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가톨릭이다

【76】감사의 글을 가름하여

차동엽 신부는 『가장 엄청난 보물은 성사이며, 성사의 풍요함과 은총은 무궁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나아가 이 은총에 신자들이 눈뜬다면 스스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확신한다. “교회, 은총 재발굴·중재해야” 거저 주어진 영적 선물에 눈뜬다면 신자들 스스로 빛과 소금으로 살것 한국 천주교회에 주어진 기회연한 지난해 이헌재 전(前) 부총리는 한국사회에 주어진 기회는 15년이라는 발언을 했다. 2020년에 한국은 65세 이상의 인구가 전체인구의 20%를 넘는 「초고령사회」에 진입하게 될 터인데 이때까지 경제성장이 궤도에 오르지 못하면 파국에 직면할 것이라는 경고의 말이었다. 한국 천주교회에 주어진 기회는 그보다 훨씬 짧다. 필자는 이를 짧게 잡으면 5년 길게 잡아야 10년이라고 본다. 2003년도와 2004년도 교세통계에 의하면 40대 미만의 신자들이 평균 10%를 육박하는 신자감소 비율을 보이고 있다. 젊은층 신자가 줄어드는 것이 그야말로 깨진 바가지에 물새는 듯 하다. 이런 현상이 5년만 지속되어도 본당에서는 50대 미만의 신자를 찾아보기 어렵게 될 지경에 이를 것이다.교회라는 것이 양적으로 성장한다고 해도 여전히 질적으로 성장해야할 과제를 안고 있지만, 일단 양적으로 허물어지면 질에 대해서는 얘기할 기회도 없어지는 것이다.이렇듯이 교회가 무척 힘들다. 주어진 기간은 길지 않다. 손을 쓸 수 있는 기간은 불과 몇 년이다. 시기를 놓치면 다시 돌이키기 힘들 것이다. 교회는 오케스트라가 되어야 한다 그동안의 글에서 필자는 21세기 한국 가톨릭교회가 직면한 도전들을 짚어보고 그 대안도 여러 가지로 모색해 봤다.여기서 한 가지 해명하고 싶다. 필자는 교회 밖의 현안들에 대한 교회의 투신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필진들의 몫으로 유보하고 교회 내부의 문제들에 집중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워낙 심각하게 도전받고 있기에 가톨릭 신자의 정체성 문제에 골몰하였다. 이러다 보니 아무래도 글을 쓰는 사유지평이 좁을 수밖에 없었다. 인정한다.차제에 밝히거니와 필자는 정의구현사제단의 활동을 적극 지지하는 입장이다. 다른 한편으로 필자는 성령기도모임의 활성화가 한국 가톨릭교회에 꼭 필요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그 이유는 바로 예수님께서 그러셨기 때문이다. 예수님 안에서는 사회참여운동과 영성운동이 기막히게 통합되지 않았는가!우리는 한 사람이 동시에 여러 가지에 집중할 수 없기에 다만 묵시적인 동의를 전제하고서 특정분야를 우선적으로 선택할 따름이다. 자신의 관심과 역량을 하는 수 없이 전문영역에 경주할 따름이다.교회는 오케스트라이다. 다양한 은사가 모여 아름다운 곡을 연주하는 협연이다. 관악기 연주자가 현악기 연주자에게 너는 왜 그것을 연주하느냐고 탓하지 않듯이 교회의 모든 특정분야의 투신자들은 다른 특정분야의 투신자들을 포용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아니 최대한 조화를 이루며 합심하여 감동적인 화음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이는 교회의 소명이다. 은총의 시대를 내다보며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아침에는 「하늘이 붉고 흐린 것을 보니 오늘은 날씨가 궂겠구나」한다. 이렇게 하늘을 보고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왜 시대의 징조는 분별하지 못하느냐?』(마태 16, 3).시대의 징조를 분별하여 거기에서 자신에게 요청되는 사명을 깨닫고 지혜롭게 대처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신자 개인을 위한 말씀인 동시에 교회를 위한 말씀이다. 교황 요한 23세는 이 사명을 아죠르나멘또(aggiornamento)라고 이름하였다. 교회(사도직)의 현대적 적응, 이는 바로 예수님의 명령이다.아무리 고민해 봐도 포스트모던 시대에 그리스도교가 가야할 길은 「은총」을 재발굴하고 중재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은총은 하느님으로부터 「거저」, 「공짜」로 주어진 영적 선물을 말한다. 이 은총이라는 개념은 그리스도교 고유의 것이다. 물론 그 약속을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모체격인 유다교의 경전 구약성서에서 발견한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오너라. 여기에 물이 있다. 너희 먹을 것 없는 자들아 오너라. 돈 없이 양식을 사서 먹어라. 값없이 물과 젖을 사서 마셔라』(이사 55, 1).그렇다. 「돈 없이」, 「값없이」 누리는 구원의 선물, 이것이야 말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필자는 이 관점에서 신앙을 새롭게 조명하고 교육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그래서 나름대로 저술 및 강의를 통해서 신나는 가톨릭 신앙을 전파하고 다닌다. 필자의 글과 강의 속에서는 「의무」라는 단어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의무라는 단어를 「은총」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속임수가 아니다. 신앙생활의 맛을 좀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의무를 뒤집으면 거기서 은총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무척 힘들다. 하지만 필자는 곳곳에서 희망을 본다. 「은총」이라는 명약이 듣는다는 확신을 얻는다. 의무를 얘기하지 않아도, 교무금이 늘고, 헌금이 늘고, 교회헌신이 좋아진다. 「은총」에 눈을 뜨도록 조금만 도와주면 의무를 얘기하지 않아도, 신자들이 알아서 바르게 살고, 사회에서도 당당히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제껏 놓쳐왔던 「은총」에 눈뜨는 신자가 하나 둘 늘어간다면 교회 밖의 사람들이 이를 보고 하나씩 둘씩 다시 돌아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장차 어느 날엔가 / 야훼의 집이 서 있는 산이 / 모든 멧부리 위에 우뚝 서고 / 모든 언덕 위에 드높이 솟아 / 만국이 그리로 물밀 듯이 밀려들리라. / 그 때 수많은 민족이 모여 와서 말하리라. / 「자, 올라가자, 야훼의 산으로, / 야곱의 하느님께서 계신 전으로! / 사는 길을 그에게 배우고 그 길을 따라 가자. / 법은 시온에서 나오고, 야훼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나오느니」』(이사 2, 2~3). 고백하건대 고단한 여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고단하지 않다. 하느님께서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은 자」들을 보여주셨다. 그들을 통해 지원해 주셨다. 존경하는 신부님, 수녀님, 그리고 사랑하는 신자들이 힘을 보태주셨다.그동안 애독해 주신 모든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1년 반 동안 필자와 같은 배를 탔던 가톨릭신문사 임직원 모두에게도 감사드린다. 『주님이신 우리 하느님 / 하느님은 영광과 영예와 권능을 누리실 만한 분이십니다』(묵시 4, 11).아멘! ■‘이것이 가톨릭이다’ 연재 마친 차동엽 신부“가톨릭 정체성 확인 작업, 독자들 호응에 깊은 감사” 가톨릭은 부족함이 없다 『가톨릭은 갖추고 있는 면에서 전혀 부족함이 없다. 이것이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의 전부입니다』1년 6개월의 장기연재 「이것이 가톨릭이다」를 마치면서 필자인 차동엽 신부(미래사목연구소장)가 강조하는 바이다.『가장 엄청난 보물은 성사입니다. 때로는 소홀히 취급하고 만만하게 보기도 하지만 성사의 풍요함과 은총은 무궁한 것입니다』이미 교회의 가르침 속에서 충분히 제시된 것이지만, 차신부는 그것을 2명의 위대한 가톨릭 신자에게서 확인했다. 한 명은 선종 1주년을 맞은 구상 시인. 시인이 만년에 도달한 신앙의 경지는 가톨릭에 대한 만족과 자긍심이다. 차신부는 시인이 더없이 풍성한 가톨릭의 전통과 보고, 자산을 만끽했음을 알고 있었다.또 한 명은 치릴로 성인이다. 성인에게, 내용에 있어서 모든 것을 갖추고 있으며, 모든 대상을 두루 포섭한 것이 바로 가톨릭이었다. 이 두 가톨릭 신자에게서 발견되는 가톨릭은 그래서 『갖추고 있는 면에서 부족함이 없는』 그런 것이었다.문제는 이제 교회와 신자들의 과제로 이어진다. 성사의 풍요로움을 시대에 맞는 버전(version)으로, 업그레이드된 컨텐츠로 현대인과 현대세계에 제시해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현대 교회의 과제이다.「이것이 가톨릭이다」는 바로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시험적 시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제는 「토착화」와 「문화의 복음화」와도 관련된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은 살아있지 않은 전통과 문화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좀 더 생생하게, 지금 살아있는 우리 문화의 영적인 욕구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영적 자산의 풍요로움은 자연스럽게 정체성의 문제를 강조한다. 자기 정체성에 대한 주목을 통해서 자신의 풍요함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특히 다원주의가 객관성과 공정성으로 간주되는 오늘날 세계에서 정체성의 추구를 통해 자기가 품고 있는 보물을 발견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기획 연재의 제목 자체가 드러내듯이, 가톨릭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한 작업이었습니다. 당초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분들이 호응을 보여 주셔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물론 정체성을 강조하다보니 개방성과 열린 자세의 문제 제기도 없지 않았다. 이에 대해 차 신부는 「역할 분담론」을 말한다.『오케스트라에서처럼 저는 제 악기를 연주했고, 다른 연주자는 자기가 맡은 또 다른 악기를 연주합니다. 그것이 모여서 훌륭한 교향악을 이루게 될 겁니다』 먼저 예수님과 복음 배워야 차신부는 같은 맥락에서 신자들이 예수님과 복음을 우선 공부하도록 권한다. 『신학자로서 고백합니다. 아직 예수님 한 분도 제대로 사귀지 못했습니다. 우리 신앙은, 우선 예수님과 복음을 공부하는게 우선적인 과제입니다. 최선을 다해 몰입하시기를 부탁합니다』교리와 신앙을 어느 정도 공부했다 싶으면, 그 다음에 풍요로운 다른 문화와 전통을 공부하라는 당부이다. 「새복음화」와 「재복음화」 모두 중요하지만, 오늘날 현실 속에서 「재복음화」는 우선적인 과제라는 것이 차신부의 생각이다.연재를 마치면서 미처 못 다한 이야기도 있다. 유불선에 통달했던 초기 교회의 신앙선조들이 왜 그토록 천주실의에 매달렸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이게 됐는지 하는 의문이다. 『자료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여기에 커다란 신앙의 광맥이 있음을 발견했고, 어설픈 언급을 피하기 위해 장기간의 숙제로 남겼습니다』개인 신앙생활은 물론 사목 전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좀더 깊은 이해를 요구하는 차신부는 연재를 마치면서, 가톨릭신문사와 독자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시했다.

