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투아니아공화국은 지난 3월11일 이후 다시 자유로운 나라가 되었다. 리투아니아는 얼마동안 모스크바와 경쟁관계에 있었다.
3월12일 소련에 대통령제를 도입하고 고르바초프를 소련의 첫 대통령으로 뽑기위해 국민대의원 대회를 열었었다. 대통령 권한에는 합병국들의 의회 활동을 제한하거나 온전히 없앨 수 있는 가능성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리투아니아가 독립하려는 노력들을 위협하게 되었다.
그래서 12일 예정된 결선투표를 4일로 앞당긴 것이다. 지난 2월24일 치뤄진 첫투표에서 이미「사쥬디」애국운동당이 다수를 확보 했기 때문에 친모스크바 사람들을 겁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계산은 맞아 떨어졌다. 「사쥬디」당은 지금 의회의 3분의2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공산주의자들도 새 의회의 첫회의에서 독립에 찬성하는 표를 던졌다. 소련 헌법을 폐지하고 옛날 리투아니아 헌법을 다시 세웠을때 반대 표는 하나도 없었다.
또한 의회는 소련연방에서 탈퇴한다고 선언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리투아니아가 소련연방에 가입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그들은 주장하고 있다.
오히려 리투아니아는 1940년「붉은군대」가 발트연안에 진군했을 때 강제로 점령당했었다. 그리고 이것은 히틀러와 스탈린 간의 비밀계약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고, 오늘날 소련도 이 계약을 불법적인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 대신에 1920년 레닌이 서명한 조약을 보면 발트해연안은 영원히 주권을 보장받고 있다.
발트해 연안3개국 이스트렌드ㆍ레트렌드 및 리투아니아중 리투아니아가 자유와 인권을 위해 가장 강력한 투쟁을 벌였었다. 그리고 이웃나라 폴란드와 같이 교회는 종교자유와 국가권익을 위해 국민과 함께 연대했다.
국민의 80%가 가톨릭 신자인 리투아니아는 거의 50여년동안「무신론적인 공산정권」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더욱 깊게 단결되어 있었다.
국가적인 저항은 종교 권리를 얻기 위한 투쟁과 연결되어 하나의 전통이 되어있었다. 왜냐하면 이미 자르(황제)의 지배아래에서도 가톨릭이 박해를 받았었고 리투아니아어로 인쇄하는 것도 금지되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투아니아는 박해속에서도 국가적ㆍ종교적전통들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보존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난 50년간 그와같은 구조들이 생긴것이다.
1972년 3월19일 성요셉축일에 평신도들에 의해「리투아니아 가톨릭교회의 연감」이 처음으로 발간되었고, 교회와 신자들이 받은 박해에 대해서 자세히 알릴 수 있게 됐다.
이 연감은 서방에 전달되었고 리투아니아의 상황이나 소련의 다른 연방국가들에 대해 정확하게 보도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런데 정부기관은 이 연감을 위해 일했던 사람들을 정탐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체포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연감의 출간이 방해받지 않았고 꾸준하게 서방세계에 전달될 수 있었다.
신부들이 어떤 보호막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교회주변에 모여들었다.
평일에도 성당은 항상 만원이었다. 빌나의 율리조나스 스테포나비치우스 대주교는 25년동안 레트렌드 국경의 작은 마을에 유배되어 있었는데 국민들로부터는 마치 성인처럼 공경을 받았다. 그리고 사제와 평신도들은 그를 이시대의 「정신적 아버지」라고 여겼다. 지금 스테포나비치우스 대주교는 다시 자기 직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20년간 직무수행을 하지 못했던 빈체타스 슬라르케비치우스 주교는 카우나스의 대주교가 된 후 또 추기경이 되어 리투아니아 주교회의 의장으로서 국민의 특별한 신뢰를 받고 있다. 이 두 주교는 유배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었다. 즉 비밀 신학교에서 양성한 신학생들에게 서품을 주었던 것이다.
비밀리에 서품받은 신부들은 비밀리에 서원한 수녀들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잠겨진 문 뒤에서 교리교육도 시키고 첫 영성체 준비교육도 시켰다. 또한 신부들은 평신도중에 공적으로 성당에 다닐 수 없는 사람들에게 비밀리에 성사를 베풀기도 했다.
1978년 5명의 사제들이「신자들의 권익옹호위원회」를 조직했다. 이 위원회는 헌법상 보장된 종교자유 침해사례를 작성하여 연감을 통해 배포된 문헌들은 60여개가 넘으며 이것을 서방세계에 전달하기도 했다. 또 이 위원회는 사제들의 저항을 위한 조용한 샘물이 되었다.
결국 리투아니아 신부들중 약 3분의 2가량이 소련의 종교법이 교회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이 종교법을 따르지 않겠다고 서명했을때 그들은 10년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그중 3분의 1가량의 신부들은 수수께끼와 같은 자동차사고로 인해 죽었다. 동시에 밤에 폭력배들이 성당과 사제관을 습격, 많은 신부들이 부상을 당했으며, 그로인해 많은 신부가 죽었다.
지금 이러한 일들은 리투아니아에서는 과거의 일이 되었다. 그들은 자유를 누리게 되었고 교회도 자유로와졌다. 즉시 새로운 건설을 위해 일을 시작했다. 교리도 가르치고 수도회도 문을 열게 되었으며 성당도 돌려받았다.
리투아니아의 주보성인 카시미르성당은 최근 새로 수리되어 7월에는 예수회에서 관리하게 될 것이다.
이제 비밀신학교는 필요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사제서품 여부를 이제는 KGB의 비밀요원이 결정하지 않고 주교가 결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입학정원제도 없어졌다. 지금까지는 카우나스에 신학교가 하나 뿐이었는데 텔시아이에 두번째 신학교가 문을 열게 되었다. 그리고 자선단체도 생겼고 교회신문도 나오고 있다. 어디에서나 아주 열렬한 새로운 시작을 도모하고 있다.
이제 문제는 모스크바가 리투아니아의 독립문제에 어떻게 대응하는냐하는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대통령직을 통과시키기 위해 아주 현실적으로 접근했다. 소련에는 이미 강한 지도력에 대한 요구가 높게 일고 있다. 리투아니아가 소련연방에서 탈퇴하는 것은 곧 국가의 괴멸이 임박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시급히 모든것을 함께 모아 놓을 강한 정권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리투아니아는 국가적인 자존심에도 불구하고 이 상황을 현실적으로 보는 이성을 갖고 있다.
협상대표가 모스크바에 파견되었다. 리투아니아가 아주 효과적으로 일하고 있다고 모스크바에서는 보고있다. 서로가 이해하는 것이 소련의 큰 관심거리이다. 이제는 더이상 위성과의 대화가 아닌 파트너로서의 대화가 이루어지게 된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