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10월 11일 시성된 다미안 신부

곽승한 기자
입력일 2009-10-14 09:28:00 수정일 2009-10-14 09:28:00 발행일 2009-10-18 제 2668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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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자비로 700여 한센인과 아픔 나눠
다미안 베스테르(Joseph de Veuster·1840~1889) 신부는 1840년 벨기에의 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모를 따라 농사를 지을 생각이었으나, 수도자의 길을 걷는 큰형의 영향을 받아 수도원에 들어가기를 희망했다.

일찍이 영성에 눈을 뜬 그는 고향에서 초등교육을 마치고 발론(Vallon) 지방의 르콩(Brain le Comt) 고등학교에 진학해 공부하던 중,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완덕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이후 1859년 ‘예수와 마리아의 성심 수도회’(The Fathers of the Sacred Hearts of Jesus and Mary)에 입회한 그는 수도회 회칙에 따라 의사로서 시칠리아 섬의 주민들을 헌신적으로 돕다가 4세기 초에 순교한 ‘다미안’으로 세례명을 변경했다. 수도회 입회 후에는 벨기에 루뱅과 프랑스 파리에서 공부했다.

1863년 하와이 선교사로 선발된 큰형 팜필 신부가 병자들을 돌보다 장티푸스에 걸리자 다미안은 형을 대신해 하와이 선교를 자원했다. 1864년 하와이에 첫 발을 내디딘 그는 호놀룰루 근교의 아피마뉴 대신학교에서 약 2개월 간 수학한 후, 그 해 5월 호놀룰루대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푸노(Puno) 지역에서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시작한 다미안 신부는 1865년 코할라(Kohala)로 옮겨 원주민들의 인습과 싸우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성당을 짓고 섬 곳곳을 돌아다니며 미사를 봉헌했다.

1865년 하와이 군도에 한센병 환자가 급격히 늘어나자 하와이는 감염된 환자를 격리 수용하는 법을 제정했고, 이에 따라 한센병 환자들은 몰로카이(Molokai) 섬에 격리 수용됐다. 1873년 몰로카이 섬의 참상을 전해들은 다미안 신부는 33세의 나이로 그곳에 자원해 700여 명이 넘는 한센병 환자들을 사랑과 자비로 돌봤다. 그는 처음부터 스스럼없이 한센병 환자들에게 다가갔고 자신이 한센병에 걸리지 않아 환자들 고통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을 정도였다. 그는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1881년 하와이 정부로부터 ‘카라카우아’ 훈장을 받기도 했다.

다미안 신부는 1885년 자신도 한센병에 전염된 것을 알았으나 용기를 잃지 않고 환자들을 돌보다 결국 1889년 4월 15일 선종했다. 그의 유해는 1936년 몰로카이 섬에서 벨기에로 옮겨 안장됐다.

다미안 신부는 선종 즉시 시복시성 절차가 이뤄질 듯 했지만, 성인품에 오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선종한 지 103년이 지나서야 1992년 7월 시복 대상자로 확정됐고, 1995년 6월 4일 벨기에 브뤼셀의 퀘켈베르그 대성전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이후 지난해 7월 교황청 시성성은 10년 전 하와이에서 한 은퇴 여교사가 다미안 신부의 전구로 말기 폐암이 치료된 것을 기적으로 인정해 복자 다미안 신부의 시성을 예고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10월 11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성인 반열에 올랐다. 다미안 신부는 이에 앞서 2005년 벨기에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10월 11일 다미안 신부와 잔쥬강 수녀 등의 시성식이 거행된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 새 성인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곽승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