입력일 2005-06-26

【75】21세기 영성(6) - 통전영성

체험 도해(experience cycle) “올바른 영성은 성-속 구별 없어” 안팎 영육 현세내세 모두 아울러‘정구사-다락방’ 활동 서로 관통 정의구현사제단과 사제다락방기도모임 근래 한국 가톨릭교회를 대표하는 것 가운데 「정의구현사제단」이 꼽히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의롭지 못한 일일 것이다. 정의구현사제단이 1970년대부터 오늘에 이르기 까지 정치적-사회적 민주화를 위해서 기여한 공로를 우리는 결코 과소평가할 수가 없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만끽하고 있는 자유가 「당연히」 주어져 있는 것으로 여기겠지만, 이런 자유를 획득하기까지는 정의구현사제단을 위시한 민주화 인사들의 의로운 투신과 희생이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음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같은 시기에 사제다락방기도모임이라는 것이 있어왔음을 별로 인식하지 못한다. 이 모임은 마리아사제운동 회원 사제들이 교구단위로 모여서 사제성화 및 인류(특히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희생-보속을 대신 바쳐주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삼는다.여기서 진지한 물음이 하나 생긴다. 그렇다면 두 모임은 전혀 색깔이 다른 단체라고 보아야 할까? 아니 정반대 노선을 가고 있다고 보아야 할까? 만일 그렇게 본다면 우리의 영성은 아직 「반 쪽」 영성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두 단체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상호보완하고 있음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정의구현사제단의 활동에서 영험한 권위가 묻어나올 수 있었던 데에는 뒤에서 기도해준 사제다락방기도모임의 내조(內助)가 있었기 때문이다. 역으로 사제다락방기도모임의 기도지향이 성취되는 과정에는 정의구현사제단의 외조(外助)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체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사목에서도 그렇고 영성생활에서도 그렇다. 곧 우리에게는 통전적 안목(integral perspective)이 필요하다. 영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이다」(spiritual)라고 말할 때, 이 단어는 불행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몇 가지 함의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곧 「영적인」이라는 말은 흔히 「세속적인」, 「물질적인」, 또는 「육체적인」의 반대말, 나아가 「현세적인」의 반대말로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영성(spirituality)은 거룩하고, 비물질적-비육체적이며, 내세지향적인 태도로 하느님께 접근해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치부되고 만다.하지만 성서는 「영적이다」라는 말을 보다 폭넓게 이해한다. 즉, 「영적이다」라는 말은 성령이 내주(內住)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로마 8, 9; 1고린 2, 14~15)을 의미한다. 이 말은 성령께서 모든 피조물 안에서 신음하고 계시며(로마 8, 22) 인간 실존의 심층에서 「양심」(로마 9, 1) 안에 살아계시며 말할 수 없이 「깊은 탄식」으로 기도해 주신다(로마 8, 26)는 사실을 상기할 때 매우 폭넓은 지평을 얻게 된다.결론적으로 우리는 영성을 「성령을 통해 우리 안과 우리 주변에서 실제적으로 임재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경험하고 그에 대해 응답하기 위하여 삶을 영위하는 태도」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올바른 영성은 안과 밖, 영과 육, 성(聖)과 속(俗), 현세와 내세를 구별 없이 아우를 때 가능해 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그렇다고 여기서 우리는 단일론(Monism)에 빠져서는 안 된다. 성령께서 무소부재(ubiquitous)한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것이 성령의 역사로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성령께서 에너지 또는 기(氣)의 양태로 삼라만상 안에 서려있지만 모든 「에너지」와 모든 「기」가 성령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통전영성의 성찰도구 과연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영성을 통전적으로 꾸려나갈 수 있을까? 미국 가톨릭교회 단체인 「영성과 정의 센터」의 아이너 쉐어(Einor Shea)와 존 모스틴(John Mostyn)이 이를 돕는 훌륭한 성찰도구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이들은 이를 「경험도해」(Experience Circle)라 부른다.이 경험도해는 세 개의 동심원들이 정확히 네 영역으로 나뉘어 사분원(四分圓)을 이루는 형태로 그려져 있다. 여기서 사분된 영역은 인간 존재의 네 차원을 나타낸다. 곧 내면적 차원, 인간 상호간의 차원, 구조적인 차원, 그리고 환경적인 차원을 표시한다. 그리고 세 개의 동심원들은 영적 식별의 여러 차원을 나타낸다. 그림의 중심에 하느님이 있고 안에서부터 밖으로 나오면서 비주제적 차원, 반성적 차원, 해석적 차원 등이 배속되어 있다.이 도해를 유익하게 활용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하느님은 모든 경험의 깊이이기 때문에 이 그림의 중심에 존재한다.- 영성의 목표는 우리가 성령(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느님의 생명)의 현존과 활동을 인식하고 그에 응답하도록 하는 데 있다.- 이 도해에서는 기본적으로 칼 라너(Karl Rahner)의 「동시성의 원리」라는 신학적 입장을 따라 인간 존재의 여러 차원이 서로 삼투하면서 통해 있다고 본다. 이들은 따로따로 독립된 차원으로 존재하지 않고 상호 연관되어 있는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이 네 가지 차원 안에 동시에 존재하지만, 우리의 의식(意識)은 본성적으로 어느 한 시점, 한 차원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식별할 때는 한 두 차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얘기다.- 각 존재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체험에 대한 식별은 「비주제적인」 것(깊은 경험을 할 수록 주제화하기가 어렵다!)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이 경험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에 이름을 붙이고 반성해 보는 순간 우리는 새로운 차원의 의식 곧 「반성적」 의식에 도달한다. 마침내 우리는 그것이 우리 삶에 제공하는 의미를 발견함으로 「해석적」 의식에 도달하고 이제 이와 관련된 모종의 결단을 내리고 적절한 행동을 취하게 된다. 이 일련의 과정을 우리는 영성형성이라 부른다.좀 생경한 개념들이지만 가만히 짚어보면 이들은 우리가 통전영성을 영위하는데 탁월한 성찰도구가 되어주고 있다. 요컨대, 이 도해는 인간 삶의 네 차원 모두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활동에 관한 동시적 경험을 통해서 인간 경험의 비주제적 차원, 반성적 차원, 해석적인 차원을 구조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한 데서 가치를 지닌다.예컨대, 이 도해에 준할 때, 서두에서 언급된 정의구현사제단의 활동이 인간존재의 「구조적」 내지 「환경적」 차원에서의 하느님 뜻의 구현으로 해석될 수 있다면 사제다락방기도모임의 활동은 「내면적」 내지 「인간상호간」의 차원에 중심을 둔 하느님 뜻의 구현으로 해석될 수 있고, 이들은 서로 독립된 활동이 아니라 상호 관통하는 동시적인 관련성 안에서 통전영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입력일 2005-06-19

