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문인들이 펼치는 신춘수상 릴레이

[가톨릭 문인들이 엮는 신춘수상 릴레이] 8. 봄편지

봄이여당신의 이름은 오늘 나에게 이데아로 등장합니다.나에게 있어 당신의 이름은 누구나 부르는 혹은 당신이란 존재를 호칭하는 대명사는 결코 될 수 없습니다. 내가 부르는 당신의 이름은 적어도 나와의 거리를 최대한 단축시키는 결속의 빛나는 사슬같은 것이어야 합니다.「주여!」하고 부르는 이름이 하느님의 이름이 아니듯 봄이여 당신의 이름은 나에게 자아의 존재를 인식케 하는 개념 혹은 영원한 이데아 입니다.봄이여지난겨울은 괴로웠습니다. 우선 당신의 존재가 덥히어 볼 수 없으며 우둔한 나는 늘상 당신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어둡고 암담했습니다. 당신이 안 보이는 세상의 그 어디로 내 삶을 지탱할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늘은 흐려 있었고 나무들은 재 가루처럼 원한을 풀어내는 바람의 성난 손에 잡혀 떨고만 있었습니다.다만 살아 있는 건 바람뿐이라는 두렵고 외로운 지각 속에 겨울이 나를 묶어 두고 있었습니다.나는 만나고 싶었습니다. 당신의 존재를 보이지 않는 당신은 믿을 수 없었고 더욱 나에 대한 사람과 믿음과 약속 그 모두는 먼 곳의 숲에서 들려오는 새의 노래 소리처럼 아쉬운 것이었습니다. 아쉬우면서 새의 노래가 영혼의 울림을 터 주듯 아쉬우면서 새의 노래가 막연한 행복감과 희망과 아름다운 추억을 연상시켜 주는 거와 같이 당신은 내 머리 속에 떠오를 때 마다 청정한 행복감을 안겨 주곤 하였습니다. 봄이여.겨울의 내 고통은 당신을 찾고자 하는 그 괴로운 탐색에 있었습니다. 당신의 존재를 확인하려 하는 더욱 우리를 사랑에 변함없는 연속성에 대해 알고자 고민했던 나의 허약한 감수성과 부족한 인식이 내 고통의 원인이었음을 압니다.나는 물었습니다. 『너는 아느냐? 봄의 집을-. 봄은 살아 있더냐? 봄은 어떤 모습으로 무얼 먹고 무슨 말을 하며 누구와 같이 있더냐?』미친듯 황량한 벌판을 찾아 나가 외쳤으며 하늘 바람 별 나무에게도 봄의 소식을 물었습니다. 모두 당신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두의 대답이 당신이 살아 있으며 나를 향해 지금 가까이 오고 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 순간 내 영육을 억누르던 돌덩이 같은 고통의 무게는 한날 새의 깃털같이 가벼운 것으로 풀려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가벼움을 사랑했습니다. 그 암담한 회색으로부터 탈출되는 구원과 평화. 그랬습니다. 그 가벼움은 평화였습니다. 둔탁한 욕망의 군살이 빠져나가고 사물을 명징하게 바라볼 수 있는 맑은 영혼 곧 당신의 실체를 느끼는 진정한 인식만이 그 가벼움의 의미가 되어 주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벼움을 인정하는데 결코 짧다고는 할 수 없는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과 그 믿음을 부저하고 싶은 인간적인 불안이었습니다. 그 두 가지의 원인은 내안에서 강렬한 압력을 가지고 다투었고 나는 그 어느 쪽도 편들 수 없이 모두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이 겨울 안 그 죽음 같은 무덤 안에 생명을 가지고 숨 쉬고 있음을 경험으로 말합니다. 겨울 다음에는 반드시 당신이 오게 되어 있는 확실한 계절의 추이를 상식의 기초로 알고 있는 것이지요.그러나 세상에는 그 무엇보다도 명확한 신(神)에 대한 부활도 부정하는 사람이 행복하게 살고 있듯 내가 당신의 도래를 염려하는 것은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사랑이라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믿음으로 나는 고통과 괴로움으로 부터 탈출할 수 있었고 나는 아지랑이 같은 환상적인 가벼움으로 당신을 겨울의 공간에서도 부딪히곤 합니다.봄이여.사랑은 혼자 있어도 기쁩니다. 왜냐하면 당신이야말로 당신의 모습을 나에게 보이기 위해 겨울의 그 캄캄한 터널을 통과하며 오고 있으니까요.지난겨울의 나의 고통은 나 혼자만 힘든다는 자기애의 몰두였습니다.새로운 부활과 새로운 언어로써 사랑의 말 생명의 말을 준비하는 당신을 볼 수 없었던 나의 눈은 또 한 번 가당찮은 실수를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자기애의 몰두」. 실상 사랑에 있어 이것은 마땅히 단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을 가진 사람은 영원히 사랑 할 수 없으며 영원히 사랑 받지도 못할 것입니다.사랑은「나」를 부수고「나」를 바치고 승화시킬 때 비로소 풍부해지며 사랑의 주인이 되는 것을 당신은 빈틈없는 척학성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연을 이해하는-그것은 바로 신(神)을 이해하는-사랑의 현대성입니다. 시야를 넓혀야지요. 봄이여 내가 사랑하는 찬미하고자 하는 위대한 이여.당신은 지금 내 앞에서 있습니다. 만상(萬象)의 웃음기를 띄고 임리의 말씀으로 내 뜰 앞에 다가서서 내게 굳건한 두 손을 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봄이여 나는 이 만남을 체험이나 경험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운명으로-운명이라고 말하려 합니다.릴케가 루우에게 바친 노래처럼「너극 이슬이다 어머니다 아침이시다 운명이다」라고 찬미한 것처럼-.

