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교회

북『아일랜드』종교분쟁

입력일 2020-11-02 14:59:15 수정일 2020-11-02 14:59:15 발행일 1971-08-29 제 780호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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쌓였던 울분 한꺼번에 터져
종교분쟁 내란화할 기미 짙어
양분상태 통합에 주력할 듯
정치참여 주택문제 등에 심한 차별대우
영군과 구교도간 치열한 혈전 벌여
차별과 멸시속에서 참아왔던 반세기의 울분이 한꺼번에 터졌다. 굉음이 지독한만치 그 위력도 엄청나다. 북 아일랜드의 종교폭동은 급기야 내란화할 기미가 진다. 종교를 둘러싼 신ㆍ구교간의 분쟁은 영군이 신교측을 방어하고 나섬으로써 마침내 영군과 구교도의 치열한 살욕전을 빚고있다.

이 같은 사태는 신교도들로 구성된 북 아일랜드 자치정부가 구교도에 대해 극도의 차별과 정치적 압력을 가함으로 구교도가 이에 분기, 폭동을 일으키자 영국정부는 가치령인 북 아일랜드의 안전을 회복하고 폭동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영군을 투입하여 총격전을 벌인데서 시작되었다.

원래 영령이던 아일랜드 섬은 1차대전중 반란을 일으켜 1921년에 남부 26개주가 분리되어 자치권을 획득, 37년에는 완전 독립되어 아일랜드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주민의 대다수가 영국에서 살았던 겔트족으로 90% 이상이 구교도이다.

반면 북부 6주는 영 본토에서 건너온 신교도가 다수를 차지하여 영연방의 일원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북 아일랜드에서의 다수파인 신교측과 소수파인 구교측의 대립은 바로 남북으로 분할될 당시부터 시작되었다. 북 아일랜드 1백50만 인구중 1백만이 신교도로 그들이 권력을 장악하여 특권을 계속 휘두루려 하는 반면 이에 굴복지 않는 구교도들은 남부아일랜드 공화국의 지원을 받으며 줄곧 세력을 키워왔던 것이다.

그런데 신ㆍ구교간의 종교분쟁은 그 밑바탕에 있어 정치ㆍ경제등의 복잡한 문제들이 뒤얽혀있다고 하겠다. 북아일랜드에서의 차별문제는 남 아프리카나 로데시아 그리고 미국읜 흑백분규 못지않게 심각하고 중대한 문제이다.

특히 구교도의 정치참여나 주택문제 그리고 사업 등의 문제에 대한 신교 측의 차별대우 내지 탄압은 종교 폭동의 근본원인이 되었다.

예를 들면 정치참여에 있어서 경제적으로 부유한 신교도는 한사람이 20표 내지 30표를 투표할 수 있는 반면 가난한 구교도엔 세대주 한사람에 한표만을 인정하였다. 뿐만 아니라 선거구 선정에 있어 구교도 거주지는 아예 대상에서 제외해버린다.

주택문제 또한 차별이 극심하다. 구교도가 입주를 신청한지 10년이 지나도 허가가 나지않는데 비해 신교도는 불과 몇분만에 입주허가가 난다. 이러한 차별대우에 항거, 구교도들은 공민권 운동을 전개했다. 이에 신교도들이 이 운동을 탄압함으로써 폭동이 시작된 것이 1968년 10월이었다.

지난 2년동안의 종교분쟁으로 신ㆍ구 양측의 인명피해나 재산손실 등은 정확히 헤아릴 순 없다.

그러나 쌍방간의 사상자와 파괴를 무릅쓰고 끈질기게 폭동은 계속돼 왔다.

구교도들은 신교측의 무력행사에 대처하기 위해 아일랜드 해방군(IRA)를 조직, 정면으로 실력대결을 펴기에 이른 것이다.

올 8월에 접어들면서 영군은 심한 상처를 입고쓰러진 구교청년을 구하러 뛰어든 한 신부와 뒤따르던 청년을 살해한 사건을 비롯하여 구교의 트럭 운전사를 고의적으로 사살하고 많은 죄없는 희생자를 속출시켰다.

