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의 눈부신 발전과 부쩍 좋아진 영양 상태로 평균 수명도 늘어나고 ‘중년’의 개념도 변화됐다. 하지만 40대가 중년의 시작임은 여전히 분명한 듯하다. 중년의 가장 큰 신체적 특징은 급격한 체력 저하. 평소 건강 관리에 눈꼽 만큼도 관심이 없었기에 최근 들어서 내 육체의 무력함을 더 절실하게 느낀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이른바 ‘자출’(자전거로 출퇴근하기). 불과 며칠이었지만 만만치 않다. 거의 두 배 속도로 곁을 지나쳐가는 건강한 중년들. 게다가 백발 할아버지와 비만인 아주머니들까지라니…. 값비싼 자전거에 헬멧과 고글, 사타구니에 ‘뽕’을 댄 멋진 유니폼 때문만은 아니리라.
그 고속 주행을 시기하면서 왕복 3시간을 안간힘을 쓰다 보면 거의 초죽음이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며 나름대로 요령이 생겼다. 어차피 신체적 여건이야 며칠 만에 개선될리 만무이고, 문제는 정신력이다.
편도 1시간 반을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지지 않으려면 지겨움이나 지루함을 느끼지 말아야 했다. 첫 자출에서는 남은 거리를 헤아렸다. “이제 15km, 10km, 5km, 1km… 남았다.” 그런데 이건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5km를 달려 지친 뒤에 아직도 15km가 남았다고 생각하니 핸들을 돌리고 싶어진다.
그래서 찾은 방법이 아무 생각 없이 바닥을 보고 달리는 것이다. 자전거 전용도로가 코스의 대부분이라 바닥에는 계속해서 화살표가 그려져 있다.
화살표가 하나씩 발밑으로 지나가는 것을 보며, 페달 하나 하나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다보니 나중에는 그야말로 ‘무념무상의 경지’에 도달해, 평균 속도-물론 저속이다-를 꾸준하게 유지하고 소요 시간이나 거리를 계산할 필요가 없어졌다.
물론 중간 중간 고개를 들어 장애물도 파악하고 대충 “절반은 왔군” 하는 정도는 점검해야 한다. 하지만 안달스러운 마음을 버리고 페달을 밟는 순간 순간을 즐기며 최선을 다함으로써 나는 1시간 반이라는, 나름대로 벅찬 주행을 큰 어려움 없이 감당할 수 있었다.
어쩌면 내가 살아감도 이같지 않을까. 궁극의 목적지를 향해 가는 주행의 여정에서 자주 우리는 내가 얼마나 성과를 냈는지, 이제 얼마를 더 가면 목표를 달성하는지 궁금해하고 따져본다.
하지만 그럴 수록 여정은 고단하기만 하다. 정확한 길을 가는지, 장애는 없는지 고개 들어 살펴야 하지만 수없는 페달 밟기를 되풀이하며 그 하나 하나에 충실할 때 인생은 순항하지 않을까.
신앙의 여정,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되기를 향해 가는 순례의 여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순교 성인들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 목숨을 던졌다. 하지만 그분들은 동시에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사랑과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었다. 어느 순교자가 영생만을 위해서 살며 이웃 사랑을 게을리했던가.
순교자들의 종말론적 신앙은 초대교회 공동체가 실천했던 사랑의 공동체, 지금 여기 지상의 하느님 나라 건설과 결코 유리된 것이 아니다. 종말을 꿈꾸는 희망은 현세의 삶을 희망으로 채워주며, 오히려 지금 이 세상을 더 풍요롭게 해주고 더 충실하게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갈 것을 요청한다.
그까짓 자전거 타기로 무에 그리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을까마는 하루에 3시간, 묵상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우리 모두 ‘자출’을 한 번 생각해봄직도 하다. 육체적으로나, 혹은 정신적으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