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에게는 친정 엄마 같은 언니가 한 분 계십니다. 오남매 중 맏이와 막내로서 열두 살 차이가 나는 띠 동갑입니다. 언니는 팔순이 넘은 연세에도 어지간한 농사일은 손수 하고 계십니다. 그런가 하면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고 계시지요. 몇 년 전에는 돋보기를 쓰고 성경필사를 마쳐 상도 타신 분입니다. 시골이지만 고맙게도 이웃에 작은 교회가 있어, 젊은 목사님이 새벽마다 몸소 노인들 집 앞을 돌며 한 분 한 분 모시고 가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언니는 호박이며 가지 등 신선한 채소의 맏물을 목사님께 갖다 드리는 기쁨을 누리며 삽니다.
제가 삼남매를 낳을 때, 두 말 없이 올라와 산바라지를 해 주시던 언니! 그분은 언제나 시골에서 직접 농사지으신 먹을거리를 보내주십니다. 친정 엄마 같은 마음으로 김장김치를 담가 택배로 보내 주시고, 참깨며 들깨도 보내주십니다.
저는 오늘 그 참깨를 볶으려고 씻어 일다가 이런 저런 생각의 오솔길을 산책했습니다.
쌀의 경우는 기계가 다 알아서 돌도, 뉘도, 티도, 잘 골라주어 그냥 씻기만 하면 되는데, 깨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씻어 볶았다가는 흙가루가 지금거려 먹을 수가 없지요. 워낙 작은 알맹이라 기계로 고른다는 게 어려운 모양입니다. 바가지 두 개를 들고, 몇 번이고 번갈아 일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도 가벼운 곡식이라, 처음에 물을 부으면 모두 둥둥 뜹니다. 그러다가 잠시 후면 대부분 가라앉는데, 마지막까지 가라앉지 않는 것은 빈 쭉정이지요. 그것들을 걷어내고 바가지를 살살 흔들며 조리질을 합니다. 몇 번이고 바가지를 바꾸며 조리질을 합니다. 어쩜 그렇게도 많은 돌가루며 흙이 나오는지, 서너 번으로 그쳐서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일다 보면, 나중에는 이물질 속에 섞인 몇 알의 깨들을 그냥 버릴까 하는 충동이 입니다. 몇 알 안 되는 그것들 땜에 계속 일고 있는 게 시간 낭비 같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그때 저의 생각을 바꿔 놓는 게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에게 들어온 말. ‘쌀 한 톨이라도 버리면 안 된다. 농사짓느라고 수고한 사람들의 땀을 생각해라.’
여학교 때 오빠와 함께 자취를 하느라고 늘 쌀을 씻고 일었던 저는 할머니 말씀을 떠올리며 정말 쌀 한 톨도 잘못 씻겨 나가는 일이 없도록 조심했고, 어쩌다 땅바닥이나 마루 바닥에 흘린 한 톨의 쌀도 꼭 쌀통에 주워 담곤 했습니다. 그때 생각이 나서 저는 깨 한 알도 버리기가 죄스러웠습니다. 언니의 수고를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근래에는 한 가지 생각이 더 보태졌습니다. 하느님 구원 경륜입니다. 아흔아홉 마리 양들을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가 보입니다. 은전 한 닢을 찾으려고 애태우는 여인의 모습이 보입니다. 성실한 큰아들을 두고 망나니 작은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입니다. 바가지로 깨를 일고 또 일다가, 마지막 이물질 속에 남아 있는 몇 알의 깨를 보면서 혼잣말을 합니다.
‘얘들아, 왜 너희는 빛의 세계, 생명의 세계로 들어오지 않고 자꾸 거기 남으려고 하는 거야? 거긴 어둠의 세계, 죽음의 세계잖아? 얼른 이리로 올라와.’ 그것들이 생명체처럼 보이면서 서둘러 건져 주고 싶습니다. ‘한 개 정도 버리면 어때? 이쯤 해서 그냥 끝내자’ 하는 내면의 소리는 분명 인내를 거부하는 악의 소리였겠지요? 이제 새로운 목소리가 들립니다. “한 개 정도라니, 무슨 소리! 단 한 사람의 영혼도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 나에게는 그 한 사람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 줄 아느냐?”
저는 화들짝 놀라서 마침내 손가락을 사용해 마지막 한 알의 깨를 시커먼 가루 속에서 집어냅니다.
그 하나가 바로 저의 이웃, 저의 가족, 아니 제 자신일 수도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