특히 현재「울스토」를 기점으로「벨파스트」「런던데리」등지에서 맹렬히 일어나고 있는 폭동의 원인은 아일랜드의 국무총리 포율크너가 아일랜드 해방군의 테로협의자와 지도자들을 일련의 심문없이 영군으로 하여금 강제체포 구류시킨데 대한 구교측의 반발이라고 하겠다.

아일랜드 해방군은 아일랜드가 남북으로 분리되는 것을 극력반대하여 필요하면 총과 폭탄을 사용해서라도 북아일랜드와 남부아일랜드 공화국을 통합시키려는 의도하에서 폭동을 이끌어가고 있다고 보여진다. 여기에 동조하는 구교도들과 이를 원조하는 아일랜드 공화국은 분리된 아일랜드가 한 개의 정부밑에 통합되어 마침내는 영국의 존재를 아일랜드에서 몰아내고 단독 자치정부를 수립코자 하는것이다.

그러나 북아일랜드의 신교도들은 이를 극력 반대하여 영국과의 관계를 더욱 더 절친하게 하는 한편 절대 불가침의 관계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북아일랜드에서의 신구교 측의 분쟁을 주시하는 세계교회협회(WCC)는 상호간 화해를 맺도록 제안했다.

동회의 칼슨 블랙 박사는 자신은「아르마그」의 콘웨이 추기경과 간접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고 밝히면서 세계교회협회는 건설적이고 가능한 평화창조의 노력과 여하한 교회일치도 촉진시키려는 준비가 돼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바티깐」의 일간지「롯세르 바또레 로마노」지는 북아일랜드에서의 신ㆍ구교간 분쟁의 진상을 규명하는 해결을 요청하면서 현 사태가 과거 수십년동안의 구교도에 대한 시민으로서 사회적인 불평등과 차별대우에 대한 원한이 터진 것이라고 해석했다. 동지는 현 북아일랜드의 유일한 해결책은 평화를 이룩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이는『새로운 금지령과 진압』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한편 콘웨이 추기경은 라디오 방송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현 종교분쟁은『간단히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힘주어 말했다.

콘웨이 추기경은 특히 올해들어 구교 신부를 포함한 12명 이상의 구교도가 살해됐고 300명 이상의 해방군 지도자들이 체포됐으며 무죄한 희생자를 낸 영군의 처사에 당황하는 빛을 감추지 못했다.

이어 그는 가톨릭 교인들에게 이 같은 사태에 처한 그들이 감정에 치우치지 않도록 경고하는 한편 그 감정이 자연적인 것이든 강한충동에 의한 것이든 간에 그 결과는 흔히 심각한 피해나 죽음에 이르게 한다고 지적하고 그와 같은 어리석은 짓을 범치않도록 극력 당부했다. 추기경은 또한 현금사태에 대한 가능한 해결책을 묻는 기자 답변에서 현재로서는 요술지팡이와 같은 간단한 해결책이나 성명서 혹은 제스쳐가 상황을 변케할수 없다고 잘라말했다. 동시에 그는 지금의 사태가 아일랜드 분할 당시로 되돌아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끝으로「울스터」정부나 영국정부가 이 사태를 수습키 위한『간단하고 요소적인 행동』에 대한 가능성을 묻는 자리에서 콘웨이 추기경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어떤 류의 간단한 일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자신은『정치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장기간이 필요하리라고 말하면서 현 폭동의 긴급문제는 표면상의 문제로 궁극적인 문제해결은 반드시 정치적인 문제해결로 끝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현 북아일랜드의 종교분쟁이 순전히 종교문제로 인해서만 발단되었다면 문제는 간단하고 빠른 시일내에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분쟁의 배후에 뿌리박고 있는 정치ㆍ경제ㆍ사회적 문제는 타당한 대책이나 해결조건 없이 끝나리라고는 보여지지 않는다.

이런한 시점에서 전 세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북 아이레의 종교분쟁을 해결하는데 있어 뭣보다 영국의 태도는 중요하리라 보여진다. 이와 아울러「바티깐」과 세계교회협회의 역량을 테스트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

(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