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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10)1851년 절골에서 보낸 여덟 번째 서한②

민경화 기자
입력일 2022-03-08 수정일 2022-03-08 발행일 2022-03-13 제 3285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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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진 고문 속에도 오직 하느님만 바라보며
신앙 지키기 위해 고향과 재산 버리고
궁핍과 재난 받아들인 아버지 최경환
산속 떠돌며 굶주림에 시달리면서도 
자녀에게 신앙 전수한 어머니 이성례
사목 방문하며 순교자들 행적 기록
자신의 부모에 대한 내용도 담아

수리산성지 성당에 걸려 있는 최경환 성인의 가족을 담은 그림.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1847년, 최양업은 페레올 주교로부터 조선 순교자들의 행적을 기록한 책을 전해 받는다. 신자들에게 구전된 이야기를 수집한 이 책은 “목격자나 증인들이 별로 없는 이야기가 대부분이고, 그 중에 진실로 여겨지는 것만 추려서 기록됐다”고 최양업은 설명한다. 조상들의 순교 사실을 더욱 세심하게 조사하고 기록할 필요성을 느낀 최양업은 사목 방문을 시작하며 순교자들의 행적을 기록하는 일에도 힘쓴 것으로 추정된다. 1851년 절골에서 보낸 여덟 번째 서한의 말미에는 순교자들의 행적, 특히 자신의 부모인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과 이성례(마리아) 복자의 행적을 상세히 적었다.

■ 사랑하는 아버지이자 찬란히 빛나는 순교자, 최경환 프란치스코

최양업의 아버지 최경환은 고결하고 부유한 신자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천성적으로 진정한 신앙의 실천자였던 최경환에 대해 최양업은 “정직과 순박을 애호하면서도 강력한 성품을 타고나신 분”이라고 설명한다.

신앙을 열심히 실천하고자 고향과 친척, 재산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한양으로 이사한 최경환은 가시덤불과 자갈밭을 개간해 연명했다. 부유했던 최경환의 가족은 그리스도를 위해 궁핍과 재난을 자진해서 받아들인 것이다. 천주교 교리를 실천하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장을 보러 가면 제일 나쁜 것을 골라서 사 온 최경환은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제일 나쁜 물건을 사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지 않겠소? 그런 사람이 없으면 이 불쌍한 장사꾼들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소?”

또 흉년이 들면 주변의 가난한 이들을 백방으로 돕고 추수하고 나서 가장 좋은 것을 골라 이웃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눴다. 최양업은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아버지는 형제간에 화목하게 지내며 어머니는 다정하게 효도로 섬겼으며, 아랫사람들도 자상하게 보살폈습니다. 또한 아무리 바쁜 날이라도 신심 독서를 중단하지 않았고 아침저녁 기도를 가족 모두와 함께 공동으로 했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 이후 자기 마을 신자들도 순교를 준비할 때가 됐다고 판단한 최경환은 날마다 신자들을 모아놓고 열성적인 말로 격려하면서 용감히 순교하도록 용기를 북돋아 줬다.

자신을 잡으러 온 포졸에게 “우리는 오래전부터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었소”라며 평온하게 감옥으로 떠날 준비를 한 최경환은 모진 고문에도 끝까지 배교라는 말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주리를 틀려 팔과 다리뼈가 부서지고 곤장을 맞아 온몸이 피범벅이 되는 고문을 40일 넘게 견딘 최경환을 고문자들은 ‘바윗덩어리’라 불렀다. 1839년 9월 12일, 서른여덟의 나이에 최경환은 감옥에서 순교한다.

■ 하느님의 계명 지키란 말 남기고 순교한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

4남6녀 중 막내인 이성례는 총명하고 씩씩한 정신을 타고났다고 최양업은 전한다. 열여덟 살에 최경환과 결혼한 이성례는 집안을 지혜롭게 꾸려나갔으며 식구들간에 불화 없이 지냈다. 먼 길을 갈 때, 굶주림에 아이들이 칭얼거리면 마리아와 요셉의 이집트 피난 이야기나 골고타산에 십자가를 지고 오르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려줬다는 최양업의 어머니. 최양업은 “어머니는 산속을 떠돌며 극도의 궁핍과 굶주림에 시달릴 때도 모든 것을 기쁘게 참으셨을 뿐 아니라 성모 마리아,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자녀들이 인내심과 참을성을 키우도록 했다”고 전한다. 남편과 함께 감옥에 수감된 이성례는 남편과 어린 아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다. 맏아들 최양업이 신학공부를 하고 있다는 게 탄로나면서 상급 재판소, 즉 형조로 이송된 이성례는 세 차례의 고문을 당한 후 사형 선고를 받는다. 사형 집행일이 가까워졌지만 이성례의 모습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부모 없이 어린 세 동생을 거느리고 살아야 할 둘째 아들이 걱정된 이성례는 “하느님의 계명을 부지런히 지키고 형제간에 서로 화목하고 사랑하라”는 말을 남겼다.

모정에 끌리고 마음이 흔들려 영광스런 순교의 길에 걸림돌이 생길 것을 우려한 이성례는 아들에게 형장에 따라오지 말라고 명한다. 그리고 1840년 1월 31일 남편을 따라 하느님 곁으로 돌아갔다.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