발행일 1983-03-13 제1346호 8면

[가톨릭 문인들이 엮는 신춘수상 릴레이] 7. 새해 아침의 기도

한 방 가득 눌러앉은 어둠들이빛으로 되살아나는동항 사랑이 선교회에는한키씩 자라던 어둠의 씻겨水深깊은 마더 데레사의 숨결이청남빛으로 흐르고 있었다버림받은 者 예와서 있고고통속에 슬픈者 예와서 있고病들어 의지할곳 없는者 예와서뜨거운 심장 맞부비며 살과피 나눈다.아-돌아다 보며나 부끄러워라.속속들이 비워진나 부끄러라잔 마다 채울수 없이아멘 이라 아뢰인나진실로 부끄러운 삶 일래라.-뜨거운 한가운데에 서서-주여-. 새날이 밝아 오는 아침입니다.동항 사랑이 선교호를 찾아간 무거운 발길을 멈추고 조용히 당신 앞에 무릎 꿇고 속속들이 곪아서 쓰리고 아픈 죄스런 마음을 고스란히 펼쳐 놓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새 아침입니다.어쩌면 내 이웃 안에서 사람이라는 낱말을 가장 많이 남용하면서도 정당한 사랑의 값을 치루지 못하는 이 위선의 꺼줄을 벗지 못하고 살아가는 자신이 진실로 부끄러워지는 오늘의 이 눈물은 마치 탕자의 피울음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자비로운 손길로 눈물을 닦아주시고 관용과 은총으로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뜨거운 속마음이기에 내 아픔은 더 진하는 듯 하옵니다.그러나 주님-.이 아픔이 아픔만으로 머무르지 않는 삶의 거룸이 되어 당신 뜰에 피어나는 하나의 생명의 꽃이게 하소서.그리하여 내가 당신이 가꾸는 꽃이라면 당신이 가꾸는 형제만큼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게 하시고 한목숨 다하도록 오직 당신께 찬미와 영광을 돌릴 수 있는 내가 되게 하소서.그러나 만일 당신의 무관심 속에 방치된다면 나는 녹이 슬어 못쓰게 되는 연장처럼 당신들에서 시들어 죽어 가는 쓸모없는 잡초에 불가할 것이 옵니다.그러므로 주여, 오직 당신 안에서 시들지 않는 향기로운 생명의 꽃이게 하시고 가지마다 푸르른 선의로움으로 내이기의 위선을 벗는 내가 되어 이웃 안에서 찬바람을 막아 주는 울타리이게 하소서.그리고 또한 당신의 수족이 되어 당신 자비에 손길이 떠나지 않는 가운데 새롭게 태여나게 하소서.내 일찍이 눈을 가졌으되 앞을 볼 줄 몰랐고, 내 일찍이 손을 가졌으되 당신의 쓰임새 있는 도구로서 쓰여지지 못하였고, 내 일찍이 사랑으로 빚어진 당신 모습대로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인간의 값은 다하지 못하는 부끄러운 몰골로 오늘을 살아가는 것을 뼈아프게 뉘우치나이다.그래서 나의 나날은 어둡고, 그래서 나의 방황은 무분별로 당신의 가슴에 대못질 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중죄인이 옵니다.그러나 당신은 무슨 일로 이 순간을 자비와 사랑으로 지켜 주시나이까.당신이 뿌려 주신 이 생명의 텃밭에 목숨 꽃으로 심겨진 이 귀중한 목숨을 오직 값하여 되물려 드릴 수 있는 내가 되게 이끌어 주소서.그리고 초근(草根)의 뿌리마다 아려드는 이 아픔만큼, 당신 뜰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는 이 연약 하고 무례한 나의 나날을 책망하여 가늠하게 하여주옵소서.바람이 붑니다.살갗마다 도려내는 아픔을 안고 영혼의 피울음이 되어 흐느끼는 내 안에 입고 있는 매찬 바람이 붑니다.지금 내 영혼은 처소를 잃고 성전 밖에서 선회하는 바람으로 웁니다.그 처절한 울음을 되 반복하는 내질긴 죄악의 이기를 탓하여 살펴 주소서.그리고 당신 뜰에 시들지 않는 영원한 꽃으로 내일일 지탱하게 하여주소서.당신을 떠나서는 한시인들 살 수 없는 목숨이기에 보살펴 모가 닳도록 쓰여 주소서.그리고 뼈아픈 고통 속에 건강한 삶을 찾을 수 있고, 치욕의 쓰라린 채찍 가운데서도, 당신을 증거 하는 영광의 순교가 되고, 순명하며 불사를 수 있는 내 신앙의 현주소를 확인하게 하여주소서.아픈 발자국 징으로 박혀 오는 일상의 나날 속에 충치처럼 아파 오는 이 삶의 반점 위에서 다시는 더럽혀지지 않는 굳은 결심으로 자아(自我)를 확인하게 하소서.그리하여 다가온 새해에는 내 질긴 이기대로 살지 않고 오직 겸손 되어 주님의 뜻에 맞는 내 생활로 찬미와 영광을 돌릴 수 있는 내가 되게 하여 주시고, 성 프란치스꼬의 기도문을 내 생활에 옮겨 실천하게 하여 주소서.묵은 한해의 어둠을 벗고 새롭게 밝아 오는 새아침, 새롭게 하소서.

발행일 1983-02-27 제1344호 8면

[가톨릭 문인들이 엮는 신춘수상 릴레이] 6. 가짜 신부

이런 추운 겨울만 돌아오면 난 신부 아닌 신부가 되어야 하는 웃지 못 할 일로 수난을 겪는다.난 원래 양복 입기를 싫어한다. 와이셔츠에 넥타이 매는 것은 더더욱 싫어한다. 그러나 어쩔수 없는 경우엔 양복을 입을 때가 있다. 좀 괴롭지만 말이다. 가령 학교에 큰 행사가 있다든지 아니면 특별한 손님 때문에 외출을 해야 할 때는 어쩔 수가 없다. 그래도 넥타이를 매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여름이면 흰옷、겨울이면 검은 옷 이것이 내 교복이나 다름이 없다. 그런데 문제는 여름이 아니라 겨울에 있다. 와이셔츠를 안 입으니 자연 티셔츠를 입는다. 그것도 때가 덜타는 검은 것으로、까만 양복에 목을 가리는 까만 티셔츠、까만 테의 안경、까만 구두、겨울 나들이는 온통 까만 것 투성이다.몇 년 전 일이다. 인천에 있는 성 바오로 서점에 책을 사러 간적이 있었다. 책꽂이의 책들을 한참 뒤적이고 있을 때였다. 얼굴이 아주 곱게 생긴 수녀님 한분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안녕하셨어요. 신부님』그 수녀님의 너무나도 엄숙하고 진지한 자세에 난 그만 얼결에 그 수녀님의 인사를 받고 말았다.『예、안녕하셨어요. 수녀님』졸지에 신부가 된 나는 책도 못 산 채 그 서점을 빠져 나오고 말았다. 난 사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그 수녀님이 왜 나를 신부로 착각 했는지 몰랐다.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을 즈음 어느 날이었다. 서울에 볼 일이 있어 전철을 탔을 때였다. 부천에서 탄 전철이 영동포 쯤 갔을 때였다. 대학생인 듯한 처녀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안녕하셨어요.』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속으론 나를 아는 사람이니까 인사를 했겠지 하며 나도 그녀를 따라 고개를 끄덕이었다.『죄송하지만 어느 본당에 계셔요』그때서야 이 사람이 어느 성당 모임에서 날보고 인사를 했구나 하고 생각했다.『예、소사본당에요. 아가씨도 성당에 다니시나요?』내 말에 그녀는 활짝 웃어 보이며 자기의 본명이무어며、어느 성당에 다닌다는 둥、아주 친절하게 대답을 해주었다. 몇 마디 되지 않는 말이었지만 그녀 덕분에 목적지인 서울역까지 금방 오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내릴 무렵 이 처녀가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신부님이 계시는 본당은 참 재미있겠네요. 신부님이 퍽 재미있으니까요.』그러자 전철 문은 열렸고 그 전철은 그 처녀에게 해명의 시간도 주지 않고 나를 쏟아 놓고는 훌쩍 가 버렸다. 그 처녀가 나를 신부로 착각한 이유 역시 나는 몰랐다.얼마 후 학교에 졸업식이 있게 되었다. 내 체면도 체면이지만 학교에 오시는 손님들도 있고 해서 난 그때도 까만 옷에 까만T셔츠를 입고 갔다. 그때 어느 선생님 한분이 이렇게 말을 했다.『어마! 선생님도 양복을 다 입으시네요、그렇게 입으니까 꼭 신부님 같아요.』『예? 신부님?』『예 정말 신부님 같아요.』그때서야 난 서점에서 수녀님과의 마남과、전철에서 만난 어느 처녀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그 후도 난 계속 그 옷을 입고 다닐 수밖에 없는 사정 때문에 길에서나 아니면 여러 모임에서 신부 아닌 신부로 오해를 받을 때가 많았다.얼마 전에 가정 사정으로 정들었던 고향 같은 집을 두고 전에 살던 동네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갔다.헌 집을 고쳐서 가는 바람에 집사람과 나는 적잖은 곳을 들었다. 그 덕분에 집사람은 어깨가 쑤시니、머리가 아프니 하는 바람에 매일 저녁 퇴근길에 약국에서 쌍화탕을 사와야 만 했다.그러던 요 며칠 전에 역시 까만 옷을 입고 까만 T셔츠를 입고 외출을 하고 집으로 올 때 그 약방에 들러 쌍화탕을 사오게 되었다.『안녕하세요. 쌍화탕 하나 주세요.』그러나 약사는 쌍화탕을 줄 생각도 않고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리곤 그 여 약사는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혹시、신부님이 아니세요?』『신부요?』『네、천주교 신부님이요.』『천만에 말씀입니다. 신부님이라뇨』하고는 난 쌍화탕을 빼앗듯 받아 들고 약국을 나와 버렸다. 이 모든 것이 다 검은 옷을 입고 다니는 탓이리라.그렇다고 옷을 벗고 다닐 수도 없고 또 이 가난한 시골 선생이 철철이 양복을 해 입을 수도 없는 처지고 보면 난 해마다 신부 아닌 신부가 되는 수난을 겪어야 할 수밖에 없다.그러나 이상하게도 요즈음 그 옷만 입으면 저절로 내 자세가 숙연해지고 엄숙해짐은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요즈음 세상이 하도 험해 가짜가 많다 보니 가짜 신부도 있다고 어디서 어렴풋이 들은 적이 있었다. 나 같은 사람을 가짜 신부라고 하는지는 몰라도 이놈의 세상、다른 건 다 가짜가 생기더라도 신부만은 가짜가 있으면 안 되겠다.피 흘린 순교자의 넋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아무리 가짜가 판을 치는 세상이라 하더라도 가짜 신부는 생기지 않아야겠다.