【74】21세기 영성(5) - 생태영성

“소박한 삶 실천에 앞장서야” 교회환경운동 낙후성 면치못해우주차원의 생태영성운동 필요 생태가 웰빙이다 21세기 들어 전 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웰빙(wellbeing)열풍」은 그 내용을 파고들어가 보면 『파괴된 자연 속에서의 「자연」의 상품화』라고 압축할 수 있다. 웰빙의 주상품들은 하나같이 무공해, 천연소재, 여유 등을 지향한다. 한 마디로 자연(自然)이 최고의 상품인 것이다. 공기청정기, 정수기 등으로 대변되는 웰빙 가전제품들이 생산해 내는 것들도 말이 첨단이지 사실은 자연이 살아있었을 때는 누구나 누리던 맑은 공기와 청정수에는 비길 수 없는 것들이다. 과거에는 가난한 이들 모두의 주거였던 황토방과 귀틀집이 오늘날에는 부자들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되었다는 사실이 웰빙 문화가 지니고 있는 역설인 것이다.요컨대, 현대인이 누리는 웰빙은 파괴된 생태(生態)에 대한 차선적인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웰빙은 원시생태의 복원이라는 말이다. 곧 생태보전이 인류의 미래를 위한 최선의 대안이요 최고의 웰빙인 것이다. 왜 생태영성이어야 하는가? 생태보전의 중요성을 인식한 한국 가톨릭교회는 지난 수십 년간 다각도로 환경운동을 전개해오면서 오늘에 이르렀다.한국 가톨릭 주교회의 산하에는 정의평화위원회가 있고, 이 위원회 안에 환경소위원회가 설립되어 있다. 또한 전국교구의 환경과 생태영성운동 단체들 대부분이 참여한 천주교환경연대 역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가톨릭 환경운동과 생태영성운동은 현재 전국의 거의 모든 교구에서 펼쳐지고 있다(황종렬, 「생태복음화 모델 연구」, 2005년 미래사목대안 학술 발표회 자료집, 69쪽 참조).그런데 원주교구 이동훈 신부는 이러한 가톨릭 환경운동의 현주소를 다음과 같이 진단하고 있다.『지난 20여 년간의 환경운동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사회운동의 부문운동 정도로 인식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하느님의 피조물인 자연환경에 대한 소중함에 대해서 교회의 지도자나 신자들의 인식이 매우 부족한 것이다. … 환경보전의 임무가 신앙인의 본질적인 부분이라는 의식에는 크게 못 미치고 있으며,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채 생활 속의 실천에만 그치고 있는 현실이다. …교회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영성으로 드러나는 운동이 없었다. …가톨릭 환경운동은 환경운동을 신앙인의 본분으로 인식하는 창조영성, 생태영성을 진작시키는 데까지 이르게 하지 못하고 사회 환경단체의 활동과 차별성을 구현해 내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이동훈, 「가톨릭 환경운동의 방향과 과제」, 2003년 천주교환경연대 제1차 정기총회 자료집, 48쪽)이동훈 신부가 말하는 요지는 실천과 운동만 있었지 신학과 영성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한계는 각 교구의 환경교육의 대부분이 올바른 먹거리, 재활용, 개발 사업의 부당성 등의 실천적인 부분에만 머물렀다는 사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결과적으로 교회 내에서의 환경운동은 그리스도교적이며 가톨릭적인 독특성을 갖추지 못한 채, 사회 환경단체들과 대동소이한 활동을 하는 가운데 오히려 전문성과 지속성에서 낙후된 모습을 보이며 그들에게 종속적인 처지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이런 상황에서 교회 내부에서는 환경과 생태운동을 위한 신학적 성찰이 제공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여전히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윤리 신학적 차원에 머무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이유로 이동훈 신부는 「가톨릭 환경운동의 방향」은 기본적으로 「생태영성운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생태영성의 지평 그러면 우리는 어떤 지평에서 생태영성을 도모하여야 할까?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생태영성은 환경문제를 우주 차원의 하느님의 집안 인식에 근거한 「하느님의 생명 공동체의 연대와 구원」의 전망에서 접근하는 것을 요청한다.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최기산 주교는 2005년 6월 5일 환경의 날을 맞아 발표한 담화에서 시의적절하게 생태영성의 중요성과 방향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담화문에 따르면 생태영성은 먹거리 문화에서부터 국가 농업 및 환경정책,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생활양식을 아우르는 통전적 지평을 견지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생태영성이 포괄해야할 과제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첫째, 생태영성은 그리스도교 영성 전통 안에서 생태영성의 역동성을 확인하는 일이다. 곧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그리고 2000년 가톨릭 역사에서 형성된 영성과 신학과 사목 전통들을 존중하면서 한국교회의 역사와 그 속에서 펼쳐진 노력을 바르게 인식하여 이를 자기의 생태 복음화 사명에 역동적으로 통합할 안목이 필요하다. 예컨대, 우리는 생태영성을 삼위일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 생태복음화의 영성적 기초는 하느님이 하신 모든 일에 대한 신뢰이다. 하느님의 손길이 닿은 것에 생명 있고, 축복 있고, 선이 있다(창세 1장 참조). -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사도 3, 15)으로 고백한다. - 성령께서는 만물 안에서 구원을 향하여 역사하신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로마 8, 22).둘째, 생태영성의 일환으로 정의구현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일이다. 생태영성과 정의구현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무공해를 찾고 이른바 「구매」 능력을 갖는 이들은 지금까지 선두에서 공해를 유발시킨 주역들이기 십상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생태와 정의의 분리는 오히려 생태 정의를 왜곡시킨다. 공해 발생 주역은 자본을 축적하여 생태계를 계속해서 파괴할 자본력을 확보하는 가운데 공해를 피하여 휴가를 취할 가능성을 갖는다. 이에 비해서 공해 피해를 직접 겪는 서민은 계속해서 공해를 떠안고 살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생태영성은 반드시 정의구현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셋째, 「소박한 삶」의 실천에 앞장서는 일이다. 무절제한 소비문화가 생태파괴의 주범임을 우리는 안다. 그러므로 그 해결책은 소박한 삶(simple life)이어야 한다. 이를 위한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최근 범종교적으로 실시하는 음식물쓰레기 안남기기 운동은 그 한 가지 예에 지나지 않는다. 생태영성의 알파요 오메가인 명제는 생명이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 10).

