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신부님(押田大人)을 참 좋아한다. 수도회 신부님이기에 지금의 그러한 삶이 가능하겠지만 나 역시 이 추잡한 자본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나 산 속의 깊은 암자에서 자급자족하는 삶을 살면서 자연의 섭리대로 살고 싶다.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자는 생활로써 문명의 덫에서 벗어나고 싶은 충동이 한두 번이 아니다. 지금 내가 사는 대구 상인동은 사는 곳이 아니다. 나는 매일 차 소리를 듣고 자면서 차 소리를 듣고 일어난다. 새 한 마리도 노래하지 않는 도시에서 과연 인간이 산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밤이 되면 시멘트(아파트)에 갇힌 사람들이 밖으로 뛰쳐나와 욕망의 배설로 온 도시에 오줌 냄새가 가득하다. 제1세계의 영혼의 빈곤이 제3세계의 육체의 빈곤보다 더 무서운 병이다. 이제 보리고개를 넘은 이 나라의 중산층이 사는 이곳 상인동. 가난하지 않은 자들의 근본적인 회개가 필요하다. 누가 중산층들의 양심을 흔들어 놓을 수 있을까?
오늘날의 우리 수도원들은 개인은 가난할지 모르지만 수도원은 부자이다. 그들이 서원하는 가난은 자주 빛 좋은 개살구이다. 수도자들은 소위 우리 성직자들을 나름대로 판단하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각 수도원이 경영하는 사업체를 세상에 환원시키고 그 고유한 영성에 충실할 때, 참된 의미에서 종말론적인 표지로 살아간다고 볼 수 있다. 각 수도원이 남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진 먹을거리를 먹을 것이 아니라 직접 만들어서 먹는 자급자족경제, 즉 생명의 경제로 나아간다면 세계 속에 하느님의 나라는 증거할 수 있다고 믿는다. 수도회가 복지사업, 교육사업, 병원사업 등을 한다고 해서 복음화로 나아간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곧 착각이다. 자본주의와 손을 끊고 직접 생산하여 만든 공동체를 이룬다면 이것이야말로 생명 공동체가 아닐까? 금욕, 검약, 협동의 무공해 공동체로서 말이다.
현대 수도회가 본질에서 멀어지고 있을 때, 새로운 삶의 양식을 실천하는 공동체 마을이 이제 세계 곳곳에서 생기고 있다. 예를 들면 야마기시-가이 일본식 협동농장 공동체, 기계와 물질문명을 거부하는 방주 공동체, 아난다 협동마을, 물질과 정신의 조화를 추구하는 르네상스 공동체 등이다. 이제 본당에서 수녀님의 활동도 고려해 봐야 하지 않을까?
문제는 수도회이든 교회이든, 성직자이든 수도자이든지 간에 자본주의 속에 살면서 복음적인 가치를 추구한다는 것은 어정쩡한 모순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