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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르실료 제2차 전국 울뜨레야

입력일 2020-11-13 11:27:00 수정일 2020-11-13 11:27:00 발행일 1971-10-10 제 786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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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금 역할 다짐
교황 바오로 6세, 그리스도와 교회와 교황은 그대들만 믿는다 
참된 크리스챤 생활 운동
교회자세 대사회적 천명
성야고보의 성지순례단 지도자 양성 위해
1949년 스페인 에르바스 주교가 창설
1967년 최초로 한국에 전래
4년만에 2천5백명으로 성장
불과 사흘만에 굳었던 신심녹혀
지나친 독주로 신자간의 파벌조성 우려
대사회 정화운동 크리스챤 본연의 사명
10월 9일 대구 효성여자대학 대강당에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1천여 명의 꾸르실리스따가 모여 제2차 전국 울뜨레야를 가진다. 여기서 이들은 결의문을 채택, 교회내의 문제뿐아니라 대사회적인 문제에까지 한국 가톨릭의 태도와 진로를 천명한다. 이 자리에는 주한 성청대사 로똘리 대주교를 비롯해서 많은 꾸르실리스따 주교와 신부ㆍ수도자들도 참석하는데 이러한 꾸르실료가 한국에 들어오기는 지금부터 4년전. 극히 짧은 기간에 오늘과 같은 세력으로 자라난 것은 한국교회의 평신도 액션으로서는 실로 경이적인 성장이라 하겠다. 과연 이같은 놀라운 활동적 힘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아직도 일반 신자들 사이에는 그 이름도 생소한「꾸르실료」가 도대체 어떤것인가? 현 교황 바오로 6세도『그리스도와 교회와 교황은 그대들만 믿는다』고 한 것은 대체 무엇 때문일까? 제2차 전국 울뜨레야를 맞아 궁금증을 풀어보자.

한국에 꾸르실료 운동이 들어오기는 1967년 5월 4일. 필리핀 사람 까이모씨에 의해 처음 소개될 당시만 해도 우리에겐 전혀 처음듣는 말이었다. 그 후 점차 이 운동이 확장되어감에 따라 여러가지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꾸르실료는 사람을 들게 만든다』『일종의 공산당식 밀봉교육이다』또는『꾸르실료는 냉담했던 사람도 성인을 만든다』는 등등으로. 사실 이런 말들이 좋은 뜻으로 해석된다면 부분적으로는 옳은 평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꾸르식료는 교육기관도 아니요 냉담자를 회두시키기 위한 기관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꾸르실료란 무엇인가?

꾸르실료의 정의

그들의 표현을 빌리면『꾸르실료는 참된 크리스챤 생활을 구축하기 위해 일하는 운동이며 이 운동을 하는 이들로 하여금 참된 크리스챤의 기본이 되는 것을 생활하게 하는 방법이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꾸르실료 운동은 결코 우발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최초 꾸르실료 발기인의 한사람인 에드아르도 본닌씨에 의하면『처음부터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꾸르실료 운동의 목적은 처음부터「교회와 사회의 소통」을 꾀했다. 따라서 교회내 젊은이들에게 지도력을 키워주고 그들에게 산크리스챤 생활을 체험케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그러나 흔히 꾸르실료의 실무자들까지도 원래의 목적을 잊고 꾸르실료를 조직하고 이끌어나가는데만 급급한 나머지 이 기본적인 자세를 망각하는 사례를 빚는 예가 많다.

꾸르실료는 어디까지나 수단이요 방법이지 결코 그 자체가 목적이 될수는 없는것이다. 따라서 꾸르실료가 성공이냐 실패냐 하는 기준은 우리의 환경이 어느정도 그리스도화 해가고 있는가? 여러 환경안에 참다운 사도로 일하는 지도자들이 얼마나 침투하여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끌고 있나? 에 두어야 할 것이다. 만일 꾸르실료가 이런 일들을 잘하고 있다면 꾸르실료 운동은 성공적인 구실을 하고있다고 말할 수 있을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꾸르실료가 비록 어떠한 좋은 일을 하고있다 해도 꾸르실료로서의 성공은 결코 거두고있지 않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꾸르실료가 비록 시간적으로는 공의회 이전부터 생겼지만 이런점에서는 공의회 정신과 가장 잘 맞는 것으로 사회의 그리스도화는 바로 현대교회가 지향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꾸르실료는 그 역사를 살펴보면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꾸르실료의 역사

꾸르실료의 창시자 후안에르바스(JUAN HERVAS) 주교는 당시 스페인의「마요르카」섬의 주교는 사제와 신학생 그리고 가톨릭액션을 하는 평신도의 교육과 훈련을 각별하게 지도해보려고 시도했다. 먼저 사제들에게는 항상 주교와 접촉하는 기회를 많게하고 강론을 위한 특별공부를 하게하고 성사집행과 평신도 지도를 위한 훈련을 시켰다. 그리고 가톨릭액션을 하는 평신도를 중심으로 매주 금요일 주교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여케하고 강론을 해왔다. 여기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지도자학교가 출범됐다.