입력일 2005-06-12

【73】21세기 영성(4) - 증거영성

신앙, 의무 아닌 신바람 돼야의무 지향적 교리 중심 벗어나 체험 매개하는 성서 교육 필요 젊은층의 교회이탈 2000년대에 들어와서 젊은층 신자들의 교회이탈 현상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2003년 말 기준 한국 가톨릭교회 교세 통계를 보면 전년 대비 신자 연령별 증감 현황에서 40세 미만의 연령대는 모두 충격적인 수치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6세 이하 연령대의 신자 증감률은 -18.4%, 7~19세 연령 대는 -9.1%, 20대 청년층은 -7.7%를 보였다. 특히 가장 왕성하게 활동을 해야 할 30대 청년층이 -7.2%를 기록했다.이러한 추세가 몇 년간 누적되면서 빚어진 결과는 참담하다. 2005년 한국 갤럽 조사(한미준 한국갤럽, 「한국교회 미래리포트」, 2005)에 의하면, 종교 내 청년인구(18~29세) 비율에서 개신교는 44.1%, 불교는 35.1%를 기록하고 있으나 가톨릭교회는 16% 대에 그치고 있다. 이를 절대 수치로 환산하면 청년 신자 비율은 가톨릭 1명당 개신교 7.26명, 불교 7.14명으로 나타난다. 이는 전국민에 대한 신자비율이 가톨릭 8.2%, 개신교 21.6%, 불교 26.7%임에 비할 때 대단히 저조한 수치인 것이다.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러한 이탈현상은 기존 가톨릭교회의 「의무」신앙에 대한 포스트모던 세대의 노골적인 불만의 표출로 해석할 수 있다. 즉, 40대 미만 층의 가치관에 비추어볼 때 가톨릭교회가 「재미없고」(전례), 「고리타분하고」(교리), 「부담스럽기」(교회법) 때문에 기피한다고 보면 된다. 오늘날 소비자의 구미는 까다롭고 냉정하다. 실망하면 물건을 가차 없이 바꾼다. 더 좋은 것을 만나면 옛것을 미련 없이 버린다. 설마설마 했다가는 큰 코 다친다.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런 현상을 극복할 수 있을까? 필자는 가톨릭교회가 「의무」 신앙의 이미지를 벗고 「신바람」 신앙의 이미지를 구축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그동안 젊은이들에게는 「가톨릭」이나 「성당」 하면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부담」, 「엄격함」, 「딱딱함」 등등일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었다. 그러므로 가톨릭교회가 미래에 살아남고자 한다면 이런 이미지가 획기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제는 「성당」 하면 생각나는 단어가 「신바람 나는」, 「즐거운」, 「웃음이 가득한」이라는 이미지가 되어야한다. 결론적으로 종래의 「의무」 신앙이 「신바람」 신앙으로 틀바꿈, 탈바꿈을 해야 한다. 교리에서 성서로 어떻게 해야 신바람 신앙을 일으킬 수 있을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신바람 신앙은 교리(敎理) 중심의 신앙교육에서 성서(聖書) 중심의 신앙교육에로 전환될 때 비로소 형성된다고 본다. 교리 중심의 신앙교육은 「믿을 도리」와 「지킬 계명」 등등의 방식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아무래도 「의무」 지향적이었다. 하지만 성서(聖書) 중심의 신앙교육은 숱한 선배 신앙인들의 하느님 체험과 예수님 체험을 매개해 준다.이는 하나의 주장이 아니라 현상에 대한 증언이다. 필자는 미래 한국천주교회의 사활은 예비신자 교리교육과 신자 재교육을 위한 신바람 나는 프로그램에 달려있다고 보고 나름대로 대안을 제시해 왔다. 이것이 과분하게도 많은 신부님, 수녀님, 교리교사들, 그리고 예비신자 및 교우들로부터 공감을 얻었다. 교리를 완전히 배제하지 않으면서 성서 중심 교육을 지향했더니, 형식적이고 무미건조한, 마치 엄격한 윤리 도덕을 지키듯이 신앙생활을 해왔던 이들이 『주님은 정말 살아 계셨군요. 참으로 좋으신 분이시군요』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또 『신앙 생활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겠어요』하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증거(martyria) 영성 성서는 체험의 기록이다. 그리스도교는 체험의 종교, 만남의 종교이다. 뜨거운 감동이 있는 종교이다.욥이 환난을 겪고 있을 때 개념(槪念)의 하느님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욥을 구했던 것은 체험(體驗)의 하느님이었다.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욥기 42, 5).욥은 사람들에게서 하느님은 이러저러한 분이라는 것을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냥 객관적으로 「하느님」 또는 「그분」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욥은 모진 고통을 겪으면서 이 하느님을 직접 만났고 체험했다. 마침내 하느님을 나의 「당신」으로 보고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두 제자는 주님을 만나 뵙고 가슴 뜨거워짐을 체험하였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서를 설명해 주실 때에 우리가 얼마나 뜨거운 감동을 느꼈던가!』(루가 24, 32).복음을 전하지 말라며 박해를 하던 유다인 원로회의 앞에서 베드로와 요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사도 4, 20).보고 들은 것이 있으니까 증거(證據)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증거는 체험을 전제로 한다. 팔삭동이 같은 자신에게 무한한 은총을 베푸신 예수님의 사랑에 감읍한 사도 바울로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1고린 9, 16). 누린 만큼 증거해야 한다는 논리인 것이다.증거(Martyria)는 본래 순교를 뜻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복음 증거의 사명(마태 28, 19~20 참조)은 마르티리아의 언어적 의미 그대로 고난을 견디어내며 기꺼이 순교하기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복음은 개념이 아니고 체험을 의미한다. 따라서 복음 선포는 주장이 아니고 증언인 것이다. 곧 예수를 그리스도로 먼저 체험한 이들이 다른 이들을 그 체험에로 초대하는 증거인 것이다.결론적으로 증거 영성은 자신의 전 실존이 먼저 예수를 그리스도로 체험하고 그 체험을 이웃에게 나누는 영성을 의미한다. 곧 먼저 자신의 모든 의문, 문제, 욕구에 대한 답을 예수님 안에서 만나고 그 예수님을 다른 이에게 소개하는 영성을 말한다.요즈음 도처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온다. 노숙자들, 실직자들, 성격파탄자들, 절망 속에서 마지막 탈출구로 죽음의 길을 찾는 이들, 착취당하는 외국인 노동자들, 탈북자들 등등 울부짖는 이들의 소리가 하늘을 찌른다. 영적 목마름의 탄식 또한 애절하다. 신자건 비신자건 평화를 갈구하고 하느님 체험을 목말라하면서 엉뚱한 곳을 헤맨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복음, 기쁜 소식, Good News 이다. 딱딱한 교리, 읽지 않는 성경책이 아니라 만능 해결사 예수 그리스도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해방자(루가4, 16~21)로서, 때로는 치유자(마르1, 40~42)로서, 때로는 착한목자(요한10, 1~6. 10~16)로서 증언할 수 있어야 한다. 아직도 죄와 죽음과 어둠 속에 살고 있는 세상 사람들이 기쁜 소식을 접하여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뜨거운 열정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것, 이것은 시대를 초월하는 그리스도인의 본분인 것이다.

입력일 2005-06-05

【72】21세기 영성(3) - 성체영성

성체는 ‘살과 피’가 된 말씀 영하면 내 ‘살과 피’가 되고 가난한 이 위해 투신하게 해 앞에서 「성찬의 원리」, 「성사」, 「가톨릭교회의 보고」 등의 측면에서 성체(聖體)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했었다. 이제 그 종합으로서 성체영성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성체의 원적외선 효과 좀 무리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필자는 성체조배의 은총을 원적외선 효과에 비유하기를 좋아한다. 많은 신자들이 성체조배의 요령을 몰라서 별별 수를 다 쓰면서 30분이고 한 시간이고를 뒤척이거나 부스럭거리는 것을 보고 좋은 대안을 찾고 있을 때 얼른 떠올랐던 영감이었다. 이후 필자는 신자들에게 이렇게 설명해왔다.『여러분, 찜질방에 가보신적 있으시죠? 거기서 원적외선을 쬐며 땀을 뺄 때, 무슨 요령 같은 것이 필요합니까? 아니죠. 그냥 쬐기만 하면 되는 것이죠. 성체조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체조배를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 이런 것 고민하지 마세요. 그냥 성체 앞에 앉아 있는 겁니다. 졸음이 오면 졸면서 그냥 시간을 보내는 겁니다. 다만 딴전을 부리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바로 눈 앞에, 코 앞에 계신데 성서 같은 거 펴들고 읽는 것은 효과적이지 못합니다. 집중이 잘 안되어도 좋고 아무것도 안 해도 좋으니까 그냥 예수님과 함께 앉아 있다가 나온다는 심정으로 시간을 버텨보세요. 그러면 어느새 자신의 육신, 마음, 영혼에 예수님의 현존이 삼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예수성심과 나의 마음이 하나가 되기도 하고, 상상하지 못했던 좋은 일들이 여러 가지 형태로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그랬더니 어느 교우가 강의 끝에 남아서 필자에게 증언을 해 주었다. 그의 요지는 이랬다. 그는 어느 사제의 형이다. 여러 해전 그는 사업실패로 위기를 맞이하였다. 기도를 하기 위해 성당을 찾았다. 하지만 기도가 되지를 않았다.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1시간가량 앉았다가 집으로 왔다. 다음날도 또 기도를 해볼 요량으로 성당을 찾았다. 그날도 무슨 힘에 압도당한 듯 입을 열지 못했다. 오기가 생겼다. 그래서 뭔가 감이 올 때까지 매일 1시간씩 성당을 찾기로 작정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여러 해, 용케도 잘 버텨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데 강의를 들으면서 돌이켜 보니, 자신이 해왔던 것이 바로 「성체조배」라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기도하고 싶었던 지향이 오늘에 와서 생각하니 그대로 현실로 이루어졌다. 자신의 청원기도는 실패했지만 어느새 그보다 더 깊은 기도인 성체조배를 몸에 익혔다는 것이 더없이 은혜로운 일이었다.그의 말은 사실이다. 단지 1시간씩 성체가 모셔져 있는 감실 앞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신앙과 삶에 엄청난 변화가 생긴다.『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1고린 2, 9). 육화된 말씀, 성체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왜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를 제정하셨을까? (복음)말씀을 주셨으면 되었지, 왜 그것에 더하여 성체까지 선물로 주셨을까? 말씀으로는 족하지 않다는 예지에서였을까?』개신교에는 이른바 카리스마 넘치는 목사님들의 설교가 있다. 신도들에게는 말씀의 은혜가 넘친다. 말씀에 대한 열정이 부족한 우리에게는 부럽기만 한 현실이다. 분명 이는 가톨릭교회에 분발을 촉구하는 저들의 장점이다.그런데 어느 날 필자에게 깨달음이 왔다. 곧 성체가 말씀의 육화(肉化)요 성취(成就)요 구현(具現)이라는 사실에 불현듯 마음이 열렸던 것이다. 아무리 말씀이 좋아도 말씀은 이해를 해야 은총이 된다. 그래서 말씀의 은총은 사람마다 달리 누린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말씀이 은총이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지능(知能)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성체는 이미 「살」이 되고 「피」가 된 말씀이다. 그래서 그냥 영(領)하기만 하면 이해력에 상관없이 우리의 살이 되고 피가 되어 주신다. 언젠가 언급했듯이 란치아노의 성체 기적은 성체가 예수님의 심장조직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 주었다. 이는 성체가 우리의 마음이 예수 성심(聖心)을 닮도록 해주는 매체가 되어 준다는 점을 시사해 주고도 남는다. 뿐만 아니라 성체는 신비한 주님의 현존이시기에 몸에 모시지 않고 그냥 그 앞에 앉아있기만 해도 우리를 주님의 현존으로 휘감아 주신다. 그래서 필자는 이를 성체의 원적외선 효과라고 비유적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한마디로, 성체를 통해서 우리는 육화된 (복음)말씀을 자신 안에 모시게 된다. 성체 조배를 통해서 우리는 육화된 말씀의 현존에 휘감기게 된다. 결국 성체는 말씀의 완성인 셈이다. 이는 예수님 생애에서도 드러났고 오늘 우리 안에서도 체험되는 현실이다. 예수님의 (복음)말씀은 파스카 제사(「몸」과 「피」의 제헌)로 완성되었고 그 파스카 제사를 송두리째 현재적으로 담고 있는 것이 성체인 것이다. 그러기에 다음의 예수님 말씀은 그대로 우리 안에서 사실로 체험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요한 6, 56). 성체의 삶 미사 끝에 사제는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또는 『가서 복음을 실천합시다』라고 하며 신자들을 파견한다. 이것은 단순한 끝맺음이 아니라 파견이다. 그래서 미사 전례를 통해 우리는 주님께서 제정하신 성체성사에 50% 참여하는 것이며, 성당을 나와서 내 생명을 내어놓는 우리 사랑의 구체적 행위가 이루어질 때에 나머지 50%가 완수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놓으셨다면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서 생명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인간으로서 또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과의 결합은 형제적 인간 결합에로 연결되어야 한다. 이 순환적 흐름을 우리는 성체영성이라 부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교회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성체성사는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투신하게 한다.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참되게 받기 위해서는 그분의 형제들인 가장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보아야 한다』(가톨릭교회교리서 1397항).이러한 당위를 몸소 실행했던 이가 복녀 마더 데레사였다. 그녀 안에서 우리는 성체영성의 전형을 만난다. 마더 데레사는 우리에게 권고한다. 『일할 수 있고 볼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기 위해선 예수님과의 그리고 (가장 가난한 사람들과의) 성체성사적 일치가 필요합니다』

