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강림 대축일은 주 예수께서 약속하신 위로자(빠라끌리또) 성령께서(요한 14,16-17·26:16,14-15) 성모님과 사도들 그리고 여러 제자들에에 내려오신 사건(사도 2장)을 기념하는 날이다. 주 예수님의 부활 대출이이 유다인들의 파스카(유월절)축제와 깊은 관련이 있듯이 이 축일 역시 오순절(벤떼·꼬스테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유다인들의 오순절은 본래 밀을 추수하여 그 첫 결실을 하느님께 바치는 감사제였다(민수기 28,26). 이날은 원래 유다인들이 이집트를 탈출한 것을 기념하는 우월절 축제 후 50일 만에 지내던 축제였으며 후에는 유다인들이 야훼 하느님과 맺은 계약(탈출 19장)을 기념하는 축제로 지내던 것이다.
그당시 제자들은 유다인들의 관습과 전통을 지키고 있었으므로 오순절도 그들에게 큰 축제였으나 이 대축제일에 성령이 강림한 사건도 상당히 의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성령을 받은 사도들이 축제를 지내기 위하여 사방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여든 경건한 유다인들에게 예수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수조건이라는 점을 역설했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다. 즉 성령 강림일을 기점으로 하여 제자들이 공적으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기 시작하였으므로 이날을 교회의 탄생으로 볼 수도 있다.
성령은 어떤 분이신가? 성령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제3위격으로서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며 두 위격과 서로 구별되면서도 높고 낮음이나 선후의 차이가 없는 동일한 하느님이시다. 여기서는 이런 교리적인 이야기를 하기 보다는 성서 안에서 드러나는 성령의 역할과 활동에 대하여 묵상해 보고자 한다.
‘영적인 무지’
주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실 때 여러 가지 말씀을 해 주셨는데(요한 13장~17장) 그중의 하나는 위로자이신 빠라끌리또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일이다(요한 14,16·26:16,7).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스승의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들의 마음은 두려움과 불안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네들의 스승이 기적적으로 로마인들을 몰아내고 지상의 구세주가 되리라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의 역할과 인도하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서도 아직 마음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였던 것이다.
제자들의 캄캄한 마음의 상태는 올리브동산과 겟세마니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스승이 고뇌에 싸여 피땀이 흐르도록 기도를 하고 있는데도 ‘무지한’ 그들은 깨닫지를 못하고 눈이 거슴츠레해져 잠만 자고 있었던 것이다. 스승이 무장한 군인들에게 붙들려 끌려가고, 매를 맞고, 재판을 받아도 깨닫지 못한다.
마지막에는 스승이 십자가를 지고 비참하게 죽어가자 그들은 모두 도망쳐버리고 만다. 만일 우리도 그런 상황에 놓여 있었더라면 제자들과 비슷하게 행동하지 않았다고 누가 장담하지 않았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엠마우스로 길을 떠나는 두 제자의 자포자기 한 모습(루카 24,13-27)과 승천 직전에도 “주님, 이때에 이스라엘을 위하여 나라를 재건하시겠습니까?”(사도 1,6)라고 묻는 제자의 심정은 능히 이해할만하다. 그들은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정신은 혼돈상태와 같았고 마음은 아직 열리지 못하여 캄캄한 상태 그대로였던 것이다. 이를 일컬어「영적인 무지」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단의 으뜸인 사도 베드로의 행동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그는 한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기도 하고(마태 16,16) 자기를 세 번이나 배반할 것을 예고한 스승의 말씀에 당당한 자세로 “모두 주님에게 걸려 넘어질지라도 저는 절대로 걸려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26,33)라고 장담까지 하였으나 하녀의 질문에도 겁이 나서 맹세까지 하면서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마태 26,72)라는 말로 간단히 스승을 배반해 버리고 만다. 이 얼마나 초라한 모습인가? 스승을 배반한 비겁한 제자라기보다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한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차라리 동정을 해 주고 싶은 심정이다. 우리의 주제와 연관을 짓는다면, 그는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부터는 사정이 완전히 달라진다.
