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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명가를 찾아서] 정하상 바오로 성인의 후손들

리길재 기자
입력일 2011-04-14 수정일 2011-04-14 발행일 1997-03-23 제 2045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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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이룬 사제의 꿈 4ㆍ5대서 만개

한국 천주교회의 전통 가운데 가장 자랑스러운 것은 다름 아닌 순교전통이다. 그래서 신자들 사이에는 순교자 집안을 명문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순교자의 후손들 역시 조상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순교자 집안을 손 꼽으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정하상(바오로·1795~1839) 성인 가문을 내세울 것이다.

한국 천주교회의 대표 성인이라 할 수 있는 정하상 성인의 집안을 살펴보면 어머니 유소사(세실리아·1761~1839)가 성인품에 올라있고, 아버지 정약종(아우구스티노(1760~1801)과 형 철상(가롤로·?~1801)도 신유박해 때 순교해 현재 시복시성 작업이 추진되고 있다.

◆삼촌 정약용 정약전

정하상 성인 집안은 교회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 사회에서도 손 꼽히는 명문이었다. 나주 정씨로 기호남인 출신인 정약용과 정약전이 정하상의 삼촌들이다.

정하상의 집안에서 가장 먼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도 바로 정약전, 정약용이다. 정약용은 약관 16세 때인 1777년 무렵부터 천주교 서적을 접했고, 1784년 겨울 서울 수표교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루어진 한국 천주교회 첫 세례식에서 요한이란 세례명으로 영세했다. 다만 정약전은 직접 북경에 가서 세례를 받으려는 생각에서 이때 세례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초기 교회에서 지도자 역할을 한 정약전은 아우인 정약종에게 교리를 가르쳤고 정약종은 1786년 3월 아우구스티노로 영세하고, 장남인 철상과 둘째 부인인 유소사에게 교리를 전함으로써 성가정을 이루었다.

정약종은 일찍이 부인인 이수정과 사별했으나 가족들의 간청에 못 이겨 두 번째 부인인 유소사를 얻게 됐다. 이때부터 그는 아내와 금욕을 지키며 살 생각을 했지만, 교우들의 만류로 자식을 낳게 됐다.

정약종은 한문을 잘 알지 못하는 교우들을 위해 한글 교리서「주교요지」상, 하 2권을 집필했는데 이것이 바로 한국인에 의해 쓰여진 최초의 한글 교리서이다.

◆아버지 정약종「주교요지」집필

정약종의 「주교요지」는 박해 중에도 필사본으로 널리 읽혀져 오다 1864년 제4대 조선 교구장 베르뇌 주교의 명에 의해 목판본으로 간행되어 지금까지도 전해져 오고 있다.

한국 최초의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 초대 회장으로 활동한 정약종은 1801년 1월 10일 신유박해가 터지자 체포돼 곧바로 최고 재판기관인 의금부로 압송됐으며 1801년 2월 26일 42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했고, 정철상도 4월 2일 순교했다.

정약종은 특히 서울로 올라가다가 마재쪽으로 금부 도사가 포졸을 이끌고 가는 것을 보고 자신을 체포하러 가는 길임을 직감, 스스로 금부 도사에게 가서 체포되는가 하면, 망나니의 첫 번째 칼날이 목을 스치자 다시 성호를 그으며 두 번째 칼날을 받은 유명한 일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정약종의 시신은 그의 가족들이 고향 인근인 배알미리(지금의 경기도 하남시 배알미동) 선산에 안장했다. 1959년 4월 후손이 사는 경기도 안산시 반월의 사사리로 이장됐고, 1973년 5월 선산이 매각되면서 근처의 가족묘지로 다시 이장됐다가 1981년 11월 1일 천진암으로 옯겨져 안장됐다.

◆7살 때 부친 선종

정약종이 순교할 당시 정하상의 나이는 7살, 정정혜는 5살에 지나지 않았다.

함경도 무산에서 조동섬에게 교리와 학문을 배운 정하상은 유진길과 함께 앵베르 주교, 유방제 신부와 모방 신부를 영입했고, 최양업, 김대건, 최방제를 중국으로 안내하는 등 21년간 교회 밀사로 활약했다.

정하상은 또 앵베르 주교로부터 신학생으로 선발돼 라틴어와 신학을 공부하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체포된 그해 8월 15일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정하상은 3천4백여 자로 된 장문의 「상재상서」를 집필, 호교론을 펼쳤다.