발행일 1983-02-13 제1342호 8면

[가톨릭 문인들이 엮는 신년수상 릴레이] 5. 약속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며…/지요하

水兄.안녕하신지요. 새해 인사가 너무 늦었읍니다. 금년도 벌써 1月 한달이 뉘엿뉘엿 서산마루에 기우는데 나는 무얼하느라고 이 제사 당신께 새해 첫 인사를 드리는지 모르겠읍니다. 지난해 늦가을, 아니면 초겨울이던가요, 당신과 감격의 해후(邂逅)를 하였을 때, 앞으로는 자주 자주 소식을 드리겠노라 나 스스로 힘껏 다짐드렸던 그 약속을 식언(食言)이나 하듯이 허물고 또는 기피해온 것도 같아 정녕 죄스럽고 부끄럽고 웬지 마음이 아프기도 합니다. 어쩌면 내 정열과 능력의 한계, 감성과 언어의 빈약, 주위환경의 불일치와 게으른 천성이 부끄럽고 두려워, 차라리「숨고 싶음」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읍니다. 그리고 마음이 아픔은 내가 요즘 들어 약속이라는것, 약속의 참 의미와 가치들에 대해 깊이 생각을 기울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읍니다.水兄.작년 말경에 나의 연로하신 아버님께 불행한 일이 있었지요. 골수염이라는 우환에 발가락 하나를 도죽맞으신 일이었읍니다. 내 아버님께서는 절친한 벗을 삼으셨던 술(酒)과도 석별을 하시고 무려 두달가량이나 벼원엘 다니시면 여간 고생아니셨읍니다. 그런데 그때 매일같이 병원에 다니셔야 하는 아버님의 걸음을 여러 교우들이 번갈아가며 대신해 주었던 것을 나는 잊지 못합니다. 교우로서의 정, 그 진진한 실감같은 것을 나는 잊을 수가 없읍니다. 나는 그때 이미 옛날에들통나 버린 나의 빈궁(貧窮)을 우기로하여 오토바이를 가진 교우들을 차례로 호출해 대었던 것입니다. 내일은 누구, 모래는 누구 하는 식으로 일방적으로 순서를 짜서 약속을 받아놓고는, 그 약속의 이행상태를 조금은 음흉하게, 말하자면 체크를 하곤 했던 것이지요. 오토바이를 가진, 또는 탈 줄 아는 교우들에 대한 부러움과 고마움을 가슴에아로 새기면서 말입니다.그런데 나는 교우 아닌 다른 친구한테도 더러 신세를 지곤 하였는데, 어느날 후배 한사람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읍니다. 난느 진작부터 그의 여러가지 부탁들을 들어주고 도와주는등 그와의 약속을 한가지도 어긴 적이 없는데 그래서 그에게도 부탁을 했던 것인데, 그는 12시까지 오기로 한 약속을 방바닥에 파묻어 버려 나로하여금 끝내 3천원의 택시비까지 지출케 만들고서는, 나중에 나로부터 나의 실망과 낭패들을 얘기 듣고서도 그럿에는 아랑곳도 않는 체로『글쎄, 미안하다』는 것이었읍니다. 그리고는 고작한다는 소리가『몸이 좋지 않아서 오전 내내 방바닥신세를 지며, 다른 사람부르겠지, 하고 생각 하였다나?.』그렇게 태연히 말하는 것이었읍니다. 나는 섭섭함을 지나 어이가 없고 분노와 증오심마저 끓어올라 오랫동안 비장(秘藏)해 두었었던 나의 험구(險口)를 아낌없이 드러내버리고 말았읍니다.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에게 비난을 퍼부어대는 나에게 비난을 퍼부어대는 나의 마음보가 우선 뻔뻔스럽고 일방적인 것이 아닌가, 떫은 의심을 풀었었읍니다. 그런데 나는 나의 오종종한 이기시뫄 빈궁이 치졸하게 느껴지고 혐오스러워 그에게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어떤 절망같은 것, 확실한 하나의 좌절감 때문에 그런 것인지도 모릅니다.水兄.내가 왜 이 고귀한 지면을 빌어 지극히 사소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지 이상한 감이 드시겠지요. 혹 마음이 언짢으실지도 모르겠읍니다.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냐 하면, 나와의 그 약속을 망실해 버리고도 미안해하지 않은 그 사랑으로 하여 나는 나자신을 돌아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그 사람은 보이지도 않을 이 지면을 이용하여 그를 계속 비난함으로써 내 마음의 무엇을 위무하고 해소하려는 뜻은 추호도 없었읍니다.나는 우선 그 사람 나름대로의 사정때문에 어쩔수 없었던 그 약속의 망시를 조금도 관용하지 못하고 내 사정만을 앞세워 험구를 드러내었던 나의 소졸함을 많이 반성하였지요.그리고 가만히 나 자신을 돌아 보았읍니다. 나는 과연 어떠한 마음 자세로 사람들과 약속을 하고, 또 어떻게 그 약속들을 지키며 살고 있는지…. 내 지나온 삶의 노정(路程)안에 더불어 있는 온갖 형태의 크고 작은 수많은 약속들을 하나하나 애써 떠올려도 보았지요. 그런데 갑자기 자신이 없어지고 통렵히 무서워지더군요. 나와 더불어 있는 수많은 허술한 약속들과, 약속들의 망심과 파괴…심지어는 수년전에 서울에서 외상술값 떼어먹은 일까지 떠올라 미치게 괴로와지더구요.그러나 무엇보다도 두려운일은, 나로서는 하찮은 약속이라도 상대방에게는 그것이 더없이 중요한것일수도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거의 망각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이었읍니다.나의 이같은 허술한 삶이 우리 사회의 깊은 불신, 또는 체념의 진구렁과 사이좋게 연대하고있는건 아닐까하는 의구심의 대목에서는 진땀이 나더군요.그동안 우리 국민들을 수없이 좌절케하면서 불신의 진구렁으로 내몰아 거의 불감증환자로도 만들어 버렸던 거짓정치의 공약(空約)들…그 무수한 약속의 파괴들이 벌떼같이 떠오르며 필경은 그것들과 나의, 또는 우리들의 분명하지도 철저하지도 못한 삶의 모습이 결코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생각마저 왕왕거려 왠지 나를 더욱 슬프게 하더군요.水兄.나는 요즘들어 가끔 종교는, 특히 우리교회는 거대한 약속의 우람한 요람이라는 생각을 하곤합니다. 참으로 많은 것을 우리에게 약속해주셨고 그 약속들을 지켜주고계시는 하느님의 모습인 교회…그래서 차라리 약속의 모습인 교회가 아니겠는지요. 신앙이라는 것은 따지고보면 주님과의 약속을 향해 끊임없이 확인하고 실천하며 나아가는「약속행위」라는 생각이 듭니다.그리하여 나는 내가 연초에 하느님께 드렸던 최초의 기도를 간략히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맺을까합니다.『주님, 올해부터는 모든 약속을의 아름다움을 더욱 사랑하며 살겠읍니다.주님과 제 이웃들과 그리고 지 자신과도 좋은 약속들을 하고, 힘껏 실천하며 살 것을 약속드리겠읍니다…』水兄,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발행일 1983-02-06 제1341호 8면

