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유신이후 암울했던 시대에 민주화의 촛불을 켜들고 인간존엄과 인간화 실현에 앞장서오며 우리사회의 정신적 지도자로 큰 족적을 남기며 일생을 살아온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의 고희 겸 주교서품 25주년을 맞았다.
금년으로 고희 겸 주교서품 25주년, 사제서품 40주년을 맞이하는 김수환 추기경의 발자취를 살펴본다.
김수환 추기경은 1922년 5월 8일 대구에서출생, 41년 동성상업학교(소신학교)를 졸업한 뒤 42년 9월 일본 동경상지대학 예과를 수료했으며, 그해 9월 동경상지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44년 1월 학업을 중단했다가 다시 수학하던 중 해방돼 45년 12월 동교 철학과를 중퇴했다.
이어 46년 9월 성신대학 신학부로 전학한 후 50년 6월 동교 신학부를 졸업하고 51년 9월 사제로 서품됐다.
그 후 51년 9월 당시 대구교구 산하에 있던 안동본당 주임을 시작으로 목자에의 첫발을 내디뎠던 김추기경은 53년 4월 대구교구 주교비서, 55년 5월 김천본당 주임 겸 성의중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1956년 독일로 유학, ‘뮨스터대학’대학원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뒤 64년 5월 28일 귀국한 김추기경은 그해 64년 6월 5일부터 66년 3월 6일까지 ‘가톨릭신문사’의 전신인 ‘가톨릭시보사’ 사장으로 재직했다.
64년 당시 ‘가톨릭시보사’ 사장으로 재직 중이던 3월 5일 교황 바오로 6세가 부산교구에서 마산교구를 독립시킴과 동시에 김추기경을 초대 마산교구 교구장으로 임명함으로써, 김추기경은 5월 31일 마산교구 설정과 함께 주교로 서품되어 초대 마산교구장에 착좌하게 됐다.
이어 김추기경은 68년 4월 27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노기남 대주교의 은퇴로 공석이던 서울대교구의 제2대교구장으로 임명돼 주교서품 2년만인 5월 29일 대주교로 승품됐으며, 그 이듬해인 69년 3월 28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한국가톨릭교회에서는 처음으로 추기경으로 서임, 4월 28일 로마, 교황청에서 임명식을 가졌다.
김추기경은 서울대교구장으로서의 성무를 담당하면서 한국주교회의 의장 2차례, 한국주교회의 대표로 6차에 걸친 세계주교대의원회의(시노드) 참석, 아시아주교회의 연합회(FABC) 구성 준비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또 김추기경은 74년 2월 서강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77년 5월 미국 노트르담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88년 11월 일본상지대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 90년 5월 고려대학교에서 명예 철학박사, 90년 10월 미국 시튼홀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와 함께 서울대교구장으로 20여 년간 재임해오면서 한국교회의 발전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가 사회·경제·정치적으로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정의의 사도로서 역할을 다해온 김추기경은 전 미국대통령 지미 카터와 함께 ‘세계인인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42세 때 주교가 되고 5년 뒤인 47세때 한국교회 2백년 사상 처음 추기경이 된 김수환 추기경은 서울대교구장착좌식대 강조한 ‘각성·쇄신·현실참여’를 실천하기 위해 정치·사회적으로 ‘빛’이 필요하던 3공화국 5공화국 시절 우리나라의 민주화와 인간화를 위해 위정자들에게 많은 충고의 발언을 해온바 있다.
70년대 유신체제 거부를 시작으로 포문을 연 김추기경은 사회 전체가 정신적, 도덕적으로 황폐화되어 국민들이 제 갈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할 때 바르고 곧은 목소리로 도덕적 양심을 일깨워 왔다.
또한 국내적으로 어려울 때마다 결정적인 발언을 해온 김추기경은 ‘예언자의 소리’로 계속 주목받아왔으며, 그 결과 89년 10월 한 시사주간지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한국을 움직이는 제2인자’로 나타나기도 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지난 25년간 한국 교회, 나아가 한국사회의 명실상부한 정신적 지도자로서 한국교회의 전성기와 더불어 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두 번의 교황방문을 클라이맥스로 그 위상이 절정에 달했던 한국 교회는 이제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모습으로 거듭 태어나기 위한 진통으로 약간의 몸살을 앓고 있다.
어둡고 길었던 터널을 지나 새로움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바로 이 시점에서 김추기경의 양 어깨가 가벼워질 수 없음은 이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