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신달자의 주일 오후] 변태 신앙

입력일 2009-03-11 00:00:00 수정일 2009-03-11 00:00:00 발행일 2009-03-15 제 2639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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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달자 시인
아들을 낳지 못했던 나는 내 딸들이 낳은 손자들에게서 더 큰 사랑을 느끼곤 한다. 언젠가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남자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면, 나는 분명히 손자들의 이름을 부를 것이다.

내 남편이 마지막 눈을 감을 때도 나는 “이 아이들을 두고 어떻게 먼저 가냐”고 울부짖었고, 내가 “우리 다음에 아이들과 함께 꼭 다시 만나요”란 말을 건네자 그제야 남편은 눈을 감았다. 그이도 사랑스런 손자들을 두고 쉽게 눈을 감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랬다. 우리 부부에게 있어서 손자들은 빛나는 보석과도 같았다.

큰 딸이 첫 아들을 출산할 때, 나는 한국에 없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급하게 집으로 달려온 나는 갓난아기의 기저귀부터 벗겨보았다. 그리고 아랫도리를 보며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모든 근심걱정이 사라지는 듯했다.

사위는 지금도 가끔 그 이야기를 한다. 어떻게 아기 얼굴도 안 보고 아랫도리부터 궁금했냐는 것이다. 나는 그게 궁금했다. 딸만 낳아 기죽었던 과거가 분명히 내게는 있었다. 아마도 대리만족을 느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내 두 딸들이 아들만 내리 낳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셋째 딸이 고추 숫자를 더 보탤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부자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아이들이 자랐다. 이제는 말귀를 좀 알아듣고, 나와도 통하는 사이가 됐다. 나는 손자들을 볼 때마다 그 옛날 할머니들처럼 ‘우리 강아지 고추 좀 보자’하며 매달리곤 했다. 그러면 이 녀석은 바지를 확 벗어 내리며 시원하게 보여주곤 했다. 고추를 보고 있자면 세상이 다 내 것 같았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다시 보여 달라고 떼를 쓰면, 녀석은 흔쾌히 바지를 벗었다. 나는 행복의 연장선상에서 키득거리며 마음 뿌듯해 했다. 때때로 좀 비싸게 굴 때면, 천 원짜리 한 장 내밀고 고추를 실컷 구경할 수 있었다. 그 돈만큼은 절대 아깝지 않았다. 아니, 몇 장이라도 더 꺼낼 수 있었다.

그리고 녀석이 다섯 살 되던 설날이 왔다. 나는 세배를 받는 것에는 마음이 없었다. 녀석을 보자마자 “관우야, 고추 좀 보자. 고추 보여주면 세뱃돈 많이 줄게”라고 말했다. 그런데 녀석이 갑자기 나를 째려보더니 험상궂은 눈을 굴리며 소리쳤다. “할머니는 변태야!”

나는 어이가 없었고, 주변 식구들도 당황했다. 그러다 모두들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모두 같은 반응이었다. 녀석 말이 맞는다는 것이다. 왜 할머니가 자꾸 고추를 보여 달라고 보채냐는 핀잔이었다. 딸들까지 합세하는 분위기였다. 결국 나는 설날 아침부터 변태 할머니로 찍혀버렸다. 정말 섭섭했다. ‘내가 정말 변태인가….’

그 이후 나는 녀석의 고추를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변태’라는 단어를 어디선가 보면, 혼자 슬며시 웃는다. ‘그래, 알았다 녀석아. 절대로 고추 보여 달란 말 하지 않으마.’ 녀석의 고추는 잘 있겠지. 내가 본들 뭐하겠는가. 덕분에 나는 ‘변태’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그 순간을 생각하면 행복하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신앙에도 ‘변태 신앙’이 있는 것은 아닐까? 혹시 내 신앙도 변태가 아닐까? 걸핏하면 손을 내어 부탁만 하고, 달라는 것은 많고, 내놓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시도 때도 없이 고집부리는 신앙 말이다.

돈을 달라, 복을 달라, 행운을 달라, 합격시켜 달라, 성공으로 이끌어 달라, 결혼시켜 달라, 취직시켜 달라…. 돌이켜보니 내 기도의 핵심도 무조건 요구하는 데 있었다. 이거야 말로 이기심에 똘똘 뭉친 변태 신앙의 모습은 아니었을까?

국어사전은 변태를 ‘성(性)에 관한 행동이나 심리가 정상적이 아님을 말함’이라고 정의 내린다. 그렇다면 ‘성(聖)에 관한 행동이나 심리가 이기심으로 가득함’도 변태가 아닐까. 신앙은 눈을 뜨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장님이 되려 하니, 주님은 안타까워 지금도 잠 못 이루신다.

이제 다시 볼 수는 없겠지만, 나는 우리 손자의 고추가 잘 있다는 것을 믿는다. 우리 주님도 직접 만나보진 못했지만, 찬란히 빛나는 모습으로 내 앞에 계시고 나와 함께 해 주신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고 보니 나는 변태가 아닌가 보다. 보이지 않아도 잘 믿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