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사태」의 비극적 참상으로 온 누리가 몸서리치고 있을 때인 80년 6월 25일 밤 11시경, 전주교구 여산본당(전북 익산군 여산면소재)사제관에서 본당신부가 괴청년 5명으로부터 난자당하는 집단테러사건이 발생했다.
현재 전주 중화산동본당에서 사목활동중인 박창신 신부. 박 신부는 이날의 테러로 하반신이 마비, 최근 몇 년까지만 해도 목발에 의존하지 않고는 걸을 수 없는 신체적ㆍ정신적 고통을 감수해야했다.
이 사건은 당시 계엄령하에서 사실보도조차 철저히 통제되었고, 계엄군 합동수사반에 의해 수사가 착수됐으나 이렇다 할 법인을 체포하지 못 한 채 남아있다.
사건의 직접 피해자인 박 신부와 직ㆍ간접의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80년 여산성당 테러사건」의 그 진상을 추적해본다.
사건발생 후 8년이 넘은 지금 사건의 전면재수사를 최근 요구하고 나선 박 신부는『테러범은 금마공수부대 군인이며, 사건의 진상은 철저히 은폐되어 있다』면서『해묵은 사건을 들추어 관련자들을 처벌하자는 것보다 공권력에 의해 자행ㆍ은폐된 사건의 진상을 규명, 이 나라 민주화와「오부장 테러사건」으로 실추된 군의명예회복을 위해서도 진상규범은 참으로 시급한 과제』라고 강조했다.
「광주사태」가 발생한지 1개월여 뒤인 80년 6월중순경, 전주교구는 사제단 긴급회의를 열고 김현장씨(부산미문화원사건으로 구속수감)가 작성한「전두환 광주살육작전」이라는 유인물을 주일미사 때 신자들에게 배포, 「광주사태」의 진상을 널리 홍보할 것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박 신부도 본당과 공소에 이 유인물을 배포하게 되었는데, 행정구역상으로 충남 마전ㆍ신근리공소에서 교리교사들이 대전 계업사에 연행, 조사를 받는 사건이 발생, 이때부터 박 신부는 군기관에 의해「요주의 인물」로 지목받게 되었다.
박 신부가 테러를 당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5월 25일 금마공소 주일미사 강론.
박 신부는 공수부대가 있는 이곳에서「광주사태」에 직접 참가한 공수부대원들의 참회를 촉구 한면서『공수부대원에게는 물건도 팔지 말고, 그들과 상종을 하지 말라』고 강조, 군인들의 비위를 상하게 했다.
당시 금마지역에 살고 있던 신자와 주민들 대다수가 박 신부의 서슴지 않은 강론에 대해『이 무서운 세상에 저렇게 당당할 수가…』라는 생각과 함께 박 신부의 신변을 매우 염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날로부터 한 달 후인 6월 25일 박 신부는 금마공소에서 봉헌한 밤 8시 30분 미사를 마치고 공소청년회원 임모세(당시26세)ㆍ소수산나씨와 함께 밤 10시 30분경 여산성당 사제관에 도착, 현안문제에 대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사제관 2층 거실에서 얘기를 하던 중 현관 초인종이 울려지고, 임모세끼가 1층 현관문을 여는 순간 5명의 괴한이 쇠파이프 등으로 임씨를 내려쳤다
이와 함께 임씨의 비명소리를 듣고 뒤따라 나온 박 신부에게도 쇠파이프로 전신을 구타하고, 예리한 칼로 팔ㆍ다리 등을 찌른 후『일단후퇴』라는 외침과 함께 테러범들은 도주했다.
불과 2~3분에 걸친 순간적인 일이었다. 이 테러사건으로 임씨는 가벼운 타박상에 그쳤으나, 박 신부는 늑골 골적, 전신타박상 및 자상(刺傷)으로 전북대부속병원에 입원, 3주간의 치료를 받아야했다.
그러나 이후 약 1년 뒤 상처가 재발하면서 하반신이 마비, 81년 8월 22일부터 10월말까지 전북대병원ㆍ서울 성바오로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박 신부는 8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오른쪽다리를 절룩거려야하는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이 사건발생 후 전주교구 사제단ㆍ정의평화위원회ㆍ수녀연합회ㆍ가톨릭농민회 등 교구단체와 본당에서 진상의 철저한 수사를 촉구했으나 합동수사반은 수사의 방향을「치정에 의한 원한관계」로 몰고 가려는 듯한 인상을 진하게 풍겼다.
곧 합동수사반은 본당식복사의 가족ㆍ인간ㆍ애인관계 등을 조사하면서 사건 전후로 여산성당 사제관 및 식당을 다녀간 여자들의 행방을 찾는데에 분주했다.
더군다나 수사반은 사건발생 3일 만인 28일 식복사를 연행, 『병원에 박 신부를 찾아갔을 때 어떤 모습으로 대하더냐, 박 신부의 여자관계를 다 알고 있다. 바른대로 말하라』며 새벽 3시까지 취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건의 수사가 이와 같이 왜곡된 방향으로 계속 흘러나감에 따라 전주교구는 계엄당국하에서 더 이상의 진상을 밝혀내기가 어려움을 간파하고 7월 18일 교구 정의평화위원회 명의로 합동수사반에 수사중지 의뢰공문을 발송했다.
이 공문에서 정평위는 『박 신부님이 당한 상처를 현 시국의 한 희생으로 조용히 감수키로 하고, 수사를 계속함으로 인해 새로이 빚게 될 물의와 또 다른 희생들(선의의 피해자들이나 인권침해의 폐)을 막기 위해서 부득이 수사중지의뢰를 하기로 했다』고 전제, 『오직 범인 스스로의 자각과 회오에 의한 따뜻한 용서의 순간이 언젠가 주어지기를 빌 뿐, 인도적인 견지에서도 더 이상의 무모한 희생들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판단됐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그런데 이 테러사건에 대해 피해당사자인 박 신부와 직ㆍ간접의 목격자들이 이날 테러범들이군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데에는 나름대로의 몇 가지 근거 및 증거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 신부에 따르면 이날 범인들은 군인들의 머리 형태인「스포츠형」이었고, 도주 시에도 일반인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일단후퇴』라는 구령을 외쳤다는 것이다.
박 신부의 이러한 증언은 당시 또 다른 피해자인 임씨의 목격담과도 일치한다.
또 당시 사건발생 시간직전 금마에서 여산까지 범인들로 추정되는 괴한들을 태워다 준 운전기사 신모씨도 『당시 손님들이 군인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 운전기사 신모씨는 사건발생 후 이리경찰서와 전주에 있는 군수사기관에 불려가 1주일가량 목격자조사를 받았다. 군수사기관은『밖에 나가서 입을 열면 범인들에게 보복 당할지 모르니 절대로 입을 열지 말라』는 애정(?)어린 충고와 함께 그를 석방했다.
또 당시 금마의 군부대에서 근무했다는 강모씨도『여산성당을 싹 쓸어버렸다는 소문이 부대 내에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기억 된다』고 증언했다.
이밖에도 사제의 테러에 대한 강력한 항의로 직위해제당한 신자 군인 장재구 소령(당시 논산훈련소근무)사건, 여산ㆍ금마지역에 한때 무성했던『범인들이 부대 앞 오토바이 상에서 쇠파이프 등을 구입해갔다』라는 소문 등이 군에 의해 자행된 테러임을 시사하는 것으로 주장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