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한국교회 초석 놓은「산 증인」- 고 노기남 대주교의 생애를 되돌아본다

이윤자 차장
입력일 2011-06-30 11:42:29 수정일 2011-06-30 11:42:29 발행일 1984-07-01 제 1412호 8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보좌신부에서 주교로 서품
군종단 창설ㆍ경향신문 창간
일기 42권ㆍ1천여 점 유품 남겨
「Fiat Voluntas Tua」(주님의 뜻대로 내게 이루어지소서). 성경말씀 가운데 성모의 찬가(마니피깟)를 유난히도 즐겨 사용했던 老 대주교, 이제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겼던 「주님의 뜻대로」영원한 안식의 나라로 떠나갔다. 주교서품과 함께 택한 표어 -「당신의 뜻대로」를 생의 표지로 삼고 오로지 주의 대전에 자신을 불사른 노기남 대주교(82세). 그는 누가 무어라해도 한국교회를 반석위에 올려놓은 초석이었다. 시대를 움직인 「큰사람」이었다. 격동기에 태어나 최초의 한국인 주교로 한국교회를 이끌었던 노기남 대주교는 혼돈과 시련의 시기, 이 민족이 겪어야했던 아픔을 함께해온 한국교회의 「산 역사」이자 「증인」이기도 했다.

1902년 평남 중화군 율리면 무진리(남당리)에서 6남5녀중 막내로 태어난 노기남 대주교는 17년 용산 성심신학교에 입학、성직의 길에 들어섰다. 제2의 고향인 황해도 浦內본당 주임이었던 부이수 신부(孫以燮ㆍ빠리외전)를 통해 사제에의 꿈을 키워 온지 5년 만에 그 꿈을 성취했던 노 대주교는 30년 사제로 서품、종현대성당(명동)보좌신부로 첫발을 내디뎠다.

동창들이 하나둘씩 본당주임으로 영전(?)되어 갈 때에도 줄곧 보좌에 머무르기만 해 좌절 아닌 좌절을 겪기도 한 노 대주교는 42년 전격적으로 경성교구장 (서울교구)에 임명됐다.

조선총독부와 일본본토를 경악시킨 이 놀라운 조치는 일제의 노골적인 종교탄압정책에 대한 엄숙하고 조용한 도전이기도 했다.

1월 18일 제10대 경성교구장에 착좌한 노 대주교는 그해 12월 주교로 成聖、서리의 위치에서 명실상부한 서울교구장에 올랐다.

보좌신부 12년 만에 곧 바로 주교직에 오른 이 「이변」은 일본인주교의 경성교구장 설정이 확실시되던 당시의 급박한 상황이 배경으로 깔려있었지만 첫번째 한국인주교의 탄생은 한국교회 역사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영광의 사건이기도 했다.

당시 경성교구장 라리보 원주교와 교구장 비서오기선 신부、그리고 몇몇 고위성직자 외에는 극비리에 추진되었던 한국인주교 설정은 「첩보작전」을 방불케 할 만큼 긴박한 상황 속에 이루어졌고、이 같은 시작은 격동의 시대 한국교회를 이끌어 나가야할 노 대주교의 험난한 앞날을 예고하고 있었다.

45년 일본의 패망과 함께 한국교회는 새로운 발전기로 들어섰다. 건국준비로 숨 가쁘게 돌아가는 정세에 합세하는 가운데 46년 김대건 신부 순교1백주년을 맞아 「한국순교자현양회」를 발족시킨 노 대주교는 순교자현양사업에 적극 나서는 한편 경향신문을 창간、와중의 한국사회의 公器로 키우는데 주력했다.

49년 전국주교회의를 개최、천주교 중앙위원회(現 한국천주교 중앙협의회)설치를 주선하고 초대회장에 선출돼 도약기를 주도하기 시작한 노 대주교는 6ㆍ25 발발로 다시 시련기를 맞아야 했다.

전쟁중인 51년 정부에 군종제도 실시를 건의、가톨릭 군종신부단을 창설하기도한 노 대주교는 53년 휴전과 더불어 30여명의 신부ㆍ신학생ㆍ평신도들을 유럽과 캐나다 등지로 대거 유학을 보냄으로써 미래 한국교회에 대비한 인재양성에 높은 안목과 놀라운 결단력을 발휘했다. 한편으로는 전쟁으로 초토화된 이 땅과 교회의 복구와 재건을 위해 세계 각국을 순방、지원과 협력을 요청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펼치는 가운데 교회의 성장과 발전의 기틀을 공고히 다졌다.

