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시에나 성녀 가타리나, 분열된 교회단합 위해 헌신

이창배 신부ㆍ대구효목본당 주임
입력일 2019-08-02 17:09:04 수정일 2019-08-02 17:09:04 발행일 1988-04-24 제 1602호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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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대한 무조건적 순명 주장

예수와의 신비적 일치 닮은 저서 남겨
1461년 성녀 선포… 4월 29일 축성

4월 29일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학자축일을 맞아 성녀의 거룩한 생애와 영성을 소개한다.

1369년 화창한 봄날아침이었다. 젊은 기사 뚤도가 사형장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이 죄수는 사형선고를 받은 후 이날까지 욕설을 하고 발버둥을 쳤었다. 젊은 나이에 죽기가 싫었고 형리의 시퍼런 칼날이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이때 한 처녀가 감옥 안으로 그 사형수를 찾아왔다.

한 번도 본적이 없는 평범한 처녀였다. 그녀는 그 죄수와 함께 기도를 바쳤다. 이 기도는 그 죄수의 마음에 후회와 회개를 일깨워주었다.

이때 기적이 일어났다. 억센 사형수가 순한 양이된 것이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는 고백성사를 받고 일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성체를 영했다. 그리고 자세를 가다듬고 형장으로 걸어갔다.

한편 그 처녀는 이미 형장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나이가 겨우 스물둘의 애띤 처녀였다. 그녀는 사형수에게 다가가서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잡고 조용한 목소리로 '예수님, 예수님' 하고 계속 불러주었다. 사형수의 목이 잘려 붉은 피가 그녀의 옷을 흠뻑 적실 때까지. 바로 이 처녀가 시에나의 가타리나였다. 14세기의 기적이요 정신적 힘이었다.

성녀 가타리나(1347~1380)는 중세후기의 아주 독특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신학공부를 한 적이 없는데도 교회는 오늘 날까지 교회학자로 공경하고 있다.

가타리나는 서민출신의 평범한 처녀이면서도 당시교회와 정치현실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한 그녀는 교화에 대한 조건 없는 순명을 주장하다가 심한비판과 반대에 부딪쳤다. 다시 말해서 그녀는 인간적인 약점이 보이는 그곳에 하느님이 활동하신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것이다. 그녀는 건강이 좋지 않은 평범한 여인이었고 사회적 지위도 없는 약한 사람이었다.

1530년경 이태리는 피를 흘리는 내란이 계속되었다. 교황은 1309년이 래 줄곧 불란서 아비뇽에기거하고 있으면서 서서히 불란서 황제의 힘에 눌리고 있었다. 교회는 당시 가장 돈 많은 부자였지만 사회에 신용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이 찢어진 세계에 새로운 교회쇄신운동이 일어났고 많은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발견하면서 활발한 기도생활을 시작했다.

이런 시대에 가타리나가 살았다. 그녀는 형제ㆍ자매가 많은 한 페인트공의 가정에서 성장했다. 그녀는 15살에 도미니꼬회 제3회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그때 도미니꼬회 수녀들은 시에나에서 모범적인 공동체생활을 하고 있었다.

젊은 가타리나는 처음 몇 해 동안 은둔생활을 했다. 이때 그녀는 극기생활로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일치가 깊어지고 자주 환시를 경험했다. 그녀와 하느님과의 신비적 일치에 대해서 수많은 편지와 책은 그녀가 죽기 얼마 전에 쓴 것이며 그녀의 깊은 신앙심을 증언해 주고 있다. 이것이 그녀를 교회학자로 불리우게 한 것이다.

가타리나는 계속 은둔생활만 하지는 않았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그녀로 하여금 고독에서 뛰쳐나와 온 힘으로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교회쇄신을 위해일하도록 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짐을 들어주고 병자들을 간호해 주면 감옥에 찾아가고 창녀들을 돌보아 주었고 전쟁에 부당한 사람들을 치료해 주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준비시켰다.

1374년 페스트전염병이 돌았을 때 가타리나는 고향에서 병자들을 열심히 돌보아 주었다. 그녀는 병든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에게 이미 여러 번 편지도 냈었고 1376년에는 20명의 수녀들을 데리고 아바뇽으로가서 교황이 로마로 돌아가도록 간청을 드렸다. 이 간청으로 말미암아 교황은 로마로 돌아오게 되었다.

가타리나는 자기 고향에서 일어난 내란에도 관여하여 중재와 화평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녀의 노력은 허사가 되고 1378년 교황선거 때 분열이 일어나 이교가 생기고 말았다. 결국 교황이 둘이 생기는 바람에 교회의 분열은 더욱 깊어지고 말았다. 여기서 가타리나는 포기하지 않고 교회가 화목하도록 계속 노력했다.

그런데 그녀의 건강이 따라주지 못했다. 1380년 봄, 로마의 상 세드로 대성전에서 쓰러져서 그로부터 몇 주 후에 33살의 나이로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한편 가탕리나는 1461년 성녀로 시성되었다.

성녀 시에나의 가타리나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깊은 힐치를 체험함으로써 자신의 한계와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 사회와 교회에 지대한 공헌을 남겼다. 이로 인해 성녀는 오늘날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많은 신자들의 귀감이 될 것이다.

이창배 신부ㆍ대구효목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