이 지도자학교에서 조성된 분의기와 정신적 자세가「아이디어」의 핵심이 되었고「크리스챤 생활의 꾸르실료」가 싹트기 시작했다.

스페인의 크리스챤 청년들은 스페인 서북부의「산띠아고」에 있는 성야고보의 성지순례를 위한 꾸르실료를 시작했다. 꾸르실료(CURSILLO)란 스페인말로「단기 강습회」란 뜻으로 풀이된다. 크리스챤 생활의 꾸르실료는 사도 성 야고보의 성지를 순례하는 가운데 싹텄다.

이 순례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순례단 지도자를 양성해야 했고 이 지도자 양성을 위한 꾸르실료가「마요르카」섬에서 수년간 계속되었다. 이 꾸르실료는 쉬지않고 사도적 활동을 하는 청년들을 양성해내고 주교가 임명한 지도신부 밑에서 크리스챤 생활의 꾸르실료의 핵심 분자로 싹텄다. 여기서 얻은 경험은 굳은 신심속에서 살던 사람뿐 아니라 오랫동안 죄중에서 그리스도를 외면하고 살던 청년들에게도 신덕과 성스러운 이상이 강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을 보았다.

교구 평의원회의 지도자학교는 용기백배하여 사제와 평신도로 된 소위원회를 구성, 경험을 모으고 새로운 문제점을 연구, 개선하여 최종적인 결론을 얻어내려고 노력했다. 매회의 꾸르실료마다 신학적ㆍ심리학적면에서 분석, 검토했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양식의 꾸르실료가 1949년 1월 7일 이곳「마요르카」섬에서 개최되었고 이것이 「크리스챤생활의 꾸르실료」의 최초형태가 되었다.

교황 삐오 11세는『몹시 병들어 있는 세계에 표양과 길잡이가 되는 것은 크리스챤 생활의 확립』이라고 말했다. 이와 같이 꾸르실료 운동이 점차 본 궤도에 오르게 되자 그 영향력은 대단했다. 그래서 교황 바오로 6세가 『그리스도와 교회와 교황은 그대들만을 믿는다』고 말했는지도 모른다.

에르바스 주교는 나중에『너희들은 야고보의 성지순례단 꾸르실료에서 사도성 야고보의 칼을 훔쳐와서 하늘을 찢어 구멍을 내고 거기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폭포수처럼 받았다』고 말한적이 있다.

꾸르실료의 방법

그러면 꾸르실료가 어떤 방법으로 신자들의 마음에 불을 질러놓는가? 하느님의 은총이 꾸르실리스따들에게만 내리지는 않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우리는 지금까지의 신자교육방법이나 신앙의 자세문제를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교회는 지금까지 적어도 공의회 이전까지는 이론적으로 교리를 증명하고 설득을 시켜 신자들로 하여금 철학자 또는 신학자로 만들겠다는 태도였다. 그러나 그 이론과 실천생활과의 연결점을 찾지 못했었다. 다른말로 바꾸면 인간성에서의 이성적 속성에만 지나치게 매달려 감정적인 면을 전혀 무시했었다.

인간은 이성과 감정의 복합체적인 동물이지 그 어느것에도 치중해서는 안된다. 여기서 꾸르실료가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방법을 쓴다고 해서 겉만 보고 여러가지 잘못된 오해를 해왔었다. 사실 이 점에 있어 꾸르실료 자체에서도『3박4일의 꾸르실료는 다분히 감정적인 방법이었다』고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대로『흔히들 빠져있는 습관성 신앙의 고질에서 빠져나오자면 각성제로서 그 방법은 충분히 이유가 있는 것이다. 』는 말에 수긍이 갈만도 하다.

다만 이들은 감정에만 젖어있지 말고『꾸르실료 이후의 신앙생활은 이성적이고 지속적이어야만 한다. 』고 강조하고 있다.