입력일 2005-05-29

【71】21세기 영성(2) - 복음영성

복음은 용서와 구원의 은총 복음을 중심으로 신나게 살고 실존을 부축하는 복음 전해야 우도, 장발장 그리고 키에르케고르.역사 이래 최고의 횡재를 만난 사람을 꼽으라면 반드시 우도가 몇 손가락 안에 꼽혀야 할 것이다. 아니 참으로 무엇이 귀한 것인지를 볼 줄 아는 사람에게라면 의당 첫 번째로 꼽혀야 할 것이다. 촌각이 급한 상황에서 「툭」 던진 말 한 마디로 천국을 약속 받은 사람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는 극도의 두려움 속에서 간청했다.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루가 23, 42). 이에 예수님께서는 누구도 예상치 않은 약속을 선언하셨다.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루가 23, 43).이는 인간적인 판단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용서의 선언이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충격이요 파격이었다. 살인강도에게 선언된 이 파격적인 특은에 대하여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347~407)는 이렇게 묵상했다. 『이 도둑이 드디어 낙원을 훔쳤구나! 이 사람보다 앞선 사람들도 일찍이 아무도 그런 약속을 받은 사람은 없었다. 아브라함도, 이사악도, 야곱도, 모세를 비롯하여 많은 예언자들과 사도들 가운데에도 그러한 약속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이 도둑은 그들을 모두 제치고 앞서고 말았구나!』 그는 하느님의 자비심이라는 틈새를 기어들어가 천국을 훔친 희대의 도둑이었던 것이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은 또 하나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 빵을 훔친 죄로 19년 간 중노동을 선고 받은 장발장은 감옥에서 출소한 후 길을 헤매다 한 신부의 자비로 성당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다. 그러나 장발장은 신부가 잠든 사이 은잔을 훔쳐 어둠 속으로 달아났고, 곧 경찰에 의해 붙잡혀 성당으로 끌려온다. 그러나 신부의 반응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다시 오셨군요!』 신부는 장발장에게 큰소리로 말한다. 『참 다행입니다. 제가 촛대까지 드렸던 것을 잊으신 모양이죠? 그것도 은이라서 족히 200프랑은 나갈 겁니다. 깜박 잊고 놓고 가셨나요?』과오도 인정하지 않은 장발장을 용서한 이 감동적인 장면은 모두에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이후 촛대를 은총의 소중한 상징물로 간직한 그는 어려운 이들을 돕는 데 여생을 바친다.두 이야기에서 우리는 무조건적인 용서의 강력한 파장에 공명하게 된다. 키에르케고르는 이 무조건적인 용서를 베풀기 위해 예수님께서 얼마나 멀고 먼 길을 오셨는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죄인에 대한 문제라면 하느님은 그냥 팔을 벌리고 서서 「이리 오라」고 단지 말씀만 하시지 않는다. 줄곧 서서 기다리신다. 탕자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 아니다. 그분은 서서 기다리시지 않는다. 찾아 나서신다. 마치 목자가 잃은 양을, 여인이 잃어버린 동전을 찾아 나선 것처럼 그분은 찾아 가신다. / 아니다. 그분은 이미 가셨다. 그 어떤 목자나 여인보다 무한히 먼 길을, 진정 그분은 하느님 신분에서 인간 신분이 되기까지 무한히 먼 길을 내려오셨다. 그렇게 죄인들을 찾아오신 것이다』 복음 복음은 말뜻 그대로 「기쁜 소식」, 「희소식」, 「복된 소식」을 말한다. 복음이 진정으로 「기쁜소식」이 되기 위해서는 「슬픈 현실」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슬픈 현실이란 다른 것이 아니고 죄, 그리고 그것으로 초래된 현실적 불행(고통과 죽음)에 대한 인간의 무능력을 가리킨다.동서를 막론하고 죄인에게는 응분의 벌이 기다리고 있으며 죄인에게 미래는 곧 심판의 때요 좌절의 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기성종교들의 신념이었다. 힌두교와 불교의 업보사상이나 유다교의 상선벌악에 대한 믿음은 죄인들에게는 철퇴와 같은 것이었다. 바로 이런 슬픈 현실에서 예수님의 복음이 선포되었던 것이었다.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 15). 복음의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선언하셨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마침내 예수님은 십자가 제사를 통하여 이 복음을 온전히 구현하셨다. 그런데 복음은 은총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복음은 하느님으로부터 「공짜」로 주어지는 용서와 구원을 의미하는데 바로 이처럼 공짜로 주어지는 선물을 「은총」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바로 복음이며 은총의 선포인 것이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오너라. 여기에 물이 있다. 너희 먹을 것 없는 자들아 오너라. 돈 없이 양식을 사서 먹어라. 값없이 물과 젖을 사서 마셔라』(이사 55, 1).그렇다. 「돈 없이」, 「값없이」 누리는 구원의 선물, 이것을 온전히 성취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살과 피로 값을 지불하였던 것이다(1베드 2, 24 참조). 이 소식을 우리는 복음이라 부른다. 이 사실 자체를 우리는 은총이라고 부른다. 복음영성 복음영성을 우리는 복음을 누리고 복음을 나르는 영적생활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우선, 복음영성은 복음을 「누리는」 삶을 말한다. 말 그대로 거저받은 용서, 공짜로 받은 은총을 누리는 삶을 말한다. 스스로에게 정직해 볼 때, 가톨릭교회는 복음을 소홀히 여겨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동안 우리는 「복음화」를 말하면서 복음을 왕따시켰다. 정작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할 때 의무조항 투성이인 교리를 가르쳤고, 복음서를 윤리도덕 책으로 전락시켰고,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 강론대에서 성서 말씀보다 오히려 불경이나 논어를 인용하기를 좋아했다. 영적상담의 자리에서는 심리학으로 복음을 대체했고, 성서공부의 현장에서는 성서 주변지식으로 복음묵상을 몰아냈다. 우리는 성서보다 교회문헌 인용하기를 더 좋아했다.이제부터라도 복음중심으로 살자. 그러면 신앙생활이 홀가분해지고 기뻐지고 신나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복음영성은 복음을 「나르는」 삶을 말한다. 복음을 나르려면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슬픈 현실을 볼줄 알아야 한다. 요즈음 도처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온다. 노숙자들, 실직자들, 성격파탄자들, 절망 속에서 마지막 탈출구로 죽음의 길을 찾는 이들, 착취당하는 외국인 노동자들, 탈북자들 등등 울부짖는 이들의 소리가 하늘을 찌른다. 영적 목마름의 탄식 또한 애절하다. 신자건 비신자건 평화를 갈구하고 하느님체험을 목말라하면서 엉뚱한 곳을 헤맨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복음, 기쁜 소식, Good News 이다. 딱딱한 교리, 읽지 않는 성경책이 아니라 만능 해결사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바로 해방자, 치유자, 착한목자, 선생님, 회장님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이다.이제부터라도 실존을 부축해주는 복음을 나르자. 그러면 복음이 더욱 매력을 발산할 것이고 복음을 찾는 이들 때문에 즐거운 비명을 지르게 될 것이다.

