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파멸의 위기에 놓인 이 시기에, 새 교황이 세계와 교회 내에서의 평화와 일치를 교황직의 핵심 목표 중 하나로 삼았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이다.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 출신의 종교 지도자가 된 레오 14세 교황은 지금과 같은 위기의 시기에 통합에 힘을 쏟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는 최근 재선에 성공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냉소적이고 이기적인 행보와 극명히 대조된다.
트럼프 대통령이 악의 통로가 된 것을 노골적으로 즐기는 반면, 레오 14세 교황은 선함과 연민, 용서, 사랑을 전하고자 하는 뜻을 밝혔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교의 덕목이지만, 트럼프 대통령과 가톨릭신자인 JD 밴스 부통령은 이를 조롱거리로 여기며 거리낌 없이 무시해 왔다.
성 아우구스띠노 수도회의 전 총장이었던 새 교황이 5월 8일 성 베드로 대성당 발코니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는 준비된 연설문을 손에 들고 있었다. 이는 그의 교황직이 철저히 계획되고 치밀하게 운영될 것임을 암시하는 분명한 신호였다. 이전 어느 교황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1978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선출 직후 군중에게 즉석에서 연설한 첫 번째 교황이었다. 그는 500년 만에 선출된 첫 비(非)이탈리아인 교황으로,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이탈리아어로 그들의 목자가 되겠다고 약속했다. 독일 바바리아 지역 출신의 베네딕토 16세 교황과 아르헨티나 출신의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즉흥적인 짧은 연설을 전통처럼 이어갔다.
하지만 레오 14세 교황은 준비된 문서를 낭독했다. 이는 그가 절제되고 계획적인 교황직을 지향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의 교황직이 세속 언론에는 지루하게 보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프란치스코 교황 시절, 언론은 그의 수많은 즉흥 발언과 파격적인 행보를 통해 ‘교황청과 싸우는 개혁가’라는 서사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는 많은 부분에서 사실이 아니었고, 그의 복합적인 교황직의 여러 측면을 간과하게 만들었다.
레오 14세 교황은 전임자의 개혁 노선을 이어가고자 하는 뜻을 보이고 있으며, 더 조심스럽고 신중한 접근 방식을 택하고 있다. 그 결과, 그는 언론의 눈에는 덜 띄지만, 오히려 프란치스코 교황이 시작한 개혁을 더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행보는 지루할지 몰라도, 결코 흥미롭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레오 14세 교황이 교회 내 문제에 있어서 이룰 수 있는 성과는 놀라울 수 있으며, 매우 중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대체로 종교를 전문적으로 다루지 않는 언론에는 포착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언론은 그가 트럼프 대통령이라는 ‘악의 세력’에 맞설 때만 관심을 보일 것이다.
레오 14세 교황은 미국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시카고 남부 교외 출신의 레오 14세 교황은 전형적인 ‘미국인’은 아니다. 그는 대부분의 삶을 미국 밖에서 보냈으며, 오랜 기간 선교사와 주교로 활동한 페루의 시민권을 취득했다. 그가 이중국적자가 된 이유는 자신이 봉사한 남아메리카 민중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를 더 깊이 나누기 위한 것이었으며, 동시에 자신이 흔히 말하는 ‘그링고’(gringo, 백인 외국인)가 아님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레오 14세 교황은 해외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많은 미국인처럼 미국과 그 문화, 국민, 지정학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 특히 그는 수도회 출신으로서, 지역 교구 주교와 본당 체계로 구성된 미국 가톨릭 문화와는 거리가 있다.
그는 미국 주교회의와 관련된 문화에 동조하지 않으며, 이들이 트럼프 재선에 중대한 책임(혹은 죄책감)을 진다고 보고 있다. 그는 미국교회와 연루되지 않았으며, 예언자적 정신을 잃고 초소비주의, 여성혐오, 백인 그리스도인 민족주의로 기울어버린 미국교회 주류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미국교회의 보수화 경향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후반기부터 본격화되었고, 베네딕토 16세 교황 시기에 더욱 공고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레오 14세 교황은 미국 내에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가장 진보적인 두 주교로부터 성품성사를 받았다.
1981년, 디트로이트대교구 토머스 검블튼 보좌주교는 그에게 부제품을 줬다. 검블튼 주교는 평화운동(팍스크리스티 회장 역임), 여성의 권리, 성폭력 피해자 옹호 등 진보적 입장으로 인해 일찍이 주교단에서 배제되었다.
교황은 1982년 주미 교황대사 장 자도 대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자도 대주교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미국교회를 정화하기 위해 노력하다 로마로 소환됐고 추기경도 되지 못했다. 자도 대주교는 미국에 파견된 교황대사 중 추기경이 되지 못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레오 14세 교황이 이러한 진보적 거물 주교 두 명에게 서품을 받은 것은 일종의 ‘아이러니한 주님의 섭리’이다. 또한 흥미로운 사실은, 검블튼 주교가 디트로이트대교구에서 모든 공식 직책에서 해임된 후 빈민가의 가난한 본당에서 사목활동을 이어갔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본당의 이름은 ‘성 레오’(St. Leo’s)였다.
글 _ 로버트 미켄스
1986년부터 로마에 거주하고 있으며, 40년 가까이 교황청과 가톨릭교회에 관해 글을 쓰고 있다.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11년 동안 바티칸라디오에서 근무했다. 런던 소재 가톨릭 주간지 ‘더 태블릿’에서도 10년간 일했으며, ‘라 크루아 인터내셔널’(La Croix International) 편집장(2014~2024)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