노 대주교는 62년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됨과 동시에 대주교로 승품됐다. 이는 해방 후의 혼란과 전쟁의 와중 속에서도 급격히 교세를 신장시켜온 한국교회로서는 다시한번 기쁨을 맛본 영광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걷잡을 수 없이 몰아친 그 혼돈의 시기는 진리의 소리를 높였던 경향신문의 무기정간、복간、다시 매각이라는 아픔을 가져다주었다.

62년 개막된 제2차「바티깐」공의회 1회기에서부터 65년까지 전회기에 참석、변화하는 세계 안에서 역시 변화하는 한국교회의 기초마련에 부심해온 노 대주교는 67년 3월 만25년간의 서울대교구장직을 사임했다. 격동과 혼돈의 시대、힘겨운 목자의 자리를 지켜온 그의 사임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ㆍ교회의 여건으로 볼 때 너무도 적절한 결단인지도 몰랐다.

제2차「바티깐」공의회 이후 현대세계에의 적응、교회의 쇄신 등 새 기운은 젊은 세대가 새로운 사명을 이어가도록 내린 노 대주교의 결단을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3월 27일 은퇴와 더불어 안양「성라자로마을」 (원장ㆍ이경재 신부)로 직행한 노 대주교는 그로부터 인자하고 평범한 나환자들의 아버지로 살았다. 급변하는 국제정세 안에서 민족의 영욕을 함께 하면서 도약기의 교회를 이끌었던 화려한 경력을 뒤로한 채 오직 나환자 속에 파묻혀 살면서 그들의 아픈 상처와 고독한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80평생 건강을 자랑해온 노 대주교였지만 여든을 넘기면서 병마와 싸우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은퇴와 더불어 여생을 보내온 라자로마을을 떠나「입원」과「임시퇴원」을 반복해온 노 대주교는 자신의 주변들을 정리하면서「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질 그때」를 대비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1월 22일 여든한번째의 생일을 맞아 입원 중이던 명동 성모병원에서 주치의의 엄격한 조건부 퇴원 명령에 따라 잠시 퇴원한 노 대주교는 라자로마을 이경재 신부가 마지막 생신이 될지 모른다는 예감 속에 마련한 잔치상을 받고는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선배인 구천우 신부ㆍ동료ㆍ후배성직자 및 평신도 등 70여명이 참석했던 81회 생일잔치는 은퇴이후 가장 많은 이들이 참석한 대규모(?)잔치였지만 결국 그 자리는 노 대주교가 이 세상에서 받은 마지막 선물이 되고 말았다.

노 대주교는 이날 잔치에 앞서 최석우ㆍ박희봉 신부를 라자로마을 자신의 거처로 불렀다.

이 자리에서 50여년 성직생활의 결산이라고 할 수 있는 각종 기록물 소지품을 내놓은 노 대주교는 후대에 귀한 자료로 활용될지 모를 1천여점의 유품들을 교회사연구소(각종 기록물)와 절두산 순교기념관(소지품)에 각각 보관토록 앞당겨 유언을 남겼다.

「손이섭 신부의 호조」(여권)「명동 파이프오르간 구입 문서」6ㆍ25 당시 교회청년들이 조직했던 「청년결사대 서류」등등 각종 서류기록물 가운데 유난히 돋보이는 것은 「42권의 일기책」보잘 것 없는 작은 수첩 노트 등을 망라、깨알 같은 글씨가 촘촘히 박힌 이 42권의 일기는 뮈뗄 민 대주교의 꼼꼼한 기록、서류보관 등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지켜보면서 42년간의 주교생활을 간략하게 그러나 소상히 적고 있어 근대 한국교회사연구에 상당히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42년 1월 18일 착좌와 더불어 『사령장과 성모병원의 돈 1만6천원을 회수 받았다』는 기록으로 시작된 노기만 대주교의 일기는 83년 4월로 끝을 맺고 있다. 이제 그는 영원한 안식을 찾았다. 주님의 뜻 안에서.

이윤자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