입력일 2005-05-22

【70】21세기 영성(1) - 갈피잡기

목자 없는 양들 뿔뿔이 흩어져‘복음·성체·증거·생태·통전’ 다섯가지 영성적 대안 제시 지금까지 「이것이 가톨릭이다」라는 제하에 취급할 수 있는 주제들을 얼추 다루어 봤다. 하지만 이는 거대한 산맥(山脈) 가운데 몇몇 산, 숲, 나무들만 둘러본 격에 지나지 않는다. 마저 발을 디뎌봐야 할 지대(地帶)들이 아쉬움의 눈빛을 보내오고 있다. 언젠가 또 기회가 있으려니 하는 미련을 품으면서 이제 행낭을 추슬러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이렇게 머지않아 있을 작별을 예감하면서 마지막 행보의 발 머리를 「2l세기 영성」이라는 봉우리를 향해 돌려 보고자 한다. 봉우리에 올라 일출(日出)을 보고 하산할 것이다. 메시지가 있다 2004년 갤럽조사에서 1998년부터 2004년까지 각 종교별 교세 성장률에서 불교가 3.2%, 개신교가 0.9%, 가톨릭이 0.7%를 기록한 것으로 나와 있다. 1970년대 말 이후 줄곧 선두권을 유지해왔음에 비할 때, 실망스런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런 현실 앞에서 우리는 낙심할 것이 아니라 얼른 메시지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도대체 이런 사태의 원인과 의미는 무엇인가? 그 답을 찾을 줄 알아야 한다. 곧 이런 현상 속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심신(心身)의 안정(安定)을 갈구하는 현대인의 갈구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현대인은 한마디로 불확실한 미래를 담보받기 위하여 치열한 생존경쟁을 하며 극도의 스트레스 속에서 살고 있다. 베트남 출신 승려 틱 낫한은 이런 현대인의 삶의 조건을 통찰하기라도 한 듯이 「화(anger)」와 「힘(power)」이라는 책 두 권을 써서 일약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그는 「화」라는 책에서 「스트레스」에 대한 불교적 대안을, 그리고 「힘」이라는 책에서 「생존경쟁」에 대한 불교적 대안을 제시하여, 결국 불교를 대대적으로 홍보하는데 공헌하였던 것이다. 또 요 근래에 불교에서는 「사찰체험(temple stay)」을 통하여 대중을 끌어들이는데 많은 공을 들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불교 측에서는 이미 현대인의 심리적 욕구를 읽어내어 이를 포교(布敎)의 계기로 삼고 있는 것이다.심리적인 안정을 갈구하기는 가톨릭 신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어딘가 용한 「답」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그 주변을 기웃거리게 된다. 점을 치고, 무당을 찾고, 신흥영성에도 기웃거려보고, 명상이나 수련법도 배워본다. 이렇게 그저 소박하게 낯선 지역에 발을 들여놨다가 마침내는 종교적 일탈(逸脫)로 이어지는 불행한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그런데, 이런 식의 신앙적 외도나 일탈에 대하여 가톨릭교회에서는 「그러면 안 된다」는 금령으로만 일관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이 과연 무엇을 갈구하고 있는지, 어떤 고통과 불안을 안고서 그 「해답」을 찾아 여기 저기 방황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헤아려 주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또 설령 신자들의 심리적 욕구 내지 영적 갈증을 파악하기는 했다고 해도 그에 대한 가톨릭적 해법을 명쾌하게 제공하지 못했던 것이 실제다.이러함에 가톨릭교회의 한 사제로서 필자에게는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 토로하시는 하느님의 애절한 음성이 매일이고 환청처럼 들려온다.『양들은 목자가 없어서 흩어져 온갖 야수에게 잡아먹히며 뿔뿔이 흩어졌구나. 내 양떼는 산과 높은 언덕들을 이리저리 헤매고 있다. 내 양떼가 온 세상에 흩어졌는데 찾아다니는 목자 하나 없다. … 나의 양떼는 마구 잡혀 갔고, 나의 양떼는 목자가 없어서 들짐승에게 찢겼다. 그런데도 내가 세운 목자들은 나의 양떼를 찾아다니지 않았다』(34, 5~8).이는 그저 2500년 전의 신탁(神託)이 아니다. 오늘 이 시대의 사목자들을 향한 하느님의 처절한 절규이다. 그렇다. 사목자들은 현대인들이 얼마나 영적으로 목말라 하는지 예민하게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교회에서 얻지 못한 치유, 위로, 평화, 행복을 찾아 「산」과 「언덕」을 헤매는 양들의 속사정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더러 「야수」와 「들짐승」에게 물려가 이리저리 찢긴 처참한 영혼의 사정을 안타까워할 줄 알아야 한다. 5가지 우선적 선택 다시 큰 그림으로 돌아가 보자. 20세기 하반기 물질의 풍요와 성공을 추구해온 현대인들은 이것들에서 만족과 행복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타락과 고갈을 체험했다. 현대인의 정신적 황폐증상, 인간의 존엄성 실추, 그리고 환경파괴 등 이 시대의 심각한 문제들이 물질의 추구로 해결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조장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기 시작했다. 그래서 원하던 행복을 얻기는커녕 오히려 상처투성이인 채 정신적 공허에 시달리며 갈증만 더 심해갔다. 물질과 감각생활에 대한 반작용으로 영성에 대한 굶주림을 갖게 된 것이다.승전보를 기약하며 도도하게 전쟁터에 나갔던 용사들이 저마다들의 상처들을 안고 지친 영육(靈肉)을 질질 끌면서 치유와 안식, 심기일전과 재충전을 꿈꾸며 고향으로 돌아오는 모습, 그 모습이 바로 신앙생활에 기대어 보려고 교회를 찾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이다.그렇다면 가톨릭교회는 이런 처지에 있는 21세기 사람들에게 어떤 영성적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관점에 따라 여러 답이 가능할 것이다. 필자에게는 다음과 같은 5가지를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시대의 요청이라고 보인다. 첫째, 복음영성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시고 이루신 것은 복음(福音)으로 압축될 수 있다. 복음에서 우리는 구원, 치유, 해방, 행복 등을 만난다. 현대인의 영적 갈증에 대한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하다. 복음 하나면 되는 것이다. 복음을 제대로 받아들이면, 신앙생활은 「의무」에 시달리는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 「은총」 넘치는 신나는 것이 될 수 있다. 둘째, 성체영성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전 생애를 복음으로 「압축」하셨을 뿐 아니라 나아가 성체에 「담아」 주셨다. 이로써 예수님은 몸소 우리 안으로 들어오셔서 피와 살이 되어 주실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성체(성사)를 거행하고 공경하고 관상하는 것은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이 누려야할 특권이라 할 수 있다. 셋째, 증거영성이다. 12사도에게 있어서 증거할 수 있는 사명과 능력의 원천은 「성령」이었고, 증거의 내용은 「복음」이었으며, 증거의 완수방식은 「순교」였다. 이 세 가지가 증거영성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넷째, 생태영성이다. 그리스도인 영성의 지평은 전피조계 곧 우주적 생태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교 영성은 의당 생태영성일 필요가 있다. 이는 오늘날 자연영성을 갈구하는 현대인의 욕구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대안이 되기도 한다. 다섯째, 통전영성이다. 치우치면 결함과 왜곡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지(知)-정(情)-의(意), 대아(對我)-대인(對人)-대신(對神) 등의 전반을 아우르는 영성을 지향할 줄 알아야 한다.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스케치만 해봤다.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서 세부 그림을 그려볼 것이다. 차동엽 신부 미래사목연구소 소장

입력일 2005-05-15

【69】가톨릭교회의 보고(寶庫)-증거자들(2)

