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11년 만에 귀국한 재미교포 신태민씨

입력일 2011-06-30 11:30:03 수정일 2011-06-30 11:30:03 발행일 1984-06-10 제 1409호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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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된 평신도활동에 감격
평신도활동 싹 틔운 장본인
30연대부터 교회활동 시작
성가대 효시인 「메아리 클럽」회원
30년대부터 싹튼 투지와 의욕이 아직도 쟁쟁하다. 50년대를 휩쓸던 열기어린 신앙이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짙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신태민氏(在美·61세·토마스 아퀴나스). 현대적 의미의 한국평신도 활동을 발아시킨 장본인중의 한사람, 신태민씨는 11년만에 밟은 한국땅에서 놀라우리만치 성숙된 평신도들의 활약상에 크게 감격하고 있었다.

지난 5월 1일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키 위해 현재의 거주지인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일시 귀국한 신태민씨는 5월 6일 2백주년 기념대회 및 시성식에 참석, 한국교회의 발전 속에서 특별히 돋보이는 평신도들의 성장을 감회어린 눈으로 지켜보았다.

『1944년 부활절인가, 명동에 적을 둔 「메아리창단」이 난생처음으로 남녀가 함께 부활성가를 불렀읍니다. 물론 연습은 남자 여자 따로 했읍니다만 당시 교회는 난리가 났었읍니다. 어떻게 남녀가 한자리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었지요』『물론 4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말할 수 없는 격세지감을 느끼게된다』는 신태민씨는 『잠깐 동안 둘러본 우리교회의 생동감은 바로 교회가 평신도들을 적재적소에 투입하고 있음을 입증해주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2백주년을 계기로 초기교회 목자 없는 시절, 굳건하게 교세를 신장시키며 신앙을 배양시켜온 평신도들의 역할이 크게 강조되고 있는 시점에서 제2차 「바티깐」공의회 훨씬 이전인 30년대부터 자발적인 노력으로 교회 일에 뛰어든 평신도들의 활약상을 거론하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 교회는 사회 속에 살면서 교회의 한 구성원인 평신도들의 참여가 크게 요구되고 있는 상황이었고 그만큼 평신도들은 뜨거움 속에 자신의 역할을 찾아 해냈다.

신태민씨는 풍운의 시기를 벗어난 한국교회가 격동의 시기로 접어들면서 또 다시 평신도들의 활동이 활발하던 시대에 스스로 교회 일을 선택했던 한사람의 평신도다. 그는 38년 가톨릭평신도단체로, 또 가톨릭성가대의 효시라고 볼 수 있는「메아리 클럽」에 한 멤버가 되면서 평신도 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 들었다.

명동을 중심으로 백동(혜화동) 약현(중림동)등지에서 인테리층이라 지칭되던 장발 임백규 안응렬 김영근 신부(당시 청년)등이 뜻을 모았던 「메아리클럽」은 파이프올갠 주자였던 변 보댕 신부의 지원을 받아 구성된 합창단으로 오직 남성만이 회원자격이 있었다. 하대응 교수(지난해 작고)가 동성학교에 부임하면서 눈을 뜨기 시작한「메아리 클럽」은 44년 이문근 신부(작고)가 명동에 부임, 눈부신 성장을 거듭할 수가 있었다.

역경의 시기가 지나 해방이 되자 가톨릭 액션을 해야 한다고 마음을 합한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사도직단체가 탄생됐다. 신태민씨는 『연극·음악회를 개최하면서 행동하는 사도직을 펼쳤던 이들의 액션은 좌경화의 위험 앞에 정신적인 무장을 위한 세미나·강연회 등도 개최, 활동의 영역을 넓혀갔다』고 회고했다.

경향신문 부사장·연대·중대·서울미대 등에서 강의를 맡으면서 지속적인 봉사자의 자세를 견지해온 신태민씨는 73년 일본을 경유, 미국생활을 시작했다. 현재 미국「필라델피아」한인 복지 재단이 사장직을 맡고 있는 그는 귀국하기 바로 전까지 심장병으로 세번이나 입원을 한 처지임에도 불구, 12년만의 모국행을 포기하지 않았다.

고국에 머무는 동안 그는 전국을 돌며 한국교회의 변모를 마음깊이 새겼으며 특히 명동대성당의 사료 찾기에 생생한 증언으로 큰 몫을 담당하기도 했다.

『새남클럽이 올해 초 가톨릭신문에 게재된 것(본보1389호 참조)을 보고 눈물이 나도록 기뻤읍니다. 25년전 새로운 평신도상을 마련한다는 소박한 꿈속에 밑거름이 되었던 새남클럽이 아직 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감격스러울 수가 없었어요』

지난 5월 31일 후배들의 초청으로 새남클럽을 찾은 신태민씨는 사회 곳곳에서 조용히 맡겨진 몫을 다하고 있는 후배들의 모습에 목이 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