[가톨릭 문인들이 펼치는 신년수상 릴레이] 4. 봄을 위한 편지/정두리

니꼴라오 神父님, 新春이라는 말을 해마다 주저없이 쓸 수 있음은 늘 희망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심 탓이라 생각 합시다. 굳이 새봄이라는 그럴듯한 기다림의 단어를 미리 부려놓고 아직도 긴 겨울을 진력 낼 것은 무엇인가 조금은 우습기도 합니다. 神父님께서 보내주신 연하장을 펼치면 멋진 가로수, 설경의 아름다움, 1백년 이상되는 골동가구가 있는 房, 분홍빛 뺨을 가진 소녀들, 항상 기도 중에 만나 뵐 수 있는 神父님의 따순 사랑의 마음이 사각봉투 속에서 앞다투어 일어나서 걸어 올 것 같습니다.「겨울의 숲속을 바람이 목동처럼 눈송이들을 몰고간다많은 전나무는 이제곧 경건하게 촛불로 밝혀질 것을 예감하며귀를 모은다. 하얀 길을 향해어느새 가지를 뻗치고바람을 막으면서 그 영광의 하룻밤을 향해 자란다」고 한 릴케의 詩가 겨울의 아름다움을 빛내고 있읍니다. 지난 해 11月부터 시작한 詩集이 얼마전에 다 꾸며져 나왔읍니다. 詩를 쓰는 것, 그것은 제게 기쁨보다는 분명히 고통쪽인 것 같습니다. 만족스러운 詩를 쓰고자 하는 욕심이 대로 곤두박질쳐서 덜렁 결함 덩어리로 남겨져 있음을 봅니다.「詩人이 할 수 있는 가장 건설적인 일은 꿈꾸는 것이다」하였던 어떤 詩人의 글이 생각 납니다.올해도 모든 이의 마음속에 사랑과 평화를 소망하는 불씨가 고루 나누어졌으면 좋겠읍니다.벌써 지난해가 되는 소록도여행이야기를 하겠읍니다. 녹동 선창가에서『어이』하고 손흔들어 부르면 마주소리치며 대답할것같은 가까운거리에 섬은 있었읍니다. 선입견이 평범하지 않았을뿐, 성당과 교회 법당이 갖춰있고 일렬로 세워진 고만고만한 집들, 민사지대의 테니스장에서는 건강한 사람들의 웃음소리, 라켈에 부딪는 불소리가 여느 동네와 같은, 그러나 무섭도록 조용한 마을은 삭아지고 있었읍니다. 육체의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야하는 이들에게 그토록 아름답고 풍성한 수목들을 어떤 은혜입니까?자그만 성당에서 만나본 교우이자 주민인, 나이를 알수없는 한 아저씨는『선생님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하셨어요. 두손을 마주잡고 있는 그에게 얼핏 눈길을 주었을때 그의 손가락열개는 제대로이지 못했읍니다. 그가 느낀「감사함」은 무엇이었을까요? 「안락함」과「영달」이 아니라면「살아있음」을 느낌일까요? 아무 소용없는 제감상주의마저 열등하게 생각되어지던 참으로 부끄러운 하루였읍니다. 막배를 기다리며 백사장에서 저물어가는 바다를 바라보았을때, 이 쪽에서 저쪽으로 풍덩 자맥질하던 망둥이를 보았고, 그향기가 천리간다는 그야말로 놀랄수 밖에없었던 지독한 향기를 뿜던 나무를 보았고 또 무엇을 보고 알았어야 했을지요?여차직하면 냉정하게 화를 내거나 돋구고, 보이지 않게 미워하며 뚜렷한 支柱를 붙잡지 못하고 무분별이고 싶은 저자신을 똑바로 알았어야 하는것인지도 모릅니다.꽃시장에서 산수유꽃을 한묶음 샀읍니다. 잔잔한 매듭을 가진 이 꽃은 잎보다 꽃이 먼저 피어 봄의 전령같아서 좋아 합니다. 원추리라는 이름의 야생꽃도 새로이 좋아하게 된 꽃 입니다.이 세상에는 아직도 우리가 모르고 있는 많은 아름다움이 있어 눈물 겨웁습니다. 머지않아 봄이 시작도리것입니다. 저는 계속 앓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을 드러내 펼쳐보는 시간을 따로 갖지 않아도 늘 생활을 기도처럼, 기도를 생활처럼 이끌어 주신 뜻 감히 제것으로 느껴봅니다.神父님, 제가 新春에 하고자하는 약속은 조그만 것입니다. 아까움 없이 제나이를 버리고 부끄럼없이 童心과 어울리려 합니다. 비록 허울로 겹겹이 봉해진 마음도 아이들과 만나면서 어여뻐지고 뜨거워 질 것입니다.말갛게 안경알을 닦고, 유리창도 닦아 놓겠읍니다. 세상 끝까지 맑게 바라 볼수 있는 눈을 위해서 입니다.神父님, 오래 건강하시고 바쁘신 날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발행일 1983-01-30 제1340호 8면

