체포되거나 추방됐고 교회 건물이 폐쇄되고 재산은 몰수됐습니다.
남한 교회에서, 천주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반공 투쟁은 다른 모든 일체의 가치를 앞섰습니다. 반공과 멸공주의에 대한 반성은 역사적으로 훨씬 먼 후대에 와서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성찰되기 시작했습니다. 시대적인 한계를 고려하더라도 천주교회의 맹목적인 반공주의는 민족 분단의 현실에 대한 반성, 북한 교회의 고통에 대한 외면,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노력의 부족이라는 측면에서 비판적 성찰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침내 발발한 6.25 전쟁과 그로 인한 결과로써의 민족 분단은 지금까지도 우리 민족의 가장 뼈아픈 상처로 남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은 이른바 ‘침묵의 교회’가 됐습니다.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