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죽으면 이 세상 인생 나그네 길은 끝나는 것이고 그로부터 응분의 영원한 생명이 시작된다. 죽음은 죽음이 아니오 영생의 관문이다.
다만 생명의 형태만 바뀌는 것이지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일단 창조된 인간은 다시 무로 돌아가지 않고 다만 이 세상에서 살던 자기의 행실대로 상이나 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상이나 벌을 받기위해 하느님은 각 개인을 심판하신다. 그 심판이 사심판과 공심판 두 가지 있다는 것은 이미 말한바와 같다. 사심판의 판결은 이렇다. 평생을 착하게 살다가 은총 지위에 있는 영혼은 영복소에 들어갈 것이고 일생을 하느님의 계명 밖에서 살던 죄인은 영벌의 곳으로 보내질 것이고 조금만 보상하면 크게 나쁘다고 할 수 없는 영혼은 그만큼의 기간을 보상하려 단련을 받을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밝혀둘 것은 흔히<천당간다 지옥간다>라고 장소적인 표현을 할 때가 많으나 천당이나 지옥을 그렇게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어떤 상태>로 생각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영원한 생명 혹은 영복을 지극히 원하던 황금덩이를 손에 쥔 사람의 만족해하는 그 상태는 행복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보고 싶던 어머니 품에 안겨 어머니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만족과 사랑과 평화에 잠겨있는 어린 아기의 모습을 생각할 때보다 더한 행복이 있겠는가!
영복이란 여기에 비할 수 없는 무한한 행복의 극치에 달했을 때고 그 행복이 영원히 계속 한다 할 때 그 상태를 영복이라 할 수 있다.
반대로 영벌이란 영복의 정반대의 극악의 고통의 상태로 이해하면 된다. 무더운 날에 종일을 걷고 땀을 흘렸을 때 느끼는 갈증은 극심하다. 그러나 마실 물이 없고 끝없는 길을 계속해서 걸으면서 영원히 한 컵의 물도 못 마시리라는 절망된 상태를 생각하라. 그러나 그 상태를 자유로이 끝내지도 못하고 무한히 계속한다면 그 얼마나 큰 고통이겠느냐!
영벌은 이 고통의 수만수억 갑절의 고통보다 더하다면 이해가 갈 것이다.
그럼 왜 이런 큰상이나 벌을 잠깐 살은 세상 삶으로 결정하느냐? 너무나 가혹한 일이 아니냐 하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인간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영복을 얻기에 넉넉한 은총과 시간과 능력을 주셨고 어떤 사람이나 환경이나 조건에서도 능히 영벌과 영복을 추구할만한 힘을 주셨다.
그것을 선택하고 추구하는 것은 인간에게 준 자유를 행사하므로 될 수 있게 하셨다.
진리를 거절하거나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의 자유다.
그렇기 때문에 상이나 벌도 자기가 원한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