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한담

[일요한담] 크리스찬 사랑의 기도 / 변갑선 신부 6.

변갑선 신부
입력일 2020-03-02 13:55:12 수정일 2020-03-02 13:55:12 발행일 1975-02-09 제 949호 4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겨울철의 어두운 밤에도 동굴속의 하얀 성모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하소연 하는 신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신자는 무엇 때문에 성모님께 매달리고 있는 것일까? 병원에서 갓 수술을 받은 자식의 건강회복을 위하여 애원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벌써 여러해 전부터 소식조차 끊어진 이북의 자녀나 부모나 본당 신자와 친구들을 돌보아 주시라는 사연일까? 혹은 감옥에 있는 분들의 건강과 자유를 의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춘궁기에 굶주리게 될 가난한 이웃들의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인간회복을 위하여 기구하고 있을법도 하다. 동족끼리 외국에서 무기를 얻어다가 서로 죽인 부끄럽고 비참했던 형제 살해의 전쟁이 재발될까 우려되어 평화의 모후신 성모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도 바람직하다.

수년간 열심히 수험공부를 한 학생이 가족과 한가지로 천주님께서 성의와 노력을 보시고 합격의 은혜를 내려주십사 하고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불합격이란 쓴 잔을 마시고 온 집안이 다 주님의 인자하심에 의심을 품었다는 실화가 있다.

기도는 굳은 믿음과 겸손한 마음으로 이웃과 서로 화목하여 항구히 바쳐야 한다. 바리세이는 남의 죄를 생각하며 판단하면서 기도를 바쳤다. 자기가 죄가 없으면 무죄하게 이끌어주신 주님의 은혜를 알고 감사했어야 하지 않았는가? 죄 중에 교만한 죄가 가장 큰 죄임을 인식해야만 하지 않았는가? 열심한 신자라도 기구중에 분심이 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남의 죄를 생각하면서 기구하다가는 완전히 천주님에게서 마음을 이탈시키는 잡념에 빠질 수 있다. 나는 이와같은 부끄러운 경험이 없는가? 우리는 기도하는 순간만이라도 한마음 한뜻이 되어야만 하겠다. 「둘이나 셋이 모인 자리」란 말은 사랑의 일치를 의미하지 않는가. 베드로 사도가 억울하게 잡혀갔을때 교우들은 문을 닫고 기구했지만 서로 화목하고 단결하여 사랑속에서 기도를 바쳤기 때문에 천주님께서 그들의 청원을 허락하셨을 것이다. 초기 신자들보다 더 친절하고 다정한 신자들은 일찍이 없었을 것이다.

때로는 기구중에도 이웃을 용서하기가 어려움을 체험한다. 그러나 힘들지만 원수를 용서했을 때의 감격스러움도 체험하지 않을가? 그리스도와 스테파노도 자신을 살해하는 사람들을 악당이라고 하기는 커녕 그들을 위해서 용서와 축복을 기원했다.

순교자들의 장함은 사자 입에 먹히고 불속에 이끌리어 죽음을 참은 용기보다도 죽는 순간까지 원수를 용서하는 기도를 바칠 수 있었던 사랑때문이 아닐까? 수용소에서 기아와 갈증에 허덕이면서도 기도를 계속하다가 주사를 맞고 죽어간 꼴베 신부님을 온 천하가 감격하여 마지않는 이유도 원망없이 이웃을 끝까지 용서하고 사랑한 때문이 아닌가? 약한 인간도 주님의 은총을 받아서 강해질수 있기 때문에 오늘의 현실속에서도 크리스찬 이상을 간직해야 할 것이다. 천주님 앞에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을 특별히 기도중에 유의해야 한다.

바오로 사도께서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서로 갈라져서 드리는 기도는 미사성제까지도 무효하다고(코전1ㆍ11) 말씀하실 정도로 기도하는 신자들의 용서와 사랑의 일치가 강조되고 있다.

변갑선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