[가톨릭 문인들이 엮는 신년수상 릴레이] 3. “늘 새해 새아침의 기도이게 하소서”/이규철 신부

언제나 그러하듯 새해 새아침을 알리는 보신각 종(普信閣鐘)소리는 1분1초도 어김없이 들을 수 있었읍니다만 그 여운(餘韻), 그때의 마음들이 흐름의 순리(順理)에 따라 우리의 곁을 멀리 떠나가고 있는가 봅니다.새해 새아침에 붉게 타오르던 태양을 향하여 무엇인가 모양도 크기도 색채(色彩)마저도 알 수는 없지만 새로운 것을 기대하는 소망으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기에 새해 새아침의 기도는 그래도 심도(深度)깊은 의미를 가질 수 있노라고 생각해 봅니다.낡은 것과 힘겨운 것들, 번뇌적(煩惱的)인 일들이 하루 빨리 지나가기를 원하기 때문에 새로우리라 생각되는 대지(末知)의 것들을, 기대이상의 것까지라도 간절히 소망하는 새 아침의 기도와 열망(熱望)은 살아있다는 의미로써도 감사드려야 하겠습니다.무엇을 소망한다는 것은 그 누군가가 새롭고도 마음 흡족한 것을 가져다 주리라는 소박하고 희미한 뜻도 있겠지만 나 자신이 새롭고도 생동감 있는 생활 모습을 찾아나섬이 더욱 더 값진 소망중의 소망이리라 생각합니다.살아있음(實存)의 의미와 생동감 있는 현존자(現存者)로서 우리는 무엇을 소망하고 어떠함의 생활을 갈망하고 있는지 자문자답하여 볼 때 그 누구에게나 공통분모(共通分母)를 찾을 수 있는 마음의 평화와 가정의 평화, 더 나아가 민족의 진실된 참 평화적인 일일 것입니다.평화란 타인이 가져다 주는, 만들어주는 것도 아닐 것이며 세월을 기다리면 자연히 찾아오는 것은 더욱 아닐 것입니다. 나 우리 자신이 자각(自覺)과 신념을 갖고 평화를 만드는 작업(作業)아닌 작업을 펴 나가는 그 과정에서의 모든 일들을 받아들여 해결해 나가는 일이 급선무일 것입니다.『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습니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이 세상을 평화스럽게 하려고 내가 왔다고 생각하십니까? 결토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은 분열을 일으키러 왔습니다.한 가정에 다섯식구가 있다면 이제부터는세사람이 두 사람을 반대하고, 두 사람이 세 사람을 반대하여 갈라지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반대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반대할 것이며, 어머니가 딸을 반대하고 딸이 어머니를 반대할 것이며…』(루까 12 ㆍ49~53)인간 미래를 예언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자의적(子意的)인 말씀으로서가 아니라 은유적(隱喩的)이요 비유적(比喩的)인 말씀으로서 전후(前後) 문맥을 찾아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비록 부자지간, 모녀지간이라 하더라도 진정 인간적이 때요 신앙적인 차원에서 참 평화로운 생활이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매 순간의 고통과 핍박(逼迫)까지라도 감수 인내하는 예언자적이요, 선구자적인 마음으로 평화를 찾는, 만드는 일에 앞장서야 되지 않겠습니까?우리의 오늘 이 현실, 진실된 평화를 찾기란 그리 쉬운 세태(世態)인 것 같습니다.우리가 평화를 누리려 한다면, 안정과 고요함을 갖기를 원한다면, 오늘의 이 말못할 군상(群像)들을 향해 나의 모두를 내 놓을 때, 믿음으로 순간순간의 고난과 역경을 승화(昇華)시켜 나갈 때 진정한 평화를 얻을 수 있다 하겠습니다. 참 평화는 무엇을 의미하고 있겠습니까? 거짓 평화도 있을 수 있는 인간의 모임이요 세태입니다. 여러 의견과 견해를 점차로 바꾸어 낡고 썩어가는 것을, 더 나아가서는 좋다는, 그럴듯 하다는 이유만으로 버젓이 서 잇는 치밀한 조직외 부산물과 아름답다 못해 비위를 거스르게 하는일들, 힘 잇는 사람보다는 힘이 약한 사람들에게 부담과 장애를 주는 일이라면 천천히 또 조용히 붕괴(崩壞)시키며 정화(淨化)시켜 나가야 하겠습니다.평화의 추구가 한날 자신을 위한 몇몇 사랑만을 위한, 더 나아가서 힘있는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라면 불안하고 위협을 느낀다 하더라도 꿈을 가지고 오늘과내일을 직시(直視)하며 나아가야 하겠습니다.『한 사람의 꿈은 꿈 자체로 끝날수 있지만 3백만의 꿈은, 아니 백만의 꿈이 있다면 현실이 될수 있다』고 하신헤르다 까마라 주교님의 말씀을 생활로써 받아들임이 어떨까합니다.『좋은 열매을 얻으려거든나무를 잘기르시오. 잘못 기르면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어떤 나무든지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수 있습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딸수 없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딸수 없습니다』(루까6 ㆍ43~44)새해 새아침을 맞이할때마다 무엇이든 좋고 회망적인 것을 성취(成就) 할 수 있기를, 마음이 뜻으로만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좋은 열매, 풍성한 열매를 얻을 수 있는 신앙인의 믿음과 평화의 나무를 가꾸기위해 묘목(苗木)부터 선정하는일에 새아침의 그 마음들이 담겨지기를 기도드립니다.아름다운 꿈과 부푼 꿈을 꿀수있는 특권(特權)이야말로 언제나 새해가 우리에게 주는 유일한 은총의 선물이라 생각합니다.새해 새 아침을 맞던 그마음으로 언제 어디서나 새롭고도 변화를 가져올수 잇는 생동감잇는 생각과 그 생활로써 공통관심사인 평화를 찾는, 만드는일에 진력(盡力)을 다해야 하겠습니다.주님! 타오르는 열망과 불길을 감싸주실 때 벅찬 새아침의 기도가 헛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어머니의 따스한 손길이 어린이의 복통(腹痛)을 낫게하듯이 주님의 감싸주심만이 새해 새아침의 기도가 헛되지 않으리라는 위로와 희망을 길이 간직할것입니다.

발행일 1983-01-23 제1339호 8면

[가톨릭 문인들이 펼치는 신춘수상 릴레이] 6. 고백성사

새 봄을 맞이하는 기분은 흡사 고백성사를 마친 뒤의 영혼처럼 새로운 출발과 새로운 결의를 다짐하는 것이라고 내게는 생각된다. 천주교에 처음 입교할 때 제일 매력을 느낀점이 바로 고백성사였다.사람마음 속에는 지난 잘못을 잊어버리고 싶은 간절한 희원이있다. 잊으려 아무리 애를 써도 잊혀지지 않는 잘못에 대하여는 이를 용서받고 싶은 더욱 큰 열망이 있다.지난일을 용서받는 고백성사를 통하여 죄를 통회할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한번 죽었다가 거듭나는 새삶을 살수가 있다. 이는 진실로 땅위의 생명에겐 끝없는 위안이오 하늘의 천주께는 지극한 영광의 성사가 아닐 수 없다. 무겁고 어두운 죄의 그림자를 일생 끌고다녀야 하는 고역에서 놓여 나온다는 것은 한 자유를 부여받는 것이기도 하다. 굳이 도덕적이며 윤리적, 혹은 법률상 저촉되는 죄나 잘못이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는 일생을 살아가면서 크고, 작고, 많고, 적은 차이는 있을지언정 누구라도 잘못을 저지르게 마련이다. 이러한 잘못을 용서받는 기쁨, 그것은 어디다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일게다. 또한 잘못이 크면 클수록, 많으면 많을 수록 그 탕감의 기쁨은 비례할 것이며 이는 성서속에서도 이미 비유적으로 말씀이 되어있다.죄에서 벗어나 깨끗한 마음, 깨끗한 몸으로 새 삶을 시작하여 보다 보람찬 인생을 살게 될 때 천주께선 그 사랑의 가이없음이 실현되는 것을 아시고 더 큰 은총으로 이끄실 것이다.내가 영세를 받고 맨처음 행하였던 고백성사의 감격을 나는 영 잊을 수가 없다.지금은 그 고백의 내용을 기억할 수 없지만 내가 그 고백성사를 잊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영세후 처음 고백성사였다는 이유에서 뿐 아니라 그때 그 나의고백을 보속하는 방법을 가르치신 신부님의 말씀 때문이다.성사를 보러 가기전에 스스로 성찰하여 통회하라고 하였지만 그때 나의 괴로움은 통회만으로 될 수 없는 정도였다. 나는 성사를 보러 가기전에 여러날을 망설였었다. 아무리 얼굴을 안보는 고백실이라고 하지만 거짓없이 고백할 수 있을런지가 우선 의문이었다. 자기를 미화 시키지도 변명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신부님께 여쭐 수 있을까 없을까 하는 것은 자신이 자신을 두고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우선 자기마음을 가다듬기에 여러날을 보내었다. 문제는 이것으로만 끝나지 않고 그다음으로는 보속방법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또 여러날을 고민으로 보내었다.감당하기 어려운 벌이 주어지면 어찌하나, 스스로 점쳐보니 결쿄 가벼운 벌이 내릴 것 같지는 않은데 보속을 제대로 못하면 더욱 큰 일이 아닌가…등등 갈수록 근심거리가 더해만 갔다. 그래서 며칠 동안을 할일없이 성당 주변을 맴돌며 서성이기만 하였다.오늘 내일 미루기를 여러날 한 끝에 이제는 더 이상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곧 부활절이 닥쳐 왔기때문이다. 어느날 오후 아주 마음을 단단히 먹고 고백실을 찾아갔다.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간신히 누르고 고백을 하였다. 그때 나의 몸과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을만큼 떨리고 있었다. 마침내 고백이 끝났다. 그리고 침묵, 침묵속에 나는 숨을 죽인채 기다렸다.정녕 어떤 채찍이라도달게 받게하소서마음으로 외며.칸막이 저쪽에서 조용한 음성이 들려 왔다.『형제여, 당신의 잘못은 용서받앗오. 천주경을 외며 묵상하시오』나는 마치 철퇴로 얻어맞은듯 비틀거리며 고백실을 나왔다.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토록 여러날 여러밤을 고민한 그 잘못이 단지 천주경 한번으로 보속되다니……인간의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이야 말로 천주의 사랑의 율법, 온유의 뜻이 슬기로운 사제의 입을 빌어 표현된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었다.그때 겁을 먹고있던 나에게 무서운 벌이 주어졌더라면 나는 천주는 노하신 천주, 두려운 천주를 접하였을지언정 사랑의 천주를 알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천주경 한번이라는 가벼운 보속방법은 그 어떤 벌보다도 사실 나에게는 더욱 충격적인 것이었다. 아직 성사를 보러 가기전의 나의 모든 괴로움과 통회를 낱낱이 헤아리신 뜻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의 이 이야기가 지나치게 아전인수 (我田引水) 격으로 드릴는지 혹은 우연에 자기류의 해설을 붙여 생각한 미신적 사고라고 지적 당할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로인하여 나는 크게 깨우친바가 있었다.즉, 내가 학생들을 가르칠때나 집에서 아이를 나무람해야할 때 나의 첫번째 고백성사에서 받은 감명을 늘상기하곤 한다. 그리하여 혹 아이들에게 잘못이 있을 때 비록그 잘못이 크다할지라도 뉘우침이 그에 못지않게 클때에는 가벼운 훈계를, 반대로 아무리 잘못이 작은것이라 할지라도 고의적이거나 뉘우침이 없을때는 큰 꾸지람을 하는 지혜를 터득하였다 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 고루 베풀어지는 고백성사가 맞이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묵은 해의 근심, 묵은해의 구차함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설계로 시작하는 삶이 거기에는 있기때문이다.참말이지 누구에게나 새봄이 찾아온다는 것은 감사하여 마지않을 일이다.더욱이 지난날이 회한과 슬픔으로 젖어 있을때는 더말할 나위도 없다.나처럼 항상 잘못투성이로 살고있는 사람에게 있어 새 봄은 실로 감격스러운 은총이다. 이봄을 더욱 감격의 해로 뜨겁게 살기위하여 나는 고질의 게으름을 탈피하고 자주자주 고백성사를 행하여야 하리라고 스스로 타이른다.

