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말은 아니다. ‘호도’의 경지를 얻기란 쉽지 않다는 뜻이지만 문제는 이 ‘호도’다.
우리말로 ‘호도’는 어떤 일을 분명히 처리하지 않고 우물쭈물 얼버무린다는 뜻으로 과히 좋은 뜻은 아니다. 그러나 중국어의 경우는 조금 다른 모양이다. 중국어로 발음하면 ‘난더후투’가 되며, 이 ‘후투’에는 ‘어리석은 사람’이란 뜻이 들어있다 한다. 그리고 바로 이런 뜻 때문에 중국 사람들이 이 말을 그렇게 좋아하는 것이라 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알아듣지 못할 바도 아니다.
누군가가 똑똑하다, 총명하다는 소리를 듣고 기뻐한다면 그런 사람은 속이 깊은 큰 인물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런 정도라면 아무래도 경박한 허영가에 머무르기가 쉽기 때문이다. 반면에 바보 소리를 들어도 태연할 수 있다면, 누가 그런 사람을 정말로 어리석은 사람으로 취급할 수 있겠는가. 그런 사람의 속내는 쉽게 헤아릴 수가 없어 이런 경향을 중국 사람들이 그렇게 선호하는 모양이다.
얼마 전에 차동엽 신부님은 이런 묘리(妙理)를 담은 옥저(玉著) 『바보 Zone』을 펴내셨다. 차 신부님이 그려내는 인물도 생각이 매우 깊어 겉으로는 어리석어 보이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은 ‘외우내현(外愚內賢)’ 형의 인물이다.
허지만 사람이 생각만 깊다고 참된 뜻에서의 ‘바보’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바보 소리를 들어도 태연할 수 있는 것은 마음 속으로 사랑을 품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사랑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의 처지를 다 이해하고 마음에 품어줄 수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써 때로는 사물(事物)을 판단하는 척도(尺度)와 기준에 서로 모순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기 때문에 바보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중국인이 좋아한다는 ‘호도’의 사람은 사랑 말고도 분명 또 하나의 미덕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며, 그것은 곧 겸허의 미덕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겸허가 몸에 배어 있기 때문에 남이 바보로 평가해 주는 것이 오히려 더 고마운 것이다. 이런 경지에 가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일까. 인내하는 삶의 수련 없이 가능할까. 그리하여 진정으로 ‘호도’를 터득한 사람은 성인의 경지에 한 걸음 다가선 사람이 아닐까 싶다.
생활에서 비교적 쉽게 ‘호도’를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나는 찾아냈다. 그것을 여기에 소개할까 한다. 일상생활에서 하고 싶은 말 두 마디 중 한 마디만 하고 나머지 한 마디는 참고 하지 않는 것이 바로 ‘호도’를 향하는 실천방법이다. 벙어리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말을 반쯤만 줄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자연 말 실수도 줄어들고 남을 헐뜯는 야만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나는 이것이 효과가 있다는 것을 체험으로 깨달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것은 약간의 노력에 의해서 실천이 가능한 방법이다.
조금 전에 나는 중국인이 선호하는 ‘호도’의 경지의 핵심에는 사랑과 겸허가 있다고 말했다. 이런 쪽으로 조금 더 생각을 밀고 가면, ‘호도’는 그 뿌리를 ‘침묵’의 세계에 내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침묵’은 ‘한국복자수도회’를 창설하신 고 방유룡 안드레아 신부님이 늘 말씀하신 ‘침묵(沈黙) 대월(對越) 면형(麵形) 무아(無我)’의 ‘침묵’과 다를 바가 없다. ‘침묵’은 인간의 수련의 기본적 토양이다. 그리고 또 이 침묵은 스위스의 예언적 철학가 막스 피카드가 말하는 ‘침묵의 세계’와도 별개의 것이 아니다.
피카드는 ‘친묵’이란 주제로 책을 한 권 썼다. 그리고 책 어디를 펼쳐봐도 침묵이란 말의 그 신선함과 깊이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피카드의 말을 인용하겠다.
‘말이 끝나면 침묵이 시작되기는 한다. 그러나 침묵의 시작이 말의 끝남 때문은 아니다. 말이 끝날 때 침묵을 더욱 뚜렷하게 의식할 수 있을 따름이다. 침묵은 독자적인 현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