근세기를 살았던 인물 가운데 모든 종교를 막론하고 마더 데레사 만큼 감동적이고 설득력 있는 「박애」의 전범(典範)이 없다. 마더 데레사는 21C 성녀 한평생 가난한 사람 위해 헌신그리스도의 상징이자 증거자 사그라들지 않는 울림 짧지만 많은 것을, 아니 가장 중요한 것을 전해주는 이야기가 있다. 첫 대면에 필자의 심금을 울린 이후 입때까지 가슴 언저리를 빙빙 돌고 있는 그 말마디는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어떤 사람이 힌두교도에게 물었습니다.그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그리스도인은 주는 사람입니다.」여러분에게 부탁할 것이 있습니다.싫증내지 말고 주십시오. 그런데 남은 것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상처를 받을 때까지, 고통을 느낄 때까지 주십시오』마더 데레사가 남긴 말이다. 이 짧은 말 속에 그녀의 성소(聖召)와 삶과 유훈(遺訓)이 담겨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리스도의 생애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리스도교의 정체성과 사명이 담겨 있다. 마더 데레사의 거룩한 족적 1997년 9월 5일 마더 데레사의 타계 소식이 매스컴을 통해 전해지자 온 세계는 한결같이 「인류의 참 어머니」를 잃게 되었음을 안타까워하면서 애도했다. 그녀가 평상시 종교, 이념, 민족, 피부색을 초월한 모든 이로부터 얼마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었는지 새삼 온 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그 거룩한 생애의 족적은 다음과 같다.1910년 8월 27일 구 유고슬라비아의 스코페에서 출생. 1928년 18세에 아일랜드 로레토 수녀회 입회. 1929~1948년 인도의 캘거타에 파견, 성 마리아 학교 교장과 성 안나 수녀원 수련장 맡음. 1937년 5월 24일 종신서원. 1948년 로레토 수녀회를 나와 빈민촌에 학교 세움. 1950년 「사랑의 선교회」창립, 빈민가에 들어가 극빈자들을 구호하고 그들에게 봉사. 1979~1996년 미국 자유상, UN 슈바이처상, 노벨 평화상, 인도주의상 등 수상. 1997년 9월5일 심장질환으로 영면. 2003년 10월 19일 로마 교황청에 의해 시복.1929년부터 20년간 인도 캘커타에서 교사로 지낸 데레사 수녀는 2차 대전 중 수백만 명이 죽고 가난으로 고통 받는 것을 보았다. 데레사 수녀는 이곳이야말로 하느님이 부르시는 현장임을 절감하고 38세(1948년)에 단돈 45루피(한화 1080원)로 빈자(貧者)들의 안식처인 「사랑의 선교회」를 설립한 것을 발판으로 하여 이후 전 세계 126개국 200여 도시에 600여 개의 세계적인 자선 기관을 세웠다.마더 데레사는 20세기를 살고 간 성녀였다. 20세기 풍요의 시대에 오히려 수많은 빈자들이 가난과 병과 소외 속에서 죽어갔다. 마더 데레사는 우리에게 바로 이런 이들의 괴로움 속에 감추어 져 있는 그리스도를 발견하도록 해 주었다. 마더 데레사의 삶은 마태 25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산 삶이었다.『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 …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 35~36, 40).실제로 마더 데레사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 사랑 받지 못하는 사람, 보호 받지 못하는 사람, 배고픈 사람, 잊혀진 사람, 헐벗은 사람, 집 없는 사람, 나병환자 그리고 알코올 중독자들을 「가난한 사람」으로 보고 한 평생 그들을 위해 사랑을 실천하며 살았다.마더 데레사는 『가진 것이 많으면 주기 어렵고 가진 것이 없을수록 더 자유롭게 많이 나눌 수 있다』는 역설을 실천하고 증거하면서 각박한 오늘의 세상에 놀라운 사랑의 기적이 일어나도록 한 주님의 일꾼이었다. 21세기 시대 이념은 박애 확신컨대, 마더 데레사는 21세기의 성녀가 될 것이다. 새 시대가 성녀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사상가들은 19세기의 시대 이념이 자유(自由)였고 20세기의 시대 이념이 평등(平等)이었다고 한다면, 21세기 시대 이념은 박애(博愛)가 될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다. 그런데 근세기를 살았던 인물 가운데 모든 종교를 막론하고 마더 데레사 만큼 감동적이고 설득력 있는 「박애」의 전범(典範)이 없다. 마더 데레사는 인간의 저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선한 의지를 구체적인 육화의 삶으로 산 그리스도의 상징이며, 그리스도의 흔들림 없는 증거자로 살았던 분이다. 이런 마더 데레사의 삶을 보고 한 이슬람 사제가 이렇게 고백했다. 『그 동안 나는 줄곧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의 예언자라고 믿어 왔습니다. 오늘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분은 놀라운 사랑으로 이러한 일을 하도록 이 자매에게 큰 기쁨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마더 데레사의 영성은 특히 우리를 위해 자신의 「살」과 「피」를 기꺼이 내어주신 예수님, 성체(聖體)로 오시는 예수님에게 깊이 뿌리를 박고 있다. 그녀는 우리에게 권한다.『그분은 우리가 전해야 할 진리,우리가 살아야 할 생명,우리가 비추어야 할 빛,우리가 사랑해야 할 사랑,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우리가 함께 나누어야 할 기쁨,우리가 발산해야 할 평화,우리가 우리의 가정과 이웃과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들을 위해 해야 할 희생입니다』이는 단지 권고가 아니었다. 그녀의 삶이었다. 그래서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인 것이다. 그러기에 복녀(福女)는 앞으로 적어도 100년 이상 인류를 이끌 아름다운 권위(權威)가 될 것이다.

입력일 2005-05-08

【68】가톨릭교회의 보고(寶庫)-증거자들(1)

안중근 토마스는 애국자이자 신앙인이었다. 안중근의 저격은 신앙행위 조국과 동포를 지키려한 살인애국심과 신앙심에 따른 결단 시대마다 위대한 신앙의 증거자들이 있었다. 그들이 우리에게 감동과 설득력을 지니는 것은 그들은 자신들이 믿는 바를 실행하기 위해 몸을 던졌다는 사실 때문이다. 투신(投身)은 가장 강력한 웅변이다. 이 시대의 영성에 빛을 던져줄 대표적인 예(例)만 들어보기로 한다. 시험의 추억 비엔나 대학에서 석사과정에 있을 때 윤리신학 시험을 소위 오럴테스트(oral test), 곧 구두시험으로 치렀다. 그 때 교수님으로부터 받았던 물음들 가운데 15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나는 아주 재미있는 물음이 하나 있었다.『지금 당신이 음식점에서 음식을 먹고 있다고 가정합시다. 갑자기 한 괴한이 나타나 총기를 들고 인질극을 벌이고 있습니다. 상황은 악화되어 이미 몇 사람의 생명이 희생당했고 분위기는 점점 위험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당신에게 그를 제거할 기회가 옵니다. 당신은 호신용 총을 가지고 있었고 그가 당신의 사정거리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당신의 움직임을 보지 못합니다. 자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필자는 간단하게 대답했다.『그자를 쏘겠습니다』교수님이 다시 물었다. 『살인은 제5계명을 거스르는 행위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필자는 대답하였다.『그리스도교의 윤리는 동등한 가치가 서로 대치국면에 있을 때 우선적 선택의 원리를 따를 것을 권장합니다. 곧 생명과 생명이 대립되어 부득이 한쪽을 희생해야 하는 선택을 해야 할 때, 다수의 생명을 보장받기 위해 소수의 생명을 희생해야 한다는 원리 말입니다. 미치광이 한 사람을 죽임으로써 선량한 여러 사람이 산다면 그것은 의로운 행위입니다』교수님은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어주셨다. 그 때 필자는 「정당방위론」은 피력하지 않았다. 교수님의 질문의도가 「불가피한 우선선택의 원리」를 묻고자 한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의사(義士)와 증거자(證據者) 며칠 전 어느 독자로부터 연구원을 통해 전화 문의를 전달 받았다. 「여기에 물이 있다」를 읽다가 안중근 의사를 위대한 가톨릭 신앙인으로 소개한 대목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곧 그 분 질문의 요지는 『어째서 안 중근 의사가 이토오 히로부미를 죽인 것이 신앙 행위냐』는 것이었다. 애국행위로 봐 주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그것을 신앙행위로 보는 것은 좀 무리가 있지 않느냐는 말이었다.국민들은 안중근을 의사(義士) 또는 애국지사(愛國志士)로 기억한다. 하지만 근래에 가톨릭계에서는 그런 애국행위의 배경에 굳은 가톨릭 신앙심이 있다고 보려는 움직임들이 활발히 일고 있다. 노길명 교수(고려대)는 논문 「안중근의 가톨릭 신앙」에서 안중근을 신앙심과 애국심을 조화시킨 인물로 보고 있다(제100회 한국 교회사 연구 발표회 기념 학술 발표회 「안중근 토마스 의사의 신앙과 민족운동」 참조). 노 교수는 민족의 수난과 고통을 외면한 채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당시 교회의 선교정책을 비판하면서, 안중근 의사를 인간의 영혼과 육신, 현세와 내세, 그리고 개인과 사회를 총체적으로 구원시키고자 하는 신앙을 갖고 있었던 선각자로 봐야한다고 제언한다.또한 청주교구 신성국 신부는 『그분의 짧은 생애 그 하나하나가 바로 그 분명한 증거입니다. 우리의 주님,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죽음은 너무도 똑같습니다. 너무도 닮았습니다』고 고백한다(신성국 역,「의사 안중근(도마)」참조). 증거자 안중근 안중근(1879~1910)은 황해도 청계동 성당에서 18세(1897년 1월 11일)에 토마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대륙 침략을 꾀하기 위해 러시아 대장(大藏) 대신과 만나려고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의 가슴과 복부에 십자표시를 새긴 세 발의 총알을 쏜 후, 안 토마스는 혈서로 「독립 자유」라는 글자를 써넣은 태극기를 품속에서 꺼내 흔들며 『대한제국 만세』를 세 번 목이 터지도록 외쳤다고 한다. 이어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진 후 곧 죽자 십자성호를 긋고 『천주여, 포악한 놈을 무찌르게 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기도드린 후 러시아 헌병에게 태연히 포박되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그의 애국심과 신앙심이 결국은 하나였다는 점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안중근 토마스는 자신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천주교 교리에서 금지한 죄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성서에도 사람을 죽임은 죄악이라고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고자 하는 자가 있는데도 수수방관하는 것은 죄악이므로 나는 그 죄악을 제거한 것뿐이라며 자신의 신념을 밝혔다.그는 사형 집행 전 가족들에게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과 아들(준생, 베네딕토)을 성직자로 키워 주기를 유언했다. 또한 2천만 형제자매들이 교육과 실업에 힘써 국권을 회복시키며, 성직자들은 민족 복음화에 배전의 노력을 기울이고 냉담한 교우들에게 신앙을 독려할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대한 독립과 동아 민족의 행복을 위해 죽는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예수님의 성화(聖畵)를 간직한 채, 『대한 독립 만세』 『동양 평화 만세』를 세 번 부른 후 미소를 띠며 1910년 3월 26일 여순 형무소 교수대에서 그의 영혼은 거룩하게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잠깐 곁길로 들어가면, 이렇게 여순 감옥에서 교수형(絞首刑)에 처해졌다는 것이 일제의 공식 발표다. 그러나 현지에는 놀라운 이설(異說)이 남아있다. 안 의사의 동지였던 우덕순의 증언에 의하면, 일제는 안 의사를 교수형에 처한 게 아니고 찜통에 쪄서 죽였다는 것이며, 죽이기 전에 쇠못이 박힌 철판 위를 걷게 하는 모진 고문을 가했다는 것이다. 일제는 안정근.공근 두 친동생의 유해 인도 요구에도 불구하고, 안 의사의 유해를 왜간장통에 넣어 감옥 안의 공동묘지에 묻어버렸다.안중근 토마스 의사는 한국과 한국교회가 세계에 자랑해도 좋을 인물임에 틀림없다. 조국과 민족에 대한 그침 없는 사랑과 하느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자신을 불사른 신앙의 대선배로서 안중근 토마스 의사를 마음껏 자랑해도 좋을 것이다. 신앙은 민족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다.