발행일 1981-03-08 제1245호 8면

[가톨릭 문인들이 펼치는 신춘수상 릴레이] 5. 신탁에 의한 주님 체험을

대부님. 온종일 까닭없이 서성대기만하던 하루가 저물고 벌써 냉한의 밤이 이렇게 깊습니다.이밤에 대자는 다시 한번「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면서 이 서툰 편지를 대부님께 띄웁니다.주님 날개의 서늘한 그늘아래 이밤도 그렇듯이 신락(神樂)에 취해 계실 공경하옵는 대부님.실로 15년만의 통신이 요해후라서 조금은 어색하고 서먹한 기분으로 우리가 주고받는 대화의 진폭을 대부님은 천상에서 더욱 정확히 간파하셨으리라 믿습니다.「지척이 천리」라는 속언 그대로 내쳐 격조한 나날을 무신으로 일관해 온 아들하고도 긴 세월이었읍니다.그탓은 오로지 저에게 있읍니다. 그때 흑석동에서 보다 성의있는 탐문을 이틀만 더 계속하였더라면 두분 유족을 보다 가까이 혈육처럼 대할수가 있었을 것을…생각하면 그때 그무례를 영 씻을 길이 없읍니다.일점 혈육이던 자제분이 대학을 거쳐 지금은 미국에서 자녀랑 두고 국위선양에 일의를 담당하는 요직에 계신다니 비록 사제성소의 특은은 아니더라도 대부님의 생전소망이 반이나마 이룩됨이 아니옵니까.여제께서도 노리에 건강하시고 주안에 평강을 누리신다니 살아생전 고행(古行)으로 이끌어오신 성가문의 홍복이요 은총이라 믿어집니다.당신께서 기억하실 우리 모두의 마음안에 지금도 오롯이 살아 환회작약(歡喜雀躍)하시는 경애하옵는 대부님! 당신은 진실로 현대교회의 살아게신 성인이셨읍니다. 사도직이 있기 훨씬 이전에 복음을 씨뿌리는 선두주자로 방방곡곡 기산하(幾山河)를 주비며 다니셨읍니다.부귀 공명 다 버리고 성교회에 귀정(歸正)하신 당신이셨기에 남달리 간구함이 컸으리이다. 그러기에 교회입문 14년! 그 긴긴 생애를 신의 제대 앞에 새벽마다 경건히 무릎을 끓던 당신、언제나 신락 중에 환의용약하시던 대부님의 그 티없이 맑고 가식없으셨던 표정을 지금도 저는 역력히 뵈옵니다.대부님은 진정 성인이셨읍니다. 그러기에 당신은 늘 주님안에서 평화를 지니시고 그분과의 끊임없는 영교(靈交)를 통해 일취월장 성화의 길로 나아가셨읍니다.그러한 당신이겼기에 세인이 그토록 무서워하는 죽음의 강도 두려움없이 뛰어넘으셨으며. 『먹거나 마시거나 그 밖의 무슨 일을 하든 자신의 영광 위하여』(Ⅰ꼬 10ㆍ31)하실 수가 있으셨다고 대자는 지금도 굳게 믿고 있읍니다.한평생 유례없는 영성생활로 마침내 주님과 일화(一化)되어 선의 가장 높은 자리로 옮아 앉아계시는 우리 대부님.그런데 타고난 죄인인 저의 몰골은 지금 어떠합니까. 항시 신의 사랑에 압도되어 사셨던 대부님을 명명중에 뵈올때마다 이 무색하고 가엾은 자신이 부끄럽고 한스러워 견딜 수 없읍니다. 주님의 고상(古像) 앞에 자주 무릎 끓어도 보나 혼의 뿌리는 마구 폭풍앞에 나부끼는 갈대가 아닙니까. 그런데도 오늘 제안에 「정죄(淨罪) 의 비누」한방울 가진바 없으니 대부님! 지금에 와서 제가 무슨 수로 주님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으리까.한냉한 벌판에서 구원의 손도 없이 탈진(脫盡)의 고비를 넘기고 있는 제 영혼의 취약함을 대부님은 늘 연민의 눈으로 지켜보시겠지요.운명(殞命)의 그 절박한 순간까지 인간을 초극한 신앙의지로 처절무비의 고행을 감수하시던 대부님의 생애가 오늘따라 제 가슴에 무서운 채찍으로 번져옵니다.암연한 절망의 순간에서도 기도로써 신락을 쟁취하시던 공경하옵는 대부님.저간에 제가 치른 영적 위기를 낱낱이 기억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감히 무엄하게도 예레미아 선지자의 흉내를 내며 공인(公人)의 자리를 떠나 애써 종적을 감추려던 그런 무모를.아시다시피 애당호 제겐 신앙의 열정도 투혼도 없는 그런 섬약한 위인이 아니던가요. 때문에 저는 입문의 그날부터 한사코 수도와 투혼 지극한 대부님을 영적 아버지로 모셔드렸고 깨달음의 길을 함께 모색하기 수삼년을 거듭해온 것입니다.그러나 대부님 떠나신후의 저의 영혼은 계절을 타는 바람처럼 설레어 자주 흔들리고 자주 회의하면서 신역(神域)의 언저리를 배회해 왔읍니다. 이 얼마나 나약하고 민망스런 고백입니까. 어느때 다시 재가 왕국에의 자각을 얻어 현존하신 주님을 뵙게될지 그저 막막하고 안타깝고 초조할뿐 입니다.그러나 우리 공경하옵는 대부님.지난번 브라질에서의 김선생의 출현은 제게 깊은 감동과 격려와 위안을 주셨읍니다.이민생활 17년! 그 긴긴 세월을 문명에서 원시로 급전직하한 아픔을 참고、이루 필설로 형언하기 어려운 극한 상황에서도 끝내 주님을 놓치지 않았다는 이야기며、이로 인한 페부를 에이듯한 삶의 고행담에서 저는 또 한분의 수도와 투혼에 능한 대부님을 만나는 느낌이었읍니다.절대절명의 나락에서도 묵종(默從)으로 다져온 신앙의 깊이、그 깊은 속에서 울려오는 혼의 소리를 저도 한번쯤은 이 해빙(解氷)의 땅에 뿌려보고 싶습니다.온전한 헌신과 신탁도 없이 주님의 식탁에서 멀어져가는 제게 당신 가없는 통공으로 신앙의 무딘 삶을 희망안에 조명해 주시는 은혜로운 대부님!만유(萬有)가 그분 뜻 그 한뜻으로 되는것을 깨닫게 하시고 많이도 잃어버린 저의 실지(失地)를 제가 제손으로 도로 찾게 되도록 도와주시며、제게도 하루빨리 신탁에 의한 하느님의 체험을、그리고 그분이 친히 배설하신 푸진 은총안에서 참삶의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대부님、부디 대부님의 이름으로 빌어 주시옵소서.오、천상에서 이밤도 사람의 잔에 입맞추실 대부님!

