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깐市 21일 로이타合同】「르네상스」시대 최고 걸작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조각품 하나가 정신 이상을 일으킨 것이 틀림없는 한 사나이에 의해 거의 복원이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졌다. 일요일인 21일 낮「바티깐」시「성 베드로」대성전에 모인 신자들 사이를 뚫고 레인코트를 입은 한 텁석부리 사나이가 4백70여년 전 미켈란젤로의 걸작「라삐에따」(슬퍼하는 성모 마리아) 상이 놓인 단 위로 뛰어올랐다. 항가리 태생 호주인으로「시드니」에서 관광차 왔다는 라스즈로 토드(33)란 이 사나이는「코트」속에 감추어온 5kg짜리 망치를 꺼내 눈 깜짝할 사이에 4번의 타격을 가했다.
성모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무릎 위에 안고 애통해하는 모습의 이 흰 대리석 조각품(3천5백kg)은 그가 휘두른 첫 망치질에 성모의 왼쪽 팔꿈치 밑부분이 완전히 부서져 나갔으며 이어 성모의 왼쪽 눈과 베일 및 왼뺨 그리고 코가 차례로 박살나 버렸다. 외출 중이던 한 이태리 군인이 그를 끌어내려 폭행을 가하려는 노한 군중들을 가까스로 피해서 성전 밖으로 끌어냈다.이태리 경찰 당국에 넘겨지기 전에「바티깐」관리들의 심문을 받은 그는『내가 예수 그리스도이다.당신들이 나를 죽여 주면 더 좋겠다. 그러면 나는 천국으로 가게 될 테니까』라는 등 횡설수설했다.
1498~1500년 사이 미켈란젤로가 만든 이 세계적 걸작품이 부서졌다는 소리를 들은 교황 바오로 6세는「성 베드로」대광장에서의 정오기도를 허둥지둥 마치고 성당 입구 바로 오른쪽에 있던 이 상 밑으로 달려와 굳은 얼굴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1964년「뉴욕」세계 박람회에 전시되었을 때 1천만 달러(39억 원 상당)의 보험금이 붙었던 이 상은 그 후 외부 반출이 일체 금지되어 왔으며 한 달 후에는 특수 제조된 유리 방책을 두를 계획이었다고「바티깐」당국은 말했다.
「라 삐에따」상은 또 미켈란젤로의 많은 작품 중 유일하게 그의 친필 서명이 든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작품이 완성될 무렵 성모의 모습이 너무 젊다는 항간의 입방아에『미켈란젤로가 이를 조각한다』란 글귀와 서명을 넣었다는 것.
이태리 내외 저명한 조각가들은 망가진「라 삐에따」상을 보고 난 뒤 복원이 절망적이란 견해를 보였는데 페데리꼬 알렉산드리니「바티깐」대변인은 미켈란젤로 조각술의 면밀한 연구와 함께 많은 시간이 필요한 지난한 작업이지만 복원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바티깐시22일 로이타 同合】교황청 전문가들은 21일 한 정신병자의 망치에 파괴된 미켈란젤로의「삐에따」상을 원상 복구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으나 외부 전문가들은 이러한 주장에 회의를 품고 있다. 이태리 복원연구소 부소장 조바니우르바니 박사는 기자들에게 예수 시체를 안고 있는 이 성모 마리아 상은 영원히 불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우르바니 박사는 마리아 상의 부러진 팔과 코는 복원될 수 있을지도 모르나 왼쪽 눈의 파손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교황청 미술복원연구소 소장 데오클로지오 레디그 데 캄포스 씨는 기자회견에서 1498년에서 1500년 사이에 만들어진 미켈란젤로의 이 걸작품은 완전히 복구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이태리의 가장 유명한 조각가의 한 사람인 지아코모만주 씨는 이 작품의 복원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며 오직 나만이 그것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성 베드로」대성진 오른쪽 제단 위에 놓여 있는 이「삐에따」상은 당시 프랑스의 그로스레이 추기경의 부탁으로 미켈란젤로가 24세 때 완성했는데 구상이 섬세하고 선이 부드러우며 모양이 우아하고 아주 세세한 부분에까지 신경을 쓴 작품으로 미켈란젤로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고있다.1475년 3월 6일 이태리의「카프레세」에서 출생, 1564년 2월 18일「로마」서 사망한 미켈란젤로는「르네상스」의 대표적 인물이며 최고의 조각가로 손꼽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