성령의 작용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밖에도 제대로 나가지 못하던 그가 하늘로부터 내려온 ‘불같은 혀 모양의 능력’을 받고 나서는 갑자기 용감해져 군중 앞에 나아가 설교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나약한 어부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지 않는가? 바로 이것이 성령의 작용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와 같이 성령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나 알아들을 수 없는 어려운 일까지도 능히 하시는 분이시다.
성령은 하느님의 영ㆍ얼 곧 생명의 근원이요 생기를 주는 숨이나 물 또는 타오르는 불과 같다. 성령은 천지가 혼돈 중에 있을 때 그 위에 감돌던 기운이며(창세 1,2) 삼라만상이 꼴을 갖추어 질서 있고 조화롭게 운행되도록 이끄시는 힘이다. 인간의 창조설화에서도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내어 코에「숨」을 불어 넣으시니 생기가 돋아 정상적인 사람이 되었다.(창세 2,7)
‘야훼의 기운’(에제 37,1) 은 예언자 에제키엘을 들로 끌고 나가 메마른 뼈들이 부활하는 환시를 보여 주신다. 말라빠진 뼈들도 ‘야훼의 기운’을 받으면 살아난다는 그 환시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예견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 기운이 인간 생명의 근원임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하다. 예언자 다니엘은 영의 인도를 받아(다니 13,46)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여인 수산나를 구출한다. 이때의 영은 선과 악을 식별하여 하느님의 공의하심을 적절히 드러낸다.
그 기운을 입으면 누구든지 역동적인 힘을 내기 마련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자연적인 본능에 따라서 살 것이 아니라 그 영의 기운을 받아 살아야 할 것이다. 인간에게는 원죄의 결과로 악에로 기울어지는 강한 경향이 있어 이를 극복하기란 쉽지 않으나 성령의 기운을 입으면 육체를 지닌 인간이라도 육체의 욕망을 쉽게 극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살게 된다. 그 기운은 이런 신령한 힘까지도 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영이 지배하는 곳에는 진정한 자유가 있어(II코린 3,17) 악을 이길 수 있는 자유까지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이런 자유를 누리는 자는 윤리적으로 부정한 행위, 곧 ‘음행추행, 우상숭배, 원수 맺는 것, 싸움, 시기, 분노, 이기심, 분열, 당파심, 질투, 술주정,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것, 그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갈라 5,20-21)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인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의 열매’(갈라 5,22)를 맺으면서 살아간다.
생명의 영
또한 그 기운은 생명을 주는 영이므로 이 영에 따라 사는 자는 생명력을 상실한 법조문에 집착하기 보다는 오히려 법의 근본정신을 따라 살게 된다. 왜냐하면 문자는 죽이고 영은 살리기 때문이다(II코린 3,6:1베드4·6).
또한 그 기운은 인간으로 하여금 진리와 오류의 영을 식별하여(1요한 4,6) 성화의 길을 걷게 한다. 그 영의 인도를 받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성전이 되어(1코린 3,16:16,9) 주님과 하나 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1코린 6,17). 이는 마치 태아가 어머니로부터 끊임없이 영양을 공급받고 있듯이 그 영과 하나 되어 사는 그리스도인도 끊임없이 그 영의 생명력을 받아 활기찬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삶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삶이며(1요한 4,9) 그분의 도움을 받아 더욱 더 풍성해지는 삶으로써(요한 10,10) 이런 사람을 사는 자는 사도 성 바울로와 같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뜻깊은 성령강림 대축일을 맞이하여 성모님과 여러 제자들에게 강림하시어 생기와 힘을 불어 넣으신 성령께서 우리에게도 강림하시도록 진심으로 기도해야할 것이며, 세상 마칠 때까지 교회 안에 머무시면서 진리를 가르치시고 성화시키시는 성령의 기운이 교회의 모든 계층을 두루 비추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제자다운 사람을 성실히 살아가자며 이 세상을 위한 참 봉사의 도구가 되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주여 당신의 영을 보내주소서 그러면 온 누리가 새롭게 되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