입력일 2005-05-01

【67】가톨릭교회의 보고(寶庫)-교황(2)

교황직은 하느님 사랑의 성사 인간의 ‘분열 특성’ 때문에 교회에 절대적 리더십 필요 교황과 빌리 그레이엄 목사 2005년 4월 12일자 국민일보의 기자칼럼 「이태영 전문기자의 교회이야기」가 필자의 눈을 끌었다. 「교황과 빌리 그레이엄 목사」라는 제목을 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대한 전 세계적인 추모열기를 부러워하는 가운데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위업을 세계적으로 기렸으면 하는 바람을 담고 있는 글이었다. 중요대목을 인용해 보면 이렇다.『TV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장례식을 지켜보면서 빌리 그레이엄 목사 생각이 났다. 올해 85세인 그레이엄 목사는 파킨슨병으로 거동이 불편한 상태다. … 그레이엄 목사의 사역 역시 교황에 못지않다. 대부흥사로서 전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국내 가톨릭 신자들이 한국의 소록도를 방문했던 교황을 기억하듯 개신교 신자들 역시 여의도 광장에서 카랑카랑하게 복음을 전했던 그레이엄 목사를 기억할 것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가톨릭의 상징 인물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였다면 그레이엄 목사는 복음주의 기독교권의 상징 인물이었다. …「과연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전 세계 방송사들, 또한 국내 방송사에서도 교황이 서거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비중 있게 방송을 내 보낼까」 단언하건대 그레이엄 목사가 서거했을 때에는 교황 서거와 같은 비중으로 보도하지 않을 것이다. …이 같은 보도 내용과 비중의 차이는 가톨릭과 기독교간 시스템의 차이에서 비롯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가톨릭에서 교황은 절대적인 상징 인물이다. … 개신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진정한 상징이 없다. 개신교에는 교황이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계에서는 세계인의 마음을 잡기 위한 적극적인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교황 서거는 가톨릭 입장에서 전도의 호기였다. 많은 사람이 친숙하게 가톨릭의 사랑과 화해의 정신을 접했다. 그레이엄 목사가 소천하면 개신교는 그의 꺼지지 않은 구령 열정을 널리 알려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국내 개신교계도 마찬가지다. 고쳐야 할 것은 회개하고, 알릴 수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널리 전해야 한다』(thlee@kmib.co.kr). 이 글을 읽고 나서 필자는 바울로 사도의 말을 떠올렸다. 그는 『「나는 바울로파다」 「나는 아폴로파다」 「나는 베드로파다」 「나는 그리스도파다」하며 떠들고 다니는』(1고린1, 12)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도대체 아폴로는 무엇이고 바울로는 무엇입니까? 아폴로나 나나 다 같이 여러분을 믿음으로 인도한 일꾼에 불과하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각각 맡겨 주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1고린 3, 5).바울로 사도의 권고대로 우리는 교황님을 존경하듯이 빌리 그레이엄을 존경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종파의 벽에 대해서는 아직 조심스럽게 생각할 필요가 있지만, 교파의 벽은 인간이 쳐놓은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개신교를 「갈라진 형제들」로 여겼다. 곧 이산의 상태에 있는 「피붙이」로 여긴 것이다. 교리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빌리 그레이엄」의 위업을 높이 산다. 이런 의미에서 빌리 그레이엄이 가톨릭 신자로부터도 존경을 받았으면 하는 것이 진심이다. 종들의 종 그건 그렇고 차제에 교황직의 의의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자.주지하듯이 교황직은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맡기신 사실(마태 23, 13)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늘나라의 열쇠를 우리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호된 질책과 연결시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하늘나라의 문을 닫아놓고는 사람들을 가로막아 서서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못 들어가게 한다』(마태 23, 13). 이 말씀으로써 예수님은 저들이 613개 조항으로 된 까다로운 율법 조문으로 천국의 문턱을 높이고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있음을 개탄하셨다. 이렇게 볼 때에 「하늘나라의 열쇠」는 복음의 힘으로 이 천국의 문턱을 낮추고 죄인들까지 들어갈 수 있도록 구원 활동을 펼칠 수 있는 권한과 사명을 뜻한다고 말할 수 있다.이러한 사명이 자칫 군림(君臨)으로 경색될 수 있음을 예견하신 예수님은 미리 누차에 걸쳐서 섬김의 자세를 강조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왕은 지배하지만 신앙의 지도자들은 섬겨야 한다(루가 22, 25~26)고 하셨고, 몸소 모범으로써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고(요한 13장), 마지막으로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요한 21, 19)하시며 사랑어린 당부를 하셨다.실제로 베드로는 초대 교황으로서 이 사명에 충실하였으며, 이 교황직은 그의 후계자들을 통해서 면면히 계승되며 오늘에 이르렀다(이에 대한 성서적, 문헌적 전거는 「참 소중한 당신」 5월호에 소상히 게재한 졸고 참조).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해 열쇠를 맡기시며 「매고 푸는」사명을 주셨다. 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런 권한을 주셨을까? 한 마디로 예수님은 당신의 「후계자」가 아닌 「대리자」가 필요했다. 그렇다. 예수님은 세계교회를 지속적으로 이끌 「하늘이 준 카리스마」가 매 시대마다 필요함을 알고 계셨다. 중심, 푯대, 보루의 역할을 할 절대적 리더십이 언제나 교회에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인간이 걸핏하면 분열하는 특성을 갖고 있었기에 「구심점」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를 주셨다. 그래서 교황직을 세우셨다. 현실적으로 오늘날 각 교회 교파들이 서로 자신만 옳다고 주장하면서 반목하는 것을 보면 이런 일치의 제도적 장치가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절감하게 된다.예수님이 세우신 교황직은 인류를 위해, 우리를 위해, 나를 위해 있는 것이다. 교황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음성이 되어 주시며, 예수님의 사랑이 되어 주시며, 우리가 영적 및 윤리적으로 서 있어야 할 삶의 바위(petra)가 되어 주신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를 「종들의 종」(servus servorum)이라 부른다.2000년이 흐르는 동안 교황직을 둘러싸고 교회 안팎으로 박해, 방해, 반대 등이 끊이지 않았다. 때로는 크고 작은 스캔들도 있어 왔다. 그리고 늘 독재, 타락, 경직의 유혹이 도사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당신 성령의 돌보심으로 교황직을 영원히 보전하고 계신다. 교회와 교황은 온 인류를 위해 포기할 수 없는 하느님 사랑의 성사(聖事)이기 때문이다.베드로 대성전 안에 안치된 베드로의 무덤 위 처마에 새겨진 라틴어 대문자 글씨의 비문(碑文) 『Tu es Petrus et super hanc petram aedificabo ecclesiam meam』(『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은 앞으로도 영원히 유효할 예수님의 약속을 떠올리게 해준다.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마태 16, 18).

입력일 2005-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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