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여가를 누리면서

이경숙·성악가 서울대 음대 교수
입력일 2021-01-20 15:47:19 수정일 2021-01-20 15:47:19 발행일 1970-07-05 제 725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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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공들의 손길에 심취
캬라반처럼 떼지어 바다로
장미는 정성으로 탐스럽게
노래를 부르고 가르치며 언제나 소리 속에서 살고 있다 보면 자연히 나에게 휴식의 첫 조건은 조용함이다. 악음이든 순음이든 간에 소리에서 해방된 조용한 순간에 벌써 나의 안식은 시작된다.

추운 겨울이나 지리한 장마철에는 책을 읽으며 지낸다. 어느 여름에는「파스테르나크」를 또 어느 겨울에는「시몬느 베이유」를 읽으며 마음은 광활한 들을, 또 소용돌이치는 싸움터를 달린다. 책과「라임」내음새도 시원한「김레트」나 뜨거운 커피가 있으면 엄동설한이나 지리한 장마도 오히려 고맙게 느껴진다.

차를 갖게 된 후부터 일요일이면 무조건 서울을 벗어나간다. 주말의 여행으로는 몇 해 전에 갔던 강화가 좋았고 또 깊은 눈보라 속의 강진행도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가 즐겨 찾는 곳은 광주의 도자기 굽는 곳이다. 그릇이 빚어져서 다듬어지고 유약을 발라 굽는 과정을 보고 있으면 그 정성 어린 도공들의 손길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송진 내음새가 물씬한 나무를 때서 굽는 데 하루가 지나도 지글지글 더운 기운이 가마에서 난다. 새로 구운 그릇을 보면 너무나 반갑다. 청자 백자를 몇 개씩 골라서는 찻잔으로도 쓰고 접시로도 쓰는 데 품위가 있고 아치가 있어 좋다.

여름에는 바다로 나간다. 만리포 일광이 좋았었다. 올해에는 몇 가족이 캬라반 같이 떼를 지어 경부고속도로로 부산까지 갈 예정이다. 행선지는 해운대이지만 그곳에서는 이틀만 묵기로 하고 가는 도중에 아무 데에서나 쉴 작정이다. 산이 좋으면 산에 오르고, 강물이 맑으면 그곳에 배를 띄우며 즉흥적인 휴가를 가지려고 한다. 사람이 많이 모이지 않고 정해진 시간에 구애되지 않는 여행을 해보려는 것.

봄부터 가을까지 집에서의 나의 여가는 거진 꽃 가꾸기로 보낸다. 요새 같은 공해의 강박관념 속에서는 교외에 있는 집이 여간 고맙지 않다. 산도 보이고 아침이면 여러 새들의 노랫소리도 들려서 서울에서도 전원생활을 하는 것 같다. 꽃을 가꾸다 보니 이력이 좀 났는지 꽃은 장미와 국화만을 가꾸고 있다.

꽃 중의 꽃인 장미는 서리 나릴 때까지 충실하게도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몇 해 계획으로 온통 장미동산을 만들려고 한다. 한 백 종류까지 길러보고 싶다. 장미는 손이 많이 간다. 힘들이지 않고 이루어지는 것이란 거의 없는 것이고, 또 있다 해도 보람을 느낄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일깨움을 꽃 가꾸는 가운 데 배운다. 정성이 깃들어야 탐스럽게 꽃 피우니 말이다.

집을 둘러싼 블로크 담에는 담장이를 쭉 돌아 심어 놓았다. 벌써 일곱 해가 지나서 온통 푸른 잎이 무성하다. 그것이 가을에는 오묘한 단풍으로 변하며 좋은 자연의 벽화를 이루어 준다. 화단을 정리하고는 잔디에 주저앉아 잡초를 다듬는다. 싱그러운 푸르름 속에서 흙을 매만지는 시간에 나는 모든 것을 잊게 되고 삶의 고향으로 가까워진 아늑함을 느낀다. 우리는 흙에서 났고 또 흙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손에 닿는 흙의 감촉은 그지없이 평온함과 안정감을 준다.

진이도 꽃에 물을 주고 흙을 다듬으며 엄마를 많이 도와 준다. 주단 같이 고른 잔디에 앉아 차디찬 맥주를 마시며 감나무를 쳐다본다. 감이 많이 달려 있어 올해에는 붉은 감이 주렁주렁 열릴 것 같다. 해가 고요히 서쪽으로 기울고 조용한 바람이 나뭇가지에 인다. 이 한적함, 이 평안함, 이것이 무엇보다도 나의 복된 여가의 진수이다.

이경숙·성악가 서울대 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