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서론
김범우(토마스)의 순교자적 생애는 1874년 프랑스어로 간행된 달레(Dallet)의「한국천주교회사」에서 처음으로 알려졌다.
그는 서울의 역관집안에서 태어났다. 평소 친분있던 이벽의 권면으로 1784년 천주교에 입교,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고 주위 여러 사람들을 입교시켰다. 모두 8형제였는데 셋째동생인「이우」와 일곱번째「현우」도 입교, 형의 두를 따라 신유박해(1801)때 순교했다.
김범우는 175년 초에 체포되어 여러가지 고문을 받았다. 이 소식에 접한 권일신을 다른 신자들을 거느리고 판서를 찾아가 同敎人이므로 김범우와 같은 처벌을 해줄것을 요구하였다. 판서는 그들이 유명한 인물임을 알고 타일러 돌려보냈으나 김범우만은 계속 박해했다. 여러 형벌로도 김범우의 신앙을 이겨낼 수 없게되자 그를 충청도의「단양(丹陽)」으로 귀양보냈다. 그는 유배지에서도 기도와 전교활동을 그치지 않았지만 결국 상처의 악화로 사망했다.
김범우에 관한 이러한 사실들은 그후「벽위편」「邪學悠養」「한국천주교회사」등을 여러자료에 의해 입증되었고 또 부분적으로는 보완도 되고 시정도 되었다.
그런데 최근 김범우의 후손들의 출연과 함께 경주김씨 족보와 戶口單子등 새로운 자료들이 제시되고 있다.그러나 교회사학제 일부에서 이자료에 대한 기초적 비판도 없이 내용들을 맹신 하려는 경향에서 도리어 혼란이 초래된 느낌이다.
Ⅱ.본론
1) 사망년도
2) 捕忘記는 김범우의 사망년도에 대해「김토마스는 유배지에 얼마 안되어(약2년후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받은 상처의 악화로 사망하였다」고 했다.
그런데 달레는 이 내용을 『어떤 사람들은 그가 상처의 악화로 丹陽에 도착한지 몇주후에 죽었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2년후에 죽었다고 한다』고 부정확하게 옮김으로써 두가지 의견을 같은 비중을 처리해버렸다. 이승훈의 영세 신부인 그라몽 신부도 김범우가 10일만에 죽었다고 함으로써 그의 사망은 유배 직후로 보았다.
그러나 이승훈은 김범우가 1786년에 사망한 것으로 보고하였고, 김범우의 동생 현우도 1801년 포청 신문에서 맏형 범우가 소위 사학때문에「단양」에 정배되어 병오(1786) 처하던 년에 죽었다고 진술했다.
이러한 증언은 그들이 모두 김범우와 동시 대인으로서 그의 유배를 목격하였을 것이라는 점에서 또 그들의 증언이 일치한 점에서 더욱 신빙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그런데 경주김씨(1897)에는 김범우의 사망한 해가 丁末(1787)로 되어있다. 이 기록을 맹신한 나머지 마백락씨는 단순하게 김현우의 증언을 잘못된 기술이거나 오기(誤記)일 것으로 일축하고 있다.
그러나 김현우의 기록은 1차적이고 기본적인 살인데 비해 丁酉譜는 2차적인 사료에 불과한 것이고 또한 김범우의 유배로부터 1백년의 세월이 흐른뒤의 기술이어서 무론 丁丑譜(1817)를 참고 한다하나 기록보다는 口傳에 의거했을 간능성이 높다고 본다.
2)유배지문제
달레는 김범우의 유배지를 충청도의「단양」(丹陽)이라고 했다. 이것은 김현우의 증언으로 완전히 입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마백락씨는 1873년 당시 密陽府 丹陽面 法貴里에 거처한던 김범우의 손자 金東譁의 戶口單子를 근거로 하여 김범우의 자녀들이 부친을 따라「단장」(丹場)으로 가서 살았을 것이고 이리 하여 경상도 땅에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했을 것이고 또한 김범우도 충청도의「丹陽」에서 순교했을 것이라는 사실까지 추리해냈다. 아직 김범우의 묘소가 발견되지않고 있다고는 하지만 설사 그것이「丹陽」에서 발견된다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김범우의 丹陽 유배를 입증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후손들이「丹場」으로 이사할 때 김범우의 묘를 그곳에 이장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백락씨는「丹場」이 혹시 「丹陽」으로 誤記된 것으로 보는듯 하지만 일반적으로 유배지는 고을 이름으로 기록되는 것이 관례였으므로 만일 김범우가「丹場」으로 유배됐다면「丹場」이 아니라 密陽유배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3) 순교의 여부
유배지에서 사망한 사람에게는 원칙적으로「증거자」란 존칭까지 주어지는 않는다.
한국교회사에서도 김범우를 제외하면 예외는 없었던것 같다.
김범우의 순교에 관한 이야기는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비망기도 김범우를 첫순교자로 간주해야 마땅할 것 같다고 말한것이지, 간주해야 한다고 단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 김범우의 죽음을 유배직후로 믿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달레는 비망기의「첫 순교자인 것 같다」는 내용을「첫 순교자이다」로 단정해 버렸다. 뿐더러 유배직후 또는 2년후란 두 의견을 동등하게 취급함으로써 오히려 순교의 근거를 더욱 약화시켰다. 어쨋든 달레의 주자에도 불구, 초기교회에서 김범우를 순교자로 공경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이승훈은 김범우의 죽음을『박해로 인해 많은 고통을 겪고 사망했다』고 하며 순교란 말을 쓰지 않았고 구베아 주교도『영광스럽게 죽었다』는 표현을 사용했을 뿐이었다. 그후 구베아 주교의 서한은 일명「5순교자전」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1791년의 순교자「윤유일」ㆍ「최인길」ㆍ「지황」을 말한다. 사실 초기 교회에서도 이들 5명의 순교자만이 공경의 대상이었다.
Ⅲ.결론
김범우의 사망년도에 대해 1785,1786,1787년등 몇가지 설이 있으나 1786년이 가장 신방성이 있다고 생각되며 김범우의 유배지도 김현우와 비망기의 증언이 일치하고 있기때문에「단양」이 가장 신빙성 있다고 본다.
그리고 원래 유배자는 순교자로 간주되지 않았기 때문에 김범우의 첫순교자 문제는 재고되어야 할 문제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