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민족·화해·일치] 자유 / 김 글로리아

김 글로리아 (하나센터 (지역적응센터) 상담사)
입력일 2013-06-11 05:22:00 수정일 2013-06-11 05:22:00 발행일 2013-06-16 제 2850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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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국 초기 지하철을 타고 마을버스에 올랐다. 앞사람이 카드를 대니 ‘감사합니다’라는 소리가 들렸다. 반면 내 카드에서는 ‘환승입니다’하는 것. ‘이 단말기도 내가 북한에서 온 것 알고 차별하나?’하고 생각하니, 몹시 마음이 상했다. 나중에 환승제도에 대해 알게 되고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이후로는 늘 소개할 기회가 있을 때면 “안녕하십니까? 7살 김ОО입니다”고 인사한다. 한국에 정착한지 7년이 되어가기 때문이다. ‘암흑’이라는 닫힌 곳에서 ‘자유’라는 세상에 다시 태어난 나는 아기가 걸음마를 배우듯이 대중교통 이용부터 전화사용법, 가전제품 사용방법 등 모든 것을 새롭게 배우고 사회에 적응하고 있다.

내가 태어난 곳은 함경북도 국경지역이다. 20년 넘게 생활했으나, 도내를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북한에는 이동의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북한주민들은 수도 ‘평양’에 다녀온 경험이 있으면 자랑처럼 느낀다. 평양시민들은 수도에 거주한다는 것 자체가 영광이고 자랑스러운 일로 생각한다. 그리하여 평양 처녀들은 전봇대를 안고 살아도 지방으로 시집가지 않는다고 한다. 지방에서 ‘평양’에 들어가려면 평양에서 하달하는 승인번호가 있어야 여행증을 발급 받고 출입을 할 수 있다. 기차로 이틀 넘게 걸리고 연착이라도 되면 보름이 넘게 걸리는 평양여행은 해외여행처럼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느껴졌으니 하루 안에 제주에서 서울을 오가는 남한이 작게만 느껴지곤 한다.

또한 내가 살던 국경지역은 검찰초소가 있어 내륙지역 사람들의 출입이 쉽지 않았다. 공적인 출장은 가능하나, 그 외 사람들은 뇌물을 주거나 국경지역 거주민의 공민증(주민등록증)을 빌려 출입을 했다. 사실 북한에서 발표하는 인구조사는 신뢰도가 낮다. 왜냐하면 출생 등록부터 전입, 전출, 사망신고 등 동사무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서류들은 수기로 작성되며 전산화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식량난에 많은 북한주민들이 살길을 찾아 불법으로 중국행을 택했다. 남은 가족들은 처벌이 두려워 없어진 식구를 ‘사망’으로 처리한다. 몇 년 후 북송돼 진술 과정에 집주소를 밝혀도 호적에는 사망으로 기록돼 있어 혼란스러운 경우가 많다. 이후로는 신원이 확인되지 않는 한 ‘행방불명’으로 처리된다. 많은 북한이탈주민들 중 여성이 70%를 차지하는 것은 여성이 이동과 은신에 자유로우며 가부장적인 북한사회에서 출가외인인 여성이 행방불명되는 것이 남은 가족에 피해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가족이 피해를 줄이려고 행불을 감추듯이 연대책임을 회피하려는 지방자치단체들도 마찬가지이므로 신뢰도가 높은 인구조사가 나올 확률이 적다고 생각한다.

남한에 정착한 북한이탈주민들은 주택 배정 시 서울을 선호하며 경기·인천 지역에 70%가 살고 있다. 단지 일자리가 많고 높은 임금보다는 이동의 자유가 없어 마음대로 평양을 가지 못했던 보상심리라고 생각된다. 이동의 자유, 아니 선택의 자유가 있는 이 땅에서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우리는 얼마나 감사한지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김 글로리아 (하나센터 (지역적응센터) 상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