沒我的(몰아적) · 神的(신적)이며 限界(한계)없는 사랑을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마치 내가 너희를 사랑함 같이 너희는 서로 사랑하리니라』(요왕 14 · 34절 15 · 12)
이 사랑의 새 계명의 본뜻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우선 먼저 보편적인 사랑의 계명에 대해서 묵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의 새 계명은 특수하고 고등 사랑법으로서 보통 사랑법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을 우선 먼저 알아야 하겠다. 흔히 우리는 예수님께서 공생활(公生活) 초기에 교법학자와의 대화를 통해서 말씀해 주신 사랑의 계명을 제일 큰 사랑의 계명으로 오산하는 수가 있다. 『네 주 천주를 온전한 마음과 온전한 영신과 온전한 뜻으로 사랑하라 하였으니 이는 가장 크고 제일 큰 계명이요. 제이는 이와 같으니 곧 남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으니 모든 교법과 선지자들의 글이 이 두 계명에 달렸나니라』 (마두 22 · 38-40 말구 12 · 28-31 누까 10 · 25-28) 하신 말씀때문에 그렇게 생각하게 됨도 별로 이상하지 않다. 왜냐하면 『…가장 크고 제일 큰 계명이요…모든 교법과 선지자들의 글이 이 두 계명에 달렸나니라』라는 예수님의 표현법이 우리로 하여금 의심한 여지를 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계명을 잘 분석해 볼 필요가 았다. 즉 어느때 어느날 어느 환경에서 누구한테 무슨 동기로 주셨나가 문제이다. 여러가지로 종합해 보건대 예수님의 공생활 초기라고 생각된다. 그러니 아직도 12종도들이 선정되어 교회의 기반이 완전히 서기 전이다. 둘째로 교법학자와의 대화에서이다. 즉 교법학자들을 깨우쳐 주시고자 하셨다. 왜냐하면 법률학자들이 예수님을 시험코자 예수님께 질문했던 것이다. 『스승이여 법률에 어느 계명이 제일 크오니까?』(마두 22 · 36) 이와같이 사랑의 계명을 깨우쳐 주는 동시에 당신이 인간에게 대한 사랑 때문에 강생하셨음을 또한 가르쳐 주고자 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랑의 보편적인 계명은 이미 구약에 명확히 계시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데우떼로놈서(書) 6 · 5-9까지를 읽어보면 신약에 되풀이 된 것 보다 더 섬세하게 나와있다. 그래서 비록 이 계명이 확고하고 깊은 덕이 요구되나 최고의 사랑방법은 아닌 것이다. 예수님을 가까이 따르던 몇몇 종도들이나 기타 다른 제자들까지도 사랑의 최고 절정에 이르기 까지는 아직도 거리가 멀었고 소화할 능력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새 계명은 공생활의 최초나 중간에 주시기에는 시기상조엿던 만큼 서서히 마음 준비를 시키셨던 것이다. 『누가 만일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버리면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요왕 15 · 13) 하신 말씀이나 또 『착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하여 본 생명을 버리나니라』(요왕 10 · 11) 위대한 교육자시요 인간의 나약성을 너무나 잘 아시는(요왕 2 · 25) 그리스도께서는 제일 심각한 순간에 사랑의 새 계명을 주셨다. 즉 운명하시던 전날 밤에 우리에게 유일한 유언으로써 남겨주신 것이다. 누구나 다 죽기전에 후손들에게 제일 중대한 것을 말해주는 것이 상례이다. 이와같이 예수님께서도 제일 중대히 여기시는 「사랑의 새 계명」을 이 마지막 엄숙한 순간에 주신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우선 먼저 예수님께서 의식적으로 또한 계획적으로 이와같이 하신 그 심정부터 알아듣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노니 곧 너희들은 서로 사랑하라. 마치 내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지니라. 너희가 만일 서로 사랑하면 모든 이가 이로써 너희가 내 제자 되는 줄을 알리라.』 (요왕 13 · 34-35) 이것이야말로 글자 그대로 새로운 완덕이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또한 유일한 최대의 계명이다. 즉 남을 사랑하되 우리가 우리를 사랑함 같이 사랑할 뿐더러 (마두 22 · 39),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사랑하심 같이 사랑하는 그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노니 곧 너희들은 서로 사랑하라』 여기까지는 아직도 사랑의 새 계명이 아닌 것이다. 『마치 내가 너희를 사랑함 같이… 』 여기에 참된 신식 사랑법이 있는 것이다. 이 계명이 얼마나 중대하고 긴급한지 또 예수님께 얼마나 고귀한지 그것을 당신 계명이라 부르시며 「이 계명 지키는 것」이 「님」의 절친한 친구의 태도라고 그 특성을 말씀해 주셨다. 『여기서 모든 이가 너희들이 내 제자인줄을 알아볼 것이니라』(요왕 13 · 35). 예수님께서는 정말 색다른 방법과 위대한 권위로써, 우리로서는 최고라고 생각해 왔던 사랑의 단계 「남을 우리와 같이 사랑하는」 즉 아직도 너무나 인간적이고 내 중심주의적인 불완전한 단계에서, 천주적인 최고의 단예로 옮겨 당신이 우리에게 대한 무한하고 지대한 사랑의 궤도에 옮겨 놓으신 것이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께서 말씀하신 소위 『사랑은 자기부터 시작된다』고 하신 것은 당연한 말씀이나 이는 신 · 구약에 공통되는 보편적 사랑의 정신이지 특수한 사랑 정신이 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소위 사랑의 표준을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그런데 들것이 아니고, 더욱 무한하고 한계없는, 국경과 민족을 초월하는, 그 사랑에 즉 그리스도의 마음에 두고 「님」의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의 비결을 알아들어 우리 형제와의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하신다. 만일 우리의 사랑의 예수님께서 피조물을 사랑하시는 바로 그 사랑이 될 때(천주님이 인간을, 조물주께서 피조물을, 의인이 죄인을) 우리의 형제에는 마침내 완전한 것이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형제들을 한결같이 사랑할 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잘 맞는 사람이나 잘 안맞는 사람이나 막론하고 오히려 우리를 미워하는 원수들을 더욱 또한 우선적으로 사랑해야 할 것이다 (마테오 5 · 43-48 참조)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들을 위하여 생명을 버리셨고 그들을 위하여 아직도 제대 위에서 속죄)贖罪)의 제사를 천주 성부께 올리고 계시며 그들 때문에 성체 안에 참으로 실제적으로 또한 본질적으로 현존하시고 그들을 먹이려 항상 대기하고 계시다. 그 구속의 피! 거룩한 피! 오 얼마나 고귀한 진리인고?! 우리의 형제애가 만일 부족하고 한계가 있다면 무슨 이유를 가지고 그 정당성을 이러한 예수님 앞에 변명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그 자체가 자아모순(自我矛盾)밖에 안될 것이다. 『누가 만일 천주를 사랑하노라 말하며 그 형제를 미워한다면 이는 거짓을 마하는 자니라』 (요안 제1서 4 ·20) 예수님의 사랑은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버려두고 길잃은 양 한마리를 찾으려 나서는 착한 목자의 사랑이요 의인이 반역자 대죄인인 인간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는 미련하고 미친 사랑이다. 이것이 소위 바오로 종도께서 말씀하신 바로 십자가의 우몽이다. (코린터 전서 1 · 22-23) <계속>白南翼 神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