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교회 특히 중부 유럽 교회 신자들은 12월 4일 성녀 바르바라 축일에 흔히 정원에 나가 복숭아 살구 사과나무 등 과일 나뭇가지나 꽃가지를 꺾어 화병에 담아 실내에 둔다.
이후 이 가지들은 크리스마스를 전후해 꽃을 피우게 된다. 성녀 바르바라 축일에 가지를 꺾기 대문에 사람들은 이를 「바르바라 나무가지」라고 부른다.
만개한 꽃을 기다리는 이러한 풍습은 봄의 모습, 또한 그리스도가 가져오는 새 생명의 표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성녀 바르바라는 306년 막시미누스다야 황제 치하에서 순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을 뿐 그의 생애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성녀는 배교를 거부한 의연하고 굳은 신앙심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교도였던 바르바라의 아버지는 딸이 결혼해서 살 것을 원했으나 바르바라는 이를 거부했다.
외롭게 되면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들것이라 여기고 아버지는 바르바라를 높은 탑에 감금한 후 출장길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탑의 창문은 세 개가 되어있었고 벽에는 십자고상이 걸려있었다.
그리고 바르바라는 자신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교인이 되었다는 것과 동정서원을 했다고 고백했다.
당시에는 그리스도교인에 대한 극심한 박해가 자행되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배교를 한다면 사형을 면제해 주겠다」고 간곡히 말했다.
그러나 바르나라는 『나는 사람들이 겁을 먹는 우상 잡신들의 저주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예수께서 나를 축복하셨기 때문이다』고 대답, 아버지의 분노를 샀고 고문 형리에게 넘겨졌다.
고문을 받는 동안 바르바라는 상처가 불로 지져지고 옷을 거의 벗기운 채 거리에 끌려 다니는 고통을 당했으나 의연한 모습을 잃지 않았고 그의 아버지는 이러한 모습에 분을 참지 못하고 직접 자기 손으로 바르바라를 죽여버리고 말았다.
서구 교회에서 볼 수 있는 바르바라 성녀상은 왼손에 탑을 들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서 탑은 모든 구속자들의 상징으로 제시된다.
바르바라는 또한 광부들의 수호성녀로 꼽힌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성녀축일을 맞아 성대한 행사를 곧잘 벌이는데 이는 사고가 갑자기 발생 급사하지 않도록 도우심을 비는 의미에서다.
그것은 형리대신 칼을 쥔 바르바라 성녀의 아버지가 마지막 칼을 내리치던 순간 벼락을 맞아 죽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기 때문이다.
포병 광부 등 폭발을 다루는 이들이 바르바라를 수호 성녀로 공경하는 이유도 이런데서 기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