발행일 1981-02-22 제1243호 8면

[가톨릭 문인들이 펼치는 신년수상 릴레이] 4. 사람값ㆍ나이값ㆍ성한값을 치르자

며칠전、초저녁에 한 여인이 길에서 당한 일이다. 잔일을 마치고 어둑어둑해서 직장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려고 큰 길을 건너는데、느닷없이 젊은 녀석 한패가 나타나 들고 있던 핸드백을 소리개가 고기를 채가듯 빼앗아 들고 내뺐는데、그냥 뺏은게 아니고 각목으로 그 여인의 머리를 내리쳐서 정신을 잃게 한 것이다.병원으로 실려간 다음날、같은 직장 동료들이 그를 찾아가、자기네들도 날치기 나들치기를 당한 적이 있음을 이야기했을때 침대에 누운 그는 간신힌 입을 열어 속에 먹은 마음을 말했다고 한다.『제가 안 당했더라도 그날 그시각 그 길목에서 누군가가 당했을 거야요. 다른 사람 대신 내가 당했거니 생각하니 누군가를 위해 내가 좋은 일 한걸로 여겨져 한결 마음이 편하군요…』그렇게 말하는 그의 입가에 맑고 밝은 웃음이 떠올랐으리라.어떻게 생긴 여인인지 나는 모른다. 한달에 얼마를 받고 일하는지도 모른다. 가난한 아가씨들에게 기술을 익혀주는 직업훈련원 여선생임을 들어서 알 뿐이다.그러나 예사로 말한 그의 한마디에서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내가 그런 일을 당했으면 어찌했을까를 따져본 것이다. 머리에 피도 안마른 불량배들의 잔인한 손버릇을 통탄도 하고 저주도 했으리라. 무책임한 그들 부모와 무능한 경찰을 탓도 했으리라. 그라나 그렇게하면 내몸보다도 내마음이 더 불편해서 밤잠을 제대로 못 이뤘을 것이고、꿈자리가 사납고 잠꼬대가 심해 주위 사람까지도 편안히 자지를 못했을 것이다.이왕 당한 노릇을 이를 간들 무엇하랴.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니、그들 어린 깡패가 언젠가는 붙잡히고 말것이요、그들이 털어놓을 속사정을 들어보면、날강도로 변한 그들의 탈선이 반드시 그들 책임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병실침대에서 고통을 참으면서『누구대신 이벌을 받는다』고 생각이 든 그는、정신적으로 도리어 얼마나 큰 위안을 받았을 것인가.1981년 올해는 유엔이 정해놓은「세계장애자의 해」이다. 심신 (心身) 장애자의 해라고 함이 옳을 것이다. 십여년전에「성한사람이 돌보자、소아마비 어린이」라는 표어를 지어 준적이 있고 지진이니、정박아니、신체장애자니、천지니、바보니하는 말따위가 정이 떨어져서、10년걸려『엄마』란 말을 깨친 아이도 있고、여러해 걸려 제나이를 왼 아이도 있다지만 그것도 나이가 해마다 변하므로 해마다 한살씩 보태주느라고 애를 먹는다고 한다. 늦게라도 뜻을 이루고 있으니 늦동이가 아닌가. 그래서 나는 이들에게 야박한 말을 피해서「늦동이」라고 불러주고 싶은것이다.나는 그러한 늦동이들을 위해 주자는 해에「심신장애자의 노래」한편을 지었다. (노래제목은「우리들의 새세상)이다)사람눈 밝으면 얼마나 밝으랴 사람귀 밝으면 얼마나 밝으랴 산너머 못보기는 마찬가지. 강건너 못보기는 마찬가지. 마음눈 밝으면 마음귀 밝으면 어둠은 사라지고 새세상 열리네. 달리자 마음속 자유의 문. 오르자 마음속 평화동산. 남 대신 아픔을 견디는 괴로움. 남대신 눈물을 흘리는 외로움 우리가 덜어주자 그괴로움 우리가 덜어주자 그 외로움.사실 말이지、사람의 눈이나 귀가 밝으면 얼마나 밝겠는가. 사람보다 훨씬 밝은 눈을 가진 짐승들이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어찌 눈이나 귀뿐이랴. 달리기나 높이뛰기도 생긴 비례대로 따지면토끼나 벼룩을 당할 재주가 없는 것이다. 길눈을 말하자면 해마다 그맘때 옛둥지를 잊지않고 찾아드는 제비가족을 당할수가 없을 것이다.이목구비를 들출것도 없이 사람이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으며 못났으면 또 얼마나 못났을 것인가. 잘살면 얼마나 잘살겠으며 못살면 또 얼마나 못살것인가.『한 평만 가지면 넉넉하고도 남을 걸 그애를 썼구나』한것은 어머어마한 땅덩이를 차지하고나서 비명횡사한 수전노 한사람의 무덤을 써주고나서상여꾼들이 중얼거린 말이었다. 그 수전노는 마음과 눈과 마음의 귀가 얼굴에 박힌 눈이나 달린 귀보다 얼마나 소중한가를 끝끝내 모르고 세상을 뜬 마음의 불구자라고 할만하다. 나는 늦동이들도 얼마든지 달릴 수 있고 오를 수 있음을 위 노래에서 가리켜 주려고 하였다.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우리네 인생살이에서、우리둘레에서 우리대신 고통을 당하고 우리대신 누명을 쓰고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먼저 뻗쳐야 한다.『안됐군…』교통지옥에서 누가 희생이 되었을 때 누가 돌림병에 걸려 생죽음을 당했을때、우리는 안됐다는 한마디로 지나쳐버리기 일쑤이다. 그러나 알고보면 그네들은 우리대신 당한 횡액이요 불우일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물며 아무죄도 없는데 뭇사랑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따돌림을 당하며 사람축에도 못끼는 수많은「늦동이」등를 생각할때 다리팔이 멀쩡하고 하루세끼 거뜬히 먹어치우는 우리네「성한 사람들」이야말로 그대들을 대할 낯이 없다. 「사람값、나이값、성한값」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지내기 때문이다. 알고보면 우리네가 빚투성이다.이솝얘기에 이런 것이 있다 한쪽눈이 먼 애꾸들만 모여사는 원숭이나라에 두눈이 멀쩡한 원숭이가 한마리 나타나자「두눈 달린병신」으로 몰려 쫓겨났다는 것이다.2천5백여 년 전 그리이스에 종으로 태어났던 꼽추 이솝이 만든 얘기가 지도를 펴보면 아시아 대륙에 맹장처럼 달려있는 한반도에도 아직껏 돌아다니니 사람사는 세상에는 예나 이제나 그런 일이 비일비재한 모양이다.

