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신뢰회복운동 취지문(전문)

입력일 2019-10-28 11:07:50 수정일 2019-10-28 11:07:50 발행일 1988-11-13 제 1630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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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존엄ㆍ사회규범 제시 위해 노력”


한국 천주교 평신도 사도직협의회는 11월 13일 평신도의 날을 기해 신뢰회복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로 하고 신뢰회복운동의 취지문ㆍ실천과제ㆍ계획 등을 결정, 13일 전국 각교구 본당차원에서 실천운동에 들어가기로 했다. 이에 본보는 평협이 의욕적이고 지속적인 사업으로 준비해온 신뢰회복운동의 취지문 전문(全文)을 게재한다. (편집자 註)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세상만물 중 가장 존귀한 존재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존중을 받는 인간은 누구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중받을 수 있어야 하며, 또한 인간답게 살수있어야한다.

그러기위해서는 인간관계가 원만해야 하고, 서로믿을 수 있는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어야한다. 인간관계가 서로 믿을 수 없는 것이 될 때 질서가 잡히지 못하고 협동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약속도 지켜지지 않는다.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사회분위기 속에서 질서의 기본이 되는 법이나 규범이 지켜질 까닭이 없다. 혼자서 법과 질서를 지키다가는 공연히 자기만 손해 볼 것이라는 불안에 싸이게 되고 이러한 불안은 불신감을 불러일으킨다. 불안과 불신감은 결국 사회윤리를 거스르는 비양심적인 행위를 하고서도 법에만 저촉되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심리를 유발하고 만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인간과 인간의 불씨를 낳고 있지는 않은가?

오늘을 사는 이 땅의 우리들은 무엇보다 우리자신이 만들어낸 것들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다. 예컨데 콩나물과 두부조차도 유해식품으로 판정받는 것이 많고 보통 쌀에다 기름을 발라 윤기 나는 경기미인양 속임수를 쑤는 일도 있다. 입으로 들어가는 식품마저 안심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고 보면 도대체 누구를 믿고 무엇을 먹어야할지 답답해진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내 잇속만 차리려는 데서 속임수가 생겨나고 속임수는 불신을 가져온다. 남이야 죽든 말든 나만 잘 먹고 잘살면 그뿐이라는 행위가 서로를 파멸의 길로 이끌어간다. 질서를 파괴하는 이런 일이야말로 창조주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현상이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향상을 특징으로 하는 현대문명의 발달은 윤리와 도덕의 조화 있는 발달을 아울러 요청하는데도 우리의 현실은 이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빠른 속도로 경제성장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근대화는 어느덧 능률의 극대화만을 의미하게 되었고, 경제 제일주의가 지나치게 물량적인 팽창에만 치우친 나머지 황금만능의 풍초를 몰고 왔다. 산업사회에 따른 경제윤리가 제대로 세워지지 못한 상황에서 한탕주의와 배금사상이 만연해 경제 불신을 일으켰고 돈에 대한 무서운 애착이 사회 안에 퍼져 돈 그 자체를 행복의 원천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아졌다.

돈을 앞세우다 보니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강조하는 정신문화가 크게 뒷걸음치게 되었고, 사람이 돈을 쓰는 것이 아니라 돈의 노예가 되고 사람이 기계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기계의 부속품처럼 취급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우리나라가 산업재해와 교통사고 사망률이 세계1위라는 사실도 이러한 맥락에서 살필 수가 있을 것이다.

정치 공동체가 공동선을 제대로 추구하지 못한 데에서도 불신의 벽을 쌓아온 것이 사실이다. 특히1인 장기집권의 병폐와 정통성을 잃은 공권력이 적지 않은 비리를 저지르는 가운데 개인과 개인, 정부와 국민 사이에 불신의 골을 더욱 깊게 파놓았다.

행정부가 국민의 신뢰를 잃게 되면서 입법부와 사법부, 그리고 교육계마저 신뢰를 잃게 되고, 이러한 불신은 언론에까지 확산됐으며 언론이 불신을 조장하는 사례까지 있었으니, 이는 바로 공권력에 대한 불신과도 직결되는 문제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을 모두 남의 탓으로만 돌리면서 다른 사람의 가슴만 치도록 강요할 수는 없다. 같은 시대를 함께 살며 그들의 잘못을 방조하거나 그 잘못에 동참한 허물이 나에게도 있는 까닭에서이다. 『너는 형제의 눈 속에 든 티는 보면서도 어째서 제 눈 속에 들어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하신 우리 주 그리스도의 말씀을 묵상하며 넓은 의미에서의 연대성 원리에서 우리도 그 책임을 나누어 가져야 할 것이다.

