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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논단] 십자가는 신의 산고

김용순·강원도 장성읍 철암공소
입력일 2020-01-28 13:49:41 수정일 2020-01-28 13:49:41 발행일 1976-04-04 제 1003호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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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같이 편한 것만 찾는 시대에 특히 여성에게 산고가 없다면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된다. 과학의 발달로 스위치만 누르면 밥이 되는 세상에 산고마저 없다면 고통스러울 것이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신의 뜻은 그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만일 여자에게 산고를 주지 않았다면 사랑이 희박하여 세상은 더 불행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산고를 치르고 자기 밑으로 낳은 자식은 귀엽다고 물고 빨고 하며 사랑을 하지만 기저귀 한 번 채워주는 수고도 없이 생긴 자녀는 그렇지 못하니 사랑을 깨달으려면 역시 산고가 앞서야 하기에 고통은 신의 선물인 것이다.

동물은 산고가 심하지 않기에 키워주면 그것으로 끝나지만 사람은 산고가 심했기에 머리가 백발이 되어도 그 사랑은 그칠 줄을 모르는 것이다.

기실 우리가 주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게 된 것도 십자가상 신의 산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산고가 없었다면 주님의 자녀로 태어나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도 없을 것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유사 이래 세속으로부터 핍박을 받는 이유 중에 하나가 친자녀는 사랑을 받으며 주님의 영생복락의 상속을 받게 되기에 질투심에서 미워하게 되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또한 그들보다 고통을 당하는 것도『귀한 자식은 매 한 개 더 때리고, 미운 애에게 큰 떡을 줘야 된다』듯이 착한 자녀가 되기 위해서이다.

현실을 봐도 있는 자는 교만해지기 마련이고 없는 자는 겸손하여지니 천국은 겸손한 자의 소유물이므로 그를 주기 위해서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즉 우리에게 주어진 고통은 사랑의 증표이며 참된 기쁨을 주기 위한 것이므로 고통의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만사에 있어서 힘들지 않고 얻어진 것은 결과가 좋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정사 한 건에 수십만 원이란 추문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모교회와 우리의 현실을 비교해 보면 그들의 관심은 지극한 데 반하여 우리는 너무나 무관심 상태이다.

이것 역시 남이 지어준 산고 없이 얻어진 자녀와 같아서인지 그들은 교회를 위해 십일조도 기쁜 마음으로 꼬박꼬박 내는데 우리는 30조도 몇 개월 밀리는 것은 보통이고 생각조차도 안 하는 예가 없지 않으니 편의주의가 무엇을 주는지 알 것이다.

만일 8ㆍ15 해방이 온 겨례의 피땀으로 얻어진 것이라면 오늘의 불행을 면했을 것이라고 믿어진다.

그렇다면 고통의 신비를 음미하고 사랑은 산고를 수반하고 산고는 옥동자를 보는 기쁨임을 자각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약혼자가 산고가 무서워 사랑을 포기해서야 되겠는가.

김용순·강원도 장성읍 철암공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