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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박해 200주년 특강 지상중계 (4) “조상 제사 문제와 신해박해”

김진소 신부(호남교회사연구소 소장)rn정리=박영호 기자
입력일 2000-06-18 12:53:00 수정일 2000-06-18 12:53:00 발행일 2000-06-18 제 2205호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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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제사 거부 … 유교문화와 갈등
당시 제사는 종교 이상의 관행
타종교 인정 안한 독선주의가 박해씨앗
한국 천주교 창설을 주도했던 남인의 지식인 신도들은 한문 서학서를 통해 천주교 교리와 유교 교리가 배치되지 않는 것으로 이해했고 중국 선교사들의 보유론적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한국교회 창설기부터 신도들은 천주교가 유교식 조상 제례를 금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신도들은 천주교를 믿으면서 조상 제사를 병용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됐고 유교를 떠나지 않고는 천주교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그래서 이제는 보유론적인 입장을 떠나 천주교의 가르침만을 따라야 했다.

전라도 진산의 윤지충은 1791년 어머니의 상을 당해 신주를 모시지 않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이에 권상연 역시 신주를 소각해 폐지하고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 노론의 측근 인물인 홍낙안은 진산군수에게 사건을 처리하도록 재촉하고 좌의정에게 두 사람의 행위를 패륜적인 역적 행위라고 규탄, 참형토록 장서를 올렸다.

1791년 10월 29일 두 사람은 전주 감영으로 압송됐고 11월 8일 왕의 재가를 받은 사형 판결문이 전라감영에 하달되자 두 사람은 형장으로 갔다. 마침내 11월 13일 두 사람은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망나니의 칼에 목이 잘렸다. 친척과 친지들은 장례를 치르려고 형장에 왔다가 모두 놀라운 일을 목격했다. 처형된 지 아흐레가 지났는데도 시체가 상하기는 커녕 그날 참수를 당한 듯 선혈이 붉었고 그들의 머리를 고여놓고 자른 목침과 결안을 써둔 명패가 선혈에 젖어있었던 것이다.

1793년말 조선교회는 신해박해의 전말과 윤지충, 권상연의 순교사적과 기적이 일어난 사실을 북경 주교 구베아에게 보고하면서 순교자의 피가 묻은 몇 장의 수건을 보낸다. 구베아 주교는 1797년 8월 15일 윤지충과 권상연의 순교사적과 기적의 내용을 사천교구장 마르탱 주교에게 보낸다. 1798년 이 서한이 런던에 도착하자 각국말로 번역돼 서구교회에 전파됐다. 구베아 주교는 두 순교자의 행적을 포교성성에 보내 이른바 좥5순교자전좦에 기록했다.

조상제사를 거부해 발생한 신해박해를 반성하면 종교 다원주의를 인정하지 않는 독선주의가 근본 원인이었다. 신해박해는 그 근원을 따져보면 중화문화의 유교와 서양문화의 천주교간의 우월감이 빚어낸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제사문제와 신해박해의 올바른 이해는 조선 주자학에 반해 일어나고 있던 여러 가지 사상운동을 고려해야 한다. 또 한국의 전통 문화 중에서 중국적 유교 문화의 비중이 높다하여 한국의 조상제사는 유교제사 하나만이 전통의례라고 주장했던 문화적 상황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조선 후기의 조상제사의례는 종교화 내지는 신앙화됐기 때문에 유교의 관행이나 국민 관습의 한계를 넘어서 있었다. 그래서 신도들은 제사를 종교적인 문제로 인식했다. 만약 조선후기가 살고 잇던 역사적 문화적 현상을 외면하고 조상제사와 신해박해를 이해하려 한다면 윤지충과 권상연의 피는 맹물이 되고 순교는 맥없는 일로 남게 될 것이다.

김진소 신부(호남교회사연구소 소장)rn정리=박영호 기자