가진 이와 덜 가진 이의 격차와 노사간 지역 간의 갈등 또한 불신을 조장하는 원인이 되고 있으며 이러한 갈등과 불신이 신앙을 가진 이들 사이에서도 공공연히 번지고 있다는 사실, 특히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임을 고백하는 하느님 백성을 사이에서도 성체를 모시고 돌아서기가 바쁘게 바오로파니, 아폴로파니, 고향이 어디니 따지면서 반목하는 등 부끄러운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

믿을 수 없는 인간과 믿고 살수 없는 세상. 이는 분명 하느님의 질서를 거역하는 일이며 인간의 길을 역행하는 현상이다.

인간의 길은 교회가 걸어야하는 1차적이고 근본적인 길이다. 그리스도 친히 따라 걸으신 길이며, 변함없이 강생과 구속의 신비 속을 거쳐 가는 길이 곧 인간의 길이다. 때문에 오늘의 교회는 늘 새로운 방법으로 인간의 상황을 바르게 파악해야하고 시대의 표징을 바로 알아듣도록 일깨우면서 인간의 생활을 보다 인간답게 나가도록 도와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일이 없어야하며 인간스스로가 각자의 생활을 그 진정한 존엄성에 합당하게 이끌어줘야 한다. 믿을 수 없는 세상을 믿고 사는 세상으로 바꾸도록 함께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이에 한국 천주교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는 1980년대 초에 시작한 「신뢰 회복운동」의 불을 다시 지펴, 믿고 사는 세상을 구현하는데 앞장서고자 한다. 지난10월16일 대정에서 열린 한국성체대회를 기해서1989년 10월의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에 이르는 한해를「성체성년」으로 선포하고「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는 대회 주제를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위해「한마음 한몸 운동」을 범 교회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이때 우리공동체가 신뢰회복운동을 더욱 활성화 시킨다고 하는 것은 매우 뜻있는 일이라 할 것이다. 「한마음 한몸 운동」이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시고 죽기까지 하시면서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이끌고자 하신 뜻에 따라 우리도 사랑을 실천하고자 하는 운동이라고 할 때 신뢰회복운동은「한마음 한몸 운동」을 벌이는데 전체가 될 수 있는 정신운동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신뢰회복운동을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주체가 되어 일상생활에서부터 이루어져야하고, 신앙과 사회의 기초공동체인 가정에서부터 믿음이 되살아나야한다. 가정안의 믿음이 더욱 굳건해짐으로써 이 믿음은 이웃과 더 큰 공동체에 까지 그 씨앗을 뿌리게 되고 결실을 거두게 된다.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의 도구나 수단이 될 수 없으며 각 사람은 단 하나밖에 없는 존귀한 존재인 까닭에 그 누구를 막론하고 서로 존중하고 아껴야한다. 이렇게 우리가 서로 존중하고 사랑할 때 서로 믿을 수가 있게 된다.

그러나 믿음은 단순히 생각하고 느끼는 것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으며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행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신뢰를 받으려면 먼저 자신이 믿는 것을 몸소 실천해 옮길 수 있어야한다.

인간은 어느 누구에게나 할일이 주어져있다. 자기가 맡은 일을 성실하게 이행할 때 사람들은 그를 신뢰할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각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이웃을 속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인간은 나약하기 때문에 자신의 힘만 믿고서는 바라는 바를 성취할 수가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굳게 의지 하고『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해주십시오』라고 청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새롭게 자기반성을 하면서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해 큰일에 이르기까지 신뢰받을 수 있도록 실천해야 할 것이다.

신뢰회복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면서 우리 한국천주교 평신도들은 인간의 길로 바로가기를 가르치는 교회의 정신에 따라 다음과 같이 다짐하며 이를 생활 속에 심어 나가고자 한다.

신뢰회복을 위한 한국천주교 평신도의 다짐

1. 신뢰회복운동은『지금, 여기서, 나에게서부터』펼쳐나간다.

2. 우리 평신도는 기도와 희생과 나눔으로 가족끼리 온전히 믿고 지내는 가운데 성가정을 이룩함으로써 이 운동을 사회공동체로 확산시켜 나간다.

3. 우리는 순교 선열들의 영성을 생활 속에 이어 받아 참된 말과 행동으로 세상을 밝히는 그리스도인이 된다.

4. 그리스도 안에서「한마음 한몸」이 되어 형제적인 사랑으로 지역 간의 감정과 계층 간의 갈등을 해소하는데 우리가 앞장섬으로써 믿음의 공동체를 이룩한다.

5. 이러한 신뢰가 북녘 땅 침묵의 교회에 까지 번지게 해서 평화적인 민족재결합의 희망을 가꾸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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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1월 13일 평신도의 날

한국천주교 평신도 사도직협의회

회장 박정훈외 각 교구 회장, 전국단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