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유흥식(라자로) 추기경님이 기획하신 미술 작업에 참여하게 되어 로마에서 몇 달간 생활하며 작업할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이 주어졌다.
세계 최고의 대리석이 채석되는 이탈리아 북서부 카라라와 로마를 오가며 작업하던 어느 날, 모처럼 휴일에 근교 소도시 당일 여행을 하고 싶어졌다. 어디를 가면 좋을까 고민을 하던 중 수백 개의 지명 중 간달프라는 작은 마을의 지명이 눈에 들어왔다. 완행열차를 타고 도착한 간달프는 작고 조용한 마을이었다.
고즈넉한 분위기를 만끽하며 마을을 거닐던 중 작은 성당이 눈에 띄었다. 궁금한 마음에 안으로 들어가 보니 그간 본 적이 없었던 희귀한 성모자상을 보고 한 눈에 매료됐다. 넋을 잃고 한참을 감상하다 신부님께 양해를 구하고 촬영을 할 수 있었고, 그 성모상이 ‘신자들의 도움이신 어머니 마리아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때는 몰랐었다, 바티칸에서 작업을 1차로 마무리한 후 한국에서 추가 작업을 위해 귀국을 한 지 며칠 후, 인천 가르멜 수도원 원장 신부님으로부터 문의가 왔다. 창고에 오래된 이탈리아에서 온 성모자상이 있는데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복원할 수 있는지 한번 봐 달라는 것이었다.
다음 날 찾아가 창고 문을 여는 순간 나는 너무 놀라 주저앉을 뻔했다. 바로 간달프 마을의 성당에서 본 그 성모님이었다. 그 순간 ‘아! 로마에서 성모님이 나를 이끄신 거였구나’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성상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같은 성상 사진이나 회화적 상본이 있어야만 가능한데 나는 이 성상의 유일한 상본이 되는 마리아상을 직접 보고 사진도 찍어 뒀으니 복원이 훨씬 수월했다.
시골 성당으로 성모님께서 나를 인도하셨다고 믿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내가 고미술 복원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 그리고 우연히 들른 시골 마을에서 성당에 들어간 일 등 내게 벌어진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나는 기꺼이 복원을 맡았다. 그러나 너무도 귀중한 성상이기에 창고 같은 작업실로 옮기기 싫었다. 할 수 없이 집 거실의 소파를 내다 버리고 임시 작업실로 꾸민 뒤 성상들을 옮겼다. 너무 많이 훼손된 채 창고에서 오랜 시간 변형된 탓인지 원래 색채를 알 수 없는 부분도 있어 하나하나 차분하게 복원하여 거의 일 년 만에 완성하고 수도원에 모신 날, 신앙인으로서 나의 삶도 의연하고 충만한 시절에 접어들었음을 느꼈다. 성모님의 도우심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글 _ 고승용 (루카) 성미술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