정하상의 모친 유소사 역시 79세의 나이로 2백30대의 곤장을 맞고 옥중에서 순교했고 정정혜도 동정생활을 하다 체포돼 3백20대의 곤장을 맞고 참수당했다.

정하상의 시신은 정약종과 같이 배알미리에 묻혔다가 1981년 10월 산 주인에 의해 파묘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있은 뒤 남은 유해가 신장성당에 안치되었으며 그해 12월 31일 천진암으로 안장됐다.

정하상 성인은 신학생이었기에 결혼을 하지 않아 손이 없었으므로 형 정철상의 아들 대익을 양자로 맞아 대를 이었다.

정대익은 광섭, 국섭, 성섭 등 3형제를 두었고, 정광섭은 외아들 정규완을, 국섭은 규관, 규선 등 5형제를, 성섭은 규린을 두었다.

정규완은 장손인 낙진과 석진 2형제를 두었고 정낙진은 해영, 해식, 해훈, 해만 등 9남매를 두었다.

◆후손 덕진·욱진·해성 신부

정규선은 유진과 덕진을 낳았는데 둘째 정덕진 신부는 수원교구 소화국민학교 교장으로 사목활동을 해오다 지난해 12월 19일 선종했다. 정규린은 도진과 욱진, 형진 3형제를 두었고 둘째인 정욱진 신부는 미국 뉴욕에서 교포사목 중 은퇴했다. 또 정도진의 아들 정해성 신부는 수원 가톨릭대학 기획관리처장으로 있다가 1984년 10월 24일 과로와 지병으로 운명했다.

이렇듯 정하상 성인이 못다 이룬 사제의 꿈을 그의 후손인 정덕진, 정욱진, 정해성 신부가 이루었으며 이들 세 신부의 모범된 삶은 지금도 교구 사제단 사이에서 귀감이 되고 있다.

정석진 옹에 따르면 증조부인 정대익까지는 고향 마재에 살다가 할아버지 광섭과 국섭 때 군난을 피해 강원도 희룡산으로 피신, 고상과 묵주를 만들어 팔면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정석진 옹은 종교 자유가 조인되자 경기도 안산시 반월동 사사리로 정착해 선산을 이루며 지금까지 살고 있다.

◆「정우회」 조직 매년 가족모임

정하상의 후손들은 시성운동이 무르익던 1983년 1월 정우회를 조직, 지금까지 매년 봄, 가을 두 차례 선산을 단장하고 있으며 지속적인 가족모임을 갖고 있다.

시복이 안 된 정약종 할아버지에 관한 이적을 목격했다는 정석진 옹은 『고향 선산에 있을 때 비만 오면 정약종 할아버지 묘와 정약용 할아버지 산소 사이에 무지개가 떠 있었으며, 사사리로 정약종 할아버지 유해를 이장할 때 별안간 맑은 하늘이 흐려지면서 사람이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심한 비바람이 불어 하관예절을 하는데 애를 먹다 하관이 끝나자 감쪽같이 날씨가 맑아졌다』고 털어놓고 『당시 노기남 대주교와 윤공희 대주교가 배석해 교회 어른들이 이 일을 자세히 증언해 줄 것』이라고 말했다.

정석진 옹은 또 『40이 넘도록 아이를 갖지 못한 한 부부가 정약종 할아버지의 유해 흙을 성호를 긋고 먹자 아이가 생겨 아이 이름을 김 아우구스티노라고 지었다』고 증언하고 『태열로 부스럼이 심했던 교우 최대영씨도 정약종 순교자의 유해 흙을 머리에 뿌리고 잠을 자자 다음날 감쪽같이 나았다』고 말했다.

현재 선산을 지키고 있는 정해만(마티아)씨는 『경기도 광주 검단산에 있던 정하상 성인의 유해가 파묘됐을 때 심하게 훼손됐다』면서 『당시 큰 뼈만 수습하고 잔뼈들을 제대로 추스리지 못한 것이 지금도 후한이 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순교자 후손으로 늘 타인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고 말하는 정해만씨는 소신학교를 마치고 미국 뉴욕에서 의류사업을 크게 하다 선산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귀국, 현재 농사와 사슴농장을 하고, 서울에 조그마한 가게를 운영하면서 순교자 후손들의 삶의 터를 묵묵히 지키고 있다.

리길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