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명동성당에서는 김수환 추기경님 집전으로 당선자를 위한 축하미사가 열렸다.
대선에서 치열한 경쟁을 치르고 난 뒤여서 당선자도 낙선자도 심신이 지쳐있던 시기였고, IMF 한파가 국가의 존립마저 뒤흔들고 있던 때여서 경축의 들뜬 분위기는 못되었다. 이 자리엔 당시 패배의 고배를 마신 이회창 총재도 참석했다. 뜻밖에 당선자와 낙선자가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숙연한 자리가 되었다.
이회창 총재는 김대중 당선자에게 먼저 「평화를 빕니다」하고 축하했고 서로가 악수를 나누며 화해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나는 그때 이회창 형제와 함께 앞자리에 앉아있었다. 어제의 적이 마음의 앙금을 씻어내고 하느님 앞에 한 형제로 서 있는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한때 정치인으로 살았기에 나는 이들의 화해를 주선할 수 있었고, 그런 일이 성사되어 한국 정치에도 상생의 정치가 열리리라는 기대로 부풀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진행을 맡고 있는 『안녕하십니까, 봉두완입니다』방송에서 어려운 시기에 대통령이 된 김대중 당선자를 앞으로 6개월 정도는 밀어주자고 서슴없이 말했다. 정치적인 편들기가 아니라 충심어린 마음이었고, 사심없는 소신이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한형제
우여곡절 끝에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니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도 그에게 믿음과 기대를 갖고 힘을 실어주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한나라당은 성명을 내고 방송국에 항의하며 나를 방송에서 퇴진시켜야 한다고 압력을 가해왔다. 한때 나와는 정치적으로 동료였던 최고위 당직자와 고교후배가 앞장서서 나를 몰아붙였다. 그런 저런 정치적 영향으로 나는 그해 5월 시사정보 프로그램 진행자의 자리를 물러났고 곧이어 로마에서 열린 「세계 평신도 대표자회의」에 「꾸르실료 세계협의회 의장」자격으로 참석했다.
모두가 용서하고 화해하고 한국정치사에 상생의 정치문화를 이뤄가는데 미력하나마 힘이 되고자 했던 나의 뜻은 벽에 부딪혀 끝내 좌절하고만 것이다. 그로부터 2년이 흐르고 이제 다시 선거의 계절이 돌아왔다. 2년 전 대통령 후보로 라이벌이었던 두 분이 화해하고 협력하는 기도의 자리를 만들었던 나로서는 더욱 큰 회의와 절망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타인을 인정하지 않는 상극의 정치문화는 어떤 이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지난날의 과오를 인정하고 참회하지 않고서는 어떤 화해도 있을 수가 없다. 지난날 대통령을 지냈거나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분들이 지금 어떤 마음으로 어떤 일을 도모하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한달 동안 동남아를 방문하고 김포공항으로 들어오면서 귀국일성으로 지역감정을 비난하고 나섰다.
그는 『무슨 놈의 정당이…』로 시작해 지역감정을 선동하는 정치인들을 비난하는가하면 『나는 완전 전씨로 전라도 사람이고 김해 김씨은 김대중 대통령은 김해 사람』이라는 말도 했다.
최근 상도동의 대문을 열어놓고 정치인들을 면접하며 선문답을 즐기고 있는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서도 반성과 참회의 빛을 찾아보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이다. YS의 재임 중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김광일 전 의원이 『김 전 대통령께서 너희들(민국당 지도부) 중에서 (차기)대통령이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고 했다. 말이 그대로 사실이라면 참으로 기막히는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YS는 요즘 대통령까지 지낸 이가 이제와서 야당을 쪼개 지역당을 만든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분인데 그런데도 민주계에서 후계 대통령이 나와야 한다는 식의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YS가 대통령 재임시 명동성당에 공권력을 투입했을 때부터 나는 그분에 대한 희망을 이미 저버린 채였다.
참회와 화해로 정치의 봄 맞자
『지는 해 뜨는 해』론으로 대권도전에 야심을 키우고 있는 이인제 민주당 선대위원장도 마찬가지이다. 지역대표를 뽑자는 16대 총선을 마치 대선 전초전 쯤으로 여기고 마치 자신이 차기 대선 후보로 내정이라도 되어있는 듯 착각하는 인사들이 갈등과 반목의 불씨를 지피고 있으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지금은 누구의 봄도 아니다. 새천년의 봄이 우리 모두의 봄이 되게 하기 위해선 이 땅의 정치지도자들이 참회하고 화해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지난 수십년 동안 부정부패와 이전투구를 일삼으며 지역감정을 부추겨 국민들 분열시키는데 앞장 선게 오늘의 정치 지도자들이 아니었는가!
이들의 참회만이 새천년을 맞은 우리의 정치의 봄을 봄답게 할 수 있으리라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