발행일 1981-02-08 제1241호 8면

[가톨릭 문인들이 펼치는 신년수상 릴레이] 3. 구라주일에 나눔을 생각하며

아직 이해 겨울을 다 살아내진 못했으나 우리는 벌써 봄을 예감할 수는 있다. 유난히 춥고 매서웠던 올겨울、몸도 추웠고 마음 또한 썰렁하기만 했던 이 겨울이 며칠 뒤에 닥칠 구정을 고비로 하여 그 카랑카랑한 날빛을 거두게 될 것임엔 틀림없다. 이 녹아 금새라도 햇쑥이며 냉이ㆍ씀바퀴 따위가 움쑥솟아날 것만 같다.그래、새해엔 날씨가 풀리는 것처런 우리의 생활도 펴이고 얼어붙었던 마음도 녹아졌으면……그래서 눈을 돌려보지 못했던 이웃을 확인하게 되고 각자가 도와야할 일、자기의 도움을 필요로하는 곳을 찾아보는 여유를 가졌으면 싶다.마침 한국 천주교회에선 금년의 사목방침으로「나눔」을 강조하고 있다. 이웃에 대한 전교는 나눔의 최상의 방법이다. 그러므로 나눔은 이웃에의 인식으로부터 출발하고 그 이웃과 관계를 맺는、또 그들을 사랑함의 구체적 실체로 드러나는 행위를 말함이다.믿으이나 사랑、돈이나 재물을 자기 혼자서만 간직한다거나 혹은 창고에 쌓아두고 있다면 그건 성경의 달란트의 비유처럼 마침내 아무것도 갖지 못함과 같다. 그것을 나누어 줄때 비로소 열달란트를 소유하는 상을 받을 것이다.우리 겨레는 옛부터 이웃과의 나눔을 소박한 생활속에 간직해 왔었다. 돌잔치、회갑연 따위의 경사 때나 이사를 하게되면 적은 음식이나마 이웃들에게 골고루 돌린 풍습이 그 하니 예이다.세찬이 있었고 복조리가 돌려지기도 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선 이러한 미풍양속이 이웃과의 단절속에 서서히 그 모습을 감추어버렸다.이달 25일은 천형의 나환자를 위한 구라주일이다. 내가 나가는 본당에서는 한주 앞당겨서 주일미사를 행했다.나환자 정착촌인 라자로마을의 주임사제 이경재 신부님이 우리 본당 신부님의 추천 신부가되는 연으로 그분을 모셔서 강론을 듣고 특별 봉헌예물을 바치기도 했다. 우리 신자편으로선 은혜를 구하기 위함이요、이 신부님으로선 자신이 돌보고 있는 나환자를 위해 도움을 청하는 일이었다.그분의 강론은 무디어진 신자의 양심을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나환자는 자기가 지은죄로 인해 저처럼 고통받는것이 아니라 다른모든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보속하고 있는 것이다.이 지론을 전제로해서 나환자의 눈썹에서부터 신체각부위의 일그러진 형상을 자작시로 읊어 주었다. 정확한 기억을 되살릴 순 없지만 이를테면 어느 누가 주지육림만 탐했기에 그 보상을 저나환자가 대신하여 저같이 입이 짓물렀으며、얼마나 많은 사랑이 손으로 악을 행했기에 저 나환자 손가락이 굽어들었으며 또 어떤 이들이 가지 않아야 할 곳만 찾아다녔기에 나환자의 발가락이 몽땅 떨어져 나갔을까…이런 탄식과 자책이 채찍처럼 계속된후 신부님은『그러므로 우리는 동정과 자비심으로 저들을 도와야하는 게 아니라 빚진 걸 갚는다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헌신적으로 보살펴야 한다』고 강론을 맺었다.강론도중에 몇명의 신자들은 의자에서 일어나 통회하는듯 두손을 모은채 고개숙여 경청하는가 하면 울먹이기끼지하는 할머니도 적잖아 보였다. 그날 저녁에 있었던 울뜨레야 모임에서 신부님께 들은 바로는 그날의 미사헌금이 지난주보다 3만원이 더 늘어난데다 구라사업을 위한 특별헌금은 주일헌금의 곱이나 되었다 한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2차헌금이 있는 날엔 으례 주일헌금은 줄어들게 마련이고 더구나 특별헌금은 미사예물의 절반에도 훨씬 못미치는게 상례였기 때문이다.이사실은 우리 교우들이 무관심과 배리의 움추림에서 기지개를 켰다는 증거이며 우리가 늘상 범한죄를 자각했다고도 짐작케 하는 일이다.나는 그 이튿날 언젠가 빨랑까로 받은 후 그냥 서가귀퉁이에 꽂아 두었던 나환자 신부의 전기「다미안 신부」(小田部胤明著) 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읽어가면서 마침 그무렵 펴들었떤 국내작가의 장편소설이 허망하게 느껴질만큼 큰 감동을 받았다. 다미안 신부의 굳건한 신심、나환자에게 기울인 사랑과 정열、그리고 나환자들의 격리지에서의 초인적인 의지와 활동은 나로 하여금 끝까지 단숨에 읽게 했다. 다미안 신부가 종내엔 나병에 걸려 그들의 진정한 반려가 됨을 볼때、사랑의 실천이 어떠해야 하며 남의 고통에 동참함의 진면목이 어떠한가를 이해하게도 된다.다미안 신부는 그 절해고도의 격리지에서 거의 만년에 이를때까지 혼자서 고군분투했다. 그가 나병으로 몸이 부자유스럽게 되자 두분의 사제와 몇분의 수녀가와서 그를 도왔다.「보물섬」의 작가 스티븐슨이 다미안 신부의 死後 이 격리지를 찾아왔다가 떠나면서 남긴 시는 과연 그의 문명 (文名) 에 값한다.문둥이의 참상을 한번 눈으로 보면 미련한 사람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리. 그러나 이들을 간호하는 수녀의 모습을 보면 미련한 사람들도 침묵중에 신을 찬양하리라!대단한 재기 (才氣) 요 깊은 통찰력과 표현력이라 아니 할수 없다. 우리는 이 시에서 버림받은 자를 위해 봉사하는 수녀를 흠양함에만 그치지 않고 하느님을 믿는 이들의 표양과 하느님을 공경하는 방법을 알게도 된다. 모름지기 가톨릭인은 믿음이 없는 자로 하여금 하느님을 알게하고 주님의 영광을 드높여야 함이 제일의 (第一義) 이다. 다시말해서 저 수녀님들처럼 모든 가톨릭인은 불우한 이웃을 외면하지 않고 희생을 감수하며 도움에 앞장서야 한다. 그럴때에 불신자들도 눈을 뜨게되고 하느님을 찾게될 것이기 때문이다.우리교회가 올해를「나눔의 해」로 정해 그실행을 강조하는 의의도 여기에 있으리라. 그 나눔의 이번 구라주일을 계기로 나환자들에게 쏠린다면 다행이겠다. 보아선 안될것을 많이 본 우리의 죄를 대신해 눈이 먼 저들에게 우리의 기도와 희생으로써 영적인 빛을 보도록 해주어야 할 일이다.날씨가 풀려 우리의 발걸음을 기다리는 나환자촌에 순례의 행렬이 이어지는 광경을 떠올려 본다. 싱그러운들녘의 봄기운이 우리의 몸을 씨어주고 그들과의 만남이 우리의 영혼을 맑게 해주리라.

발행일 1981-02-01 제1240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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