꾸르실료는 3박4일간 어떠한 방법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지 설명하기를 꺼려한다. 그것은 어떠한 말로도 충분한 설명이 불가능하며 불피요한 설명으로 잘못 오해를 불러일으킬 위험을 방지하자는데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보다 치밀한 계획으로 짜여진 꾸르실료가 사전에 예비지식을 가지고 참가할때 심리적면에서 극적인 효과를 얻을 수 없다는 점을 오히려 더 우려하는 것 같다. 다만 이들은『성인을 만들기위해 인간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방법을 다 사용한다. 』고 말하고있다. 하여튼 우리 주위의 경험에 의하면 꾸르실료는 확실히 크리스챤으로서 무언가 행동하도록 사람의 마음에 불을 질러놓는 것만은 사실인것 같다. 불타는 마음으로 아직도 냉랭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다른사람을 볼 때 또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 볼 때 스스로 도취된 행동을 할 때가 있다. 그래서『꾸르실리따는 신자안의 특수층도 아니고 우월감을 가질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그들 스스로가 자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층에서는 아직도 희열에서 깨어나지 못한듯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행동을 하고있다. 사실 꾸르실료가 본래의 정신대로 교회안에서나 교회와 사회간의 접착제적인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오해를 살만한 행동은 스스로사 조심해야 할것이다. 꾸르실료 자체에서도 이러한 반성은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데 그 예로 일부에서 용어나 동작이 실감이 나지않고 어색하게 보여 제3자들에게 경원시당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되었다. 사실 이것은 바로 본 판단이다. 여기대해 정통파는 꾸르실료의 순수성ㆍ정통성ㆍ온전성을 내세워 토착화를 반대하며 이러한 부작용을 감수해야만 한다고 맞서고있다. 하여튼 이 문제는 앞으로 더욱 심각한 여론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꾸르실료의 이 같은 강력한 힘은 첫째 그 정신면에서 찾아볼 수 있겠으나 여기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경제적인 뒷받침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꾸르실료를 개최하고 운영하는데는 비용이 든다. 3박4일간, 숙식비와 교통비ㆍ필기구 등 각종 소모품비ㆍ기타잡비 등 비용을 원칙적으로 개인이 부담햐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부족한 비용은 독지가의「빨랑까(희생)」란 이름의 기부금으로 보탬을 받기도 한다. 그래서 흔히 꾸르실료에는 경제력이 약한사람은 갈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그렇지만 꾸르실료에는 회비라던가 경제적인 의무는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막대한 비용을 각 꾸르실리스따의 전적으로 자의에 의한 희사로서만 충당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누가 계속「빨랑까」를 내놓을까? 한 두 번이지 길지는 못할 걸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빨랑까는 놀랄만 하다. 우선 한국에 꾸르실료가 들어온 역사를 더듬어보면 어느정도냐가 이해가 갈지도 모른다.

꾸르실료 한국전래

1967년 5월 4일 서울 성수동에서 있은 제1차 한국 꾸르실료는 필립핀에서 성직자 평신도가 대거 내한, 최초로 2명의 성직자와 30여 명의 평신자 꾸르실리스따를 배출했다.

그 해 8월 제2차 꾸르실료를 위해 다시 필립핀에서 15명이 대거 원정 이 두번의 꾸르실료를 영어로 실시하고 제3차를 한국말로 갖기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이 두번에 걸친 한국 꾸르실료를 위해 필립핀에서 전세 비행기를 동원하는 등 경제적으로 시간적으로 또 노력에 있어 실로 막대한「빨랑까(희생)」를 한 것이다. 최초의 한국인 꾸르실리스따들은 전국 방방곡곡에 꾸르실료 운동을 심기위해 물심양면의 희생을 감수함으로써 필립핀 꾸르실료에서 받은 은혜를 갚은셈이다. 이렇게 한국에 상륙한 꾸르실료 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각 교구로 전파 1970년 6월30일 전국 10개 교구에서 30명의 대표가 참석 한국 꾸르실료 협의회에서는 이 문제를 논의, 승인하고 7월 6일자로 정식통보했다.

꾸르실료는 그 후에도 계속 팽창, 오늘 현재 11명의 주교 꾸르실리스따와 3백여 명의 신부 꾸르실리스따 2천5백여 평신자 꾸르실리스따 그리고 2백50여 명의 여자 꾸르실스따를 갖게되었다.

꾸르실료의 문제점

이와같은 대식구로 불어난 한국 꾸르실료는 꾸르실료를 마친 후의 사후 관리문제에 진통을 겪고있다. 각 교구마다 사정은 약간씩 다르나 성직자의 협조문제, 지도적 인재의 결핍, 경제, 시설 등 여러문제를 안고있다. 아직까지 초창기라고 볼 수 있는 한국 꾸르실료는 튼튼한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인원선정에서도 여러가지 면에서 고려한것 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점으로 해서 특권의식을 가질 이유도 우월감을 가질 이유도 없다. 그것은 이 판단이 어디까지나 극히 인간적인 기준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꾸르실료의 사후관리를 위해 사무국 운영이나 울뜨레야, 팀 회합 등 여러가지 행사가 불가피하며 이를 위해 경비는 꼭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최소한의 경비 염출을 위해「빨랑까」를 호소해왔고 또 대부분 선뜻 내놓았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꾸르실리스따가 다같이 「빨랑까」를 내놓은 것은 아니다. 그 중에도 열성이 부족한 사람도 있겠고 실제로 힘이 못 미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빨랑까」가 강제적인 것은 아니다. 인간적인 여건에서 부담감을 느낀다면 곤란한 문제를 야기하게될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런 점이 꾸르실료안에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는 앞으로 한국 꾸르실료가 해결해야할 큰 문제중의 하나로 등장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꾸르실료의 앞으로의 진로문제다. 지금까지는 일을 위해 힘을 축적하는 시기였다면 이제부터는 일 자체를 위해 활동을 개시할 때다. 꾸르실료 자신의 주장은 꾸르실료는 운동이지 조직이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꾸르실리스따 개개인이 또 전체 꾸르실료가 사회의 그리스도화에 아무런 역할을 담당하지 않고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꾸르실료 운동은 실패로밖에 볼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제2차 전국 울뜨레야는 한국 꾸르실료, 나아가서는 한국교회 전체의 대사회적인 자세를 천명하고 앞으로의 진로를 밝힌다는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 볼 때 참으로 시기에 맞는 적시안타라 아니할 수 없겠다. <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