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녀원 아랫마당으로 걸어 내려오면 작년에 작고하신 우리 수도회 창설자 성 베드로 신부님의 흉상이 눈에 들어온다. 생전에 머무르셨던 사제관 앞, 정원 한편에 다정하게 웃고 서계시는 모습이 따습게 느껴온다.
수녀원에 입회한 다음날, 성 신부님께서 큰 소리로 “소비녀!”하고 우리를 부르셨다. “소비녀라니요? 누굴 찾으시나요?…” 수녀들을 지칭하는 ‘작은 여종’이란 이름이었건만 알아듣질 못하고 어리둥절해 있었다. 그때는 ‘성가수녀원’에서 본래의 명칭인 ‘성가소비녀회’로 바뀌기 전이었다.
“소비녀로 사시오” 고해성사를 주시던 성 신부님으로부터 자주 듣던 말씀이다. 정원을 산책하시다 마주치면 “예수 마리아 요셉께 소비녀 되도록 기구하시오”하고 짚어주셨다.
교리를 가르치시거나 강론을 하시거나 신부님 댁을 찾아 갔을 때에도 한마디씩 소비녀의 신분을 확인시켜 주셨다. 그럴 때마다 신부님의 깊은 영성과 각별한 아버지의 사랑이 느껴져 왔다.
오로지 주님과 이웃을 섬기고자 모인 여종, 저마다의 정성과 성의로 사랑의 몫을 살고자 애쓰는 여종들에 대한 애정이 신부님의 마음속에 차고 넘쳐서 콧노래처럼 타령처럼 어느 곳에서나 소비녀라는 말로 흘러나왔다.
수도생활을 하는 동안 소비녀라는 말은 내 안에 있었고, 내 앞에, 내 옆에, 내 뒤에 있었다. 나의 생활을 늘, 소비녀라는 말에 반추하며 살았다. 내 기쁨이기도 했고 고통이기도 한 그 이름이 핏줄마다 퍼지고 순간마다 하늘로 이어지기를 바라며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열 번 지냈다.
여전히 하느님 사랑에 어설프고 소비녀의 역할에 걸맞지 않음을 자책할 때도 있지만 하느님의 자비가 담겨있는 그 이름 안에서 찬미와 감사를 드높인다.
가을햇살이 성 신부님 흉상 앞에 지천으로 깔려있다. 파란 하늘에 구름 몇 송이가 평화롭게 흘러간다. 신부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소비녀, 가난하고 미소한 자들을 사랑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