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참석했던 평신도 모임에서 있었던 일이다. 평신도들의 모임이 그러하듯이 이날의 화제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교회이야기, 평신도 자신들의 이야기로 무르익었다. 그런데 갑자기 평신도 한 분이 “현재 한국 사람들이 공동으로 걸려있는 병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 있는가” 하는 엉뚱한 물음을 좌중에 던졌다. 대부분 외제병, 사치병, 과소비병, 일류병 등 그동안 한국사회를 풍자할 때마다 맴돌았던 답을 내어놓았다.
그러나 아무도 그 평신도가 원했던 질문의 정답을 찾지 못했다. ‘에라, 모르겠다’라는 정답을 예상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 평신도는 현재 한국 전체를 강타하고 있는 이상한 병의 실체를 ‘에라, 모르겠다’ 심리로 풀이하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가 열차사고, 비행기사고, 선박사고, 그리고 기타 헤아릴 수조차 없는 많은 사고를 불렀다는 것이다.
함께 자리했던 그 누구도 이 진단에 이의를 달지 못했다. 우선 나부터 그러했다. 어려운 문제를 풀어나가다 벽에 막히거나 장애가 생기면 언제부턴가 ‘에라’하는 마음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문제를 풀기 위해 바치는 시간과 노력이 아깝고 아니 그보다는 개인적 투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더라”는 나름대로의 계산이 그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만들었다고도 할 수가 있다. 애쓰고 땀 뺀 사람만 억울하고 손해를 보았다는 마음이 무엇보다 앞섰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핑계일 뿐이다. 일은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일은 하는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자신의 만족과 자신의 성취를 위해 일은 필요한 것이고 그것은 인간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 교회는 일찍부터 노동은 신성한 것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의 일을 남을 위해서만 하는 것이라는 착각 속에 자주 빠진다.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고 결국 일 자체를 망쳐버리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일만 망치는 것이 아니라 무고한 사람까지 손해를 보게 하는데 심각성이 있다.
‘에라 모르겠다’ 심리는 현재 우리 주변 도처에서 도사리고 있다. 앞서 지적한대로 최근에 이어진 대형 사고들이 이를 입증해 주고 있고 그 위험은 여전히 우리 삶과 생명까지 위협하고 있다. 나라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높은 어른들에서부터 스스로 자신을 보잘것없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소시민들에 이르기까지 그 심리는 팽배해 있다.
현대를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매순간 결단과 판단이 요구된다. 더구나 한 분야를 책임지고 있는 자리일 경우 그 같은 결단과 판단의 순간은 더욱 빈번할 수밖에 없다. 그 판단을 ‘에라,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실행하고 만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가 겪어야 했던 불행한 사건의 반복을 감수해야만 할 것이다.
나라의 일만이 아니다. ‘에라 모르겠다’ 식으로 처리한 직장의 일들이 바른길로 발전해 나갈리 만무하고 에라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가정의 나날이 화평할리 없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리고 자녀들까지 각자 ‘에라’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이 마당에 가정의 ‘소리 없는 무너짐’과 ‘청소년들의 탈선’은 예견된 사건이어야 마땅한 것이다.
만일 우리의 모든 공복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맡겨진 임무를 철저히 수행했다면 세상을 놀라게 하는 엄청난 대형 참사들이 줄을 이었겠는가. 만일 우리 각자가 자기의 위치에서 맡은바 책임을 완벽하게, 공의롭게 지켜나갔다면 우리 사회의 질서가 엉망인 채 바닥을 헤매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을까. 만일 우리 가정의 모든 구성원들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어 있었다면 인간의 생명이 이렇듯 보잘것없는 것으로 내팽겨 쳐지는 신세가 되었을까.
최근 한동안 잠잠한 것 같았던 과소비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각 백화점의 고가 외제품들은 없어서 못 팔고 대통령 눈치 보던 골프장들은 연일 만원사례라는 말씀이다. 된 서리를 맞아 좋은 세월 지났다고 한숨쉬던 이른바 ‘고급 살롱’들은 자리가 없어서 아우성이라는 소식도 있다.
물론 실명제 이후 감추어졌던 장롱속의 큰 돈들이 소비라는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진단이 맞을 것이다. 갈 곳 없는 돈들의 새로운 활로가 과소비로 이어졌다는 얘기다. 자기의 돈이니 자기 마음대로 사용한들 누가 어떻게 할 수는 없겠지만 모처럼 잡혀가던 과소비 억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고 있는 또 다른 형태의 과소비는 할 말을 잃게 한다. 이 역시 우리의 의식 밑바닥에 잠자고 있는 ‘에라’병이 기인하고 있음이 틀임 없다.
‘엔고’라는 호기를 우리의 기회로 잡지 못한다는 경제전문가들의 진단은 미래에 대한 우리의 걱정에 무게를 더해준다. 이미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과 미국의 클리턴 대통령은 나라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 장사꾼으로 나서고 있고 그런 모습은 자연스럽기 조차하다. 그만큼 세계의 경제는 어려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는 얘기다. 먹히느냐 살아남느냐의 냉엄한 국제현실은 오늘을 살아남기 위해 우리가 벌여야하는 투쟁이 얼마나 멀고 험한 길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이미 교회력으로는 새해가 시작됐다. 과연 한 해의 시작을 신바람나는 미래를 향해 내디딘 우리의 새 출발이 과소비와 향락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부끄러움으로 열어야만 할 것인가.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는 새해는 ‘에라 모르겠다’는 우리의 불치병을 뿌리째 뽑아버리는 것으로 시작해보면 어떨까. 우리 신자들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