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한담

[일요한담] 수구리 / 이용호 신부 7.

이용호 신부ㆍ대구대교구 교구장비서 겸 성소국장
입력일 2019-06-26 16:42:57 수정일 2019-06-26 16:42:57 발행일 1990-07-22 제 1714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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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품식 전날이었다. 나는 긴 기다림이 끝나고 사제단의 입원이 된다는 뿌듯함과 또 한편으로 나같이 나약한 사람이 훌륭한 사목자로서 헌신할 수 있을까 하는 망설임이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입맛이 당기지 않는 저녁을 끝내고 함께 기도를 한 후 내일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동창 둘과 함께 나란히 누워 빨리 잠들고 싶었으나 잠은 쉽게 오질 않았다. 하필이면 그날따라 밤이 제일 길다는 동지날이고보니 더욱 그날 밤이 지루해졌다. 눈이라도 올 것같은 흐린 날씨는 드물게 보는 겨울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홈통에 빗물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점점 더 또렷하게 들리더니 머리 속을 채우고도 부족해 이젠 가슴속에까지 가득 차는 것 같았다.

다음날 아침 서둘러 머리를 감고 나서 길 건너에 있는 이발소에 가서 드라이를 하는데 주인아저씨는 느긋해 하기만 해 재촉을 했더니 『오늘 선 보러 가십니꺼』하며 낌새를 알아차리는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잘 보이고 싶은 마음으로 헤어스타일에 신경을 쓰다보니 자연 목에 힘이 갔고 또 주인아저씨는『아이고, 목에 힘 빼고 수구리라카이』하며 혀를 찼다.

며칠 전 신학생들과 3박4일의 수련회에 갔다. 새 신부님들이 후배신학생들을 위해 야영장에까지 와서 함께 미사를 봉헌해 주었다. 이들과 미사를 봉헌하면서 제단에 머리를 숙이는 모습에 가슴이 찡해 왔다. 내가 첫 미사를 봉헌하러 제단에 나서며 느꼈던 그 감격이었다. 정말 무덥고 땀나는 하루였지만 한순간의 벅찬 감격이 넉넉한 저녁시간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튿날 조별로 선택한 단막극을 하는 시간이 있었다. 해설을 맡은 부제가 조원들을 일렬로 세워 놓고「수구리」하니까 모두 인사를 했다. 그 상황에「차렷 경례」가 나올 것으로 예상했던 나로서는 배꼽을 잡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극이 끝나고 들어갈 때 역시 한 줄로 나란히 서자「수구리」하는 말이 여기저기에서 나왔다.

성당에서 무릎을 꿇는 것도 절을 하는 것도 주님께 경배를 드리며, 순종을 나타내는 신앙의 표현이다. 서품식날 주교님은 서품식의 절정인 안수에 앞서 성인열품도문을 노래하는 동안 신자들에게 기도를 하자고 권고하고 먼저 무릎을 꿇고 기도하신다. 수품자들은 완전한 봉헌의 뜻으로 제단 앞에 엎드려 기도하게 된다. 하느님 앞에「수구리」를 하는 것이다.

곡식이 익어 알이 차면 고개를 숙인다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권고 말씀이 어쩌면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라는 성서의 말씀과「수구리」의 맥이 통함을 생각케 한다.

이용호 신부ㆍ대구대교구 교구장비서 겸 성소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