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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우 신부 사순절 특강] 3 십자가상 그리스도의 요구 "목마르다"

입력일 2020-01-06 14:41:30 수정일 2020-01-06 14:41:30 발행일 1977-03-27 제 1050호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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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마르다 절규하신 예수는 너무나 인간적
예수의 목 마름에 동참하면 공허감 채울 수 있어
성부와 사도들과 온 인류를 갈망하신 외침
타락한 현대인의 행동은 현대화된 우상 숭배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기 전 예수님은『목마르다』고 외쳤다. 여기서 말씀하신「목마르다」의 뜻은 그동안 당하신 수없는 고통으로 목이 터질 듯이 컬컬하다는 뜻이 되겠다. 그러나 이 말뜻을 그렇게 간단하게만 볼 수 없는 것 같다. 예수님의 수난을 예고한 시편 21편을 보면『마치도 엎질러진 물과 같이 뼈들은 묻어나고…』『하느님 내 하느님 어찌 버리십니까…』라고 기록돼 있다. 예수님은 육체적인 목마름뿐만 아니라 마음의 갈증 때문에도 목말라 하셨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십자가 밑에는 마리아 사도요한 마리아 막달레나 외에 누가 있었는가?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억지로라도 임금으로 모시려 했던 백성들은 다 어디에 있었는가? 『목마르다』는 예수님의 절규는 당신이 아버지로부터 사랑하시던 제자들로부터 버림받으심에 대한 마음 밑바닥에서 토해진 소리다.『목마르다!』이 짧고도 간단한 말은 아버지와 사도들과 나아가 온 인류를 갈망하신 소리인 것이다. 예수님의 심오한 기도생활 행하신 기적들은 우리와 거리가 먼 것들이지만 목마르다고 외치실 때의 그 마음 상태는 우리와 너무나 가까운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다 외로운 존재이다. 인정하기가 몹시 아프고 싫지만 본래 외로운 존재이다. 아마 그것은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의 몸처럼 우리 인간 역시 이 세상의 것도 아닌 동시에 아직은 저 세상의 것도 못 되기 때문이다.「하느님 바라기」(해바라기에 비유)인 인간이 하느님과 하나가 되기 이전에 배불리 먹고 마신다고 해서 목마르지 않겠는가? 외롭지 않겠는가? 하느님께서 일부러 우리의 본고향이신 당신을 찾아가도록 외로운 존재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그 외로움은 나쁜 것도 아니고 피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그 외로움을 피하려고 하는 것이 나쁜 것이다. 둔한 우리 인간들은 하느님 외에 그 외로움을 덜어줄 어떤 것도 이 세상에는 없다는 것을 모르고 그 외로움을 없애기 위해 온갖 짓을 다한다. 하느님이 아닌 것을 숭배하는 것은 우상 숭배다. 외롭기 때문에 쾌락을 찾고 술에 취하고 관심을 끌기 위해 색다른 짓을 하는 현대인의 행동은 역시 현대화된 우상 숭배다. 외로운 것은 넋의 아픈 상처이며 마음 한구석에 생긴 커다란 구멍이다. 이 구멍은 돈ㆍ술ㆍ여자로도 채워지지 않고 출세ㆍ칭찬ㆍ아부로도 차지 않는다. 모르는 척 없는 척해도 그대로 남아 있다. 솔직히 말해 우리는 외롭다. 최후만찬 때 사랑하는 어머니와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보자.『아버지 이 사람들이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예수님이 우리와 당신이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신 것은 뜻밖의 일이 아니다. 공생활 중에도 종종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이와 같이 아버지의 영광과 우리의 일치를 항상 언급하시던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일치를 갈망하시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예수님의 욕망은 인간으로서 가장 올바르고 알맞는 것이므로 예수님이 목말라 하시던 대상에 우리도 목말라 한다면 우리 마음속의 구멍도 채워질 것은 분명하다. 예수님은 목마르다고 하신 그 말씀으로 우리가 구원되는 길을 보여주셨다. 즉 하느님을 섬기면서 이웃과 같이 삶을 나누는 길을 보여주셨다. 많은 경우 20년을 같이 살아온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정말 터놓고 삶을 나누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아무리 오래 같이 살아온 부부라도 같은 현상이다. 이것을 보면 주위에 사람이 많다고 해서 오래 사귀었다고 해서 함께 산다고 해서 삶을 나누는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남들과 다소라도 삶을 나누기 위해선 다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 내 삶에서 하느님이 첫째가 되어야 한다. 둘째 다른 모든 우상을 버리고 나서도 버리기 제일 어려운 나 자신에 대한 우상을 깨뜨리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조건은 사실상 하나이다. 하느님이 첫째라는 것과 나 자신이란 우상을 깨뜨리는 것은 같은 것이란 말이다. 몇몇 사람이 진정한 삶을 나누면 서로의 담을 허물고 하나가 된다면 그것이 바로 하느님을 비춰 드러내는 거울인 것이다. 이런 의미의 공동체가 있다면 바로 거기에서 하느님의 영광이 이 세상에서 가장 뚜렷하고 눈부시게 드러나는 것이다. 함께 산다는 것은 바로 천당이다. 그러면 이 천당과 같은 생활을 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어떻게 하면 하느님이 첫째가게 할 수 있을까?「나」라는 우상을 깨뜨리는 것이라고 앞에서 말했다.

하느님처럼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나를 부끄러워하며 남이 보지 못하게 성을 쌓고「나」아닌 사이비 나를 만들어 그것을 남에게 내세우려는 우상을 깨뜨려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버릴 것을 사수하고 잃어버려야 할 것을 사수하는 것은 어리석음이요 비극이다. 십자가상에서 목마르다고 하신 예수님은 참으로 약하고 불쌍한 예수님께 끌려가고 스스로 달려간다.『목마르다』이 한마디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고 가르치셨다. 목말라 하신 대상인 하느님의 영광과 우리의 일치에만 구원이 있다는 것,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는 일치는 불가능하다는 것, 있는 그대로의 나를 미워하지 말고 오히려 사랑하라는 것을 뼈저리게 원하셨고 가르치셨다. 하느님 아버지와 온인류가 하나가 되는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는데 같은 목적지로 가려는 우리가 다른 길로 갈 수 있겠는가?

껍질을 뚫지 않고는 싹이 돋을 수 없듯이 우리도 우리의 교만과 껍데기를 고통으로 부수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